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주의 운동과 반동(Monasticism)
콘스탄틴 치세 아래에서의 교회의 번영은 평화를 하느님의 경륜에 의한 목적의 달성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상황을 기독교 신앙생활의 타락 이라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었다. 거의 300년 동안을 계속적인 박해의 위협 속에서 살아온 신자들에게 2,3세기의 평안과 안전이 오히려 그들에게 신앙적자세의 흐트러짐으로 이르게 되자 번영으로 인한 유혹을 이겨내는 진정한 신자의 모습을 찾고저 노력하는 자들이 자기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남겨둔 채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육체와 정욕을 절제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고독 속에서 축복을 찾고자 하였다.
콘스탄틴의 시대 이전에도 주님을 보다 더 자유롭게 섬길수 있다는 이유로 결혼치 않고 자기들의 시간과 정력을 교회에 모두바친 “과부들과 처녀들”의 독신주의 처녀들과 극단적인 금욕주의-금식-금주 맛있는 음식의 거절 및 맨바닥에서 잠자기 까지했던 오리갠과 같은 고대 철학파들은 육체의 제한성을 능가하여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겼는데 우리는 이들에게서 수도원 운동의 근원을 찾을수 있다.
1) 사막의 최초 수도사들
수도원 운동의 무대를 제공한 것은 사막, 그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의 사막이었다. 수도사(monk)라는 단어는 고독(solitary)을 의미하는 ‘모나코스’(monachos)에서 연유 되었으며 혼자 거주하는 수도사를 의미하게 된 “은자”(anchorite)는 원래 “도망자,” 혹은 “피신한 사람”등의 의미가 있다. 이들은 오직 다른 이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을 한적한 곳, 즉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수도사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들을 떠나 고독을 찾는 것이었다. 이런 수도사들 중에 제롬과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전설과 같이 전해지는 최초의 수도사로 알려진 폴과 안토니가 있다.
A. 폴(Paul of Thebes, ?-340)
그는 은자 수도사 (은수사)였다. 2세기 중반 아직 청년이던 폴은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가 위조지폐업자들이 거주하다 버리고 간 은신처를 발견하고 그 굴에서 거의 대추만을 먹으며 평생을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제롬에 의하면 폴은 거의 백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 초대수도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고독의 이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B. 안토니(Antony, 250-356)
안토니는 이집트 콥트인으로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8세 쯤 되었을 때 부모님이 별세하자 가정과 여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여섯 달쯤 되는 어느 날 그는 교회에서 복음서의 부자 청년의 일화(마19:21)를 듣고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하시는 말씀으로 받고 즉시 그대로 실행했다. 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여동생을 수녀원에 맡긴후 주님의 제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세상적인 삶으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하여 초인적인 자기 훈련을 통하여 악한 정욕과의 싸움을 싸워 자유하게 되는 영적 진보를 성취하였다. 그후 안토니는 사막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폐허가 된 성터에서 20년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 수도생활을 추구하며 지냈지만 점차 기도와 명상의 지혜 그리고 수도생활에 관한 지식을 얻고저 찾아오는 수도사의 발거름이 끊이질 아니하자 그들에게 은사적 지도자로서 영적 아버지로서 사역한다. 그는 이제 사막(산 속의 굴)생활과 세상에서의 생활을 서로 왕래한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수도자였다. 안토니는 사막에서의 생활에 있어서 지속적인 기도와 명상, 성경에 대 한 암송, 묵상이 주를 이루었고 시편과 더불어 기도하며 각성하는 삶을 살았다. 안토니는 아리우스 논쟁에 관련하여 그들을 공박해 달라는 아타나시우스의 끈질긴 요청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종을 받았다.
이렇게 은자의 생활을 찾아 도시를 떠난 이들의 숫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들의 생활은 극도로 소박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정원을 가꾸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바구니와 멍석을 짜서 이것들을 빵과 기름과 교환하였다. 그 이유는 재료가 될 갈대가 풍부하기도 하였거니와 손으로 이것들을 짜면서 기도하고 시편을 낭송하고 혹은 성경 일부를 암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식량은 대부분 빵이었고, 가끔 채소, 과일, 기름을 섞기도 하였다. 이들의 재산은 최초한의 의복과 깔고 잘 거적뿐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교만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서적의 소유를 배격하였다. 이들은 기억에
만 의존하여 성경 전체, 특히 시편과 신약을 서로 가르쳤다. 또한 이들은 가장 존경받던 은
자들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말씀과 권덕이 되는 일화들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막 생활은도시에 살며 특권과 권력을 누리던 감독들로 구성된 교회의 계급 조직과는 맞지 않아 많은 수도사들은 신부나 감독에 임명되는 것을 가장 큰 악운으로 생각하였지만 소수의 수도사들은 아타니시우스의 간청에 의해 성직 임명을 받는 수도사도 있었다.
