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사회생활에 치여 고달픈 개인을 보듬어주는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로 홍보되곤 한다. 아들 딸을 둔 중년 부부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등장하는 가족풍경화는 유토피아의 실현처럼 유포되는 스위트홈의 원형이미지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해외입양에 비해 국내입양이 제대로 안되는 혈연가족중심주의와 가족 이기주의에 대한 개탄도 나온다. 게다가 <가족은 야만이다>라는 책에서는 가족제도의 폐해를 통렬히 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대안가족, 공동체로서의 가족이건만 여전히 가부장 혈연중심 일부일처제 가족을 숭상하는 태도가 사회적 무의식을 형성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낮은 출산율과 결혼기피증, 갈수록 증가하는 이혼율은 과거의 일생 일혼주의에 근거한 부계혈연중심 가족제도가 더 이상 강고한 척도로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대사회의 사랑과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탐색하는 올리히 백과 에리자베트 백-게른하임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에서 남녀의 관계방식과 가족제도의 변화를 세 단계로 추적해 낸다. 1단계는 개인적 삶보다 가족이란 경제단위가 압도하는 확대가족시대이다. 2단계는 확대가족이 붕괴되면서 남성의 주도권이 확보되고 상대적으로 여성권리가 희생되는 가부장 가족시대이다. 3단계는 서구에서는 60년대 시작된 개인-가족제도로 양성 모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하는 축복과 짐을 부여받은 현대적 관계양상이다. 한국사회에서 9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호주제 폐지 운동과 (전통적) 가족해체에 대한 우려, 대안가족론은 한국사회 역시 가족의 재구성 시대인 3세대에 접어든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사회변화의 감성대이자 인간욕망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영화는 이제 변화의 기로에 선 가족이란 개념, 가족제도에 도전한다. 전통적으로 가족 씨네마의 장을 수행하며 스위트홈 판타지를 산포하던 멜로드라마는 새롭게 구성되는 가족개념에 도전장을 내민다. 영국영화 <비밀과 거짓말>(마이크 리감독)은 가족 안에 은닉된 비밀스런 과거와 그로 인해 가족이 공유한 비밀을 파헤치는 멜로드라마 뒤집기를 해내고, 일본영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는 소년가장이 돌보는 아이들만의 가족이야기를 감상적 눈물 없이 보여준다.
최근 한국에서도 가족이란 전통적 가치와 개념을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극영화 <가족의 탄생>과 다큐멘터리 <쇼킹 패밀리> 두 편 모두 한국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전파하는 가부장 혈연중심 일부일처제 가족제도와는 다른 각도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유쾌하게 사유해 낸다는 점에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족의 탄생>은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들이미는 혁신적이고 신선한 작품이다. <바람난 가족>의 후속편이라고 할만한 이 영화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우연한 인연이 빗어내는 인간관계 속에 통합시켜 나간다.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변화무쌍한 연애의 열정보다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탕에 깐 관계의 미학을 보여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일생에 걸친 일부일처제가 불가능해진 현상을 그려낸다. 분식집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력 강한 소녀가장 미라(문소리)에게 오랜만에 남동생 형철(염태웅)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 엄마뻘 되는 한참 연상의 아내 무신(고두심)과 함께이다. 게다가 무신의 전남편의 전부인의 딸 채현까지 찾아와 어쩔 수 없이 비혈연 대안가족이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미라와 무신은 기다림을 통해 자매애로 결합한다.
이들이 사는 지방도시의 고요한 분위기는 다음 에피소드 (미군기지가 있는)의 무대인 오산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멜로드라마적 기운이 감도는 두 번째 에피소드는 가족(어머니)으로 부터 상처받은 선경(공효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받기 전에 상처를 주는 선경은 급기야 남자친구로부터 ‘너 왜 나한테 이렇게 막 하냐?’라는 불평을 들을 정도로 마음을 닫고 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연애에 정신이 팔려 자신을 방관한줄 알았던 어머니 매자(김혜옥)에 대한 원망과 상실감은 감춰진 사랑의 발견과 연민으로 진전된다. 이 가족관계 역시 표준적인 혈연가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는 또 다른 가족형태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위의 두 가지 에피소드로부터 파생된 인물을 연애관계로 결합시키며 세 가지 이야기를 인연의 기묘한 법칙 속에 통합해간다. 소위 말하는 결손가정의 아이들로 성장한 이들은 그래서 문제아가 아니라 오히려 복잡다단한 관계를 겪으며 시련으로 다져진 유연한 인물로 대안가족과 함께 탄생한다.
