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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종
○
거기서 와서 거기로 가는
○은 처음이며 끝
○은 인생의 초상
○은 다 있고 하나도 없는 모습
꽉차고 텅빈 모습
○은 무엇일까
○은 가볍다
공기(空氣)의 숨결
굴리며 놀고
뒤집어쓰면 후광
○은 크고 밝다
○은 생명의 거울
○은 사랑
○ㅗ, 모든 곡식의 살
모든 열매의 살
이슬과 눈물의 정령(精靈)
천체의 정령
금반지 은반지의 정령
풀잎과 나무의 정령
물과 피의 정령
방울들
왼갖 소리들
모든 구멍의 정령
죽음의 정령
○의 정령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가객 정현종
가객(歌客)&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입장(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걸신(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가을에 정현종
가을에&
(사계(四季)가 모두 우리 눈앞에
그냥 한 번 크게 보여주는 것이지만)
가을의 일들을 보면
바깥이 바깥이 아니라
가을의 가슴 속이에요
가을 바람에는 고만
마음의 끝이 안 보이지만
별 수 없이 가을 바람 속으로
가을의 가슴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수밖에 없지요
걸어들어 가지요 저 바깥으로
바깥은 왜 가없이 퍼져 있는지
마음은 왜 거칠게 비어 그게 속알인지,
문명의 소꿉장난, 제도의 좁쌀 위를 미끄럼 타
슬슬 바깥으로 걸어들어 가지요만
바람 불어 마음은 거기 참 많기도 하군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감격하세요 정현종
감격하세요
나무들을 열어 놓는 새소리
풀잎들을 물들이는
새 소리의 푸른 그림자
내 머리 속 유리창을 닦는
심장의 창문을 열어 놓는
새 소리의 저 푸른 통로
풀이어 푸른 빛이어
감격해 본 지 얼마나 됐는지.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거울 정현종
거울&
사물은 각각 그들 자신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나의 거울을 가지고 있듯이. 나와 사물은 서로 비밀이 없이 지내는 듯하여 각자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각자의 거울에 비취인다. 비밀이 없음은 그러나 서로의 비밀을, 비밀의 많고 끝없음을 알고 사랑함이다. 우리의 거울이 흔히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거울 속으로 파고 든다. 내 모든 감각 속에 숨어 있는 거울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사물을 빨아들이는 거울. 사물의 피와 숨소리를 끓게 하는 입술식(式) 거울. 사랑할 줄 아는 거울. 빌어먹을, 나는 아마 시인이 될 모양이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거지와 광인 정현종
거지와 광인(狂人)
거지와 광인(狂人).
나는 너희가 체현(體現)하고 있는 저 오묘한
뜻을 알지만 나는 짐짓 너희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나는
안팎이 같은 너희보다
(너희의 이름은 안팎이 같다는 뜻이거니와)
안팎이 다른 나를 더 사랑하니까.
너와 나는 그동안
은유(隱喩) 속에서 한몸이었으나
실은 나는 비의(秘意)인 너희를 해독하는
기쁨에 취해
그런 주정뱅이의 자로 세상을 재어온지라
나는 아마 취중득도(醉中得道)했는지
인제는 전혀 구별이 안 가느니―
누가 거지고
누가 광인인지
(구걸이든 미친 짓이든
한산(寒山)이나 프란체스꼬
덤으로 그 팔촌(八寸) 그림자들쯤이면
필경 우주의 숨통이려니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겨울산* 정현종
겨울산*&
겨울 산을 내려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희끗희끗 눈 덮인 산,
계곡들은 차고 맑은데
거기 네 모습이 어른거려
자꾸 발을 멈춘다.
―너는 아프냐
돌아보면 차가운 계곡
차가운 계곡뿐인데
네 모습이 거기 어른거려
내 뒤에서 자꾸 잡아당겨
돌아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너는 아프구나
어느 날 네가
북한산 계곡에서 잃어버린 시계,
시간을 청산(靑山)에 묻었으니
마음은 문득 푸른 하늘이었는데,
우리의 몸은 또 무겁고
네 병상(病床)의 시간이 나를 따라다닌다.
―너는 아프구나
(여기까지 쓰고 미완(未完)으로 놔두기로 함)
* 이 작품은 1990년 겨울호 『문학과 사회』의 김현 추모 특집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고통의 축제 2 정현종
고통의 축제(祝祭) 2
눈 깜박이는 별빛이여
사수좌(射手座)인 이 담배 불꽃의 화창(和唱)을 보아라
구호의 어둠 속
길이 우리 암호의 가락!
하늘은 새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아래로 아래로 날아오른다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시간의 뿌리를 뽑으려다
제가 뿌리뽑히는 아름슬픈 우리들
술은 우리의 정신의
화려한 형용사
눈동자마다 깊이
망향가(望鄕歌) 고여 있다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무슨 힘이 우리를 살게 하냐구요?
마음의 잡동사니의 힘!
아리랑 아리랑의 청천(靑天)하늘
오늘도 흐느껴 푸르르고
별도나 많은 별에 수심(愁心) 내려
기죽은 영혼들 거지처럼 떠돈다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몸보다 그림자가 더 무거워
머리 숙이고 가는 길
피에는 소금, 눈물에는 설탕을 치며
사람의 일들을 노래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어니
쾌락은 육체를 묶고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공중에 떠 있는 것들 1 정현종
공중에 떠 있는 것들 1
□ 돌
날아가던 돌이 문득 공중에 멈췄다.
공중에 떠 있다.
일설(一說)에는 그 돌이 정치적이라고 한다.
그 소리의 화석(化石)의 연대(年代)는 애매하다.
웃지 않는 운명만이 확실하다.
다만 철제(鐵製) 프로파간다를 매일
독약처럼 조금씩 먹는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공중에 떠 있는 것들 2 정현종
공중에 떠 있는 것들 2
□ 나
내 몸이 자꾸 무거워지는 이유는
공포 때문이다.
나는 내 그림자로부터 도망친다.
떨리는 손으로 그림자를 떼어버린다.
다른 그림자 때문이다.
그림자를 잃고 공중에 뜬 실체는 말한다
나 내가 아니오
나 내가 아니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공중에 떠 있는 것들 4 정현종
공중에 떠 있는 것들 4
□ 집
지붕마다 구멍이 뚫려 있다
지붕 바깥으로 손 들기 위해서이다.
