탕반은 후루룩 마시고 서둘러 일어서는,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과 정성이 깃든 슬로우&패스트푸드…단백질·무기질·탄수화물 풍부한 민중의 밥상
북한에서 오랫동안 쓰던 말이 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맞서 힘겨운 시절을 견디면서 외친 슬로건이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그날까지!” 나는 소년 시절 이 말을 듣던 때, 흔한 적개심이나 호기심을 넘어서 어떤 서글픔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니, 고기구이도 떡 벌어진 잔칫상도 아니고 고작 쌀밥에 고깃국이라니. 겨우 국이라니. 월남전에 다녀왔던 내 형님은 모병관의 이 한마디가 월남행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한다.
“어이, 박 일병. 월남에 가면 고깃국을 실컷 먹을 수 있어! 매일 고깃국을 준다고!” 카투사로 복무했던 한 친구는 프라이드치킨과 로스트 치킨, 간혹 나오는 소고기 스테이크가 지겨워서 꾀를 냈다. 취사장 쿡에게 부탁해 닭고기를 얻어다가 카투사들이 모인 방에서 닭개장을 끓여 소주를 마셨다. 관리 하사관에게 들켜서 치도곤을 당한 기억보다 그 닭개장 맛을 잊지 못한다. “야, 너희들 타바스코 소스 넣고 끓인 닭개장 먹어봤어?”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내륙은 기후가 춥고 건조하다. 그래서인지 국과 탕이 발달했다. 흔히 이 지역의 별미로 간고등어를 꼽는데, 육개장도 아주 잘한다. 안동의 옥야식당이라고 하면, 맛 좀 아는 분들은 일부러 찾아가서 맛보기도 하는 식당이다. 옥야식당에는 좀 미안하지만, 어지간한 이 동네 ‘할매’들은 육개장 솜씨가 기막히다.
그런데 유명한 간고등어로 육개장도 끓인다. 건건한 구이를 절묘하게 탕으로 ‘전화(轉化)’시키는 것이다. 얼마나 맛있냐면, 나는 이 고등어 육개장을 먹고 싶어 아버지 고향에 간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전통 있는 요리는 아닌 것 같다. 하여튼 한국인은 구이보다 탕을 원하는 강력한 유전자가 혈통에 흐르는 얘기를 하고 싶어 꺼낸 일화다.
1980년대 지방 소도시 5일장의 상인들이 커다란 무쇠솥에 장국밥을 끓여 팔고 있다. 장국밥은 서울 무교동의 ‘무교탕반’이 원조로 알려져 있다.
탕반의 등장, 음식 문명사의 매우 독특한 사건
앞서 미군의 스테이크를 거론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덩어리 고기를 먹고 싶어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나라였다. 불고기백반이 7천원이고 곰탕이 1만원이 넘는 ‘이상한 시절’을 살고 있지만, 우리가 고기를 통으로 그렇게 굽고 볶아 먹는 형편은 분명히 아니었다. 아직 나이 50도 안된 내 경험으로도 그랬다.
청년 시절, 구이보다 탕이 주로 술안주였다. 탕은 물만 부으면 더 많은 양을 만들어서 나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요리사로 스테이크를 굽는다. 보통 쇠고기를 스테이크로 구웠다 하면 300g 정도를 무게로 단다. 그런데 이 양이 어려서 엄마 심부름하던 정육점에서 어쩌다 주문하던 그 무게가 아닌가. 깜짝 놀랐다.
“아저씨, 엄마가 소고기 기름 없는 데로 반 근만 썰어달래요.” 반 근이 바로 300g. 혼자 먹는 그 양으로 어머니는 열 명의 국을 끓였다. 그래도 간혹 씹히는 소고기가 얼마나 구수하고 달았던가. 그나마 그렇게 1970년대에 유행하던 ‘스뎅(스텐리스 스틸)’ 그릇에 기름기라도 비치는 날은 거의 드물었다.
혹자는 우리의 탕 문화를 거론하며 나눔의 두레정신이라고 하는데 일견 수긍하면서도 뭔가 간질간질하다. 독자들은 아마 눈치채실 것이다. ‘없어서 그런 걸 뭘 두레까지 들먹이는가’ 하고 말이다. 비슷한 얘기 한 가지를 더 한다면, 설렁탕과 서양 요리에서 소스는 결국 같은 물질이라는 점이다. 서양의 소스는 대개 ‘퐁 드 보’라고 하는 바탕에서 만들어진다.