전통적 개념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한번의 결혼만 하거나,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자매가 하나도 없다. 속칭 콩가루집안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콩가루를 버무려 맛있는 인절미를 만드는 관계의 미학을 배워나간다. 현재 이혼율로 보거나 호주제하의 일부일처제라는 외식 속에 가려진 혼외 자녀의 존재는 실제로 평생에 걸친 다부다처제(동시에 이중혼이 아닌 한 번 이상의 결혼)를 법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관계유연성을 필요로 하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스크린 속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한 세대만 넘어 가면 복잡한 가족사의 비밀로 마음 고생한 이들과 가슴 깊이 소통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독특한 복합서사를 보여준 김태용감독은 엥겔스의 자본주의 세포로서의 가족분석을 담은 책 체목에서 영감을 받은 <가족의 탄생>에서 더욱 유연해진 복합서사로 관계유연성을 즐겁게 설득한다. 한국영화로는 아주 희귀하게 나이 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보여주는 인물을 맡은 고두심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고만고만한 장르영화 속의 익숙한 캐릭터와 전혀 다른 인물들의 내면풍경을 완숙하게 뿜어낸다. 그럴듯한 역을 맡아야 연기도 제대로 나온다, 라는 사실이 실감나는 연기 경연장이다.
진화된 주제를 즐거운 영화거리로 만들어 내는 것, 속칭 말하는 작품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성취하는 건 반대방향으로 뛰는 토끼 잡기처럼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김태용감독은 두 마리 토끼를 한 방향으로 몰아 동시에 잡는 성취를 <가족의 탄생>으로 이루어낸다.
전주영화제와 여성인권영화제등 올해 여러 영화제들에서 관객의 인기를 끈 다큐멘터리 <쇼킹 패밀리>(경순감독)는 영화를 만든 스탭들의 가족이야기를 자기고백적으로 발랄하게 엮어낸다. 20대, 30대, 40대 세 여성의 가족경험을 중심으로 그들이 만나는 이들이 풀어내는 가족 이야기는 그간 가족신화 혹은 가족판타지라는 당의정에 가려져 있던 쓰디쓴 속내를 드러낸다.
20대 세영은 가족과 살다가 잔소리과 간섭으로부터 독립해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독신으로 살아간다. 월세와 온갖 세금에 시달리지만 누추해도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그녀에게 가족은 억압적인 실체로 다가온다.
온종일 시댁식구들 밥상 차리는 일에 매여 살던 30대 경은은 이혼을 겪으며 독립된 자기만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중이다. 헤어져 사는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리지만 가부장의 하녀에서 주체적인 삶으로 전환한 그녀는 여자들은 늘 이사를 한다고 말한다. 친정에서 시집으로, 다시 또 다른 자기만의 거처로. 그런 경은에게 이혼 후 아들과의 관계를 비롯한 새로운 가족형태는 이제 새롭게 구성해내야 할 삶의 프로젝트이다.
감독이기도 한 경순은 이혼 후 딸을 데리고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가족형태를 만들어낸다. 다큐를 만들며 스탭과 공동체적인 삶을 꾸리는 그녀는 이미 대안적가족을 실현해가는 중이다.
이들이 함께 하는 엠티와 생일파티, 친구들과의 식사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각자의 가족에 대한 경험과 상처-엄마에게 얻어터졌던 어린시절의 상처 같은 것, 그런데 이제 다 커서 물어보면 그때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는 엄마의 변명성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아픈 과거의 토로는 비극적 톤보다는 어이없는 웃음으로 풀려나간다.
전통가족개념의 수호를 주장하며 호주제 폐지 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집회, 여자는 다 참고 살아야 가족이 행복하다는 아줌마들의 주장,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식장에서 보여주는 인고와 헌신적 모성상에 대한 칭송, 엄마는 영원히 믿고 돌아갈 존재라는 이혼한 마마보이의 강변,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입양아들을 만들어내는가, 라고 비판하는 입양아 빈센트의 지적, 여전히 가족판타지를 유포하는 광고들... 이렇듯 다양한 상황과 입장들이 서로 치고 받으며 틈틈이 끼어들어 앞뒤 안맞는 한국사회의 가족신화를 탈신화해 보인다.
개인적 경험이자, 상처어린 기억이기에 쉽게 토해내기 힘든 가족에 대한 아픔과 원망을 속질하게 털어놓은 인터뷰와 대화를 화면에 적나라하게 옮겨낸 경순감독의 재능이 진정성으로서의 다큐라는 생생한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감독과 스탭 자신이 먼저 자신의 속내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자기고백이 자기성찰로 이어지는 과정이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이 독특한 가족탐구 다큐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그것이 그 개인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가족경험과 접속하는 흡인력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가족은 개인이 안식처이지만 족쇄거나 고뇌의 원천일수도 있다. 특히 가족을 과거 1세대나 2세대적으로 생각하며 3세대에 사는 분열증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상처와 억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경순감독은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고루한 생각이 쇼킹하기에 제목을 <쇼킹패밀리>라고 붙였다고 말한다.
관계유연성이 관계 지속성을 보장하듯이 이제 가족이란 개념도 유연하게 대안적으로 생각하고 바꿔 나가야하는 가족성찰극이 한국영화에 물꼬를 튼 것은 반가운 일이다.
07/03/24 유지나
첫댓글 윗글에 <쇼킹 페밀리>를 더해 추가보완한 글입니다. 토목학회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