손 들고 있는 편안함!
비가 새니까 막으라는 겁니다라고
스피커가 말한다.
청천 하늘엔 별도나 많고.
연락선 같기도 하고 화물선 같기도 하며
초계정(哨戒艇) 같기도 하다 즐거운 나의 집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연기 위에 집을 짓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교감 정현종
교감(交感)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가등(街燈)
붉고 따뜻한 가등(街燈)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親和).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그대는 별인가 정현종
그대는 별인가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밤이 되고 모래가 되고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꽃을 잠그면? 정현종
꽃을 잠그면?
누가 춤을 잠근다
피어나는 꽃을 잠그고
바람을 잠그고
흐르는 물을 잠근다
저 의구한 산천을
새소리를 잠그고
사자와 호랑이를 잠근다
날개를 잠그고
노래를 잠그고
숨을 잠근다
숨을 잠그면?
꽃을 잠그면?
춤을 잠그고
노래를 잠그면?
그러나 잠그는 이에게
자연도 웃음짓지 않고
운명도 미소하지 않으니, 오
누가 그걸 잠글 수 있으리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꽃 피는 상처 정현종
꽃 피는 상처
남북이 갈린 자리
땅 위에도
마음 속에도
상처가 깊었다.
피가 계속 흘렀으나
체제들은
그걸 고치려 하기는 커녕
나쁜 목적을 위해
그걸 이용했다.
상처를 이용하다니!
(계속되면 죽는데)
출혈을 이용하다니!
남의 상처도 아닌
제 몸의 상처를!
그 상처로 아픈 사람은
그걸 고칠 힘이 없었고
힘이 있는 사람은
아프지 않았다.
이 민족의 삶은 그리하여
출혈이 심하고
꼬이고 꼬여왔다.
마음 고생도 크고
몸도 고생도 컸다.
무겁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얼음이 녹는 소리,
녹아 봄 햇빛 아래
반짝이는 소리,
(잘돼야 할 텐데)
아픈 데가 나으려는지
이 땅의 어디어디
근질근질 풀리는 소리,
온갖 동식물들
수런대는 소리,
(나쁜 마음으로 하면 안 되는데)
얘기가 통해
피가 통해
근질근질
수런대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
아, 꽃 피는 소리
(그래야 할 텐데)
상처에서 꽃 피는 소리!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꽃피는 애인들을 위한 노래 정현종
꽃피는 애인들을 위한 노래
겨드랑이와 제 허리에서 떠오르며
킬킬대는 만월(滿月)을 보세요
나와 있는 손가락 하나인들
욕망의 흐름이 아닌 것이 없구요
어둠과 열(熱)이 서로 스며서
깊어지려면 밤은 한없이 깊어질 수 있는
고맙고 고맙고 고마운 밤
그러나 아니라구요? 아냐?
그렇지만 들어보세요
제 허리를 돌며 흐르는
만월(滿月)의 킬킬대는 소리를.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꿈 노래 정현종
꿈 노래
신부(新婦)는 이미 죽었거나
아직 오지 않았으니
꿈일랑 그냥 비워두어라 그대여,
고향 없는 인생일장(人生一場)들이
눈송이처럼 빗방울처럼
아득히 휘날려 내리는구나
거리의 장미(薔薇) 속에 불을 묻고
술잔 수없이 넘쳐 흘러도
영원한 아직인 꿈에 홀려
육체와 영혼의 메아리 사이를
그대 아직도 도둑으로 떠도는가.
보리수(菩提樹) 그늘 같은 눈동자는
언제 그대 눈의 깊은 데서 솟아나리오.
사물의 꿈, 민음사, 1972
꿈 속의 아모라 정현종
꿈 속의 아모라
내 손이 그대 가슴을
시냇물처럼 흐른다, 아모라여,
내 눈 속에 뜨는 무지개의 한 끝이
그대 눈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오색(五色) 궁륭이 만월(滿月)처럼 부풀 때, 아모라여,
그대는 들었는가
바닷물이 땅 위로 넘치는 소리, 혹은
상처입은 시간(時間)의 날개 소리를.
흐르다가 우리가 끊어지고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간다 해도
꿈 속의 아모라여, 나는 너를 듣는다
노예의 귀로.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꿈으로 우는 거리 정현종
꿈으로 우는 거리
사람들이 말한다
사람들이 입에서 거미줄을 꺼낸다
그 거미줄에 걸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눈 감은 것처럼 어두운 세상
……그래도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본다
꿈으로 우는 거리를 꿈꾼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나는 별아저씨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나의 자연으로 정현종
나의 자연으로
더 맛있어 보이는 풀을 들고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꼬신다
그저 그놈을 만져보고 싶고
그놈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그 살가죽의 촉감, 그 눈을 통해 나는
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무슨 충일(充溢)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
동물들은 그렇게 한없이
나를 끌어당긴다.
저절로 끌려간다
나의 자연으로.
무슨 충일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낮술 정현종
낮술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냉정하신 하느님께 정현종
냉정하신 하느님께
지난 해는
참 많이도 줄어들고
많이도 잠들었습니다 하느님
심장은 줄어들고
머리는 잠들고
더 낮을 수 없는 난장이 되어
소리 없이 말 없이
행복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 납작한 벌판의 찬 흙 속에
한 마디 말을 묻게 해 주세요.
