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의원적국사(道義元寂國師)의 행장(行狀) 한국선문의 초조(初祖)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도의원적국사(道義元寂國師)는 7세기후반에서 8세기중기에 이르는 시기에 종문의 씨앗을 뿌려 우리역사를 장엄하였습니다. 스님의 생몰연대(生沒年代)는 확실치 않으며 784년(선덕5)에 입당하여 821년(헌강왕13) 귀국하기까지의 구법기로 국사의 생존기를 추정할 뿐입니다. 속성은 왕씨(王氏), 법명(法名)은 원적(元寂) 또는 명적(明寂)이라고도 합니다. 중국(中國)에서 서당지장선사(西堂智藏禪師)로부터 선법(禪法)과 함께 도의(道義)라는 법호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국사어머님께서 한 스님이 찾아와 함께 앉아있는 태몽(胎夢)을 꾼 다음 39개월만에 지금의 서울인 북한군(北漢郡)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선사(禪師)께서는 단정한 용모(容貌)에 천품(天品)이 총명하여 한 가지 일로 백 가지를 통찰하는 지혜를 갖추었으며, 동진(童眞)으로 출가(出家)하였습니다. 일찍이 교문(敎門)에 수학하고는 구법(求法)을 위해 784년(선덕왕5) 입당(入唐)하였습니다. 먼저 오대산 문수도량(五台山 文殊道場)을 참배하는 순간 공중(空中)에서 범종(梵鐘)이 울리고 산정(山頂)의 신조(神鳥)가 높이 나는 영서(靈瑞)를 감득(感得)하였습니다. 이어 6조혜능의 단경설처(壇經說處)인 광주(廣州) 보단사계단(寶壇寺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후(後), 육조(六祖)스님의 영당(影堂)에 참배코자 광동조계산보림사(廣東曹溪山寶林寺)로 찾아가 예배(禮拜)하려는 순간 영각문(影閣門)이 홀연히 열려 스스로 맞이하였으며 참배후 문(門)또한 스스로 닫히는 이서(異瑞)를 감득(感得)하였습니다.
그 길로 강서성 홍주 개원사(江西省 洪州 開元寺)로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증손(曾孫)이며 마조(馬祖)스님의 제자(弟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735~814)를 찾아 문법(問法)하니, 모든 의체(疑滯)가 마치 눈 녹듯 풀려 돌 속에서 미옥(美玉)을 캐고, 조개 속의 진주(眞珠)를 얻은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지장선사(智藏禪師)께서 ‘참으로 법(法)을 전수(傳授)할 만한 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구이겠는가!’라 찬탄하고는 도의(道義)라는 법호와 함께 육조정맥(六祖正脈)의 선법(禪法)을 전하였으니 이것이 달마선맥(達磨禪脈)이 신라(新羅)로 넘어오는 기연(機緣)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지장(智藏)의 회하에 주석하다가 하직하고 사형(師兄)인 강서성 봉신현(江西省 奉新縣)에 있는 백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를 참방(參訪)하고는 서당(西堂)스님과의 기연(機緣)을 알리니 이를 들은 백장(百丈)스님이 찬탄(讚歎)하되 ‘강서(마조)江西(馬祖)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신라)東國(新羅)의 스님에게로 귀속(歸屬)하였구나!(강서선맥 총속동국지승여)(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歟)’라고 찬탄하였으니 조계(曹溪)의 법통(法統)이 도의선사(道義禪師)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傳)하여짐을 칭송한 것입니다.
스님께서 삼칠년(三七年)동안 당(唐)나라에서 체류(滯留)하다가 821년(헌덕왕13)에 귀국하여(전거미상)(典據未詳) 선법(禪法)을 펴고자 하였으나 신라(新羅)에 불교(佛敎)가 전래(傳來)된지 이미 삼백여년(三百餘年)이 지났어도 교문(敎門)의 울타리를 넘은 일이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성숙(成熟)되길 기대하며 설악산진전사(雪岳山陳田寺)에 주석(住錫)하다가 제자(弟子)인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심인(心印)을 전수(傳授)하고 입적(入寂)하였습니다. 염거화상(廉居和尙) 역시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으나 펴지 못하고, 그의 제자(弟子)인 보조체징선사(普照體澄禪師)에게 전하였고, 보조(普照)스님께서 드디어 859년(헌안왕3) 헌안왕(憲安王)의 후원(後援)을 받아 장흥보림사(長興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전(傳)해온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振作)하였으니, 청도운문사·군위인각사·언양석남사(淸道雲門寺·軍威麟角寺·彦陽石南寺)등을 아우르며 선문(禪門)의 큰 파도를 일으킨 가지산파(迦智山派)를 형성(形成)하였습니다.
