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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에 백마국제 관광회사의 백두산 여행 상품광고를 보고 바로 신청을 하였다. 기차 침대칸 2인실이 799,000원에 비자 발급료 30,000원을 포함하여 829,000원을 미리 송금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드디어 디데이, 5월 13일 10시경에 인천공항에서 한중연 장로를 만나서 여행사 직원이 나와서 단체로 수속을 하고 12시30분에 탑승을 하였다. 1시에 이륙을 하니 바로 기내식이 나왔다. 사전에 점심은 기내식이라는 관광회사의 안내를 믿고 점심을 먹지 않고 탑승을 했는데 기내식이 작은 빵 하나에 우리 승우 손가락만한 새우 두 마리가 든 한 젓가락감인 셀러드와 물이 전부였다. 한 장로가 준비한 절편 떡 한 조각과 내가 준비한 쿠키로 보충을 하고 인천공항에서 KAL기를 타고 중국 대련으로 갔다. 비행시간은 딱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참으로 지척의 거리였다.
대련공항
대련공항에 내리니 검색이 엄청나게 심하다. 겉옷은 물론이고 신발도 벗고 확인을 하며 주머니의 것을 일일이 손으로 확인을 하면서 세심하게 검색을 하는 모습이 사회문제가 어느 나라나 다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맑고 우리나라와 기온도 거의 같은 영상 25도 정도로 더웠다. 고층건물이 많고 상당히 큰 도시라는 것을 한 눈으로 볼 수 있고 인구는 약 5~6백만 명 정도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도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조선족 출신의 가이드 전성철을 만나서 25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단동으로 출발을 하였다. 여름날처럼 더워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야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버스가 안전벨트는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30대로 보이는 젊은 기사는 걸치기만 하고 실제로는 매지도 않는 것이다. 잘 아는 대로 교통법규는 엉망이다. 아무데서나 끼어들고 신호등도 무시하고 사람은 신호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단횡단을 하는 것이 일쑤다. 공안들도 보고만 있을 뿐이다. 마침 우리가 탄 차 앞에 승용차가 방해를 하니까 기사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거칠게 말하는 모습으로 봐서 상스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상대차가 우리 버스 앞으로 오더니 멈칫거리며 방해를 하다가 달아나는 것이다. 가는 도중에 경적을 얼마나 많이 울리는지 몇 번을 깜짝 깜짝 놀랐다. 고속도로는 차가 없고 한가하여 운전하는데 너무 편할 것 같다. 도로 변에는 넓은 벌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아직도 작물을 심지 않아서 붉은 황토가 그대로 그러나 있어서 황량하게 보였다. 넓은 논 가운데 파랗게 못자리를 한 곳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두 시간 반 정도 가서 庄河휴게소에 들러서 소변을 보고 잠시 쉬었다. 작은 휴게소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고 조용한 것이 우리나라의 휴게소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화장실은 깨끗하고 좋았다. 사람이 많기로 세계에서 제일인 중국에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없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부자들은 세계를 휩쓸고 다니면서 쇼핑을 하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아직도 초라하고 겨우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보이지 않고 끝없는 들판이 이어지는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350km 정도가 된다고 하는 거리를 약 4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단동에 도착하였다.
