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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댱선작/ 유령 / 정찬일
감은 눈 속으로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뼈들이 어지럽게 떠다닌다. 흐릿하다. 나는 그 뼈들을 조심스럽게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뼈들은 굳이 내 손을 거치지 않아도 그 자체에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듯 저절로 자기 짝을 찾아 조립됐다.
5분도 안되어 그녀의 골격이 만들어졌다. 엉성하게 조립된 뼈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불안하게 보인다. 서둘러 그녀의 골격에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고 섬세한 혈관망을 만들고, 살을 붙여나간다.
얇은 살갗을 입히는 것으로 그녀의 체형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몸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인형 같은 몸이다. 나는 그녀의 발목과 허벅지를 지나 불두덩과 배를 느리게 더듬어나간다. 그녀의 젖가슴 위에서 나는, 아니 내 손끝은 잠시 방향 감각을 잃고 멈칫거린다. 따스하게 전해지던 그녀의 체온을 떠올린 것이다. 손끝에 와 닿는 감촉이 마네킹을 만지듯 차갑다. 가끔 내 손끝은 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부질없는 기억들을 느닷없이 들추어내곤 한다. 손끝을 그녀의 쇄골로 황급히 옮겨놓는다.
내 손끝이 매끈한 어깨를 지나 쌀뜨물처럼 흐릿한 그녀의 얼굴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흐릿했던 그녀의 모습이 하나, 둘… 구체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왼쪽 새끼발가락 위에 까만 점 하나를 조심스럽게 찍어 넣는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등위에도 세 개의 점을 찍어 넣는다. 그녀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다섯 바늘이나 꿰맨 상흔을 만들어 놓는 순간, 내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바르르 떨리며 욱신거린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그려 나간다.
그녀의 심장이 뛰면서 온몸에 피돌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녀의 모습은 정작 그녀와는 전혀 닮지 않은 낯선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지웠다 하기를 반복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에 조바심이 인다. 조바심이 일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집중력과 기억력은 조금씩 무뎌진다. 이제 그녀에 대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가물가물거린다. 휴우.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근래 들어 나의 하루는 이렇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그녀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그녀의 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집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집안의 사물들이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올수록 그녀는 더욱 희미해져 갔다. 그래서 나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내를 읽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많은 시간을 두고도 단편적으로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그녀의 속눈썹과 귓불의 모양을 기억해내기까지는 일주일이 걸렸고, 다섯 바늘이나 꿰맨 엄지손가락의 흉터를 기억해내기까지는 무려 이 주일이 넘게 걸렸다. 물론 내 기억만을 전적으로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진다. 나는 두 눈을 덮고 있던 팔을 들어올린다. 갑자기 얇은 눈꺼풀 속으로 환한 빛이 스며든다. 비눗방울이 터지듯 낯선 여자의 모습이 한순간에 지워진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오랜 잠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묵직한 피로가 느껴진다. 뒷목도 뻣뻣하다. 양쪽 어깨를 잔뜩 움츠리자 우두둑, 하고 어깨근육 안에 숨어 있던 뼈마디들이 이완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어제 연신내와 명동 쇼핑거리를 온종일 쏘다녔다. 밤늦은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어오른 어둠이 제 몸을 움츠리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또다시 서울의 쇼핑거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동쪽 베란다를 거쳐 방 깊숙이 들어온 나른한 햇빛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나는 느린 시선으로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오후 세시 이십분. 방 깊숙이 들어온 햇빛은 맞은편 고층 아파트 유리창이 되비친 반사광이다. 햇빛이 하얗게 반사되는 곳에서 수많은 금속성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얼마 안 있어 눈이 시큰거린다. 아파트 유리창에 비친 햇빛이 조금씩 오른쪽 상단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침실에서 나와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던 나는 현관 쪽에 놓여있는 장식장 앞으로 다가간다. 티베트산 엔틱 장식장은 그녀의 물건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다. 한쪽에는 다양한 차 종류와 향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고, 또 다른 장식장에도 많은 다기들로 비어있는 칸이 없다. 그녀는 자주 향초를 켜 놓거나 향을 태우곤 했다. 향을 피우는 이유는 향내만큼이나 다양했다. 어느 날은 다이어트를 위해, 어느 날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심지어 잠이 오지 않거나 감기에 걸렸을 때에도 그녀는 향을 태웠다. 하지만 나는 향냄새를 싫어했다. 특히 불을 붙여 내는 향연 속에는 이승이 아닌 저승의 비릿한 냄새가 스며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짙은 향냄새 때문에 그녀 몰래 욕실로 들어가 속엣것을 게워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를 언짢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장식장 사이에 걸린 그림에 내 시선을 붙박아 놓는다.