오늘의 한국불교(韓國佛敎)가 조사선문(祖師禪門)의 종토(宗土)가 되고, 조계종(曹溪宗)이 또한 종문(宗門)의 혈맥(血脈)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은 실로 종조(宗祖)이신 도의국사(道義國師)의 구법전승(求法傳承)으로 실참실수(實參實修)한 은혜(恩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조사선풍(祖師禪風)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실다운 전통에서만이 전승(傳承)될 수 있습니다. 신명(身命)을 다해 섬기는 스승들과 목숨을 다해 배우는 제자들이 동행(同行)할 때 종문(宗門)은 반드시 중흥(中興)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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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증국사(圓證國師) 태고보우(太古普愚)스님의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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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보우(1301~1382) : 고려말기 스님 |
1301년 ( 1세) |
9월 21일 양근군 대원리(옥천면)에서 출생 성은 홍(洪)씨, 본명은 보허(步虛)이며, 시호는 원증(圓證)이요,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鄭)씨. |
1313년 (13세) |
회암사 광지선사에게 출가하였으며, 가지산 보림사(도의국사가 창건한 신라 9산선문의 하나)로 가서 수행 |
1319년 (19세) |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 |
1330년 (30세) |
봄에 용문산상원암에서 12대원을 세우고 수행정진 |
1333년 (33세) |
가을, 성서 감로암(甘露庵)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7일 동안 정진하여, 홀연히 깨친바가 있으며, 37세 가을에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하였다. 그 뒤 송도의 전단원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으며, 1338년 1월7일에 대오. |
1338년 (38세) |
사나사에서 머무르며 후학 지도 |
1339년 (39세) |
봄, 부모를 하직하고 소요산 백운암으로 가시어 한가하고 자유로이 자연의 이치를 즐기면서 <백운암가> 한편을 짓다 |
1341년 (41세) |
증흥사(中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무르며, 유명한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
1347년 (47세) |
7월에 중국 호주 천호암(천호암)으로 가서 임제 의현의 18대 법손 석옥(석옥)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40여 일 동안 석옥의 곁에서 임제선(임제선)을 탐구, 스님이 떠나려 하자 석옥은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는 한편, 깨달음의 신펴로 가사(가사)를 주시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적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
1348년 (48세) |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소설산)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보임)하며 <산중자락가(산중자락가>를 지었다. |
1356년 (56세) |
4월 24일 왕사에 봉해지다. 오래 가물다 비가 내리다, 며칠 뒤에 왕의 명령으로 광명사에 원융부를 세우고, 거기에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이 스님을 청하매 가르침을 베풀다. |
1363년 (63세) |
계묘 정월, 공민왕이 귀경하고 사신을 보냈었으므로, 스님은 가지산으로 옮겨 조풍을 크게 떨치다. 신돈이 권력을 휘두르매 글을 올려 간하다. |
1367년 (67세) |
사나사에 주석하며 사나사를 140여 간으로 중창하시다. |
1369년 (69세) |
3월 공민왕이 전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혜기를 보내 청하므로 소설산으로 돌아오다. |
1371년 (71세) |
7월에 예부상서 홍상재와 내시 이부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스님을 국사로 높여 봉하고 법호를 내리다. 스님의 본향(본향)으로서 본래 익화현이었던 현을 양근군으로 승격하였다 |
1381년 (81세) |
양산사로 옮김. 우왕이 부임하던 날 선왕을 생각하여 다시 국사로 책봉 |
1382년 (82세) |
12월 14일 소설산에서 입적하여 1383년 1월 12일 다비식을 거행 사리가 무수히 나왔으며, 사지 백과를 나라에 바치니, 왕은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여, 원증(원증)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이름을 ‘보월승공(보월승공)’이라 하고, 영골을 넣어두었다. 스님의 문도와 장로들은 모두 ‘우리의 스승은 떠나셨지만 사리가 이 세상에 있으니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고 대중과 함께 힘과 마음을 다해 돌을 다듬어 종을 만들고, 사리를 넣어 사나사 등 네 곳에 봉안하였으며, 1386년 문도 달심(달심)이 사나사에 원증국사 사리 부도탑과 비를 세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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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보조국사(佛日圓證國師) 지눌(知訥)스님의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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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8年 (고려 의종12) |
송광사 16국사 중 제1세국사. 자호(自號)자호는 목우자, 시호(諡號)는 불일보조국사, 탑호(塔號)는 감로.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동주에서 탄생. 부(父)는 국학 학정을 지낸 정광우(鄭光遇), 모(母)는 개흥 군부인 조(趙)씨. 생후 신병(身病)이 많아 부처님께 기도하며 장차 출가시킬 것을 아버지가 맹세하니 병이 곧 나음. |
1165年(8歲) |
구산선문중 사굴산파의 선휘대선사(宗輝大禪師)께 출가. |
1182年(25歲) 1月 |
개경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서 승선(僧選)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창평 청원사(淸源寺)에서『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閱覽)하던 중「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비록 육근(六根)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을지라도 만상(萬像)에 물들지 않아 진성(眞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대목에 이르러 자득의 기쁨을 얻음. |
1185(28歲) |
경북 예천군(醴泉郡) 학가산(鶴駕山)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던 중 이통현(李通玄)의『화엄론(華嚴論)』을 보고 전해(前解)가 더욱 밝아짐. |
1188年(31歲) |
득재(得才) 스님의 청(請)으로 팔공산 거조사로 옮김. |
1190年(33歲) |
정혜사를 결성,『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
1197年(40歲) |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수행하며『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선(禪)은 정처(靜處)에도 있지 않고, 또한 요처(鬧處)에도 있지 않으며,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에도 있지 않으며,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에도 있지 않으나, 정처(靜處)·요처(鬧處)·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와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를 버리지 않고 참상(參詳)하면 문득 눈이 열려 바야흐로 이 옥리사(屋裏事)를 안다.」는 데에 계회(契會)하여 혜해(慧解)가 더욱 높아짐. |