압록강을 끼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한 丹東은 상당히 현대화 된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 앞에 월량도라는 섬이 있는데 중국이 관리를 하는 섬이라고 한다. 七里香이라는 중국식당에서 샤브샤브로 저녁을 먹는데 마요네즈를 버무려 놓은 것 같은 쏘스는 맛이 느끼하고 전혀 입에 맞지를 않아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안내도 해 주지 않고 말도 안 통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맛도 모르고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여러 가지 준비된 쏘스를 보고 골라봤지만 역시 우리 입에 맞는 것은 없었다. 겨우 중국식 김치와 피클고추, 마늘로 입가심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8시경에 단동역에 도착하니 광장에는 조명을 받은 엄청나게 큰 모택동 동상이 버티고 서 있고, 역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이 한가하였다. 기차역에서도 일일이 검색을 하는 것이 꼭 공항의 출국장에서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역 대합실에는 사람이 없어서 한산하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문을 잠그는 것이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바로 전용 기차를 타고는 6호차 2번방에 짐을 풀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발 맛사지를 받았다. 남녀 두 사람이 약 20분정도 하는 발 맛사지가 아주 시원하고 피곤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은 공짜로 해주지만 다시 받고 싶으면 한 사람당 15,000원을 내야 해 준다는 것이다. 8시 54분에 출발한 기차에는 서울에서 간 우리 일행 22명만이 타고 가는 전용열차로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조용하고 도난 염려도 없는 기분 좋은 기차여행이었다. 2인실을 예약한 나는 한중연 장로와 같은 방에서 내가 아래 침대에, 한 장로가 2층 침대를 쓰기로 하였다. 화장실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서 볼 일을 볼 정도고 세면대는 너무 좁아서 세수하기가 정말로 불편하였다. 3년 전에 일본 여행을 하면서 쿠루즈선을 탔을 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잠이 제대로 올까 하고 걱정을 하였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서 새벽녘에 화장실에 한 번 가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가 날이 밝아서 깨니 4시30분경이다. 우리나라의 시간으로는 5시30분이니까 잠을 깰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별로 아쉬움이 없이 눈을 뜨고 뒤척거리다가 일어나 세수를 하였다.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평야지대였고 단동에서 이도백하까지는 산악지대로, 기차는 가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 번 쉬면 보통 30~40분은 쉬는 것 같았다. 철로 변에는 온통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를 않고 어쩌다가 간간이 보일 뿐이며 초라한 모습이 북한을 연상하게 하며 우리나라의 1960년대를 보는 것 같았다. 중국에 사람이 많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도시와는 거리가 멀고 사람이 많지 않은 산골에서는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는 원초적인 삶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산과 들에는 이제 막 잎이 돋아나서 연한 색깔의 잎들이 우리나라의 4월 초와 같은 약 한 달은 늦은 신록의 계절이었다. 아침 7시40분에 이도백하라는 곳에 도착하여 장백산 상회에서 뷔페로 아침을 먹었다.
이도백하역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니 좌변기밖에 없어서 볼일을 보는 것이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9시50분경에 차비 85(약15,000원)원을 주고 북파코스로 가는 백두산 행 버스를 탔다. 백두산이 가까운 주차장에 내리니 멀리 산에는 하얀 눈이 보이고 주차장에도 전날 내렸던 눈이 모여 있는 모습이 한 겨울을 방불케 하였다. 몇 번을 갈아타고 이제 마지막으로 짚 차를 탔다. 백두산으로 가는 험한 길에는 짚 차가 제격이라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기사가 차를 모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더구나 지그자그로 된 길의 모퉁이를 돌 때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악세레다를 힘차게 밟는 바람에 차에 탄 사람들은 원심력에 의해서 이쪽으로 쏠렸다가 저쪽으로 쏠렸다가 하는데 마음이 불안할 정도로 험하게 차를 몰았다. 기사들은 대부분 30~40대의 젊은 사람들이라 더욱 거칠게 모는 것이었다. 15분 정도의 시달림 끝에 10시30분경에 드디어 백두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백두산은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하산하여 신시를 열고 단군이 탄생한 자리로 알려져 있으며 16개의 봉우리 중에 2744m의 병사봉이 최고봉이었으나 1963년 김정일이 장군봉으로 이름을 바꾸고 2750m로 측량 되었다고 한다. 정상에는 제법 넓은 주차장이 있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온 산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서 지상의 세계에는 5월의 아름답고 따뜻한 봄이라는 사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영하 2~3도는 되는 것 같았다. 대련의 여름에서 백두산의 겨울로 순간 이동을 한 느낌이었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고 남녀 3~4명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눈은 약 1,5m 정도로 높이 쌓여서 허리까지 닿을 듯하였다. 몇 사람의 수고로 처음으로 연결된 길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조금 가니 천지가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였다.