언제부터 그곳에 그림이 걸려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그림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다. 기다란 갈색 천 위에는 엽서 뒷면에 그린 다섯 장의 그림이 붙어 있다. 모두 바닷가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다. 엽서 아래쪽에 그림을 그린 날짜와 장소, 그리고 사인이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의 이름을 변형시킨 사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내 시선이 폐가를 그린 그림 위에 오래도록 머문다. 밤낮으로 바람이 들락거렸을 폐가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그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다. 손을 뻗어 집게손가락 끝으로 폐가를 살짝 문질러보다가 눈을 감고서 폐가 문을 슬쩍 밀쳐본다.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풀썩 주저앉을 것 같은 폐가 안으로 들어간다. 두껍게 먼지가 쌓여 있는 폐가 안을 둘러본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스며드는 창가로 다가간다. 창틀에 박힌 녹슨 못에 거미줄이 엉겨붙어 있다. 그 위로 거미의 알집 같은 먼지들이 달라붙어 있다. 바람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창틀이 덜컹거린다. 먼지의 무게로 축 늘어진 거미줄이 흔들린다. 흐릿한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시퍼런 억새들이 몸을 뒤척이며 스렁거린다.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빈 뇌실을 훑고 지나간다. 불현듯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잔뜩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른 뒤돌아본다. 하지만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 속을 느릿하게 떠도는 먼지들만 눈에 들어온다. 햇빛 속을 부유하는 미세한 보푸라기들이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보인다. 감았던 눈을 뜨고 손끝을 내려다본다. 집게손가락 끝에 목탄이 검게 묻어 있다.
그림들은 모두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들이다. 몇 그루의 소나무는 마치 닳고닳은 대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한쪽 방향으로 가지들이 치우쳐 있어 마치 오래 전에 지나간 바람의 흔적을 되살려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바닷바람 때문에 한쪽으로 쏠린 가지들이 영 불안하게 보인다. 억새풀들이 한쪽으로 쓸려 눕거나, 아니면 조그마한 채낚기 어선의 깃대에 매달려 흩날리는 깃발들도 한결같이 바람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스케치하기 위해 그녀가 용유도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림을 바라보던 시선을 장식장 위에 놓여있는 작은 나무상자로 옮긴다. 나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나무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연다. 짙은 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상자 안에는 마치 케이크에 꽂는 양초처럼 각양각색의 스틱형 향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그 중에서 연녹색 향을 하나 꺼내든다. 민트향이 나는 향이다. 나는 불을 붙인 스틱 향을 조그마한 옥빛 향로에 꽂는다. 짙은 향내가 거실 가득 떠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복잡한 내 혈관들을 타고 느리게 번져가는 향내를 상상한다. 몸 속의 모든 모세혈관들이 파랗게 변해가며 짙은 민트향이 머리끝까지 번져온다. 깊은 숲에서 이제 막 알몸으로 빠져나온 알연한 바람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요즈음 나는 자주 향을 태운다. 예전과 달리 향냄새를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오지 않았다.
근처 은행에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를 나선다. 그늘진 곳으로 걷는데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금세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후끈 달아오른 도로가 금방이라도 허연 이를 들어내며 단단한 내 턱뼈를 뚫고 들어올 것처럼 태양빛이 강렬하다. 며칠째 계속되는 폭염 때문인지 거리는 나다니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이대로 시간이 며칠만 지속된다면 이 거리뿐만 아니라 내 머리 속의 생각들조차 온통 표백될 것 같다.