뜬구름도 흐르게 하는 푸른 하늘다운
희망 한 가락은
얼어붙지 않게 해 주세요
겨울은 추울수록 화려하고
길은 멀어서 갈 만하니까요
당신도 아시지요만, 하느님.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너는 누구일까 정현종
너는 누구일까
너를 보면 취한다
피와 기대에 취하고
성적(性的) 향기에 그 아지랑이에
취하고, 참 희한한 때도 있느니
세상 걱정이 없다
너는 누구일까
너는 바람을 넣는다
땅과 그 위의 길들에 바람을 넣고
심장과 발바닥에
그게 헤쳐가는 시간에
바람을 넣는다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제도의 공인(公認)으로 무죄를 비는 거야말로 외설이지
관습에 기댄 자기기만이야말로 외설이지)
저 자연을 보렴
저 찰랑대는 방심(放心)을 보렴
INNOCENCE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노래에게 정현종
노래에게
노래는
마음을 발가벗는 것
노래는
나체의 꽃
나체의 풀잎
나체의 숨결
나체의 공간
의 메아리
피, 저 나체
죽음, 저 나체
그 벌거숭이 대답의 갈피를 흐르는
노래, 벌거숭이
무장(武裝)도 화장(化粧)도 없는 숨결
돌아가야지 내 몸 속으로
돌아가야지 모든 몸 속으로
불꽃이 공기 속에 있듯
그 속에서 타올라야지
마음을 발가벗는
노래여
내 가슴의 새벽이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노시인들, 그리고 뮤즈인... 정현종
노시인(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원제 : 노시인(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의 말씀
부제 : 사랑사설(辭說) 둘
나는 참을 수 없이 그분들이 내 할아버지라는 느낌이다. 그분들의 핏줄과 내 핏줄이 하나여서 어쩔줄을 모르겠다. 일테면 1970년 5월 29일 저녁, 노인들이 환장하게 보고 싶어서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시제(詩祭)에 갔다가 들은 김광섭(金珖燮)선생의 답사 `나는 사람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해서 시를 씁니다'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 김광섭의 별이 되어 빛나기 시작했고 내 머리에는 뜨끈한 물이 넘쳤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 그분들이, 예술보다 짧은 인생의 오랜 동안을 집을 찾아 헤매이다 돌아온 어린애라는 느낌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반갑구나 얘야, 내가 망령이 아니다 얘야 소를 잡으마, 때때로 그분들 중의 누가 딱딱한 무명(無明)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때도 있기는 있지만, 그렇긴 그렇지만, 제 발등에 불부터 끄는게 급함을 알기는 알아야지, `제'란 누구인가? 시인, 시의 발등, 정신의 발등, 일의 순서는 알아야지, 어떤 흉악한 홍수, 폭력(물리(物理)․물질․허위의)등이 휩쓸면 각각 힘을 다해 자기의 칼 아름답게 갈아야지, 젊은 시인들도 자 속에 무명(無明)과 사술(詐術)을 키우지 말아야지, 제가하는 바를 알고 해야지……시 쓰는 자식 열을 거느린 뮤즈 어머니의 말씀이 너희들끼리 싸우는 일이 급한 건 아니다, 발전을 위해 결코 싸울 필요가 있다면 너 자신과 싸우듯이 싸워라―그러나 어머니는 계모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핏줄이 다른 자가 있나이다―오냐 곡식 중에는 쭉정이도 있느니라, 곡식은 거두고 쭉정이는 버리리라, 거듭 부탁하지만 싸우되 방법적 회의와 방법적 미움을 다 안고 있는 방법적 사랑으로 싸워라, 너희에게는 무엇보다도 너희 공동의 적(敵)이 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가장 큰 적이란다. 상식의 슬픔. 슬픔 다사(多謝).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눈짓 하나가 탄생을 돕는다 정현종
눈짓 하나가 탄생을 돕는다
너는 태어나려고 애쓴다
네가 태아처럼 꼬부리고 걸어갈 때
네가 헤엄치듯 잠들 때
물과 햇빛 속의 태기를 마실 때
너는 태어나려고 애쓴다
너의 키와 체중 속에서, 옷 속에서, 밥
과 꿈 속에서, 네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
속에서
아 태어나려고 애쓴다
납작한 것들 속에서
찢어지는 것들 속에서
길들여진 정신
무서워하는 기교 속에서
명랑한 저 달빛 아래 쥐죽은 거리에서
석탄 백탄 속에서
아 막무가내의 기쁨 속에서.
눈짓 하나가 탄생을 돕는다.
나는 별아저씨 , 문학과지성사, 1978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정현종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자꾸 자꾸 물을 줘야 해요
나무도 사람도 죽지 않게
죽음이 공기처럼 떠도는 시절에
그게 우리가 숨쉬는 이유
그게 우리가 꿈꾸는 이유
당신의 마음, 당신의 몸은
얼마나 깊은 샘입니까
사람의 기쁨과 슬픔의 가락으로
그 보석의 가락으로 솟는 샘
가슴도 손도 꽃피고
나무와 풀
집과 굴뚝들도 꽃피게
초록초록 자라게
땅의, 보석의,
온몸의 가락을 다해 솟는 샘―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굴뚝의 어린 시절
던지는 돌에 날개 돋는 어린 시절
돛 단 지평선의 어린 시절
오, 경이의 어린 시절,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그 시절을 되찾아 주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정현종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한 처녀가 자기의 눈 속에서
나를 내다본다
나는 남자와
풍경 사이에서 깜박거린다
남자일 때 나는
말발굽 소리를 내고
풍경일 때 나는
다만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우리 눈동자도 돌리시느니
한 남자가 자기의 눈 속에서
처녀를 내다본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대취 정현종
대취(大醉)
걸리는 데마다 소리내는 강풍
그 센 바람 소리는
내 속의 대취(大醉)한 까닭없는 밑빠진
불길에 자꾸 기름을 부어
두루 태우고 뒤집고 열고 켜고
뿔뿔이 놓아주고 한군데 모으고
요컨대 세상을 깨끗이 재편하고
광물들 금속성 번쩍이게 하고
천지 귀신 휘몰아 잔치하고
눈들 말똥거리게 하고
마음 한가운데서 강풍의 제일
고요한 부분 회치고
나는 또 그러한 지병(持病)에 취해
오호라 대취(大醉)의 불타는 꽃 속에
걸리는 데 없이 흥청거리느니
날개보다 더 이르는
밑빠지게 서늘한 공기로 흐르느니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도덕의 원천이신 달이어 정현종
도덕의 원천이신 달이어
바람 소리 한 가닥
모래 위에 떨어져 있다
그걸 주어서 만져 보고
귀에도 대 본다
달 뜨는 소리 들린다
도덕의 원천이신 달이어 파도여
달 뜨는 눈알에서 내 웃음은
파도 소리를 낸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독무 정현종
독무(獨舞)
□ 1
사막에서도 불 곁에서도
늘 가장 건장한 바람을, 한끝은
쓸쓸해 하는 내 귀는 생각하겠지.