1200年(43歲) |
3년전부터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확장(擴張)한 현재의 송광사인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정하고 대중을 지도. 『금강경(金剛經)』·『육조단경(六祖壇經)』을 전거(典據)로하고 이통현『화엄론(華嚴論)』과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우익(羽翼)으로 삼음.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3문을 세워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가르침. |
1203年(46歲) |
희종(熙宗)왕이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고치고 어필(御筆)로 사액(賜額). * 광양 백운산의 백운암·적취암(積翠庵)과 무등산의 규봉암(圭峰庵)·조월암(祖月庵)을 창건(創建)하고 왕래 수선함. |
1210年(53歲). |
2月. 망모 천도재(薦度齋)를 지냄. 3月 20日 미질(微疾)을 보이고 3月 26日 저녁 병중에 목욕(沐浴)한 후 3月 27日 새벽에 대중을 설법전에 모으고 설법하되「이 눈은 조(祖)의 눈이 아니며, 이 코는 조(祖)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모(母)의 나으신 입이 아니며, 이 혀는 모(母)의 나으신 혀가 아니다.」하고, 「산승의 명근이 모두 제인의 수리(手裏)에 있는지라 제인에게 일임하노니, 횡타도예(橫打倒曳)에 근골(筋骨)의 출래함이 있게 하라.」한 후,「옛날 비야정명(毘耶淨名)의 시질(示疾)과 오늘 조계목우의 작병(作病)에 동별(同別)이 어떠합니까」라는 질문에「너는 동별을 배우느냐」하고는 석장(錫杖)을 치고「천종만반(千種萬般)이 모두 이 속에 있다.」라고 하신 후 입멸. 희종 왕이 시호(諡號)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로 , 탑액(塔額)을 감로라 함. |
* 저술은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수심결(修心訣), 진심직설(眞心直說),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등이 있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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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章 宗名 및 宗旨 |
第 1條 本宗은 大韓佛敎 曹溪宗이라 稱한다. 本宗은 新羅 道義國師가 創樹한 迦智山門에서 起源하여 高麗 普照國師의 重闡을 거쳐 太古 普愚國師의 諸宗包攝으로서 曹溪宗이라 공칭하여 이『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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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章 本尊,紀元 및 嗣法
| 第 4條 本宗은 釋迦牟尼佛을 本尊佛로 한다. 다만 종전부터 釋迦牟尼佛 이외의 佛像을 本尊으로 모신 寺刹에 있어서는 그 慣例에 따른다. 第 5條 ① 本宗은 釋迦牟尼佛의 『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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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章 宗團 |
第 8條 本宗은 僧侶(比丘, 比丘尼)와 信徒(優婆塞, 優婆夷)로서 構成한다. 第 9條 ① 僧侶는 具足戒와 菩薩戒를 受持하고 修道 또는 敎化에 全力하는 出家 獨身者라야 한다『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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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章 儀式과 法會 |
第13條 本宗의 儀式은 佛祖의 遺訓과 傳來의 百丈淸規 및 禮懺法에 依遵한다. 第14條 ① 本宗은 恒例法會와 臨時法會를 設한다. ② 恒例法會의 種別 및 日字는 宗法으로 『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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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5章 戒壇 |
第15條 戒壇은 傳戒를 行한다. 第16條 ① 戒壇은 具足戒壇과 式叉摩那尼戒壇, 沙彌戒壇, 菩薩戒壇으로 區分한다. ② 具足戒壇과 式叉摩那尼戒壇, 沙彌戒壇은 戒壇委員會의 議『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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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6章 宗正 |
第19條 宗正은 本宗의 神聖을 象徵하며 宗統을 承繼하는 最高의 權威와 地位를 가진다. 第20條 宗正은 아래의 資格을 具備하고, 行解가 圓滿한 比丘이어야 한다. 1. 僧臘 45年『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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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7章 元老會議 |
第26條 ① 元老會議는 17人 以上 25人 以內의 僧臘 45年, 年齡 65歲, 法階 大宗師級의 元老 比丘로 構成한다. ② 元老會議 議員은 中央宗會의 推薦에 依하여 元老會議에『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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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8章 中央宗會 |
第31條 本宗은 立法機構로서 中央宗會를 둔다. 第32條 中央宗會는 選擧法에 依해 選出된 81人 以內의 議員으로 構成한다. 第33條 中央宗會 議員의 資格은 僧臘 15年 以上, 年『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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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9章 總務院 |
第 1 節 總務院長 第51條 本宗의 中央宗務行政機關으로 서울特別市에 總務院을 둔다. 다만, 中央宗會의 決議에 따라 그 所在地를 變更할 수 있다. 第52條 ① 總務院에 『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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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0章 敎育院 |
第 1 節 敎育院長 第58條 本宗의 敎育 業務를 管掌하기 위하여 敎育院을 둔다. 第59條 ① 敎育院長의 資格은 僧臘 30年, 年齡 50歲, 法階 宗師級 以上의 學『이하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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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이란 대한은 대한민국의 종단이라는 국적성을 나타내고, 불교는 불교종단임을 나타냅니다. 1천7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불교사에서 화엄종, 남산종, 열반종, 천태종, 법상종 등 적지 않은 종파가 출현하였으나 그 가운데 조계종(曹溪宗)의 종맥(宗脈)이 가장 길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와 민족사회의 정신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였습니다.
한국불교사에서 조계종은 신라말 고려초에 민족의 정신문화를 혁신하였던 구산선문(九山禪門)에 기원합니다. 통일신라 후기 불교가 교학에 치우쳐 승풍이 정체되었을 때 도의(道義)국사가 중국에서 선법을 전수하여 온 이래 구산에 선풍이 크게 일어나 불교계와 민족사회가 쇄신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조에 구산선문이 흥망을 거듭하며 통합된 것이 바로 조계종(曹溪宗)입니다.