‘미기장 내역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통장정리’ 버튼을 누르고 현금자동입출금기에 통장을 밀어 넣는다. 하지만 화면기에 뜬 글은 통장에 입출력 내역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나에게 일깨워 준다. 벌써 한달 넘게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고 있다. 투명한 유리의 그림자처럼 희미한 그녀의 얼굴이 머리 속에 떠오르다가 금세 지워진다. 혹시, 하는 생각으로 나는 신용카드 창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한 달 전부터 그녀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옷도 신발도 구입하지 않았다. 현금 인출도 하지 않았다. 변동 없는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녀와 연결되던 힘의 자장이 더욱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에 잡혀 있었다.
난감하고 납득할 수가 없었다. 4년 전이었다. 이 년여 동안의 연구 끝에 막 그 결과를 발표할 즈음에 경쟁 회사의 연구팀이 같은 내용의 연구 결과를 먼저 발표했다. 그때도 나는 요즘처럼 당황하지도 허둥대지도 않았다. 흙바닥에 그린 그림이 지워지듯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가출.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생소한 단어였다. 하지만 다들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좀더 기다려보라고 전문가처럼 충고했다. 물론 그러한 충고들은, 부부라면 마땅히 상대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안 보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느니, 존재의 상실감 때문이라느니 일생을 두고 내가 잠언으로 삼을 만한 말을 한 뒤에 사족처럼 덧붙인 위로의 말들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나는 마치 잠언의 휴지통이 된 듯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커다란 입으로 그러한 모든 잠언들을 집어삼킨 괴물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시간은 그들이 내뱉은 잠언들의 혈을 정확히 짚어가며 무력화시켰다. 지난 삼 개월 동안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든든한 배후가 되어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나는 그들이 내뱉는 말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을 터였다. 이제는 구태여 내 귀를 닫아놓지 않아도 잠언 투의 말을 나에게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표정으로 내 앞에서, 아니 시간 앞에서 그들은 점차 할 말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채 두 달도 안되어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홀연히 사라진 그녀 또한 그들이 내뱉은 경박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듯 보였다. 변화의 조짐은 사라진 그녀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와 마주선 이쪽 세계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관심사는 이제 사라진 그녀가 아니라 남아있는 나에게로 그 초점이 모아졌다. 물론 말이 아니라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가 있었다.
“6월 이후로 현재까지 카드사용 내역이 전혀 없습니다.”
신용카드 담당 여직원은 피곤에 찌든 얼굴 표정과는 달리 지나치게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틀 전에도 그랬다. 여직원의 하루치 피곤이 금방이라도 나에게 옮아올 것 같다.
은행 문을 나선다. 한증막에 들어서듯 훅, 하고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문득 나 자신이 그녀의 실종을 그대로 방치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잔고를 일부러 통장에 남겨두었다. 집을 나간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통장의 잔고를 모두 인출해버리거나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키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그게 더 나은 방법인지 좀처럼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녀는 집을 나간 뒤로 한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명동은 그녀가 집을 나간 뒤로 가장 많은 흔적을 남겨놓은 곳이었다. 집으로 날아온 신용카드 사용 명세서를 보고 알았다. 명동 쇼핑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나는 카드 명세서에 기재된 가게들을 몇 번씩 찾아다녔다. 몇몇 가게의 직원들은 이제 내 얼굴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어묻는 나를 형사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기 전에 주변을 둘러본다. 오늘도 노파가 보이질 않는다. 아파트를 들고날 때마다 노파는 항상 덩굴장미 아래의 벤치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 그 모습이 막 발굴된 미라처럼 보였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요 며칠간 노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네요?”
나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아파트 경비원에게 묻는다.
“아, 705호 할머니요. 혹시 어디서 보신 적 없죠?”
대답 대신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편다.
“며칠 전에 할머니가 집을 나갔다지 뭐요. 치매에 걸린 노인이었는데….”
경비원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차며 벤치에서 일어난다.