이들은 수년 동안 기독교 예배의 가장 중요한 성찬에 참여함이 없자 어떤 지역에서는 이를 위하여 교회당을 지어 주일날 성찬후 다시 한주동안 은둔처로 떠나는 수도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점 자기들의 생활이 감독이나 교회 지도자보다 더 성결하므로 자기들이 올바른 기독교교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그중에 자기들이 정통교리라 생각했던 이론을 교회에 강요하는 폭력적 수도사도 나타났다.
2) 파코미우스와 공동 수도생할
사막에서 은둔하는 자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또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보다 경험 있는
스승들에게서 배우고자 하였으므로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이 나타나게 되었다. 점차 홀로
거주하는 수도 생활의 모습은 공동 생활의 형태로 변화되어 공동 생활적 수도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자들도 역시 스스로를 고독하다는 의미의 `수도사들(monks)` 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혼자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의미하게 되었다. 비록 그 창시자는 아닐지라도 파코미우스는 그 형태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형태의 수도 운동은 흔히 `수도원적(cenobitic)` 이라 불리는데 이는 `공동 생활`을 의미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koinos와 bios)에서 온 것이다.
파코미우스(Pachomius, 286-346)는 남부 이집트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이교도들이었으므로 집을 떠나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기독교에 관해 거의
몰랐다. 군대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 그는 교회를 찾아가 기독교 교훈을
받고 세례를 요청하였다. 수년 후 그는 사막을 찾아 어떤 늙은 은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파
코미우스는 7년 동안 이 은자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는 환상을 통해 온인류를 섬기라는 명령을 받고 자기의 동생 존과 합류, 두 형제는 함께 살기에 충분한 울타리를 짓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이들에게 자기가 기도와 명상을 통해 배운 것과 아울러 서로를 돕는 공동 생활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규율을 엄격히 하여 누구든지 자기의 공동체에 가입하고자 하는 인물은 전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상사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 받았다. 그뿐 아니라 구성원들은 모두 육체 노동을 해야 했으며 그 어떤 사역도 거부할 수 없었다. 기본 규칙은 상호 봉사로써, 비록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절대 복종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하급자들을 섬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창설한 파코미우스의 공동체는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수백 명의 수도사들이 속한 9개의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한편 파코미우스의 여동생 마리아(Maria)도 여성들을 위해 이와 비슷한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파코미우스 수도사들의 일상 생활은 노동과 예배로 구성되었는데, 파코미우스는 가장 힘
든 일을 직접 수행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경건 생활의 이상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바울의 명령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빵을 굽는 이들이나 농부들을 막론하고
작업 중에도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 구절을 암송하였으며, 소리를 내어 혹은 침묵으로 계속
기도하였다. 하루에 두 번씩은 공동 기도 시간이 있었다. 아침에는 전체 수도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봉독을 경청하였다. 저녁에는 보다 작은 소그룹으로 자기들
의 숙소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에 모여 비슷한 예배를 드렸다.
파코미우스 공동체들의 경제 생활은 서로 그 모습이 달랐다. 비록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모두가 가난하게 살았으나 파코미우스는 일부 은자들처럼 극단적 빈곤을 강요하지는 않았
다. 빵, 채고, 과일 그리고 생선을 먹었는데 고기는 일체 금지하였다. 수도사들이 생산한 작
물들은 가까운 시장에서 매매하였다. 이는 단지 식량과 기타 일용품을 구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극빈자들과 나그네들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각 소수도원마다 행정
감독자와 그 부관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파코미우스가 살던 중앙 수도원의 행정 책임자에게
보고하였다. 모든 수도사들은 절대적으로 상사에게 복종해야 했으므로 계급제도는 명백하게
정의되어 있었다. 각 숙사에는 사감이 있었으며, 이 사감은 다시 각 수도원의 지도자와 부
지도자에게 복종하였다. 또한 이들 수도원들의 지도자들 위에는 파코미우스와 `원장들
(abbots)`, 혹은 `대원장(archimandrits)` 이라 불리던 파코미우스나 그의 후계자들이 위치하였다.