아! 白頭山 天池. 중국의 길림성과 우리나라 함경북도가 접해 있는,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바라보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천지의 둘레는 14,4km고, 깊이는 평균 213m며 직경이 5km인 거대한 칼테이 호수라고 한다. 천지를 보는 순간 크게 소리 지르고 싶고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말라는 가이드의 사전 부탁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혼자 속으로만 외쳐 보았다. 대한민국 만세! 백두산 만세! 천지만세! 백두산은 16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북한이 7개를 관리하고 중국이 9개봉우리를 관리한다고 하니 우리의 명산인 백두산이 거의가 중국 것이 되어버린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백두산 최고봉은 장군봉으로 2744m요, 중국 쪽은 백운봉으로 2691m라고 한다. 천지의 푸른 물은 볼 수가 없고, 전설처럼 괴물이 산다고 하던 신비로운 이야기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추워서 가방에 넣어간 바람막이 옷을 끼어 입어야 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설경만 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여러 갈래로 더 올라가서 볼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눈이 와서 길을 모두 막아버려서 다른 곳으로는 가지도 못하고 주차장 가까운 곳의 천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서만 사진도 찍고 천지를 내려다보며 잠시 머물다가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여서 한 시간 정도 머문 후에 바로 하산을 하였다. 하산할 때도 짚 차는 여전히 속도를 내며 거칠게 차를 몰았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며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 백두산 천지를 보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백두산으로 간 이후로 11시30분 이후에는 금지령이 떨어져서 발길을 되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한 팀은 서파로 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북파로 왔지만 북파도 막혀서 결국은 백두산 정상은 올라가 보지도 못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꼬박 이틀 동안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백두산을 가보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12시경 하산하는 길에 일행 중 한 노인이 아내도 두고 혼자 버스를 타고 먼저 가버리는 바람에 가이드가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늦게 식당으로 와서 겨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장백산(이선생) 식당에서 먹은 점심은 돌솥비빔밥인데 고명으로 얹어주는 계란 후리이가 아주 작고 똥그란 노른자를 보는 순간에 중국의 가짜 계란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밥맛이 없어서 다 먹지를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長白瀑布로 가는 길은 주차장에서 멀지는 않으나 많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어서 힘이 들었다. 테크로 길을 만들어 놓아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길 아래로는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흐르고 군데군데 김이 솟아나는 온천수가 흐르는 모습이 조금은 이채로웠다. 비가 오고 안개가 끼어서 폭포 앞에까지 갔지만 장엄한 폭포의 정경은 보지도 못하고 안개 속으로 소리만 듣고 가슴으로만 느껴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조금 더 내려와서 주차장에서 산길로 조금 올라가니 작은 소가 하나 있다. 小天池라는 연못이었다. 자작나무 숲 속에 깊이 감추인 작은 소는 그림처럼 아늑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옆에 서 있는, 중국의 곳곳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동상 앞에 제단이 있고 몇 사람이 돈을 놓고 두 손을 모으는 모습을 보니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3시경에 백두산 관광을 모두 마치고 우리의 전용미니버스를 타고 五州洗浴이라는 목욕탕에서 수건만 가지고 가서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목욕을 하였다. 5시경에 白溪超市라는 식당의 원형식탁에서 생선조림과 된장국 등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바로 松江河驛으로 가서 열차를 탔다. 올 때 타고 온 열차가 이도백하에서 송강하역으로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단동으로 가는 것이었다. 열차를 타기 위해서 역시 검색을 받고는 들어가야 하였다. 우리 외에도 사람들이 제법 보이는 것이 신기하였다. 그러나 기차시간이 되니 대합실에는 우리밖에는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역사의 문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우리가 탄 전용열차는 8시20분에 단동을 향해서 출발을 하였다. 열차에서의 두 번째 밤을 맞았다. 일행 중에는 덜컹거리고 냄새가 나서 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 장로와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잠을 잘 잤다. 한 중연 장로는 덜컹거리는 것이 자장가처럼 들려서 오히려 집에서보다 더 잠이 잘 오더라고 하였다. 6시35분에 단동에 도착하여 버스로 sunny resort hotel로 이동을 하여 호텔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호텔 뷔페라 깨끗하고 맛도 괜찮았다. 식사를 한 후에 단동 근처에 있는 봉황산으로 이동을 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근처에 내렸다. 우리나라 설악산의 권금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능선으로 난 길을 조금 가니 온통 계단이고 절벽이라서 힘도 들고 위험하기도 하였다. 중국인의 특성이 절벽 난간에도 길을 만들어서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인데 봉황산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쉬고 바로 하산하였다. 가는 곳마다 동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를 하는 모습이 역시 중국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산수온천에서 실내와 야외로 연결되는 온천물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놀다가 1시30분에 늦은 점심을 먹었다. 현대화 된 시설이 깨끗하고 좋았다. 그런데 사람이 우리 일행 이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한 여름을 느끼게 하는 더위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야 했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오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눈이 내린 영향인지 추워서 난방을 하여야 하는 하루 사이에 여름과 겨울을 오가는 체험을 하였다.