조계종은 고려조 대부분의 종파들이 중국 종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한국불교의 고유한 종명입니다. 고려시대에 형성된 조계종은 억불정책의 조선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부침을 거듭하다가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재건되었고, 해방 이후 1962년에는 일제의 잔재였던 대처승을 승단에서 정화하여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출발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계종(曹溪宗)에서 조계(曹溪)는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慧能)대사가 머물던 광동성 곡강현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 기원하나, 고려조 수선결사로 유명한 보조국사의 결사도량 수선사가 있는 산을 조계산이라 명명하는 등 달마대사에서 6대조인 혜능선사가 중국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킨 이래 선종을 계승한 고려의 선종 종파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조계종은 현재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명으로 사실상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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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는 통불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통불교는 한 종파에만 국한하지 않고 불교 전체에 통하는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계종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과 그 뜻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선 삼국시대 불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는 경전을 통하여 그 뜻을 삼는 교학 불교(교종)와 선정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불교(선종)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유행하다가 통일신라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유학승에 의해 선의 수행이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신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성행하였으므로 선종이 설 자리는 별로 없었습니다. 이에 선사들은 산으로 들어가 절을 세우고 산문을 열었는데 이 중 대표적인 9개의 산문을 구산선문이라고 하고 이것은 고려 초기가 되서야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선의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원효스님의 행적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선의 기원은 신라시대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는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운동과 대각국사의 교관일치(敎觀一致)의 선교통합운동, 고려 중기에서 말기로 이어지는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 임제종의 유입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제 법통을 이어 선교양종의 회통이 있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은 신라시대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며,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한데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의 결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의 팔도도총섭제도(八道都總攝制度)가 임진왜란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청허휴정의 선중흥에 의해 활기를 띄기 시작한 불교는 조선후기에는 백파와 초의의 선논쟁으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 후 구한말 까지는 남북총섭시대(南北總攝時代) 선종과 교종이 양립하여 선종은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으로 교종은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으로 되었습니다. 1911년 일제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어 31본산(本山)제도가 생겨나고 선·교 양종의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1913년에는 31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제도가 실시되다가 1923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이사제도로 되었으며, 1924년에 이르러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조선불교조계종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총 본산은 지금의 조계사인 태고사(太古寺)에 설치되었으며, 31개 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이 인가하였고, 말사 1,300여 개소의 주지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출발하였으나 1954년부터 1962년까지는 비구·대처 승려간의 분규로 불교정화운동이 계속되었습니다. 불교정화운동의 결과로 1962년 4월에 비구·비구니 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재발족하였습니다.이렇게 어렵게 다시 시작한 대한불교조계종은 1980년 10·27 법난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하나의 힘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기도 했습니다. 1994년 4월 10일에는 종단개혁의 의지를 담은 전국승려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렸습니다. 전국승려대회의 산물로 개혁종단이 출범하였고, 개혁종단으로 출발한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은 승가본연의 수행과 정진을 다하고 밖으로는 중생교화에 노력함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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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접어 들면서 종파불교의 특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언제부터 종파가 형성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돌아와 천태종을 세우게 되는 그 전후로 하여 여러 종파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국교를 불교로 정함으로써 불교가 정치, 사회적 이념이 되었으며, 수도인 개성을 비롯하여 전국에 많은 사찰들이 있었습니다. 신하들뿐만 아니라 왕족들이 출가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원에는 밭과 토지, 노비 등이 왕실과 귀족들의 희사로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오교의 교종과 구산선의 선종이 함께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교종은 화엄·법상·법성·열반·계율의 다섯 종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광종 때에는 승과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승진제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위대한 승려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대각국사와 보조국사는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승려입니다. 대각국사는 문종의 아들이며 출가하여 송나라에서 불법을 전수하고 돌아와 불경을 간행하고 선과 교가 다 각기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막고 교관승수를 내세우며 천태종을 일으켰습니다. 보조국사는 구산의 선문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개창하고 돈오점수, 정혜쌍수를 제창하여 선문을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불교의 성격은 나라를 수호하고, 현세에 복을 기원하며, 귀족적 불교였습니다. 현재 해인사에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8년에 완성된 것으로 국난 극복의 염원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 태고보우는 임제종을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가 되었고, 혜근은 인도의 지공에서 법을 전수하여 조계종을 발전시켰으며, 자초는 조선 태종의 왕사(왕의 스승)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세력의 변화는 원효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으므로 의천이 천태종을 열 수 있었고, 지눌도 의천의 사상적 통일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계종의 사상체계가 수립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불교는 민중들을 위한 모든 계층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귀족들을 위한 귀족불교로서 모든 사회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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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불교는 신라 불교나 고려 불교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화엄(華嚴), 법화(法華), 반야(般若), 유식(唯識), 정토(淨土) 등의 전반적인 대승불교가 성행하였고, 이러한 불교문화의 기반 위에 선법(禪法)이 전래되어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교종과 선종이 공존한 불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종(禪宗)은 구산문(九山門)으로 전개되었으며, 고려 중엽에 이르러 조계종(曹溪宗)이라는 단일 종명(宗名)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불교를 말하자면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는 태조(太祖)에서 시작하여 인종(仁宗) 까지의 약 150년간으로서 세조의 호불(護佛)을 제외하고는 혹독한 탄압으로 일관되던 시기입니다. 중기는 명종 원년(1546)에서 1790년의 영정조에 걸친 약 250여 년간으로 일시적으로 문정왕후에 의해 호불정책이 있기도 했습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고승 보우(普雨)를 등용시켜 약 15년 간 양종이 부활하고 사멸의 위기에 처한 불교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던 시기입니다.
조선 시대의 불교는 '무종명(無宗名), 초종파(超宗派), 종합불교(綜合佛敎)'의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종과 교종의 종파적 특성이 공존하는 데서 오는 혼동과 갈등은 있었습니다. 종파적인 대립은 없었으나, 선과 교의 기본적인 차이는 무엇이며 선과 교를 어떻게 닦아 나가야 하는가의 문제가 중요시 되었습니다. 또 종단 밖으로는 조선 왕조의 극심한 정책적 억압과 이념적 괴리에 대하여 반격과 융화로 대응하면서 구종(救宗)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불교에 대한 조선 왕조의 정책과 이념의 양면 공격은 불교 교단 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첫째는 종파의 통폐합에 의한 선종과 교종의 융화 현상이며, 둘째는 유교의 불교에 대한 공격 이념과 왕조의 배불정책을 조화의 논리로 극복하려는 삼교일치설(三敎一致說)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억압과 탄압을 받고 있던 불교 교단은 임진왜란 이후 일시적으로 사회적 승인을 받게 되었으며 여기에는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사명 유정(四溟惟政)의 공헌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인 위협에 분연히 승병을 일으켜 구국을 도모한 결과 국가에서 불교 교단을 보는 시각이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청허휴정 이후에는 선맥이 계승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불교의 특징은 조선왕조의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하여 통불교의 전통이 성립되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왕조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선교양종이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오늘날까지 한국불교는 통불교적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불교의 이원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산중중심, 지식인 중심의 선불교와 백성에 뿌리내린 현세이익적 기복신앙, 정토신앙으로 이원화 된 것입니다. 특히 백성에 뿌리 내린 불교신앙은 장길산, 홍경래, 진주민란 등 조선 후기 민란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승려가 민란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여성이 불교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불교는 통불교적인 전통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것이 면면히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선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에만 남아 있는 이 선사상은 한국불교의 고유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선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해온 한국불교의 저력이라고 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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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적인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였습니다. 이 개항을 통해 서양의 산업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문명의 전환이었습니다.
