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는 환기성이 우세하다 / 이상옥 시인
시가 매혹적인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역시 뭐니뭐니 해도 시가 갖는 특유의 환기성 때문이다. 좋은 시는 환기성이 우세하다. 일상적 삶 속에서 놓치고 사는 삶의 진실을, 시는 환기하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을 때 무릎을 탁 칠 만큼 아 그렇지, 내가 그것을 잊고 살았지라고 감동하게 되는 것은 바로 시 특유의 환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본지 지난 호에 발표된 이 시를 읽으면 난데없이 지난 5월 별세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생각나고, 이어서 그의 수필「인연」이 생각난다. 그리고는 아사코가 생각난다. 그래서 다시「인연」을 읽어본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 마지막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 세 번째 만났을 때의 아사코는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스위트피나 목련꽃 같은 아사코의 이미지가 바랬기 때문에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피천득에게 아사코의 추억은 소양강 가을 경치처럼 늘 아름답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시수헌 가는 길 / 임보
내가 사는 운수재는
우이동 골짜기에 있고
시인들의 사랑방 시수헌은
산마루 넘어 쌍문동에 있다
세심천 고갯길로 질러가면 30분
솔밭 지나 언덕길로 돌아가면 40분
짧은 고갯길보다는
긴 언덕길로 돌아서 다닌다
언덕길 밑에는 꽃밭이 있기 때문
한 교회가 가꾼 작은 꽃밭인데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꽃들 가운데서도 나를 붙든 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국종 꽃
어느 날 꽃밭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나팔소리 들리나 한참 지켜보는데
나팔소리는 소식도 없고
나비 날개를 단 천사의 얼굴이
열 살쯤 되어 뵈는 과수원집 딸이
꽃 속에서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반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채로
천사가 되어 꽃 속에 살고 있다니
시수헌 가는 길이 더딘 것은
꽃밭에서 잠시 길을 잃기 때문
(월간『詩文學』2007. 7월호)
<이달의 문제작>
왜,「시수헌 가는 길」을 읽다가 피천득이 생각나고「인연」이, 그리고 아사코가 생각나고, 또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가. 이것은 바로 시의 환기성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시인들의 사랑방 시수헌 가는 길을 일부러 짧은 고갯길보다는 긴 언덕길을 돌아서 다닌다. 언덕길 밑에는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는 꽃밭이 있기 때문이다. 그 꽃들 가운데서도 화자를 붙든 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국종 꽃인데, 어느 날 꽃밫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나팔소리가 들리나 한참 지켜본다. 그때 나팔소리 대신 나비 날개를 단 천사의 얼굴, 열 살쯤 되어 뵈는 과수원집 딸이 꽃 속에서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꽃 속에 과수원집 딸이라니, 이것은 현실 너머 신화의 공간을 환기한다. 현실의 꽃밭이 신화의 꽃밭으로 일변한 가운데 반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채로 천사가 되어 꽃 속에 살고 있는 과수원집 딸을 만나 것이다.
과수원집 딸이나 아사코는 원형상징이다. 피천득에게는 아사코로, 임보에게는 과수원집 딸로 각각 다르게 드러나지만, 이들은 꽃 같은 첫사랑의 원형이다.
(월간『詩文學』2007. 8월호.)
이상옥 시인 프로필
나는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같은 삶을 동경하긴 했습니다.
카우보이처럼 말을 타면서(내게 청바지가 잘 어울리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개를 대동하고, 소떼와 양떼를 방목하는 한편
한켠에서는 꿀벌을 치는 초원의 삶을 꿈꾸었습니다.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랏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鋪道)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예이츠,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예이츠보다 좀 더 화려한 꿈을 꾸었던 것이요. 오두막집이 아니라 좀 근사한 목장 하나를 가지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시인 같은 삶은 살지 못하고 시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시인 같은 삶의 꿈이 무의식 중에라도 남아 있는지, 도시에 살면서도 진도개를 키우고, 그 녀석과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는 것이 일과 중 가장 기쁜 시간으로 여겨지기만 합니다.
시인이 아닌, 시인 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니스프리의 호도>의 주인공처럼 떠날지도 모르겠습니다.
1957년 경남 고성 마암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농대
대전대학교 문예창작과(학사 편입)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홍익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1989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시인)
계간 <<경남문학>> 편집위원 및 편집장 , <<시와 생명>> 편집위원 역임.
철성고등학교 국어교사 역임.
거제전문대, 태성전문대, 경남대, 창원대, 진주교대 시간강사 역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시문학상, 유심작품상 수상
현재
월간 <<시문학>> 편집위원, 계간 <<시와 경계>>기획위원, 계간 <<나래시조>> 편집자문위원
반년간<<디카詩>> 주간
창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하얀 감꽃이 피던날>>, 초판: 시문학사, 1990, 개정판: 다층, 2000.
<<꿈꾸는 애벌레만 나비의 눈을 달았다>>, 초판:시문학사, 1994, 개정판: 다층, 2000.
<<유리그릇>>, 문학수첩, 2003.
<<환승역에서>>, 문학의 전당, 2005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문학의 전당, 2004.
시론서
<<변방의 시학>>, 시문학사, 1994.
<<역류하는 시학>>, 보고사, 1996.
<<시적 담화체계 연구>>, 보고사, 1997.
<<아름다운 상처의 시학>>, 국학자료원, 1999.
<<현대시와 투명한 언어>>, 푸른사상, 2001.
<<시창작강의>>, 삼영사, 2002.
<<디카시를 말한다>>, 시와에세이, 2007.
<<시창작입문>>, 탑북스, 2010.
<<앙코르 디카詩>>, 국학자료원, 2010.
시해설서
<<사색을 위한 기독교명시>>, 신원문화사, 1999.
<<시가 있는 아침에>>, 푸른사상, 2000.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 국학자료원, 2002.
기타 이론서(공저)
<<경남문학사>>,불휘,1995.
<<한국현대시인론>>,보고사, 1996.
<<문학의 이론>>,홍익출판사, 1997.
<<한국현대문학사>>, 시문학사, 2000.
<<한국현대시인연구>>, 푸른사상, 2001.
<<한국 현대시조 작가론1>>, 태학사, 2002.
<<독서지도의 길라잡이>>, 이화, 2003.
<<문예창작의 이론과 실제>>, 창원대학교 출판부, 2005.
민문자 실버넷문화예술관장 mjmin7@silver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