비릿한 노파의 체취가 남아 있을 것 같아 노파가 앉아 있곤 하던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벤치 끝에 앉는다. 그리곤 노파가 항상 눈길을 두고 있던 곳을 바라본다. 덩굴장미 너머로 모래가 깔린 놀이터가 보인다. 한낮의 놀이터는 텅 비어 있다. 놀이터 언저리에 심겨진 회양나무 아래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빠져나온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양이는 더 느린 걸음으로 놀이터를 가로질러 회양나무 아래로 꼬리를 감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미 다 살아버린 노파가 된 기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현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디지털 잠금 장치의 번호판을 누르기 전에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비틀어 본다. 손잡이가 스르르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현관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다. 번호판을 누르기 전에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비틀어보는 버릇은 그녀가 집을 나간 후에 생긴 습관이다.
몸을 소파에 깊게 묻힌 나는 3개월 전 그녀가 처음 사라지던 날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일본 출장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국제 화학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함께 일본에 갔던 다른 연구원들보다 하루 빨리 귀국했다. 내가 귀국을 앞당긴 것은 어차피 남아있는 일정은 세미나와는 상관없는 일본 관광이 잡혀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함께 참석했던 한 연구원이 한국으로 전화를 거는 것을 듣고 나서야 불현듯 내린 결정이었다. 그 연구원의 결혼 날짜와 그녀의 생일은 같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비행기는 기상관계로 자꾸만 지연이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나리타공항에서 전화를 통해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과 꽃바구니를 미리 주문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아홉 시 무렵이었다. 공항에서 나는 집에 있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에도 몇 번 그녀와 통화를 했고, 집에 도착하기 십 분 전에도 통화를 했다. 하지만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집에 없었다. 현관에 들어선 순간 나는 마치 다른 집에 들어온 듯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삿짐을 싸다가 만 것처럼 집안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현관에 우두커니 선 채 어질러진 집 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몸 안에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기라도 하듯 초인종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녀의 생일을 위해 내가 주문한 꽃바구니를 가져온 배달원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였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오는 십분 사이에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3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날 신발장에는 보지 못했던 구두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었고, 현관 바닥에도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리고 침실 가득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많은 옷들과 패스트푸드 박스들…. 하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 집안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언제였을까. 어쩌면 그녀는 내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동안에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는지도, 아니면 후문을 통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는지도, 택시에서 내려 성급한 모습으로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서는 내 모습을 어느 한 모퉁이에서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먼발치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집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그녀가 집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또 있었다. 그때까지 향이 타는 냄새가 집안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집에서 허둥대는 시간에도 타고 있던 스틱 향이 반 정도 남아 있었으므로 적어도 얼마 전까지 그녀가 집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녀가 갈 만한 곳에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바람’이었다. 아니,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사물들의 이미지였다. 그녀가 사라지기 한 달 전쯤이었다. 그녀는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바람이 지나는 흔적을 찾아내곤 했다. 그 흔적이 나뭇잎이 되기도 했고, 사막의 모래가 되기도 했고, 흩날리는 연속극 여주인공의 머리칼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베란다 밖을 내다보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뜬금없이 ‘어, 바람이 부네’라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바람은 이야기의 줄거리에 비추어 볼 때 연출되지 않은 바람이었다.
언젠가도 그녀는 아홉 시 뉴스를 보면서 예의 ‘어, 바람이 불고 있네’ 라는 말을 열 네 번이나 말한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녀가 발견한 바람은 취재기자들이 뉴스 배경으로 잡은 화면이어서 뉴스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장면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바람이 부는 장면을 정확히 찾아냈다. 그날이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벌써 열 네 번째야, 하고 말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되뇌인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듯 오히려, 뭐가? 하고 되물으며 텅 빈 새벽 골목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그런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 있는 듯한 낯선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세미나에 참석하기 며칠 전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인가 반복했다. 세미나 발표 논문을 확인하고 있던 나는 왜 그래,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날 내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조금 높았던가. 그래서일까.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는 훌쩍거렸다. 하지만 그날 나의 신경은 온통 논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비디오 테크에 테이프를 밀어 넣는다. 그동안 CCTV가 설치된 가게나 은행에서 복사해온 폐쇄회로 테이프다. 리모콘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켠다. 화면 속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테이프는 수십 번도 더 돌려보아서 이제 화면조차 흐릿하다.