발래하는 여인과 밭에서 일하는 주민
요령성과 흑룡강성 그리고 길림성, 동북 3성 중에 단동은 요령성에 속하였으며 제일 잘 사는 지역이라고 한다. 다음이 흑룡강성이고, 길림성이 제일 가난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압록강의 총 길이는 803km요, 너비는 넓은 곳이 2km고 좁은 곳은 2m 정도가 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고 큰 강인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고는 북한 땅인 작은 섬을 끼고 북한 쪽 강으로 가니 강 근처 언덕에 있는 밭에서 일하는 북한의 농부가 간간이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주민도 보였다. 섬에 사는 한 주민이 엔진이 달린 작은 쪽배를 타고 유람선으로 접근을 하여 고리가 달린 줄을 유람선에 걸더니 산삼주와 담배, 거위알을 파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 주었다. 체격이 작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옷은 꼬질꼬질한 것이 틀림없이 북한 주민이라고 가이드가 일러 주었다. 보통 중국 사람이 북한 사람을 가장하여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들어봐도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북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압록강에는 섬이 103개가 있는데 3개는 중국이 관리를 하고 100개는 북한이 관리를 하며 강은 공동으로 관리를 한다는 것이다. 국경에 접한 섬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고기를 잡을 수도 있고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묵인하에 장사를 하며 돌아가서는 상납을 하여야 할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유람선 선장과도 협조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람선에서 내려서 강을 끼고 있는 고구려 유적지이며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하는 虎山長城(美人長城)을 보았다. 옛 고구려 시절에는 모두가 우리의 땅이었던 지역으로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고구려 유적이라고 하니 느낌은 새로웠지만 성이 상당히 현대화된 느낌이 들었다. 성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마을에 빨간 십자가가 보였다. 참으로 신기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교회에 십자가를 걸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교회는 삼자교회라고 하여 공산당에서 인정하는 교회가 대부분이다. 진짜 교회는 지하에서 당의 위협과 탄압을 받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십자가는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였다.