생각하겠지 하늘은
곧고 강인한 꿈의 안팎에서
약점으로 내리는 비와 안개,
거듭 동냥 떠나는 새벽 거지를.
심술궂기도 익살도 여간 무서운
망자(亡者)들의 눈초리를 가리기 위해
밤 영창(映窓)의 해진 구멍으로 가져가는
확신과 열애(熱愛)의 손의 운행을.
알겠지 그대
꿈속의 아씨를 좇는 제 바람에 걸려 넘어져
종골(腫骨)뼈가 부은 발뿐인 사람아, 왜
내가 바오로서원의 문유리 속을 휘청대며 걸어가는지를
한동안 일어서면서 기리 눕는
그대들의 화환과 장식의 계획에도
틈틈이 마주잡는 내
항상 별미(別味)인 대접(待接)을.
하여, 나는
세월을 패물처럼 옷깃에 달기 위해
떠나려는 정령(精靈)을 마중 가리.
부족으로 끼룩대는 속을 공복을
대해어류(大海魚類) 등의 접시로도 메꾸고
관(冠)을 쓴 꿈으로도 출렁거리며
가리 체중 있는 그림자는 무등 태우고.
□ 2
지금은 율동의 방법만을 생각하는 때,
생각은 없고 움직임이 온통
춤의 풍미(風味)에 몰입하는
영혼은 밝은 색채이며 대공(大空)일 때!
넘쳐오는 웃음은
……나그네인가
웃음은 나그네인가, 왜냐하면
고도(孤島) 세인트 헬레나 등지로 흘러가는 영웅의
영광을 나는 허리에 띠고
왕국도 정열도 빌고 있으니. 아니 왜냐하면
비틀거림도 나그네도 향그러이 드는
고향하늘 큰 입성(入城)의 때인
저 낱낱 찰나 딴딴한 발정(發情)!
영혼의 집일 뿐만 아니라 향유(香油)에
젖는 살은 반신(半身)임을 벗으며 원앙금을 덮느니.
낳아, 그래, 낳아라 거듭
자유를 지키는 천사들의 오직 생동(生動)인 불칼을 쥐고
바람의 핵심에서 놀고 있거라
별 하나 나 하나의 점술(占術)을 따라
먼지도 칠보(七寶)도 손 사이에 끼이고.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들판이 적막하다 정현종
들판이 적막하다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는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정현종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주고 받음이 한 줄기
바람 같아라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차지 않는 이 마음.
내 마음의 공터에 오셔서
경주를 하시든지
잘 노시든지
잠을 자시든지……
굿나잇.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말의 형량 정현종
말의 형량(刑量)
한 알의 밀이 썩는 아픔, 한 덩어리의 말의 불이 타는 아픔, 말씀이 살이 된 살이 타는 무두질의 아픔, 제가 하는 바를 모르고 하는 저 죽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말의 이별의 슬픔, 이별 슬픈 말, 완강한 어둠의 폭력에 상처 입은 한 줄기 빛의 예리한 아픔의 아름다움, 어둠 긁는 말의 마디마디에 흐르는 피의 아픔의 아름다움, 어둠 슬픈 말, 꽃도 피면 시드나니가 아니라 시들음의 향기화(香氣化), 죽음에 향기를 충전하는 삶의 필요성, 큰 죽음은 크게 반짝이고 작은 죽음은 작게 반짝임, 별 하나 나 하나, 두려움, 말의 두려움, 말 하나 나 하나의 두려움, 말을 사랑하는 두려움, 말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말의 사랑을 모르는 자의 무신(無神)적 폭력, 가엾음, 분노, 가엾음의 분노, 분노의 가엾음…… 말이 머리 둘 곳 없으매 시대가 머리 둘 곳이 없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정현종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내 사랑하느니
어디 어느 때의
느닷없는 쓰라림
밤 열두시, 밑도 끝도 없이
지진처럼 몸을 흔들고 지나가는
마음의 파문
뭘 아는 듯한 슬픔
뭘 아는 듯한 공복감
아는 듯한 흔들림
그 모든 걸 합쳐도 이름붙일 수 없는
까닭 없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는
지진과도 같은 파문……
일상의 모든 일이
그것에서 도망가는 일에 지나지 않게 하는
지진으로 지나가는
지층(地層)의 금(金)과도 같은
(아, 노다지를 찾았다!)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무지개나라의 물방울 정현종
무지개나라의 물방울
물방울들은 마침내
비껴오는 햇빛에 취(醉)해
공중(空中)에서 가장 좋은 색채(色彩)를
빛나게 입고 있는가.
낮은 데로 떨어질 운명(運命)을 잊어버리기를
마치 우리가 마침내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자기의 색채(色彩)에 취해 물방울들은
연애(戀愛)와 무모(無謀)에 취해
알코올에, 피의 속도(速度)에
어리석음과 시간(時間)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
악마의 정열 또는
천사의 정열 사이의
걸려 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바람 병 정현종
바람 병(病)
저 밖의 바람은
심장에서 더욱 커져
살들이 매어달려 어둡게 하는
뼈와 뼈 사이로 불고
그리 낱낱이 바람에 밟히는 몸은
혹은
손가락에 리듬의 금환(金環)을 끼이며
머나먼 별에게 춤추어 보이기도 하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바보 만복이 정현종
바보 만복이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밝은 잠 정현종
밝은 잠
저의 잠은 많이
울고 있다
떠도는 것 중에는 다 스며서
혼자 하품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호주머니 속에 가고 있는 길에도
스며서
반복은 즐거우냐고 묻는
시간의 목소리에
차를 따르는 소리 등으로 응답하며,
결심하지 않아도 오는 잠
그러나 죽음은 누울 데가 없는
바다의 파도의 잠.
저의 잠은 많이
울고 있다
밤이 자기의 문을 깊이 잠근 뒤
별빛들이 밤의 잠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꽃처럼 일어난 뒤,
한 아침이 다른 아침에게 가서
빛을 깨우고
아침들은 그때 청명히 일어나
빛을 서로 던지기 시작할 때
저의 잠은 아마 또
조금씩 깨면서 울고 있다
결심하지 않아도 나오는
노래처럼.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벌레들의 눈동자와도 같은 정현종
벌레들의 눈동자와도 같은
둥근 기쁨 하나
마음의 광채
둥근 슬픔 하나
마음의 광채
굴리고 던지고 튕기며 노는
내 커다란 놀이
이만큼 깊으니
슬픔의 금강석
노래와 더불어
기쁨의 금강석
지구와도 같고 혈구(血球)와도 같으며
풀잎과도 같고 벌레들의 눈동자와도 같은
둥근 슬픔
둥근 기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보살 이유미 정현종
보살 이유미
보살 이유미는 오늘도
밥을 해 놓고 기다린다.