그녀가 사라진 지 보름만에 나는 연구소에 휴직계를 냈다. 연구소에 휴직계를 낸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뭉그적거리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 다른 생각없이 카드명세서에 기록된 백화점 매점이나 가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CCTV를 통해서 물건을 구입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드 명세서를 보고 안 일이지만 내가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발한 날부터 그녀는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아, 속눈썹이 기다란 언니요, 하고 그녀의 모습을 나보다 더 정확히 기억해내는 판매원도 있었다.
나는 리모콘의 빨리 감기 버튼과 느린 화면 버튼을 번갈아 가며 누른다. 누구에게 떠밀리기라도 하듯이 그녀가 옷가게에 나타난다. 그녀는 매장을 몇 번 휘둘러보다가 옷을 구입하고는 화면 밖으로 금세 사라진다. 그리곤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위해 화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신발가게로 들어서는 그녀의 한 손에는 이미 두 개의 쇼핑가방이 들려 있다. 화면 속의 그녀가 마치 1920년대 무성영화 속의 배우처럼 보인다. 집을 나간 두 달 후부터 그녀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혀 연고지가 없는 지방도시의 폐쇄회로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3주전이었다. 그날도 나는 그녀가 물건을 구입한 지방에 내려갔다가 밤늦은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현관에 들어선 순간, 다른 날과 달리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게 낯설어 보였다. 그리고 식탁과 냉장고, 그녀의 화장대와 홈바와 커튼과 벽지… 집안 전체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각막을 덮고 있던 반투명의 얇은 막이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집안 물건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동선을 반복해서 좇던 일은 잠시 뒤로 미뤄졌다. 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는 평소에 말이 적고 조용한 편이었지만 무슨 일에 오래도록 집중을 하는 진득한 성격은 아니었다. 아이가 처음 자연 유산이 된 이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은데 자신의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관계를 가질 때마다 나에게 미안해했다. 어느 날에는 자신의 자궁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자궁 안에서 마른 꽃잎들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 속은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있지도 않은 아이를 가지고 그녀와 몇 번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사이에 꼭 애가 있어야 하는 거야’가 아이에 대한 내 태도였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다한들 우리의 삶이 나빠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내 태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리고 ‘그래도’로 이어지는 자신 없는 반론이 애에 대한 그녀의 일관된 태도였다. 두 번째 자연유산이 된 이후로 그녀는 갑자기 건강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밍밍한 음식들이 늘고 자극적인 음식들은 식탁에서 사라졌다. 스포츠센터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니는 눈치였다. 저녁마다 산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저녁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모습처럼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점점 그녀의 산책 시간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아침잠이 늘 부족한 나는 출근 때마다 투덜거렸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향과 차, 그리고 많은 다기들이 집으로 들어온 것도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몇 달 후 그녀의 몸은 전과 달리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유산이 되었을 때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스포츠센터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에게 산책을 나가자는 얘기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집안 가꾸기에 취미를 붙였다. 멀쩡한 가구가 바뀌고, 접착제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벽지가 새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 계절에도 몇 번씩 그녀는 커튼을 바꾸어 달았고 베란다에 미니 정원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거실 한쪽에 유리로 된 홈바도 그때 만들어졌다. 그럴 때에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이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집안 가꾸기에 관심을 두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집안 꾸미기에 싫증을 느낀 것은 그녀의 안면근육이 마비가 된 이후였다. 하지만 근육 마비는 한 달 동안 병원과 한의원에 다니면서 완쾌되었다. 그후로 그녀는 집안 가꾸는 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였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바람의 얘기를 꺼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단 집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는 많은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안경을 쓴 것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화장대 서랍 속에서 안경이 세 개나 발견되었다. 모두 도수가 높은 안경들이었다. 그런 도수의 안경을 쓸 정도라면 안경 없이 일상 생활을 하기에 많은 불편을 느꼈을 것, 이라고 안경사는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냉장고 얼음 칸을 열어봤던 나는 네 개의 얼음판에 수십 종이나 되는 작은 꽃들이 얼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많은 꽃들이 다양한 색깔로 얼음 속에 얼려 있었다. 