이 무렵 불교계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 아래 산중 깊숙이 밀려나 있었고 여기에 왕조 말기의 삼정의 문란과 국정의 혼돈으로 관리와 지역 유생들의 핍박을 받으며 힘겨운 산중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산중 생활에서도 스님들의 전통적인 산중공의제(山中公議制)를 유지하며 산중의 모든 대소사를 '대중공사(大衆公事)'라는 산중공의를 통해 해결하는 등 승가공동체의 전통을 간직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개항과 더불어 한국불교계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승려들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일본불교는 한국에서 전래되었으나 오랫동안 국교의 위상에 있었으며, 승려들의 위상 또한 매우 존중되는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불교는 1867년 명치유신을 거치면서 명치정권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어 국가종교적 성격을 띄게 되었습니다. 일본불교는 일본 내의 각 종파별 경쟁을 벌이면서 한국에 그들의 포교소, 별원 등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무렵 한국불교계에는 유대치, 오경석 거사를 중심으로 개화사상을 지닌 불제자들이 나라의 개혁을 위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치 거사 등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의 청년선비들을 지도하여 이들을 개화사상과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여기에 이동인·무불 탁몽성과 같은 개화승들이 결집하여 개화당 결사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개화당은 개화사상과 불교적 이념으로 조선의 혁신을 꾀한 사상정치집단입니다. 이들이 주도한 정변이 1884년 갑신정변입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실패한 개화당은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어 불교계의 소중한 개혁세력들은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조선왕조는 갑오경장과 갑오동학혁명을 거치며 내정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때 개화당으로 망명하였던 박영효·서광범 등이 대신으로 중용되어 개혁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무렵 국정대개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령 해제조치입니다. 이것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최종 결정만 남겨 두었다가 유보되었는데, 이듬해인 1895년 총리대신 김굉집, 내무대신 박영효가 고종의 허락을 얻어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승려들은 이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조치를 마치 자신들이 성사시킨 것처럼 왜곡선전하여 한국불교계를 일본불교계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책략을 구사하였습니다. 그후 의병전쟁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한국불의 주요 사찰들이 일본불교의 종파로 가입하여 일제의 비호를 받아 사찰을 수호하려는 흐름도 있었으나 대체로 경술국치까지 한국불교계는 고유의 전통과 종풍을 간직하여 왔습니다.
그 이면에는 1899년 경허스님(1846∼1912)을 중심으로 한 "정혜결사(定慧結社)"가 있어 본분납자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사에 참가하였던 경허스님과 선사들은 전국 사찰로 퍼져나가 선원을 복원하였고, 여기에 경허스님을 조실이나 증명 법사로 초빙하여 경허스님을 중심으로 영호남의 주요 사찰은 선원 복원의 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곳이 범어사입니다. 범어사는 지금도 일주문에 '선종대본찰(禪宗大本刹)'이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는데 당시에 내건 것입니다.
당시 경허스님을 중심으로 혜월, 수월, 만공, 한암 등 많은 제자들이 육성되어 근대 선풍을 중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특히 경허스님의 제자들은 1921년 일제시대 "선학원(禪學院)"을 건립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일제 사찰령의 예속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근거지를 확보하여 나갔습니다. 이중에서도 한암스님은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 7인 중 한 분으로 추대되었고, 1941년 창립된 조선불교조계종(朝鮮佛敎曹溪宗) 초대 종정(宗正)에 추대되었습니다.
한편 깊은 산중의 이러한 사상적인 변화와 달리 당시 도회지 중심의 불제자들은 개항 전후 거세게 밀려들고 있었던 서양문명, 일본불교 등의 영향에 자극 받으면서 불교의 운영을 근대적으로 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움직임은 '불교의 도시화', '불교 대중화'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부도 불교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러한 정황에서 나온 것이 서울에 수사찰로서 세워진 원흥사(元興寺)의 창건이었습니다. 1902년에 창건된 원흥사에는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을 총괄할 기관인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관리서의 설립은 국가에서 승려를 공적으로 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근대적인 제도의 범위 안으로 흡수하였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불교계는 근대적인 제도하에 자주, 자립의 기틀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사관리서는 1904년에 가서 해체되었는데, 그것은 정부의 통치력이 심각히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과도적으로 자생적인 교단의 역할은 1906년에 설립된 불교연구회가 담당하였습니다. 불교연구회는 불교계의 최초의 근대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모태가 됨)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일제의 한국 침략이 가속화되어, 1905년에는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으며, 그 추세에 발맞추어 일본불교의 한국 전파는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일본불교는 한국에 사찰을 세우고, 한국의 사찰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 같은 일본불교의 의도는 불교의 포교 이외에 일본 문화의 홍보를 통해 일본에 대한 반감을 희석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불교도들은 일본불교에 휩쓸린 경우도 있었지만, 그 구도에 저항하고 민족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항일 의병전쟁에 동참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 시에는 사찰이 그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많은 스님들이 참여하였으며, 일본 승려들의 비행이 자행될 시에는 격렬하게 항거하였습니다. 또한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성찰의 자세로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경허스님을 중심으로 전개한 결사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백용성 스님은 개신교의 득세로 인하여 위축되고 있는 불교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귀원정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자주적 운영을 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주적인 종단인 원종(圓宗)을 설립한 것도 기념비적인 사실이었습니다. 1908년 3월 해인사 승려인 이회광스님을 비롯한 스님 65명은 원흥사에 모여 원종 종무원의 설립을 결의하였습니다. 원종은 1910년 도성 안에 처음으로 각황사(覺皇寺, 지금의 조계사 부근)라는 사찰을 건립하여 도시 포교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불교계에서 설립한 '명진학교'를 '불교사범학교'로 승격시켜 운영하였으며, 불교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원종}잡지를 발간하였습니다. 