소의 여러 뼈를 푹 고아서 끓인 후 졸인 것을 말한다. 거기에 여러 채소의 국물과 향신료, 고기 삶은 국물을 더하면 소스가 된다. 그러니까 스테이크 한 접시에 곁들여지는 소스 한 스푼은 곧 한 그릇의 설렁탕과 같다. 실제로 한 그릇의 설렁탕을 졸이면 소스 1인분에 해당하는 양이 나온다.
고기가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은 ‘고작’ 한 스푼의 소스로 설렁탕 한 그릇을 먹었던 셈이다. 물론 이는 우리 식의 ‘탕반’ 문화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다. 국물에 탄수화물을 말아서 먹는 문화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우리가 먹고 살기 팍팍했고 고기 맛 보기가 힘들었던 데서 기인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다.
최근의 뉴스를 보면 돼지머리가 안 팔려서 사료로 나간다고 한다. 순댓국 맛을 아는 전국의 ‘탕꾼’들이 땅을 칠 일이다. 돼지는 삼겹살이며 온갖 구이 부위를 만들어내는 종이므로 지금도 많이 키우고 잡는다. 그런데 머리는 쓰임새가 한정돼 있다. 탕 말고는 구이로 쓰기에 마땅한 부위가 아닌 것이다.
최근에 돼지머리 값어치가 떨어지긴 떨어진 것 같다. 돼지머리에서 볼살만 도려내어 따로 유통이 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볼살은 거의 미국이나 칠레에서 수입했다. 돼지머리의 가치가 있으므로 따로 볼만 잘라내서 모양을 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순댓국의 맛은 돼지사골과 머리에서 나온다. 당신이 입맛을 쩍쩍 다시는 그 뽀얗고 구수한 국물은 거의 뼈에서 온다. 설렁탕도 요즘은 수입뼈가 흔해서 그렇지, 과거에는 소머리에서 많은 양의 국물을 얻었다. 설렁탕과 소머리국밥은 본디 서로 다른 탕이 아니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기록해놓은 여러 자료를 보면, 조선인들은 설렁탕국밥집 앞에 쇠머리를 진열해놓고 탕을 끓였다고 한다.
순댓국은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한 그릇의 완전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국에는 지방과 단백질, 소금이 다량 들어 있고 밥을 말아 탄수화물을 섭취한다. 반찬으로 김치나 깍두기가 나오니까 무기질과 섬유질을 얻을 수 있다. 근자에는 지방과 다량의 소금을 걱정하게 만드는 음식이 되었지만, 그건 순댓국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몸을 덜 움직여서 생긴 일일 뿐이다. 하여튼 순댓국은 수수한 민중의 서정이 깃든 음식이다.
순댓국에는 질박하고 수수한 민중의 서정이 깃들어 있다. 단백질과 무기질, 지방과 탄수화물이 풍부한 하나의 ‘완전음식’으로 평가된다.
맥도날드에 비견되는 한국식 패스트푸드
그런데 이 순댓국은 우리 민족을 설명하는 탕반(湯飯) 문화의 한 아이콘이다. 탕반이란 곧 국밥을 의미한다. 국물에 밥을 말았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음식 섭취법이다. 국에 밥을 만다는 것은 어떤 동작과 행위의 완결, 그리하여 생긴 물상(국밥)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그 국밥 안에 숨겨진 우리 민족의 상징은 결코 만만치 않다.
미국에서 1940년은 사회사에서 아주 의미 있는 해이다. 리처드와 모리스 맥도널드 형제에 의해 ‘맥도날드’ 햄버거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후 맥도날드는 다른 이에게 팔려 오늘날 미국식 식문화의 거대한 상징으로 성장했다. 맥도날드는 그동안 음식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음식을 걸어다니면서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이동), 점심이란 집에 가서 먹거나 적어도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는 가족관계망 안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 밖에서 가볍게 사먹을 수 있게 되었고(음식과 가족관계의 변화), 여성이 음식 만드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으며(여권의 변화), 한 끼에 담배 한 갑 가격으로 먹게 되어 끼니를 보충하는 비용이 감소(염가 음식의 등장), 음식업을 거대 기업이 운영하는(음식산업의 혁명)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여럿이 함께 먹지 않고 혼자서 음식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도 일어났다. 맥도날드는 오늘의 미국사회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도 맥도날드에 비견되는 음식사의 사건이 있었다. 바로 국밥의 발달이다. 18세기 중반, 한반도에도 패스트푸드가 번져나간다. 상공업의 발달로 전국에 5일장이 1천여 개가 생겨나고 보부상과 장꾼들이 등짐과 봇짐을 지고 시장으로,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에서는 이미 그 전부터 객줏집과 주막에서 이미 선보였던 엄청난 스피드의 음식이 팔렸다. 국밥이 그것이다. 찬밥을 뚝배기에 넣어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먹을 수 있었다. 국밥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서 처음 발견할 수 있지만, 민족의 음식으로 자리 잡은 건 한반도에서였다.