모두 계절을 달리하며 피는 꽃들이었다. 그 중에는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들도 있었고, 꽃집에서만 볼 수 있는 꽃들도 있었다. 야생화도 적지 않았다. 얼음을 녹이면 금방이라도 꽃들이 되살아나 짙은 향기를 내뿜을 것처럼 보였다. 가끔 얼음판을 내려다보고 있다보면 얼음 속의 꽃들이 무슨 말인가를 나에게 자꾸 건네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눈을 감아도 집안 구석구석에 놓인 가구들뿐만 아니라 서랍이나 장롱 속에 들어있는 것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집안 물건들 속에 어린 그녀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나는 얼음 속의 꽃들이 건네는 말을 듣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입 없는 것들의 말을 들을 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전화벨 소리에 나는 눈을 뜬다. 얼핏 잠이 든 모양이다. 텔레비전 화면엔 회색 입자들만 떠돌고 있다. 전화를 한 사람은 함께 연구소에 근무하는 김 박사다. 김은 아직도 아내에게서 소식이 없느냐고 묻는다. 뻔한데도 불안하고 조급한 내 심정이 목소리에 묻어날 것만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한동안 말이 없던 김 박사는 휴직 기간이 벌써 2주나 지났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내가 계속해서 침묵하자 김 박사는 소장이 언제 한번 연락을 주라고 했다며 전화를 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베란다에 서서 골목 너머 커다란 아파트 단지를 건너다본다. 예전에 했던 김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삶의 질곡을 겪지 않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게 오히려 서로에게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 그 점에서 그녀가 네게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녀를 나에게 소개해주면서 해준 김박사의 말이다. 어쩌다가 셋이 함께라도 만날라치면 김 박사는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며, 같은 원자의 수로 공유 결합한 키랄분자 같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 나는 김 박사와 함께 키랄분자를 분리해 내는 공동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동질감을 느꼈다. 굳이 김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와의 만남이 반복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핍을 겪지 않은 여유로움이 그녀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왔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단점으로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으로 보였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땡볕이 내리쬐는 사막이나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내 삶을 일부러 들여놓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인생은 며칠만에 끝마칠 수 있는 패키지 여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장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진 후로 나는 우리가 진짜 키랄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랄분자는 공유결합되는 원자의 수가 똑같다. 이를테면 닮은꼴인 셈이다. 하지만 두 분자는 거울 속에 비친 반사상의 모습처럼 서로 겹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분자는 화학적, 물리적 성질은 동일하지만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비스듬하게 소파에 누워있던 나는 고무공이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곤 다탁 위에 너덜너덜해진 지도를 펼친다. 나는 그 동안 그녀가 다녔던 곳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꼼꼼히 살펴나간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 달 전부터 그녀가 짧은 시간대에 그렇게 멀리 이동했다는 점이다. 이제 그녀는 폐쇄화면 속에서도 그리고 카드명세서에서도 사라졌다. 나는 지도 위에 표시된 숫자를 차례로 짚어 나간다. 모두 서른 세 곳이다. 2일에 한 번 꼴로 그녀는 카드를 사용했다. 지도에 나타난 공간적인 거리로만 판단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듯 보인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점점 집에서 먼 곳으로 이동을 했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그녀가 남긴 동선을 따라가던 나는 그녀가 들렀던 가게나 현금지급기가 있던 장소를 떠올린다. 어느 곳은 화려한 쇼핑거리거나 아니면 낡은 옷가게였고, 도시의 한복판이거나 이제 막 새롭게 상가가 형성되는 부둣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가출과 연관지을 만한 그 어떤 단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녀가 무심코 흘리고 갔을 어떤 단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믿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문뜩 내 시선이 지도 맨 아래쪽에 멈춘다. 섬이다. ‘유리’라는 글자에 붉은 색으로 동그라미가 쳐 있을 뿐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지 않은 곳이다. ‘유리’ 곁에 쓰여 있는 날짜로 보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카드를 사용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더 이상 현금인출도 물건을 구입하지도 않았다. 왜 그곳을 다녀오지 않았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동그라미 곁에 ‘방문’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는다.
제주에 있는 ‘유리’로 전화를 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114와 몇 번의 전화를 통해 가게 직원과 어렵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유리’는 옷가게였다.