한국불교근대사에서 처음으로 교단을 재건하고 교화의 발전적 기틀을 세워 나간 원종은 그러나 일제와 통감부로부터 합법적인 인가를 얻지 못하여 불법종단으로 규정받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원종 지도부는 원종의 종무원과 각황사의 인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인가를 위한 과정에 의타적인 행태가 일부 있었지만, 근대 최초로 자주적인 종단을 지향한 고뇌와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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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한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였습니다. 이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나라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어야 되었습니다. 이 같은 구도하에서 불교도 식민지 불교 체제에 구속되었습니다. 일제는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박탈하고, 그들의 행정편의주의 체제에 길들이기 위해 1911년 6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사찰령은 한국불교 寺刹의 인사, 재산관리 등의 권한을 주지(住持)를 경유하여 일제 총독(總督)이 행사하게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사찰의 전통적인 산중공의제도를 파 괴하고 주지 중심의 독단체제를 확립하여 일제 총독이 한국사찰의 주지 인사권을 장악하는 체계를 통해 한국 불교를 장악한 제도였던 것입니다. 일제가 사찰령을 시행한 근본 목적은 불교를 식민통치에 구속시켜 불교계 의 저항과 독립운동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한국인의 종교, 정신, 문화 등에서 차지하고 있은 불교의 위상을 고려하여,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기하기 위한 정책을 불교를 통하여 관철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민족불교를 일본불교화 하려는 것입니다. 아울러 사찰령 체제는 한국 불교의 관행인 산중공의제도라는 전통적인 민주주의 운영문화를 무시하고, 일제가 임명한 주지중심의 행정 만능 체제를 심화시켜 사찰이 불법(佛法)과 수행(修行)보다는 권력과 행정이 중심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사찰령 체제는 한국불교의 자주적인 종단의 설립과 운영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한국불교계는 사찰령에서 규정한 본산(本寺)의 주지들로 구성된 30본산 주지 회의원을 구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의원에 이어 1915년에 재편된 30본산연합사무소도 완전한 종단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주지들의 회의소 및 제한적인 공동사업을 추진하는 협의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불교계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불교정책에 대한 반발은 이미 1911년에 전개된 임제종운동에서도 치열하게 나타났습니다.
임제종운동은 원종 지도부가 일제당국의 인가(認可)를 위해 일본의 선종 종파인 조동종과 맹약을 체결한 (1910.10) 이후 그 조약이 한국불교의 전통을 훼손하고 일본불교에 예속된다고 반대하였던 운동이었습니다. 한용운, 박한영, 김종래, 오성월 스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1911년 초반부터 송광사, 쌍계사,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을 거점으로 시작되어 전 불교계로 파급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원종과 조동종이 맺은 조약의 내용이 굴욕적임을 비판하고 민족불교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가 사찰령을 제정 공포하고 총독이 직접 본말사를 관장하여 한국불교 종단인 원종과 임제종의 종단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기 때문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즈음에는 불교의 발전과 중흥을 기하기 위한 고뇌와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불교 잡지가 발간되었으며,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이 설립되었으며, 도회지에 포교당이 세워졌고, 사찰이 경영하는 학교가 각처에 생겨났습니다. 또한 선각적인 스님들에 의하여 불교계의 체질, 제도, 의식, 관행 등을 개혁해야 한다는 불교 개혁론이 다양하게 등장하였습니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의 발간, 권상로의 조선불교 개혁론의 연재, 박한영의 교육 및 포교 분야의 개혁지향적인 글의 기고 등은 바로 그 실례입니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불교정책은 점차 전 불교계 구성원이 공감하기에 이르렀는바, 바로 그즈음에 거족적인 3·1운동(1919)이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운동에는 만해가 <기미독립선언서>에 공양삼장을 추가하고 낭독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고 백용성스님이 33인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습니다. 만해는 신상완·김법린·백성욱· 김상헌 등 중앙학림 학생들을 규합하여 파고다공원에서 시위를 전개하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배포하여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인사·범어사 · 통도사 · 송광사 · 동화사 · 봉선사 등 전국 주요 사찰에서 학승(學僧)들을 중심의 만세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그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불교계의 독립운동도 억압을 받게 되는데 이때 불교계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인 이종욱 · 송세호 · 신상완 · 백성욱 · 김상호 · 김법린 · 김포광 등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중에서도 월정사 이종욱스님은 1919년 4월 인천에서 열린 국민대회에 13도 대표로 박한영 스님과 참여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와 더불어 대한민국 수립의 정통성을 부여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대회였습니다.
이종욱 스님은 이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국내 특파원과 내무부 참사, 그리고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며 대동단 김가진 총재 탈출사건과 왕자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합류 시키려는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청년외교단과 대한애국부인회, 대한적십자사 등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결성에 지도적인 역할로 참여하였습니다. 이종욱 스님은 또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 불교계 승려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신상완(용주사)·백성욱(봉국사)·김상헌(범어사)·김상호(범어사)·김법린(범어사) 스님 등은 이종욱스님과 더불어 전국 사찰을 돌며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대한승려연합회를 결성하여 불교계 중진 대표 12명의 가명으로 <불교선언서(佛敎宣言書)>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교계 승려 중심의 독립선언서로 일제로 인해 한국불교가 일본불교화 되며 절멸하고 있다는 인식이 분명히 개진되고 일제와 혈전(血戰)을 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표출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대한의승군헌제(大韓義勝軍憲制)>를 제정하여 임진왜란 당시와 같은 의승군(義僧軍)을 모집하려고 했고, 해인사 · 범어사 · 석왕사와 같은 주요 사찰에 기밀부(機密部)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코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스님들의 독립운동은 1920년을 고비로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체포, 투옥되어 좌절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활동은 크게 두 흐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첫째는 식민지 불교정책의 핵심인 사찰령을 철폐하고 자주적인 종단을 건설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둘째는 한국 전통불교와 수행과 깨달음의 핵심인 선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강렬한 노력이었습니다.