국밥이 패스트푸드가 되려면 꼭 살펴봐야 할 키워드가 있다. 바로 온도다. 요즘 인터넷으로 아마추어 음식 블로거들이 올리는 글 중에는 오래된 국밥집을 묘사하면서 아쉬워하는 대목이 있다. 국물이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그걸 어떤 의도라고 설명한다. 즉 빨리 먹고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상술(?)이라고 의심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당히 사실이다. 원래 국밥이 그런 것이었다.
빨리 먹고 나가지 않으면 국밥이 아니다. 그것이 회전율을 높이려는 의도냐 아니냐는 별 의미가 없다. 국밥의 DNA가 본디 그랬던 것이다. 대구 육개장의 명소 ‘국일따로국밥’의 3대째 주인인 서경수 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 식당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원래 할아버지 세대에 이 식당이 생긴 건 장작 도매상 같은 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장작을 지고 온 일꾼들 먹이려고 상을 펴고 조금씩 탕을 끓이다가 그게 소문이 나서 결국 식당을 벌이게 된 셈이지요.”
일꾼들이 빠르게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에 밥을 바로 말아서 주어야 했다. 훌훌 마시듯 수저를 놀리고 바삐 일하러 떠나기에 딱 알맞은 음식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여유 있어진 사람들이 밥과 국을 따로 달라고 해서 ‘따로국밥’이 되었던 것이지 일반 민중들은 빨리 먹고 일어설 수 있는 국밥을 선호했다. 그러므로 국일따로국밥의 65년 역사는 원래는 따로국밥이 아니고, 그저 국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밥이 되었던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물리적 배경이 숨어 있다. 서경수 씨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옛날에 보온밥솥이 있었겠습니까. 한꺼번에 밥을 하면 다 퍼두고 그때그때 내야 하는데, 밥이 식어 버리니 토렴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토렴은 민족의 독자적인 기술이다. 보온밥솥이 없었던 시절, 아침에 해둔 밥은 식게 마련이었다. 이것을 그대로 국에 넣어 말면 전체적으로 국물이 미지근해지고 맛이 떨어진다. 이때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헹궈내기를 반복하면 밥알 속까지 따뜻해지면서 국밥의 온도가 먹기 적당하게 변하는 것이다.
토렴에는 또 다른 맛의 비결이 숨어 있다. 뜨거운 밥을 그대로 말면, 전분이 녹아서 국물이 탁해져서 맛을 버리게 된다. 오히려 밥이 적당히 식어서 단단해진 다음 토렴하면 온도도 맞고, 밥 알갱이의 씹히는 맛도 살아 있는 최상의 상태가 된다.
앞서 기술한 청계천 아바이 순댓국집에 가면 거의 ‘예술적인’ 토렴을 구경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오픈 주방’이기 때문에 밥을 국에 넣어 데우는 동작을 반복하는 한 경지에 오른 기술을 볼 수 있다.
국에 밥을 마는 것은 한국에서 유독 발달한 요리법인데, 서양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밥이 아니라 빵을 국(스프)에 만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역시 한국처럼 서민의 음식이라는 점이다. 대구에서 따로국밥이 생겨난 이유를 유추하는 것 중의 하나는 양반들이 평민처럼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유럽의 역사에서도 비슷하다.
이자크 드네센이라는 북유럽 작가가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다. 노벨상 후보에도 올랐을 만큼 유명한데, 이 작가의 소설 중에 <바베트의 만찬>이 있다. 영화화되어 국제적으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서양에도 국에 빵을 말아서 먹는 서민 음식 있어
이 영화에서 소박한 삶을 상징하는 서양식 ‘국밥’이 나온다. 주인공 자매가 프랑스에 온 하녀인 바베트에게 빵죽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서랍에서 묵은 시커먼 빵을 꺼내더니 그냥 물에 넣고 맥주를 조금 붓는다. 그렇게 펄펄 끓여서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주인공 자매는 아주 청교도적인 삶을 산다. 청빈하고 가난한 삶의 상징으로 빵죽이 표현된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관광 가는 분들이 많다. 여기서 멋진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드시는데, 이 지역의 토속 음식인 빵죽은 잘 모르신다. ‘파파 콜 포모도로’라는, 일종의 토마토 빵 스프다. 묵은 빵을 육수와 토마토소스에 푹 끓여서 떠먹는, 너무도 단순한 요리다. 한술 더 떠서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 지방에서는 아예 마른 빵을 수돗물(!)에 적셔 풀죽떼기처럼 해서 먹는다. 오레가노 가루나 조금 뿌려서.
