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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義城)- 의(義)로운 성(城)
의성은 원래 신라때 문소(聞韶)로 불러오다가 고려 태조 12년(929년) 후백제 견훤이 의성부를 공격해왔는데, 이를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성 성주 홍술(洪術)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의(義)로운 성(城)" 곧 의성(義城)이라 명명하고 의성부(義城府)로 승격시켰다고 고려사에 전하고 있습니다.
의성 문화관광 http://tour.usc.go.kr/open_content/main_page/
고운사[孤雲寺] http://www.gounsa.net/
http://www.gounsa.net/movie/gounsa.html
붉은 돌이 많다는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에 위치한 사찰이다.
두 계곡이 하나로 합쳐지는 Y자형으로 생긴 개울을 이용하여, 북쪽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전각이 개울을 따라 일렬로 섰고, 남쪽에는 모니전(대웅전의 전신)을 중심으로 독립된 암자가 경영되었다. 즉 두 개의 독립된 가람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모습이었다. 이 두 가람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바로 사찰 입구에 세워진 가운루이다.
고운사 가운루(駕雲樓) 가운루는 길이가 16.2m에 최고 높이가 13m에 달하는 대규모 누각이다. 3쌍의 가늘고 긴 기둥이 계곡 밑에서부터 이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마치 양쪽 언덕에 걸친 다리 같고, 계곡 위에 둥실 떠 있는 배와 같다. 옛 기록에도 있듯이 가운루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고 극찬한 절경이다.
고운사 우화루(羽化樓) 에는 현판이 두 개 달려있 는데,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 라는 현판을 달고 있고 누각 안에는 불교적 용어인 꽃 비가 내린다는 뜻을 가진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우화루의 호랑이 벽화는 어느 각도에서 보든 호랑이의 눈이 따라다닌 다고 하는 유명한 벽화입니다
대곡사(大谷寺)
경내에는 대곡사 대웅전 (지방 유형문화재 160호), 대곡사 다층석탑 (지방문화재자료 제405호), 대곡사 명부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39호), 대곡사 범종각 (지방 유형 문화재 161호)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문소루(聞韶樓)
빙계계곡
경북 8경승지 중의 하나인 춘산면 빙계리에 위치한 ‘빙계계곡’은 삼복더위에 얼음이 얼고 엄동설한에 따뜻한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신비한 곳이다.
계곡은 입구에서부터 2㎞에 걸쳐 펼쳐졌고 크고 작은 바위굴이 산재해 있다. 각각의 바위굴에는 얼음이 얼어있는 빙혈(氷穴)과 바람구멍인 풍혈(風穴)이 빙산(氷山)을 이루고 있다. 빙산을 휘감아 도는 내(川)는 빙계(氷溪)로 불리며 계곡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시원함을 제공하는 물놀이장이 된다.
빙계8경은 계곡 입구에서부터 용추(龍湫)·물레방아〔水礁〕·바람구멍〔風穴〕·어진바위〔仁巖〕·의각(義閣)·석탑(石塔)·얼음구멍〔氷穴〕·부처막〔佛頂〕이다. 용추는 빙계계곡 물에 패인 웅덩이이고, 물레방아는 주민들이 계곡물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던 것이다.
풍혈과 빙혈은 빙계리 입구에 있는 바위틈으로, 한여름에는 얼음이 얼어 영하 4도를 유지하고 겨울에는 영상 3도를 유지해 훈훈한 바람이 불어 나온다. 인암은 정오가 되면 ‘仁’자 모양의 그늘이 생긴다는 바위이고, 의각은 윤은보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장수(부처님)와 용이 산중에 계곡을 내기로 의논했다. 부처막은 빙산 꼭대기에 움푹 패인 곳으로 부처와 용이 싸울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빙계서원[氷溪書院]
1689년(숙종 15) 김성일·유성룡·장현광을 추향(追享)하여 오현(五賢)으로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 서원에는 동재·서재·신문(神門)·충효사(忠孝祠)·명교당(明敎堂)·전사청(奠祀廳)·주소(廚所) 따위의 건물이 있었다.
사촌(沙村)마을
사촌마을 서쪽에는 길게 가로 놓인 숲이 있다. 사촌 가로숲으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했다.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수령이 400∼600년 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빼곡하다. 나무의 높이는 20∼30m이며 길이도 800m에 이른다. 서애 류성룡의 어머니가 1542년 사촌리 친정집에 다니러 왔다가 이 숲에서 류성룡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산운(山雲)마을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정사(鶴麓精舍)가 조선 영조 26년 건축되었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호로 지정된 운곡당(雲谷堂)과 제375호로 지정된 점우당(漸于堂), 그리고 중요민속자료 제237호로 지정된 소우당(素于堂)등이 있으며, 이를 포함한 약 40여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하고,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는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가 있다
산운생태공원
보유수종은 관목류 및 초화류 53종이며, 주요시설로는 생태관 1동, 연못 2개소, 분수, 목교, 관찰데크, 솟대, 쉼터, 산책로 등이 있습니다.