당시 한국불교계는 사찰령으로 인한 모순을 직시하고, 3·1운동의 민족적 자각에 영향을 받았던 불교계는 자주불교 지향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사찰령을 철폐하고 자주적으로 종단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청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 노력은 사찰령철폐운동과 자주적인 종단을 지향하는 통일기관을 건설하려는 운동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던 조선불교청년회 중심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청년승려들은 사찰령 철폐를 주장하는 전국의 청년, 중견 승려 2280여명의 동의를 받은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으며, 그 운동의 철저를 기하기 위해 불교유신회를 가동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청년승려와 진취적인 중견승려들은 종단을 지향하는 통일기관인 총무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일제의 탄압과 주지계층의 비협조로 완전 성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일제의 은근한 후원을 받았던 본산 주지들이 주도한 재단법인 교무원의 등장은 결정적으로 그 움직임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을 주도하였던 조선불교청년회 및 불교유신회의 침체와 불교청년운동의 기반이었던 중앙학림의 휴교는 결과적으로 불교 자주화의 나약함을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한편, 한국의 전통선풍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으니, 그는 바로 선학원(禪學院)의 창건이었습니다. 1921년, 서울의 중심부에 창건된 선학원은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스님 등 발기인의 투철한 의식과 범어사의 지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이 선학원에는 전국 선원에서 수행하고 있었던 청정수좌들이 자주, 자립을 지향하였던 단체인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가 있었습니다.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으로 만연된 계율 파괴와 선 전통의 상실을 우려한 수좌들이 은연중 사찰령의 구속을 피하면서도 일제 불교와의 대결을 기하려는 현실의식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좌들의 그 고뇌와 노력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은근한 탄압과 함께 점차 일본불교의 신행에 경도된 나약한 승려층의 증가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선방에서 수행을 하는 수좌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이 부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점차 선방 자체가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1925∼6년 경에 이르러서는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선학원이 서울에 있었다는 자체가 한국불교의 전통이 불멸하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즈음 백용성 스님은 계율 파괴와 선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하여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주도하면서 선율(禪律)의 겸행(兼行)을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백학명 스님도 내장사에서 선원 개선책의 일환으로 선농(禪農)일치를 실천하였습니다. 백용성, 백학명 스님의 그 정신과 실천도 선학원 정신과 동일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청정 비구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학원의 퇴조에 즈음하여 불교계에서는 점차 스님들의 대처육식(帶妻肉食)의 풍조가 만연되어 갔습니다. 대처육식이라 함은 스님들이 결혼하고 고기를 먹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정법과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계율에서는 있을 수 없는 파계행이었습니다. 즉 승려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처육식의 풍조가 개항기 이래 일본불교가 한국에 침투하면서 나타났는데, 일제의 한국 강탈로 인해 식민지 불교 체제가 구축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던 것입니다.
대처육식은 당시 일본불교의 상징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불교에 영향받은 승려, 식민지 불교에 기생하였던 승려, 일본 유학후 귀국하면서 파계한 승려, 친일승려로 전락한 승려 등등 다양한 계기에 의하여 대처육식은 한국 불교계에도 거의 보편화되어 갔습니다. 승려의 대처육식은 단순히 계율 파괴로만 볼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기에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즉 대처육식으로 인하여 사찰경제가 파괴되고, 사찰의 수행공동체가 해체되고, 사찰 문화재의 손상, 승려들의 행정 및 권력 지향적인 속성의 만연, 일제 총독부에 구속 등 그 폐해는 매우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전통불교의 핵심인 승려로서의 청정성의 훼손이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이는 곧 당시 불교계의 암적인 모순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승려의 대처 문제는 1925년경에 가서는 불교계의 논쟁으로 비약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승려의 주지취임 문제를 계기로 대처자도 주지에 취임할 수 있도록 사법(寺法)을 개정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1926년에는 백용성 스님을 비롯한 130여명의 청정 스님들의 그 반대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백용성 스님의 대처식육 금지를 요청하는 건백서가 총독부에 제출되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정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 반대를 묵살하고 대처자도 주지에 취임할 수 있는 사법을 개정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말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고뇌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생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강원의 학인들이 당시 불교계 파탄을 극복하려는 의식에서 나타난 1928년의 조선불교학인대회는 그 단적인 실례라 하겠습니다. 그 대회를 주도한 이운허, 이청담 스님은 그 대회의 의의를 불교정화운동의 태동으로 보았습니다. 백용성의 대처식육 건백서에 담긴 전통 수호정신과 학인대회에 나타난 정화 정신은 해방 이후 가시화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주적인 종단 재건의 움직임이 1920년대 중반 좌절을 맛보았으나, 그 노력은 1928년 가을경에 다시 추진되었습니다. 그는 불교청년운동의 재기, 청년 승려의 성장, 민족운동의 영향 등에 계발되면서 1929년 1월의 승려대회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 대회는 한국불교계의 자주, 자율을 기할 수 있는 통일기관인 종단 재건을 담보할 수 있는 종헌(宗憲)의 제정이라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도출하였습니다. 그 종헌은 불교계의 통일을 기하려는 당시 불교도들의 의지의 산물이었습니다. 즉, 식민지불교의 극복의 대안을 수립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당시 스님들은 그 종헌의 실행을 통하여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인 종단 재건을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종헌체제는 일시적으로는 성사되었으나, 일제의 외압과 주지(대처승)들의 외면으로 1934년경에 이르러서는 흐지부지하였습니다.