몇 시간 후에 비행기는 나를 공항에 부려놓았다. 공항 청사를 빠져나온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제주 날씨는 잔뜩 흐려있지만 한라산은 오히려 투명한 유리로 압착해 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다른 날과 달리 예감이 좋다. 예감은 매번 빗나갔었다. 그래도 다른 날과 달리 예감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 동안 찾아갔던 가게들을 찬찬히 헤아려본다. 이번이 서른 네 번째다.
가게 여직원이 일러준 대로 그랜드호텔 맞은편에서 나는 택시를 내린다. 옷가게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다.
“아침에 몇 번 전화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언제 옷을 구입했다고 했죠?”
잡지를 들춰보던 가게 여직원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묻는다. 짙은 화장 때문인지, 기다란 인조 속눈썹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얼굴이 과장되어 보인다.
“7월 10일입니다.”
컴퓨터 화면이 몇 번 바뀌고 여직원은 스크롤바를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린다.
“신용카드로 구입….”
내 말꼬리를 자르며 혹시 하연이라는 분 아니세요, 하고 여직원이 나에게 불쑥 되묻는다. 그녀의 이름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또 한 명의 여직원은 내가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무슨 일이에요, 조금 더 이야기를 꺼내봐요,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검지로 마우스를 톡톡 치던 여직원은 더 이상 확인해 줄 게 없다는 듯이 유난히 큰 눈을 깜빡거리며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조그마한 옷가게에는 CCTV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가게를 나서는 등뒤에서 잠깐만요, 하고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가 나를 불러 세운다. 막상 나를 불러 세운 여자는 다른 직원과 말을 나눈다. 언니, 혹시 그 잘 웃던 언니 기억 나? 요 밑에 사거리 근처에 있는 유아복 매점에 근무하던 언니말야. 그 언니였잖아. 그때 우리 가게에서 옷을 구입한 언니 말야. 기억 안 나? 하지만 인조 속눈썹의 여직원은 생각이 가물거리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잘 웃던 언니?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잘 웃는 편이 아니었다. 웃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잇몸을 드러내거나,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아지도록 웃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그녀 앞에서 유쾌하게 웃어본 적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녀는 유난히 흰 치아를 가지고 있었어. 나는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이렇게 해서 그녀에 대한 또 하나의 사실이 내 머릿속에 판화처럼 또렷이 새겨진다.
옷가게를 나와 500미터쯤 아래로 걸어서 내려가자 멀리 사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몰래 꼭 쥔 두 손에 흠뻑 땀이 배어난다. 사거리 모퉁이를 돌아서기 전에 나는 걸음을 멈춘다. 거칠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숨을 길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녀가 집을 나가기로 작정했을 때 나에게 드러내지 않고 그녀만의 가슴에 은밀히 품었던 날카로운 비수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녀가 집을 나간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큰 다툼이라도 자주 있었다면,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도 있었다면, 아니면 밖에서 만나는 다른 여자라도 내게 있어서 대판 싸우기라도 했다면 혹 그녀는 집을 나가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조금 전 옷가게의 여직원이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여직원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유아복 매점에서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도저히 머릿속에 그려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질적 결핍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그녀가, 한번도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다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유아복 매점의 직원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가까운 약국을 찾는 대신에 마음속으로 아스피린의 화학기호를 떠올린다. 탄소원자 아홉 개, 수소원자 여덟 개, 산소원자 네 개. 복잡하게 공유 결합된 아스피린의 화학구조가 머릿속에 또렷이 그려지고 나서야 두통이 가라앉는다.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여섯 번째 가게. 나는 가게 간판을 올려다본다. 유아복 전문점이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 안에서 툭, 하고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스테인리스 셔터가 내려진 가게 유리문에 쪽지가 붙어 있다. 급 가게임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내 얼굴이 유리문에 또렷이 비쳐보인다. 나는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선 채 문이 잠긴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가게 안은 텅 비어 있다. 애벌레가 잎사귀를 갉아먹듯이 뭔가가 내 몸을 갉아먹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임대문의 아래에 쓰여있는 전화번호로 핸드폰 버튼을 누른다. 