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립고 그리운 사람
거짓 없는 진실 2023. 4. 15. 16:19
언제나 그립고 그리운 사람
"그 차(車)가 네 차(車)냐-? 네 아버지 차(車)냐-?"
5.16 혁명시절
최고회의 의장실에 무상출입 하게 된 나는 박정희와 30년 지기 였건만,
그때 나는 인간 박정희의 새로운 편모(片貌)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장실엔
장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특별한 기물(器物)도 하나 없었습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가 앉는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손님용 나무 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 이었는데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 "바이스로이"를 피울 때 였습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닌
"아리랑"을 그가 피우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엄청 놀랐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또 하루는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인데 마침 그는 점심식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돈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단무지 서너 조각이 그 날 식단(食單)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상상외의 모습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였습니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 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 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나는 몹시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이렇게 험하다고 할까
싸구려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이 지구상에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感銘)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朴의장의 애국심은 지나치다고 보여질 때도 가끔 목격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장충단 공원에 있는 의장공관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눈비 내리는 겨울 아침에 국민학교 6학년인 장녀 근혜 양을 운전병이 지프차로 등교시켜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된 朴의장은 근혜 양을 불러다 꿇어 앉혀놓고,
"그 차(車)가 니(네) 차냐,? 그 차가 아버지 차(車)냐?"
다구치면서 힐책(詰責)했다고 합니다.
딸을 학교에 실어다 준 운전병을 꾸짖고 나무라지 않고
딸을 교육하고 깨우치고 또 책임을 추궁하는 도리가 온당하다 하겠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차는 나라 차야, 나라 차를 니(네)가 감히 등교용으로 쓸 수 있는가 말이다!"
아득한 옛날,
대구사범 1학년 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박물(博物) 시간인데
어느 식물 꽃 단면을 확대경을 가지고 꽃을 보면서 크고 세밀하게 그 꽃을 그리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급우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 최고 평점인 "G"점수를 박정희(朴正熙) 군이 차지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 경북 선산군 구미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그와 같은 수석들 만이 응시했던 대구사범의 9:1이라는 입시경쟁을 돌파한 수재들인 엘리트였던 것입니다.
그 엘리트들 중에서도 "G"라는 평점을 받을 만큼 그의 두뇌는 비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랬기에 천군만마를 질타하는 작전계획이라면 저 미국 육사 출신의 엘리트들 조차
朴장군을 따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랬기에 쓰러져 가는 이 나라의 구출을 위한 한강도강작전(漢江渡江作戰)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정희(正熙)야!
너와 나는 대구사범에 입학해서 본관 2층이었던 1학년 2조(組) 교실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이름 글자로는 드물었던
''희(熙)"를 우리 두 사람은 공유 했기에, 나는 너에게 비록 성(姓)은 달랐어도 형제와도 같은 친근감을 느꼈었지.
내가 보던 너는 항상 모든 일에 총명했단다.
게다가 너는 또 의분을 느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사나이였었지.
어느 날은 박물 교실의 뒤뜰에서 대구출신 S 군과 약골인 주재정君이 싸웠는데,
깡패와 같았던 S군은 주 군을 단숨에 때려 눕혀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맥주병을 깨어
머리를 쳤는지라 그때 유혈이 낭자(狼藉)했었지.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오직 우리 朴군만이 뛰어들어 그 S를 때려 눕히고
주 군을 구출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그 용기와 그 지모와
그 애국심이 朴군의 그 날(5.16혁명)을 있게 했건만-----,
그에게 넘겨진 우리 대한민국은 GNP 83弗의 세계 153개국 중 152번째로 못사는 나라였었지.
헐벗은 백성들이 사월남풍에 대맥(보리)이 누렇게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지.
이른바, 우리 겨레의 비운이었던 보릿고개를 알았기에,
그는 10원짜리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그런 것조차도
못 먹는 불쌍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걱정했던 지도자였던 것을 기억하네.
또 체인스모커(chain smoker)인 그가 담배 없이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니 피우기는 해야 겠는데-,
그 옛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궐련은 커녕 한 봉지의 장수연(長壽煙)이나
희연(囍煙) 조차도 손쉽게 못 얻어 피우시던 일을 회상하면,
그 "아리랑"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 朴正熙-!
그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으니 어찌 나의 이 추모의 정을 알리오.
오늘에 와서 그를 비방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지만, 진정 그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 당시 그를 가까이 모시면서 만사에 청렴결백 했던 그를 보았지만 아무리 맑게 한다 해도,
후일의 가족을 위해
어느 구석진 곳에 그들의 생활비 정도는 나올 무엇인가는 마련해 두었으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 이 세상에 그처럼 결백한 집권자가 또 어디 있었을까,
박대통령의 비리를 찾아보려고 26년간 뒤지고, 까고, 파고, 훑어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그가 쓴 광화문, 화령전, 운한각, 같은 현판까지도 뜯어내는 고약한 심뽀,
그 시절에 심어졌다 해서 나무까지 뽑아낸 고약한 좌파들-!!,
장관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제 자식 취직자리부터 챙기는 썩어빠지고 퇴폐된 것들이 감히
박대통령을 매도하려 발버둥친다.
좌파놈들아-!!
똑바로 알아라!!
당신들 제아무리 폄훼하려 발광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은
대한민국 중흥의 시조로써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임을….,
박정희는 비록 비명에 갔지만 그는 죽어서 진정 그 가치를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높이 더 높이 평가받게 될 것임을….,
대구사범 동기동창
김병희 전 인하공대 학장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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