더 놀라운 건 지금도 그렇게들 먹는 문화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했던 지역의 음식 문화인데, 그나마 뼈와 소 돼지 부속 삶은 물에 말아먹었던 우리가 조금 나은 셈인가 싶기도 하다. 칼라브리아 지역은 지금도 마피아가 횡행하고, 최근까지도 산적이 실제 있었던 땅이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칠고 소박한 요리는 이처럼 한 그릇의 ‘풀죽’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울의 국밥집 하면, 여러 노포(老鋪: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들이 떠오르지만 ‘하동관’을 거론하는 분들이 많다. 지금은 도시개발 때문에 원래 있던 수하동에서 명동으로 옮겨갔는데, 어려서 아버지 따라 몇 번 가본 기억이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꽤 넓은 홀에 상고머리를 하고 밑이 깡총한 흰색과 푸른색 위생복을 입은 홀 종업원(그냥 그때는 ‘뽀이’라고 불렀다)이 주문을 받던 장면이 생각난다.
깍두기 국물(깍국)이 든 노란 양은주전자를 들고 다니면서 원하는 손님에게 부어주었다. 그 집에 들어서면 아주 지독한 누린내 같은 냄새가 맡아져서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집이 왜 좋다 그런담, 비빔냉면이나 짜장면 대신 굳이 이런 탕국밥집에 데려가시는 게 싫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 집에 가서 그 냄새를 다시 맡았는데, 놀랍게도 너무도 구수하고 정겨운, 식욕이 뭉글뭉글 피어나는 아주 끝내주는 냄새로 변했다. 그래서 아버지 말씀대로 국밥은 어른의 음식인가보다.
우리나라는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육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므로 중국의 <예기>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한다. 제사에는 희생물이 필요하다. 보통 희생양은 그 이름처럼 양이 많이 쓰였지만 한반도는 양의 서식지로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소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조선에서는 하루에 소가 500마리 도살된다”고 쓸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소를 많이 잡았다. 소를 워낙 좋아해서 임금이 신하들을 데리고 소고기를 구워 먹는 행사를 가졌던 기록도 여럿 있다. 해방 후에도 소고기는 이 땅에서 최고 인기 육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맘껏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역축(役畜)으로 농사에 요긴한 짐승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도 경운기의 보급으로 쓸모가 줄어들면서 쇠고기의 대중화에까지 이르게 된다.
1950년대부터 서울 청계천 인근에서 장사를 시작한 탕반집 ‘하동관’의 국밥 말기. 하동관 국밥은 ‘깍쟁이’ 같은 서울 곰탕으로, 말간 국물을 놋그릇에 미지근하게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깍쟁이 같은 서울 곰탕 하동관 탕반의 매력
일제시대에 이미 쇠고기로 만드는 탕국밥집이 아주 성행했다. 한식의 가장 뚜렷한 기둥이 된 것이 이 시기다. 산업화와 근대화, 도시화는 탕국밥의 발전을 가져왔다. 전형적인 노동자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탕국밥집들이 거의 자취를 감춘다.
물자 공출과 전쟁 말기의 피폐는 소를 잡아서 먹을 형편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몽땅 공출되어 한반도에 소가 씨가 마르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1950년대 들어서 청계천 옆으로 ‘하동관’과 ‘대성관’이 생겨나 탕반이 다시 팔리기 시작했다는 게 미식가였던 고 신태범 선생(경성제대 출신 외과의사)의 증언이다.
하동관은 알다시피 아주 깍쟁이 같은 서울 곰탕이다. 국물이 말갛고 그릇도 놋그릇으로 미지근하게 담아낸다. 아마도 서울로 농산물과 장작을 이고 지고 밀고 온 장꾼과 등짐꾼들이 한 술 들던 것이 이 전통 있는 서울의 노포 하동관 음식이 아니었다 싶다. 서울 음식문화에 정통한 예종석 교수(아름다운 재단 이사장)는 이 집의 단골로 내력 있는 주문법을 독창적으로 구사한다.