다른 집 식구들을 기다린다.
이 일미(一味) 보살에게는
밥에 관한 한은
내 식구 네 식구가 없다.
내 집 남의 집이 없다.
그리하여 항상
밥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을 모두
먹이고 싶을 따름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밥때가 되면 이집 저집이 모두
우리집이었듯이
보살 이유미네 식탁에는
항상 이 세상 걸신들이
앉으실 자리가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누구나 신이 된다.
신앙의 큰 원천, 걸신.
보살 이유미는 그 앞에
오늘도 밥을 떠놓는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사랑 사설 하나 정현종
사랑 사설(辭說) 하나
사물을 가장 잘 아는 법이 방법적(方法的) 사랑이고 사랑의 가장 잘 된 표현이 노래이고 그 노래가 신나게 흘러다닐 수 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형은 어떤 사랑을 숨겨 지니고 있습니까?
어제 형은 형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온 땅이 거울이 되어 하늘이 다 비취고 있는 데를 걸어갔다, 거울인 땅 위를 걸어갔다, 안 팔리는 꿈을 향해 꼭두새벽 꼭두대낮 거듭 걸어갈 때 자기의 모양은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누구나 거기서는 나그네되는 항구, 항구의 고향인 바다와 그리운 꿈만 보이는 식으로 자기가 안 보이는 게 즐거웠다(그런데 거울인 땅 위에 자기의 모양이 비취인 건 침뱉기 위해 몸을 굽히거나 구두끈을 매기 위해 허리를 꺾거나 할 때였으며)……밤이 되자 별들은 무덤의 입술을 빨고 무덤들은 별들의 입술을 빨고 있었으며, 천지간의 바람은 바람 자신의 대(代)를 잇기 위해 끊임없이 불고 있었으나 오히려 시인(詩人)의 눈에 눈물 고이고 귀에 소리 고이게 하기 위해 불고 있었고 그러나 잠들어 눈 어둡고 귀 닫은 이 많아 그들이 깨어날 때까지 불 작정으로 불고 있는 듯했으며……그때 어떤 소리가 말했다, 오늘의 시의 운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쪽박으로 구걸하는 거지 자기의 명성(名聲)의 쪽박으로 구걸하는 건 아니다, 죽음으로 구걸하는 거지 살아남음으로 구걸하는 건 아니다, 명성 등(等)은 그대의 이름을 쭉정이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임을 그대는 그대의 그야말로 명성을 위해 알아두어라, 사람은 각자 자기가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 이상의 사랑을 ( )로부터 항상 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그가 삶의 현상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가 두루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은 사랑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사랑받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고 항상 그대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으면 된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시(詩)에서 그대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고통과 자신의 죽음을, 문화를, 방법적 사랑을 놓지 않으려느냐, 슬픔 다사(多謝).
잠이 깨었으나 형의 꿈은 더 깊어갔습니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사물의 꿈 1 정현종
사물(事物)의 꿈 1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사물의 꿈 2 정현종
사물(事物)의 꿈 2
― 해는 왜 지는가
사랑하는 저녁 하늘, 에 넘치는 구름, 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햇빛의 폭포, 에 젖어 쏟아지는 구름의 폭포, 빛의 구름의 폭포가 하늘에서 흘러내린다, 그릇에 넘쳐 흐르는 액체처럼 가열(加熱)되어 하늘에 넘쳐 흐르는 구름, 맑은 감격에 가열된 눈에서 넘치는 눈물처럼 하늘에 넘쳐흐르는 구름.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사물의 정다움 정현종
사물(事物)의 정다움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네.
구름나라와 은하수 사이의
우리의 어린이들을
꿈의 병신들을 잃어버리며
캄캄함의 혼란 또는
괴로움 사이로 인생은 새버리고,
헛되고 헛됨의 그 다음에서
우리는 화환과 알코올을
가을 바람을 나누며 헤어졌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고.
죽음이었지만
허나 구원은 또 항상
가장 가볍게
순간 가장 빠르게 왔으므로
그때 시간의 매(每)마디들은 번쩍이며
지나가는 게 보였네
보았네 대낮의 햇빛 속에서
웃고 있는 목장의 울타리
목간(木幹)의 타오르는 정다움을,
무의미하지 않은 달밤 달이 뜨는
우주의 참 부드러운 사건을.
어디로 갈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길과 취기(醉氣)를 뒤섞고
두 사람의 괴로움이 서로 따로
헤어져 있을 때도
알겠네 헤어짐의 정다움을.
불붙는 신경(神經)의 집을 위해
때때로 내가 밤에 깨물며
의지하는 붉은 사과, 또는
아직도 심심치 않은
오비드의 헤매는 침대의 노래
뚫을 수 없는 여러 운명의
크고 작은 입맛들을.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상처 정현종
상처(傷處)&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새벽의 피 정현종
새벽의 피
아, 새벽 거리. 봤나? 그 속으로 지나왔지. 그 속으로? 차고 맑은 새벽의 피 속으로. 그렇지, 내 따뜻한 피를 섞었지. 내 몸 속의 한 줄기 파란 감각……새벽의 푸른 육체 속으로 뚫린 (나의 육체가 지나오면서 그린) 한 줄기 따듯한 구멍. 새벽은 아주 태연했어. 비정(非情)할 만큼. 아니 새벽은 아주 믿음직스러웠어. 믿을 수 있는 건 모든 서두르지 않는, 모든 태연한 것들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 차고 맑은 피 속에 네 따듯한 피를 섞어봐. 아 새벽 거리.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생명 만다라 정현종
생명 만다라
어릴 때 참 많이도 본
나팔꽃
아침을 열고
이슬을 낳은 꽃
아침하늘의 메아리
이슬 맺힌 꽃
이슬에 비췬 꽃 만다라
무한반영(無限反映)의 꽃 만다라
피, 붉은 이슬
의 메아리, 그
메아리 속에 생명 만다라
눈동자
에 맺히는 이슬
그 이슬 속에 삶 만다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석탄이 되겠습니다 정현종
석탄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은 죽어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석탄을 캐내면서
우리는 묻힙니다.