신의주 정경
마지막으로 鴨綠江斷橋를 보기로 하였다. 단동 시내에 접한 북한과 연결된 유일한 다리가 하나 있고 대형 트럭들이 줄을 지어서 다리를 건너오는 모습이 눈이 띄었다. 날짜를 정해놓고 어는 날은 중국 쪽에서 북한으로 가고, 또 다른 날은 북한에서 중국으로만 차가 다닌다는 것이다. 우리가 간 날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날이었다.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서 통관 절차를 밟느라고 차는 밀려서 차례를 기다리고 거의 다리 끝까지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옆에는 6,25때 폭격으로 파괴된 철교가 절반만 남아서 걸어서 강 중간의 다리가 남아있는 부분까지 갈 수가 있었다. 바로 압록강단교다. 강 건너 편은 우리가 잘 아는 신의주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다만 건물만 조금 보일 뿐이다. 그래도 다른 곳과는 다르게 국경지역이고 선전을 위해서 그런지 북한에서는 제법 높고 세련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내나라 내 땅인 백두산을 보기 위해서 멀리 돌고 돌아서 남의 나라 중국 땅을 거쳐서 꼬박 이틀이 걸려서 온 셈이다. 국내에서 직통으로 가면 하루면 충분할 것을 말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나라와 내 땅을 눈앞에 두고 남의 나라를 거쳐서 가야만 하는 슬픈 이야기를 누가 알아나 줄까? 북한이 하루 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합치면 다 같이 잘 살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한 층 더 발전하게 될 텐데 말이다. 참으로 아쉽고 답답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언제나 통일 된 조국에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남북으로 오고 갈 수 있을는지. 내 생애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날 을 위해서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에 단동 시내 번화가에 있는 평양고려관이라는 식당으로 가니 문에서부터 날씬하고 예쁜 아가씨들이 북한말로 안내를 하였다. 안내에 따라 미리 예약된 2층으로 가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중국식 원탁의자에 가운데는 꽃으로 장식을 해 놓고 하얀 쌀밥에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반찬이 계속 나왔다. 내가 메모를 하다가 알송달송한 것이 있어서 아가씨한테 무슨 반찬이냐고 물어봤더니 왜 적습네까? 하는 것이다. 기행문을 쓰려고 그런다고 하니 기억하는 것은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적는 것은 가르쳐 줄 수가 없습네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았다면서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으니 세겹살 볶음입네다. 라며 기계적인 말투와 음식 이름도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 참고로 반찬의 종류를 적어보니 배추김치, 무김치, 북어포무침, 프라워콜리볶음, 돼지편육볶음, 야채무침, 두부조림, 버섯무침, 닭오이냉채, 쑥갓감자 튀김, 명태조림, 된장국, 잡채, 삽겹살 조림. 무려 14가지에 맛도 현대화 되어서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수 년 전에 금강산의 북한 식당에서 먹었을 때만 해도 모든 음식에 양념이 적으며 싱겁고 재료의 본래 제 맛을 나타내어서 담백하여 우리나라의 가난하던 1960년대 음식과 거의 흡사하였는데, 이곳의 음식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식사 후에는 북한 아가씨들이 아리랑을 비롯한 노래를 몇 곡 부르고 춤도 추는 공연을 하였다. 꼭두각시를 생각하며 이국땅인 중국에서도 당의 방침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기계 같은 사람을 보니 마음이 짠하였다. 말도 제대로 붙일 수가 없고 그냥 밥만 먹고 나오라고 하는 가이드의 안내를 들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지막 밤은 단동 시내의 假日陽光(sunny resort hotel) 602호에서 지내게 되었다. 오성급 호텔로 시설이 아주 좋은 호텔이었다. 도심에 있으며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고 假日酒店이라는 예식장도 보였다. 편하게 쉬면서 kbs 9시 뉴스를 보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잘 자고 아침 5시 30분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짐을 정리한 다음 6시 30분에 뷔페로 아침을 먹었다. 객실에 있는 화장실의 변기는 양변기였는데 밖에 있는 것은 좌변기라서 역시 힘이 들었다. 7시30분에 출발하여 4시간30분을 달려서 12시15분경에 대련에 도착하여 송도횟집에서 된장찌개로 한국식 점심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대련공항으로 가서 출국수속을 한 후에 가이드와 헤어지고, 1시30분에 체킹을 하고 2시30분 이륙예정이었던 대한항공 KE6편 비행기는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많아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3시17분경에 이륙을 하였다. 이륙하니 바로 기내식이 나오는데 제법 큰 샌드위치가 나왔지만 점심을 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다 먹지를 못하고 절반만 먹고 남겼다. 4시 17분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5시50분경에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7시경이 되었다. 3박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여름과 겨울을 오가는 백두산 여행. 꼭 한 번을 가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감행한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되어서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2015. 5. 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