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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선교사 묘지(마테오리치)를 우선 방문후에 성당을 다음코스로 잡는데 편의상(차량 정체) 남당, 북당, 선교사묘지 순서로 다녀왔습니다. 오늘 이후에 내용을 틈나는대로 조금씩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 북당(北堂, 西什库 天主堂,구세주 성당)
(1)구 북당
원래 북당의 자리는 베이징 삼해(北海,中海,南海) 중의 중해 서쪽에 있었다.
1693년 강희(康熙)황제가 해부학을 연구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 약으로 낫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땅과 성당을 지을 돈을 하사하여 북당을 지었다.1703년, 강희 황제는 북당이 완공된 후, 만유전원(萬有眞原)이라는 편액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북당은 조선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784년,
(2)현 북당
구 북당은 1887년에 서태후(慈禧太后)를 위한 유람 구역을 만들기 위하여 철거되고 지금의 장소로 옮겨지게 된다. 현 북당이 있는 지역을 시스쿠(西什库)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지역에 명나라때부터 열개의 황실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당성전 좌측의 비문에는 청나라 정부, 베이징 주재 외교사절 그리고 서양선교사들이 북당을 옮기는 일에 대하여 상의하여 결정한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오른쪽의 비문에는 한문과 만주어로 성당을 옮겨 짓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북당은 삼천 여 명의 교우들이 일만 여 명의 의화단원 들과 두 달 동안 대치하였던 전쟁터이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베이징시 39중’의 교사로 쓰이기도 하였다. 현재 베이징 교구 수녀원(성 요셉 수녀원)이 구내에 있으며, 중국정부가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주교관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2. 남당(南堂, 宣武门天主堂,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남당은 1601년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때,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베이징에 도착하여 머물러 살았던 곳에 지어진 성당이다.1610년, 마테오리치는 작은 규모의 성당을 지었다. 이후, 청나라 정부에서 역법을 책임지는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이었던 아담 샬(Johann Adan Scall von Bell, 1592-1666)이 1652년에 대성당을 완공 하였다. 그러나 이 성당은 1775년의 화재로 완전히 훼손되었고, 건륭(乾隆) 황제의 하사금으로 다시 지어졌다. 베이징의 동서남북의 네개의 성당은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으며, 특히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 현 최고인민법원 자리)이 가까워 조선 사신들이 서양선교사들과 접촉을 가져 서구 문명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에 서학(西學)이 전래될 수 있었다. 1990년, 남당은 의화단에 의하여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나,1904년에 다시 지어졌다. 1959년 이후, 베이징 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문화혁명 때에 장난감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3. 동당(東堂, 王府井天主堂, 성 요셉 성당)
동당은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생활하던 곳에 지어진 성당이다. 1655년,
완공된후, 1720년의 지진과 1807년의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1884년에 북당이나 남당보다
더 섬세하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이 성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파괴되었으나 1904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천안문 관리소에서 창고로 사용하였다.
4. 서당(西堂, 西直门天主堂, 성모 성의<聖衣> 성당)
서당은 베이징의 동서남북 4대성당 중 가장 늦게 지어진 성당이다. 서당은 1723년에 전형적인 이탈리아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1923년에 다시 지어졌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제약회사 동인당(同仁堂)의 창고로 쓰였다.
5. 동교민항 성당(东郊民巷天主堂, 성 미카엘 성당)
동교민항 성당은 1901년 프랑스 선교사에 의하여 지어졌다. 이 성당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으면서 주변의 외국인들의 신앙 생활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비록 베이징의 4대 성당들보다 규모는 작으나 고딕 건축 양식을 충실히 살린 아름다운 성당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대혁명 중에 첨탑 위의 십자가가 땅 쪽으로 굽혀져 10여 년을 걸려 있었고, 동교민항 초등학교와 송학루 호텔(松鹤楼饭店)이 사용하였다.