우리를 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폐증이라지요?
그건 여러 병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약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기를 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캐내는 석탄만도 못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막장에 묻어주세요.
거기서 석탄이 되겠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섬 정현종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시,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詩), 부질없는 시(詩)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느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거지 정현종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거지
누가 마시다 남은 술
마시다 남은 물
마시다 남은 피
그런 건 다 나한테 오거라
내 속의 저 밑 빠진 거지
시간도 비빔밥도 없는 저 거지가
그걸 다
바닥난 슬픔처럼 말려
바람 불 듯 취하리니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시를 기다리며 정현종
시를 기다리며
시 안 써지면
그냥 논다
논다는 걱정도 없이
논다
놀이를 완성해야지
무엇보다도 하는 짓을
완성해야지 소나기가
자기를 완성하고
퇴비가 자기를 완성하고
허기(虛飢)가 자기를 완성하고
피가 자기를 완성하고
연애가 자기를 완성하고
잡지가 자기를 완성하고
밥이 자기를 완성하듯이
죽음의 태(胎) 속에
시작하는 번개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시인 정현종
시인(詩人)&
아직도 일기장(日記帳)같은 거
학원일기나 희망일기 같은 걸,
사랑하며 망쳐 놓으며
심장(心臟)은 없고 바람뿐이며
재산(財産)은 수상한 피와 광기(狂氣)뿐이며
본능(本能)에 생각을 싣고
감각(感覺)에 정신(精神)을 싣고
꿈을 적재(積載)하는 무역(貿易)이 있으며
의사(醫師)와 약(藥)을 가장 미워하고
독자(讀者)를 가장 미워하고
십자가(十字架)를 자〔尺〕로 사용하다 들키고
죽음이 던지는 미끼에 매어달려 쩔쩔매고
망칙한 기쁨에 빠져서 부르짖고
사물(事物)을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면서
거듭 죽고
즐거울 때까지 즐거워하고
슬플 때까지 슬퍼하고
무모(無謀)하기도 하여라
모든 즐거움을 완성(完成)하려 하고
모든 슬픔을 완성하려 하고……
시대(時代)의 소리에 자갈을 물리는 강도(强盜)를 쫓아 밤새도록 달리고 있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시창작 교실 정현종
시창작(詩創作) 교실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 번 뛰어보는 게 나을 걸
뛰다가 넘어져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 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닥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선생 얼굴보다는
애인과 입을 맞추며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행동 속에 녹아버리든지
그래 굴신자재(屈伸自在)의 공기가 되어 푸르름이 되어
교실 창문을 흔들거나 장천(長天)에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든지,
하여간 사람의 몰골이되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라
장자(莊子)에 막지무용지용(莫知無用之用)이라
쓸데없는 것의 쓸데있음
적어도 쓸데없는 투신(投身)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가거라
너 자신이되
내가 모든 사람이니
불가피한 사랑의 시작
불가피한 슬픔의 시작
두루 곤두박질하는 웃음의 시작
그리하여 네가 만져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새와 애인과 푸른 하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사랑하는 거와 한몸으로 낳은 푸른 하늘로
세상 위에 밤낮 퍼져 있거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애인들 정현종
애인들
□ 1
함정이 땅 속에 숨고
사슬이 바람에 뜨듯이, 그래
자물쇠가 열쇠에 녹듯이
바라보며 녹는 눈―
□ 2
네 발로 기고 싶으며
옷은 털과 같다
신발엔 피가 흐르고
길은 풀밭과 같다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좋아한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어떤 평화 정현종
어떤 평화
오후의 산촌(山村).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앉아서 소가 풀 먹고 새김질 하는 걸 바라보고 있다. 가까이 가는 사람도 못 느끼고 정신없이 보고 있다. 문득 나를 알아차리고 쳐다보며 얼른 ꡒ어디 살아요?ꡓ 하고 묻는다. ꡒ나는 서울 사는데 너는 여기 사니?ꡓ목소리를 듣자마자 천하를 안심하고 다시 소한테로 눈길을 돌린다. 소 주려고 우리 바깥에 있는 짚을 한움큼 집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얼굴로 ꡒ그거 잘 먹어요ꡓ 한다. 그 목소리 속에는 친근감과 기쁨이 들어 있다(자기가 하는 짓을 낯선 사람도 하는 데서 느끼는 친근이요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내 마음에 또렷한 그 `풀 먹고 있는 소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이' 의 사진을 나는 가끔 바라본다. 잊히지 않는 그림. 지지 않는 꽃. 평화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얼음 조각들이 정현종
얼음 조각들이
너는 어려서부터
가혹하리만큼 겪는다
아, 사람이 있는 데는 왜 모두 이럴까?
집도 학교도 일터도
하여간 네가 있을 만한 데가 별로 없다
가령 어느 날
친구들이 너를 겨울 바다로 몰아넣지?
거기 둥둥 떠 있는 얼음 조각들을
너는 밟으며 물 위를 걸었지?
얼음 조각들이 너를 받쳐주었지?
아슬아슬했지만
너를 받쳐준 건
얼음 조각들뿐이었구나!
그만하면 걸어갈 만하지 않느냐!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외출 정현종
외출(外出)&
한기(寒氣) 스며들어
으시시한 물의 마음
하염없는 정감(情感)으로 별빛만
있고 바람만 있는 여기
모래의 마음으로
지금은 바깥을 걷고 있네.
골수(骨髓)에 빠져 있는 우수(憂愁)며
지껄이며 오는 욕망 또는
머리에 가득찬 의식(意識)의 불
사이서 믿을 수도 없이
장난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걷고 있네 봄밤의 길을.