파코미우스는 남부 이집트에 은자 수도처가 아니라 강력한 수도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극
단적 금욕 훈련이 아니라 합리적 공동 생활의 수도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동 서방에 수도
공동체를 퍼뜨리는 공헌을 하였다. 당시 수도주의의 문제점은 이원론적 신비주의의 분위기
와 제도적인 교회 갱신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 운동은 초대 교회 이
후 유약해진 교회 내에 새로운 헌신과 열정의 모습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창설한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은 급격히 성장하였다.
3. 수도 운동의 확장
4세기경 이집트는 수도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헌신적이고 경
건한 인물들이 이집트를 찾았다. 일부는 거기에 계속 잔류하였으며, 나머지는 사막에서 배
운 이상과 생활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수도 운동의 이상을 확장시키는 데 가
장 큰 공헌을 했던 것은 수도 운동의 모습 속에서 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장점과 가치를 발
견하였던 일단의 감독들과 신학자들이었다.
A.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Athanacius)는『성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Saint Anthony)』를 저술하
는 외에도 자주 사막의 수도사들을 방문하였으며, 한 때 황실의 박해를 받게 되자 이를 피
해 그들 가운데 거주하였다. 비록 스스로는 수도사가 아닌 감독이었으나 그는 수도 운동의
이상에 따른 규율과 헌신과 희생을 자기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그는 서방으로 유배당했
을 때에 이집트 사막에서 발생하고 이는 현상을 라틴어 사용권 교회에 알려 주었다.
B. 제롬
제롬(Jerom, 347-420)은 『은자 폴의 생애(Life of Paul Hermit)』를 집필하는 외에도 파
코미우스의『규율집(Rules)』을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스스로 수도사가 되었다. 물론 그는
예외적으로 깊은 학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제롬은 당시 기독교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그의 작품들과 모범은 서방 교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
며, 이에 따라 서방 교회는 수도주의의 정신에 보다 흥미를 갖게 되었다. 제롬과 아타나시
우스는 폴과 안토니우스에 관한 전기를 남겼다.
C. 대바실
대바실(Basil the Great)로 알려진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330-370)은 그가
관여하였던 격렬한 신학적 논쟁들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스스로의 경건을 훈련
하였던 수도원들을 창설하였다. 그는 수도사들의 여러 가지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한 논문들
을 작성하였는데, 이들은 원래 수도원을 위한 규율로 저술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러한
용도로 이용되고 사용되었다.
D. 아우구티누스
힙포의 위대한 감독 아우구티누스(St. Augutinus, 354-430)는 아타나시우스의『성 안토
니의 생애』를 읽은 것이 회심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때까지 수도사로서 살았다. 그는 감독이 된 후에도 동역자들을 조직하여 반
수도원적 공동체(semimonastic community)를 구성함으로써 그 후『어거스틴의 규율집
(Augustinian canons)』이라 불린 규칙들을 이루게 되는 영감을 제공하였다.
E. 마틴
투르의 마틴(Martin of Tours, 335-?)은 수도원적 이상을 일반화시키는데 가장 뛰어난 모
범을 제공하였다. 설피티우스 세베루스(Sulpitius Severus)가 저술한『성 마틴의 생애(Life
of Saint Martin)』는 수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이었으며, 서방 교회
수도원의 모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영향력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틴은 A.D. 335년경
현재의 헝가리인 판노니아(Pannonia) 지방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로서 군인
이었으며 마틴은 어릴 때 제국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북부 이탈리아의 파비아
(Pavia) 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거주지였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의 이름이 카테쿠맨(세례 입문자)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틴은 당시 성자로 알려졌던 포이티에르(Poitiers)의 감독 힐라리(Hilary)를 방문하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여러 가지 임무를 띠고 제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포이티에르 근처 투르(Tours)시 외곽에 자리 잡고 수도사의 생활에 전념하였다. 후에 투우르 감독으로 선출된 뒤에도 생활태도를 바꾸지 아니하고 성당 옆의 조그마한 독방에서 그의 자유 시간을 수도생활에 헌신하여 그의 이름은 성인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 감독들의 세속성과 사치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수도주의운동은 종국에는 성직제도가 추구하여야할 이상으로 남게 되었다.
[출처] [신학]수도주의 운동과 반동(Monasticism) |작성자 닛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