6. 고관상대(古觀象臺)
베이징 고관상대는 명나라 초기인 14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중의 하나이다. 1606년 마테오 리치의 재촉으로 로마에서 천문관측에 밝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왔으며, 이들은 명나라 신종 황제의 명으로 서광계(徐光啓)등의 중국인과 함께 천문연구를 시작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선 후에도 여전히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이 흠천감 감정으로 일하였다. 1688년 그를 이어 관상대 책임자로 일한 헤르디난두스 페르비스트(P. Ferdinandus Verbies,1623-1688) 신부가 선종하였을 때, 당시 황제
7. 선교사 묘지와 비석
(1) 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 당학교(北京市委党校)
마태오 리치,아담 샬,헤르디난두스 페르비스트 신부 등의 묘가 있는 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 당학교는 원래 명나라 때 등공(騰公)이라는 귀족의 개인 정원이었다. 1610년 마태오 리치가 58세를 일기로 선종하자 명나라 신종 황제는 그에게 묘지를 내려 안장하게 하였다. 당시 선교사 신부들이 명나라 정부 관리들과 상의하여 결정한 곳이 ‘등공책란(騰公冊欄)이라 불리는 땅이었다. 마태오 리치의 무덤은 중국식과 서양식을 곁들인 것이었다. 즉, 백옥의 비석 몸체 윗부분에 용의 모양을 조각하고 또 ‘I H S’(Iesus Hominum Salvator, 인간의 구원자 예수)를 새겨넣었던 것이다. 이후, 등공책란은 청말까지 선교사들의 묘지로 내려오게 된다. 의화단 사건 때,묘비가 부숴지고 묘를 파서 시신을 훼손하는 일과 관련 건축물들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강압으로 맺어진 신축조약(辛丑條約)과 이에 따른 배상금으로 등공책란은 한층더 규모를 확대하고 성당도 짓게 된다. 원래 고아원 자리에 ‘ㅁ’자형 건물을 지어 독일 나자리스크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사용하였는데, 1926년에 이 수도원이 저장성 지아싱(浙江省嘉兴)으로 옮겨가면서 베이징 및 화북 지역의 신학교로 사용되었다.1910년, 성당의 서쪽 정면에 ‘山’자 모양의 건물을 지어 프랑스 성모회의 총원으로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山’자 건물의 남쪽에 포도주 공장을 지었으며, 등공책란의 사방 주위에 대량으로 포도를 재배하였다. 1954년,베이징시 공산당위원회당학교 측과 베이징시 천주교 애국회 사이에 선교사 묘지에 대하여 의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당시 총리인 저우은라이(周恩来)에 의하여 중국 문화를 존중하고 중서문화 교류에 공헌이 큰 마태오 리치, 아담 샬, 헤르디난두스 페르비스트의 묘비만 원래 자리에 두고 나머지 묘비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결정되었다. 이때, 성당 뒷마당으로 옮겨진 묘가 셋이고, 하이디엔취(海淀区) 서북쪽의 왕시앙(旺乡)으로 옮겨진 묘가 모두 837기였다. 성당 외벽에 상감되어 있던 묘비 77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8년 좌익 노선이 심화되면서 마웨이거우(马尾沟)성당은 당학교의 창고가 되었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벌어지면서 등공책란 묘지의 성당은 철거되고 말았다. 1984년 베이징시 문물국의 감독 아래 묘지가 회복되었다.현재 ‘명청(明淸) 선교사 묘지’에는 63명의 선교사 묘비가 남아있다. 이 중 14명은 포루투갈에서, 10명은 이탈리아에서, 9명은 프랑스에서, 또 체코에서 3명, 베기에에서 2명, 스위스 한 명, 슬로베니아 한 명 그리고 국적 불명이 한 명이며, 이밖에 14명의 중국인이 있다.
(2) 정복사 프랑스 선교사 묘지(正福寺法国传教士墓地)
정복사 프랑스 선교사 묘지는 하이디엔취 스지칭시앙(海淀区四青乡)에 있으며, 1732년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의 묘지로 사용되어 왔다. 1900년 의화단 사건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심각한 훼손을 당하였다. 1987년, 베이징시 석각(石刻)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남아있던 묘비 30여 기가 이곳에 옮겨져 노천에 전시되고 있다.
===== 끝 =====
남당 첨탑
남당 예수님상
남당 내부
남당 내부
남당 제대
남당 성전
남당 성전앞 촬영(성전 좌측에 상당히 훼손된 비석이 있는데 재건축당시의 성당규모,자재등등 건립에 관한계약를 기록해놓은것이랍니다)
북당 첨탑
북당 성모상
강희황제께서 사액하신 성당이라는 글귀 같습니다(우리식으로 하면 머릿돌?)
강희황제 편액내용===>萬有眞原
성당 안에서 밖을 봤을때 녹음이 참 예뻤는데 달리표현할 빵법이 없네요
두분 신부님 모두 북당에서는 미사가 처음이시라네요... 대부분 예상을 못 했었습니다
자주 올수없는곳일지도 모른다는생각에 행여 사진이안나오면 어쩌나하는 노파심에 온갖 여수떨면서 찍은사진입니다. 다행히 다들 표정이 밝습니다
북당 성전
동교민항 성당
직접 들어갈 수 없는곳이라 담벽 구멍사이로...
가출한 것인지 주인에게 버림받은 것인지 꼬락서니가 거지괭이 인데... 누군가 페르시아 괭이라더군요(행색은 초라한데 다시보니 눈빛이 범상치 않더군요)
시계탑인데 내부의 종은 시끄러워서 떼버렸다는 말씀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시더군요
종탑안 口자 건물안에 프랑스에서 옮겨심은 12사도를 상징하는 12樹의 나무가 있는데 그중에서 위의 나무가 가롯 유다 나무랍니다. 이곳을 들어가는 입구는 성인교육관, 건물이 우중충한것이 참 남루한데 벽면에 정말 남루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잠깐 웃었습니다
동공책란내 성당(山字 모양)
저희반 同学 자매님들
첫댓글 드디어..사진을 올리셨네요...^^
앞으로도 자주....올릴꺼죠..?? !! 즐감..^^
본의아니게 삼각대를 지참한 관계로 당일 전속 사진사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유익한 하루였답니다
잘 찍으셨네요..
일전에 다녀온 곳입니다만 성 신부님과 함께가 아니라 그냥 겉 핡기식이었습니다.
혹시 가셨던 곳 중 신부님의 좋은 멘트, 형제님의 인상 같은 것 기억나시면
가능한 앵글에 설명을 좀 부탁 드려도 될련지 ~>_<~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당일 배부한 유인물을 바탕으로 가능한대로 올리도록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