공기(空氣)는 낮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고요와 고요의 다리가 되어
가등(街燈)의 공기는 가등 곁에서
나무의 공기는 나무 곁에서
제 것인 색채(色彩)와
제 것인 가락으로 흐르고 있지만
여기 우리는 나와 있네
고향(故鄕)에서 멀리
바람도 나와 있고 불빛도
평화(平和)가 없는 데를 그리움도 나와 있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이 나라의 처녀들아 정현종
이 나라의 처녀들아
장가 못 가서 자살한
시골 총각들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
마음에 자꾸 걸리는 게다
이 지상의 생물 중에 도대체
암컷 못 만나 자살한 수컷 있다는 말 못 들었는데
적어도 사람이
사람 중에도 제일가는 사람인 농부가
농부 중에도 햇덩이 같은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 고민이요
고민하다 더러 자살도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군소리지만, 그러니
신바람은 어디서 날 것이며
시골 살림은 누가 하고
농사 대물림은 어찌 될 것인가
그리하여 식량은 또 어찌 될 것인가)
이 나라의 처녀들아
저 생명의 원천 흙기운을 두고 묻노니
저 너무 맑아서 달디단 시골 공기를 두고 묻노니
저 시골 총각들의 튼튼한 사지(四肢)를 두고 묻노니
아직도 거기엔 그래도 남아 있는
넉넉한 인심을 두고 묻노니
일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두고 묻노니
ꡒ사람들은 죽으려고 도시로 모여든다ꡓ라고
한 시인이 말한 그 도시로 모여드는
이 나라의 처녀들아
무슨 대답 좀 해주렴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잎 하나로 정현종
잎 하나로
세상일들은
솟아나는 싹과 같고
세상일들은
지는 나뭇잎과 같으니
그 사이사이 나는
흐르는 물에 피를 섞기도 하고
구름에 발을 얹기도 하며
눈에는 번개 귀에는 바람
몸에는 여자의 몸을 비롯
왼통 다른 몸을 열반처럼 입고
왔다갔다 하는구나
이리저리 멀리멀리
가을 나무에
잎 하나로 매달릴 때까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자기자신의 노래 정현종
자기자신의 노래
거리를 걸어가다가 나는 느닷없이 부끄러웠다(방법이 없는 부끄러움은 물론 의심할 만하다) 나는 하여간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의 눈물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의 사랑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고 나의 파멸의 양(量)만큼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자장가 정현종
자장가&
잠들라
농부들이 땀과 가슴과
생전(生前)을 모두
땅에 묻듯이
잠들라
석탄처럼 묻혀 있는 광부들을
아무도 캐내지 않듯이
잠들라, 무엇보다도
이 나라 원혼(寃魂)들의
기나긴 그림자,
살에 파고드는 그
무한 슬픔이
너를 적시듯이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잔악한 숨결 정현종
잔악한 숨결
너무 맑은 바람은 갈증
너무 밝은 햇빛은 그리움
너무 투명한 것들의 보석(寶石)의 광기(狂氣)
이 맑은 공기의 한숨
밝은 햇빛의 고독
모든 투명한 것들의 잔악한 숨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잠꼬대 정현종
잠꼬대
잠꼬대―
너무 깊고
너무 슬프고
그리고
무섭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잡념 정현종
잡념
잡념 레퍼터리, 천당을 가까이
잡념 레퍼터리, 지옥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잡념인가 봐
그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꺼지고
출입이 자재(自在)하니
그다지 스스로 있는 걸 어찌
좋다 하지 않으리오,
잡념의 볼기짝이여
잡념의 귀싸대기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정현종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 1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재하기를 그쳤다. 물질과 허깨비만이 왔다갔다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버린다. 그 문드러진 팔다리로 나는 힘차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과의 타협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마약(麻藥)이 필요하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정들면 지옥이지 정현종
정들면 지옥이지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힘)을 얻게 되는데, 그들의 성공의 조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권력을 얻으려고 한번 죄를 지었으면, 그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은 자유를 얻기 위해 그것(권력)을 사용한다…… ―마르끼 드 사드의 세계에 대한 모리스 블랑쇼의 설명의 일부
말[言語]을
퍼내고
버리고
다시 퍼내도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시체들은 아주 깊이
가슴보다도 깊이
묻혀 있는 모양이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좋은 풍경 정현종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지식인의 환생 정현종
지식인의 환생(幻生)
축영산(祝靈山) 자락에 있는 외양간으로
어느 날 지식인 대여섯이 들어갔습니다.
외양간을 고쳐 별장을 만든
주인 상섭도인(商燮道人)이 불러서 갔지요,
(평소에도 주인은 외양간 내부를
손수 고친 데 대해서
거기서 맞는 아침의 새소리에 대해서
내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자연과 노동이 그 얼굴을
참 환하게 하는 걸 보았습니다)
밖에서 보면 틀림없는 외양간,
조그만 창 중턱 높이로 기운
호박밭에서 딴 호박 하나를
주인은 웃으며 들고 들어왔습니다.
(손에 뭘 들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가령 호박 같은 걸 들고 다니기를 나는 제안합니다)
안주인 김정매 여사는 고기를 굽고
우리는 소주와 함께 먹었습니다.
산과 공기도 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지식인이 내 눈에 이뻐 보였습니다.
외양간 속의 지식인들―
소와 외양간의 후광은 대단했으며
문득 모두 소가 된 듯했고
비로소 그 사람들이 이뻐 보였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집 정현종
집&
떠남도 허락하고
돌아감도 허락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서
모든 송중(送中)의 하늘에
별을 빛나게 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의 폭포로 노래하게 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동이여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인데
부는 바람과 흐르는 시내가
자비와 쓸쓸함으로 온다 한들
어떤 편안한 잠이
그대의 소유와 상실을 덮어줄까
어떤 길이 마침내
죽음에게 길을 열어줄까.
안정은 제 마음을 버리고
강물에 비치는 고향
때때로 무의식으로 우는 이마
깨어서도 젖는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창 정현종
창(窓)&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 준다. 자기는 거의 부재(不在)에 가깝다. 부재(不在)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天體)들과, 공중에 뿌리 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와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창천 속으로 정현종
창천(蒼天) 속으로
세상의 옆구리를 간지르고
간질린 손이 웃듯
아닌 밤중에 문득
폭소(暴笑)의 파도가 출렁거리듯이,
공기(空氣)의 깊은 가슴이 여러
꽃들과 불꽃을 피워내듯이
광대한 어둔 지층(地層)에
보석(寶石)의 날개와 창(窓)이 열려 있듯이
아 가장 깊은 물건보다도 깊은 슬픔이
가장 깊은 기쁨보다도 깊은 물건에 녹듯이
오 나는 저 숨막히는 뚜껑
창천 속으로
얼마나!