“열다섯공 내포 기름 빼고 밥 넌둥만둥!” ‘열다섯공’이란 1만5천원 짜리 특제, 내포는 내장을 이르는 말로 고기 대신 내포를 많이 넣으라는 뜻이며 기름은 소기름 없이 말갛게, 밥은 아주 조금 넣어달라는 뜻이다. 여기다가 1500원을 슬쩍 쥐어 주며 “냉수 한 잔!”을 외치면 소주를 물컵에 따라 한 잔 내준다는 뜻이다. 하동관은 술을 공식적으로는 안 파는 집인데, 이렇게 단골에게는 서비스하는 모양이다.
곰탕은 설렁탕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탕국밥이다. 곰탕이란 고음(膏飮), 즉 연고처럼 걸쭉하게 푹 곤다는 뜻이다. 19세기 요리책인 <시의전서>에 “곰탕은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떼기, 꼬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큰 솥에 넣고 만화(慢火:느린불)로 푹 끓인 음식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정육이 아니라 소 부산물로 푹 끓여서 먹는 민중식을 말한다. 요새는 곰탕을 제대로 한다면 한 그릇에 1만원이 넘는다. 뼈와 부산물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근원과 전개 과정 베일에 싸여 있는 설렁탕
앞서 신태범 선생은 인천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본디 서울서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서울음식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곤 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해장국과 장국밥, 설렁탕은 서울이 원조다. 해장국은 알다시피 청진동 골목이며 설렁탕은 화신백화점 뒷골목의 ‘이문식당’과 동대문시장 입구 ‘이남옥’이 원조격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일제 때 한 뚝배기에 15전가량이었는데 결코 싼 음식이 아니었다. 당시엔 배달도 많이 해서 동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청계천을 둘러싸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묘사한 장편소설)에는 상가나 기생집 등으로 설렁탕이 배달 오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사학자 주영하 선생은 저서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서울에서 설렁탕이 득세한 건 백정들의 해방운동과 서울 진입에 근거한다는 취재기를 내놓고 있다. 그는 “아마도 1900년대 이전부터 서울 종로 뒷골목에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김두한의 육성고백에 의하면 형평사 운동을 하던 원씨 성을 가진 노인이 1930년대에 단성사 옆에서 설렁탕집을 했다”고 쓰고 있다. 형평사란 일제 때 크게 활동했던 백정들의 신분해방 결사체다.
그러니까 소를 다루는 백정들이 그 부산물을 모아 설렁탕을 만들어 팔았다는 뜻이다. 설렁탕은 그 근원과 전개 과정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음식이다. 임금의 선정과 관련된 선농단, 몽고 유래설(술레라는 고깃국에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 설렁설렁 끓는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설, 눈처럼 희고 농밀하다고 하여 설농탕이 되었다는 설 등이 제각각인 가운데 백정들이 만들어 판 음식이라는 기록도 매우 흥미롭다.
서울은 설렁탕과 장국밥이 원조인 곳이다. 신 선생은 “장국밥은 무교동에 있는 ‘무교탕반’이 노포였다. 값은 30전으로 비쌌으며 양지머리·차돌박이·편육과 고기산적이 웃기로 화려하게 먹었다. 무교탕반은 그러나 193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폐문했다. 1940년대는 아무도 쇠고기를 구할 수 없어서 이런 국밥집들이 없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제의 수탈이 고유 음식이 사라지는 이유가 됐던 것이다. 그 까닭에 우리는 무교탕반이라는 서울과 한국(조선)을 상징할 만한 유명한 음식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고 홍승면 선생도 서울 음식의 내력을 가장 잘 알았던 분이다. 그는 여러 저술에서 이런 내용을 쓰고 있다. 앞에 신태범 선생이 거론했던 무교탕반에서 대해서도 언급했다.
“장국밥은 원래 설렁탕보다 격이 높았다. 구한말에 유명한 장국밥집은 수표다리 건너편 백목다리(신문로에서 정동쪽 길) 건너편에 있었는데 수표다리쪽에는 재상들만 가고 백묵다리는 부상(富商:부자상인)과 오입쟁이들이 다녔다…. 내가 어렸을 때는 장국밥집이 드물었다. 우미관, 종로 뒷골목과 보신각 뒤에 설렁탕집보다 격이 높은 기와집 탕반집들이 장국밥과 떡국, 떡만두를 팔았다…. 그런데 무교탕반은 서울식이라기보다는 개성식이 아닌가 생각한다….”(저서 <백미백상>)
가장 민중적이며 탁월한 지혜가 숨어 있는 우리 민족의 음식 국밥. 이 음식은 개장국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개장국에서 온갖 다양한 음식으로 탕반의 갈래가 뻗어나갔던 역사는 이제 다시 어떤 얼굴을 보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