한국 전통의 선맥을 계승하려고 출범한 선학원은 1926년에 가서는 퇴진하였으나, 1931년에 이르러서 김적음 스님의 헌신으로 재기하였습니다. 재기한 선학원은 선풍의 대중화에 유의하면서 그 운영의 기반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에 당시 교단에 재정적인 지원과 청정 비구 전용의 사찰의 할애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학원을 지키려는 청정 수좌들의 헌신에 힘입어 1934년 12월에 이르러서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35년 1월, 청정 수좌들은 한국불교의 정통 법맥은 '선종(禪宗)'에 있음과 그 수좌 자신들이 한국의 '정통승려'임을 자각한 전제하에서 '조선불교선종'의 종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선학원이 한국 불교 교단의 전통을 사수하고 당시 불교계 부패의 정화를 모의하는 근거처로 인식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에 수좌들은 그 선종의 종정으로 송만공, 방한암, 신혜월 스님을 추대하고 행정기관인 종무원도 출범시켰습니다. 이는 곧 선학원을 중심으로 전통 법맥이 면면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자주적인 종단 건설의 염원에서 나온 종헌 체제는 불교계의 나약한 의식으로 인하여 중도 퇴진하였지만 1937년부터 그 재건 움직임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총본산건설운동으로 명명되었고 그 주역은 월정사 주지 이종욱을 비롯한 본산 주지들과 만해 한용운, 김상호, 김법린 등 항일승려들이었습니다. 총본산 건설은 전불교계를 통할할 수 있는 인사권과 재정권을 총본산(사)에게 부여하여 단일적인 종무 행정을 시도하겠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노력은 당시 일본불교가 한국불교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분쇄하려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그 총본사의 법당을 건축하는 사업으로 시작되어 1938년 10월에는 그 건축을 완료하였습니다.
바로 그 법당이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입니다. 그리고 그 총본사의 사명은 태고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사찰령에서 제정된 종명 즉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의 몰역사성과 부적절함을 극복키 위하여 한국불교의 전통과 법맥을 고려하여 "조계종(曹溪宗)"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이는 중국불교와 일본불교에 없는 한국불교계만의 고유의 종명인 선종의 조계종을 복원하여 한국불교사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의 구현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1941년 4월에 등장한 '조계종태고사 사법'에 의하여 나온 것이었고, 일제로부터도 협력를 받았습니다. 1941년 6월에 태고사에서는 조계종 종회가 개최되어 종정 선거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19표로 방한암 선사가 초대 종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총본산 건설운동은 성공하였으며, 한국 불교의 전반을 지휘 감독할 기관이자 사찰인 총본사(태고사)가 등장하여 미흡하지만 종단의 자율권은 획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사찰령을 자진 철폐하지 않았기에 그 총본사 체제가 완전 자율을 성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일제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야기하며 식민지 한국을 병참기지화 하며 더욱 가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그 파장과 피해는 불교계에도 미쳐 암울한 시절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창씨 개명, 사찰물자 제공, 국방헌금 강요, 승려의 일본군대 입대, 시국 협조 등은 바로 그 사례였습니다.
일제의 군국주의 체제는 곧 한국불교 전통의 위협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이에 선학원 계열의 수좌들은 그를 극복하기 위하여 1941년 2∼3월 선학원에서 유교법회(遺敎法會)의 개최로써 그를 슬기롭게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청정비구 40여명이 참가한 그 법회는 선학원에서 10일간 개최되었는데, 전통 선의 맥과 계율을 강조하여 사부대중의 전통 법맥에 대한 수호 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선학원을 '암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는바, 이는 역설적으로 선학원이 한국불교 전통 수호의 마지막 보루였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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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종헌(宗憲)에는 "본 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소의(所依)는 의지할 바 대상을 의미하며, 소의경전은 개인이나 종파에서 신행(信行), 교의(敎義)상 근본 경전으로 의지하는 경전을 말합니다.
소의경전은 불교에만 있는 개념으로, 다른 종교는 대부분 1개의 성전을 가지고 있으나 불교는 8만 4천의 방대한 경전을 가지고 있고, 경전은 다양한 근기의 중생들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각자의 근기에 맞는 경전을 가장 중요시하는 체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화엄종은 화엄경, 천태종은 법화삼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조계종은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계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까닭은 금강경이 존재의 실상인 공(空)에 대한 가르침으로 6조 조계혜능 선사께서 항상 곁에 두고 읽으셨으며, 제자들에게도 금강경을 널리 의지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계종의 소의(所依)는 전등법어입니다. 전등(傳燈)이란 전법(傳法)과 같은 말로, 등이 차례 차례로 켜져서 꺼지지 않는 것처럼 法(곧 敎)을 받아서 계계전승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등법어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가섭존자를 비롯한 많은 역대 조사님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이어진 법맥이 중국으로 건너와 보리달마 대사로부터 6조 조계혜능 대사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의 도의선사, 고려조 태고와 보우 선사, 조선시대 청허휴정(서산대사), 부휴 양 법맥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법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과정에서 많은 법을 전하는 법어가 있었는데, 조계종은 이 법어를 근본으로 삼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은 선종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조계종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조계종 종헌에서는 금강경과 전등법어 이외에 기타 경전의 연구와 염불 지주(持呪) 등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정하여 화엄, 법화, 정토, 밀교 등 불교의 다양한 측면을 인정하고 통합하는 통불교적 전통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초월적 지혜인 반야를 가르치는 경전중 최대 분량에 속하는 육백부대반야경중 제577부째에 해당되는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분량이 약 300개송 정도이기 때문에 300송반야경(三百頌般若經)이라고도 합니다. 금강경은 대승불교 시기의 경전임에도 일반적으로 대승 경전에 나오는 대승이나 소승이라는 용어가 없으며, 내용이 공(空)에 대한 설명임에도 공(空)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대승경전에서는 대부분 설법을 듣는 대중이 보살, 성문, 연각, 천, 용, 야차, 가루라, 긴나라, 건달바, 아수라, 왕, 대신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강경은 1250 아라한과 더불어 계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금강경은 대승불교의 초창기에 이루어진 경전으로 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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