뛰어들려고 했던가
이 땅과 집과 시인을 벗어놓고
언제나 그리로 뛰어드는 불꽃처럼
언제나 그리로 뛰어드는 나무들처럼
(소리도 없이, 오 흔적도 없이)
뛰어들었던가
뛰어들어 숨을 섞는 꼴이 항상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던가
만물의 정신을 가뭇없이! 머금고
만물의 육체를 꿀먹는 벙어리
창천이여, 나의 한숨이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철면피한 물질 정현종
철면피한 물질
끝없는 물질이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물질이 치열하고 철면피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음.
내 귀에 밝게 와서 닿는
눈에 들어와서 어지럽게 흐르는
저 물질의 꼬불꼬불한 끝없는 미로(迷路)들,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능청스런 치열한 철면피한 물질!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초록 기쁨 정현종
초록 기쁨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神殿)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정현종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어요
나는 부풀고 부풀다가 그냥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렸어요
태양에서
(생명의 기쁨이요?)
달에 바람을 넣어 띄우고
땅에도 바람을 넣어 그
탄력 위에서 벙글거렸지요
인제 할 일은 하나
아주 꽃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야
거기 들어 있는 태양들을
내던지겠습니다
향기롭게, 붉게, 푸르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통사초 정현종
통사초(通史抄)
옛날 옛날에 덫과 올가미가 살았습니다. 덫은 올가미를 노리고 올가미는 덫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돌뿐이었습니다.
생명 있는 건 쇠뿐이었습니다.
우리야 돌 속의 돌이요 쇠 속의 쇠였습니다
덫이 올가미를 덮치는 순간 그야 올가미는 덫을 얽었습니다
아, 덫과 올가미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하늘의 허파를 향해 정현종
하늘의 허파를 향해
못 볼 거인 듯 나는 보았다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뒤꼍에서 혼자 부서져내리는 흙
그 무한아름의 나무기둥을 돌고 있는 바람
하늘의 저 깊은 허파를 향해 타오르는 석등(石燈)의 불꽃
땅인 줄 알고 만판 떨어져 그늘도 눈부신 동백꽃 숨소리
미친―
어쩌자구―
하늘의 입술, 땅의 젖꼭지
미친―
길이 아닌 게 없고
돌들은 팔자를 거슬러 둥둥 떠오르고
그리고 그 흙 곁의 내 마음
그 바람 곁의 내 마음
불꽃 방향
동백꽃 숨소리에 물드는 내 마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한 고통의 꽃의 초상 정현종
한 고통의 꽃의 초상(肖像)
그의 육체는 뿌리와 같다. 영혼의 꽃피는 불을 위한 모든 것을 빨아올리고 준비한다. 걸어다닐 때도 춤출 때도 땅 속에 뿌리박고 있다. 땅은 어둡다. 그러나 뿌리인 그의 육체는 밝고 밝다. 지상(地上)의 햇빛 속에 피워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여 왜 어둡겠는가. 그의 육체는 뿌리와 같다.
그의 목은 나무줄기와 같다. 그 목은 길고 투명하다. 목은 높은 데로 올라가는 신성한 사다리와 같다. 목은 아, 얼굴을 향하여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
나는 피어난 고통의 꽃 그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은 폭풍의 내부처럼 고요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의 눈은 눈물의 내부에 비친 기쁨의 빛의 넘치는 그릇이다. 자연의 폐(肺)의 향기를 향해 깊이 열려 있는 그의 숨결. 운명의 모습처럼 반쯤 열려 있는 저 입의 심연(深淵)의 고요. 회오리바람 기둥의 중심에 모인 힘으로 기쁨을 향해 열려 있는 얼굴. 오, 피어난 고통의 꽃 그대의 얼굴.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
한 꽃송이 정현종
한 꽃송이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시상(詩想)에 잠기셔서……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쪽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원시(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창(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한 숟가락 흙 속에 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 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화음 정현종
화음(和音)&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일광(日光)
은 저의 머나먼 항해를 접고
화염은 타올라 용약(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달려간다
그대 발바닥의 화조(火鳥)들은 끽끽거리며
수풀의 침상(寢床)에 상심(傷心)하는 제.
나는 그동안 뜨락에 가안(家雁)을 키웠으니
그 울음이 내 아침의 꿈을 적시고
뒤뚱거리며 가브리엘에게 갈 적에
시간은 문득 곤두서 단면(斷面)을 보이며
물소리처럼 시원한 내 뼈들의 풍산(風散)을 보았다.
그 뒤에 댕기는 음식과 어둠은
왼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아픔으로 훤히 밝기도 하며
오감(五感)의 현금(絃琴)들은 타오르고 떨리어
아픈 혼(魂)만큼이나 싸움을 익혀가느니.
그대의 숨긴 극치의 웃음 속에
지금 다시 좋은 일이 더 있을 리야
그대의 질주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한 그 외에는
그대가 끊임없이 마루짱에서 새들을 꺼내듯이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의
그대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망명(亡命)하고 싶은 그 외에는.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흐르는 방 정현종
흐르는 방(房)
길을 일으키기 위해 길을
달리면서 얻은
땀 중의 소금을 음식에 치면서
정든 길과 안개에 입맞추며 간다.
아직 보지 못한 불명(不明)의 범행(犯行)들이
저 삶의 마른 뼈 사이로
또 거듭 피를 흐르게 한다
잠이 없는 편협한 피를.
다시 저 빗소리가
편안한 집을 짓고 있고
빗소리의 소리의 흐르는 벽(壁)이
다만 사랑하는 방을 꾸미고 있다.
斫育Ç 축제, 민음사, 1974
흙냄새 정현종
흙냄새
흙냄새 맡으면
세상에 외롭지 않다
뒷산에 올라가 삭정이로 흙을 파헤치고 거기 코를 박는다. 아아. 이 흙냄새! 이 깊은 향기는 어디 가서 닿는가. 머나 멀다. 생명이다. 그 원천. 크나큰 품. 깊은 숨.
생명이 다아 여기 모인다. 이 향기 속에 붐빈다. 감자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다.
흙냄새여
생명의 한통속이여.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