수정사(水淨寺)
의성 만취당[義城晩翠堂]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의 목조건물로 꼽힌다. 창건 이후 줄곧 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영조 3)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쪽에 1칸, 동쪽에 2칸의 방을 연결하여 지었다.
의성 탑리 오층석탑(義城 塔里 五層石塔) [국보 제77호]
기단은 단층으로 14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24석으로 면석(面石)을 구성하고 있다. 사우(四隅)의 우주와 각면 2주(柱)씩의 탱주가 모두 별석이어서 건축기단으로서의 면목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갑석(甲石)은 8석으로 덮였고, 그 위에 다시 옥신(屋身)을 받기 위한 괴임돌이 놓여 있다. 초층 옥신은 우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다.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조문국 경덕왕릉[召文國景德王陵]
1725년(영조 원년)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왕릉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고, 그 후 경덕왕릉보존회가 구성되어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역은 ‘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여진 비석과 문인석·장명등·상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조문국박물관
학록정사[鶴麓精舍]
학록정사는 영천이씨 산운 입향조(入鄕祖)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750년(영조 26)에 건립한 것으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입구에는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광준은 별시 문과와 병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충주목사·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사후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학록정사는 이시하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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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면작기념비(文益漸棉作記念碑)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금주성에서 목면종자를 필관에 넣어 귀국, 조선 태종때 손자 문승로가 의성 현령으로 있을 때, 의성군의 지세가 금주성과 흡사하여 제오리에 재파하였다고 전해지며, 1935년에 기념비를 건립.
문익점목면유전비(文益漸木棉遺田碑)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의 자손이 의성 땅에 목화재배를 시작한 경위와 목화를 처음 원나라에서 수입해 온 조상의 공적을 기린 비석으로서 첫 재배지인 의성 땅에 세웠다. 융희 3년(1909년 10월)에 탁암 김도화(拓庵 金道和)가 비문을 짓고 김희국(金熙國)이 썼다.
소우당[素宇堂] 현 소유주 이희춘(李喜春)의 6대조 소우 이가발(李家發)이 19세기 초기에 지은 집으로, 안채는 1880년대에 개축하였다
의성 제오리의 공룡발자국화석
이 일대 1,656㎡ 지역에서 대형 및 중·소형 초식공룡과 육식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발견되어 이곳이 대규모 공룡의 서식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발자국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발의 구조와 크기·보폭·보행방향을 알 수 있어, 공룡의 생태 및 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운곡당[雲谷堂] 현 소유주 이병직의 선조 운곡 이의발(李義發)이 영월부사로 있던 1800년대 초기에 지은 집으로,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었다. 평면은 ㅁ자집 형태로 구성되었으나, 앞채의 좌우 양쪽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날개집의 형태를 이루었다.
의성 마늘 1526년(조선 중종 21년) 의성읍 치선리에 경주 최씨와 김해 김씨 두 성씨가 터전을 잡으면서 재배되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재배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의성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고 부식토로 덮여 있어 여기에서 재배된 마늘은 단단하고 쪽수가 6∼8쪽으로 적은 편이다. 국내 마늘 총생산량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육쪽마늘이라 하여 매우 인기 있는 품종이다. 의성마늘은 논마늘이다
우리나라 마늘 생산량의 약 80%가 난지형마늘이죠. 한지형(寒地型)마늘 20% 정도이다.
난지형(暖地型)마늘은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남해, 고흥 등 남부해안지역에서 생산되는 마늘로 겨울철에 비교적 따뜻한 지역에서 재배하는 마늘이다. 난지형마늘의 대표적인 품종은 남도마늘과 대서마늘(스페인종)이 있다.
한지형(寒地型)마늘은 겨울철에 추운 중북부지방과 내륙지방(서산, 태안, 의성, 단양 등)에서 주로 재배되는 마늘이다. 한지형마늘은 난지형과는 달리 10월 하순~11월 상순경에 파종하여 싹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땅속에서 월동을 한 다음 봄에 싹이 올라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의성군의 마늘생산농가는 4752농가에 1629㏊, 연간 생산량 1만6300톤으로 전국 생산량의 5% 포인트 차지하고 있으며 한지형(寒地型) 마늘 생산량은 전국 1위 35%를 차지하고 있다.
의성 흑마늘 생마늘의 냄새와 위장의 자극작용으로 많이 섭취하기 곤란한 부분을 일정한 온도와 습도하에서 숙성시켜 누구나 쉽게 섭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다.
의성탑산(약수)온천 7천만년 전 금성산 화산분출로 인한 전국최고의 게르마늄(72.4㎍) 약수온천으로 유황, 셀레늄, 리튬, 식염, 유화수소 등이 함유되어 있어 피부비용, 노화방지, 체질개선 등에 효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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