탁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내가 하연씨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묻자 여자는, 하연씨요? 라고 말하고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다. 잠시 후 여자는 하연 씨라고 했죠?라고 되묻는다. …아, 남편 분이라고요? 하연씨 지난달 말에 가게 그만 두었어요. 제 남편이 갑자기 부산으로 발령을 받게 되어서 가게를 내놓았는데 그때 그만 두었거든요. 여자는 또다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다. 이사 중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가게를 그만둔 것이 지난달 말이면 지금으로부터 20일 전이다. 내가 집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즈음이다. 여자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더 이상의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양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른 채 아스피린의 화학기호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이번엔 효과가 없을 것 같다. 탄소원자 아홉 개, 수소원자 여덟 개…. 선뜩 차가운 감촉이 뺨에 와 닿는다. 빗방울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느새 잿빛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다. 내 속눈썹 위로 커다란 빗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이어 굵은 빗방울들이 듣기 시작한다. 나는 가게 밑으로 비를 피한다. 길 위의 많은 사람들도 허둥대며 근처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비는 더욱 거세진다. 보도블록 위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로 바짓단이 흠뻑 젖는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같이 하늘을 쳐다보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사람들. 젖은 어깨의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서 있는 사람들의 풍경이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젖은 바지가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잘 웃던 언니 아냐? 옷가게 여직원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들려온다.
아프리카 숯불구이 앞에서 택시를 내린다. 통닭집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온다. 금세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극심한 피로감과 허기 때문인지 눈마저 따끔거린다. 그러고 보니 꼬박 하루 반을 굶었다. 나는 패스트푸드점에 들려 햄버거와 음료수를 주문했다. 밖을 정면으로 내다볼 수 있는 일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통유리 밖의 어둠은 이스트를 잔뜩 집어넣은 반죽처럼 부풀어오르고 있다. 4차선 도로 건너에 내가 사는 아파트 13층 베란다가 보인다.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자 맹렬하게 달려들던 식욕이 싹 가신다. 바싹 마른 잎을 씹듯 입안이 버석거린다. 나는 햄버거를 채 반도 먹지 못하고 패스트푸드점을 나온다. 습한 공기 때문에 목 언저리가 끈적거린다. 얼마 전에 공사를 끝내고 개업한 찜질방이 보인다. 3층부터 7층까지가 모두 찜질방인 건물이다. 나는 찜질방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땀을 씻어낸 나는 이슬보석사우나에 들어간다. 사우나실은 안개가 낀 것처럼 미세한 물방울로 자욱하다. 눈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보인다. 나는 냉탕에 발을 담근 채 오래도록 앉아 있다. 몸에서 물방울이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막막한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기분이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다.
4층으로 내려온 나는 산소방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수건을 깔고 눕자 한 사내가 스포츠 신문을 들고 들어온다. 사내는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나를 흘끗 바라본다.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질 정도로 눈초리가 매서운 사내다. 나무로 마감 처리된 산소방에서 옅은 나무 냄새가 향긋하게 풍긴다. 얼마 안 있어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나서였다.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옆에 누웠던 사내는 보이지 않는다. 산소방에는 나 혼자뿐이다. 사내가 누웠던 자리에 스포츠신문이 펼쳐져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툭, 하고 뭔가가 발에 차인다. 탈의실 열쇠다. 잠든 사이에 발목에 찼던 열쇠가 빠졌나? 하고 나는 열쇠를 주워들고 산소방을 나온다.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나는 꾹 집어삼킨다. 옷가지를 보관해둔 내 사물함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찜질방 직원은 누군가와 오래도록 통화를 한다. 잠시 후 나는 직원과 함께 2층에 있는 경비실로 내려가 CCTV 폐쇄회로를 돌려보았다. 몇 시간 전에 스포츠신문을 들고 산소방에 들어왔던 사내의 모습이 폐쇄회로에 나타난다. 그는 버젓이 내 사물함을 열고 내 옷을 입고 있다. 나는 사내가 내 지갑을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유유히 출입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CCTV 폐쇄회로를 통해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옷을 입고 찜질방 입구를 나서는 사내의 뒷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다. 내가 보기에도 사내의 뒷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인다. 난감한 표정으로 화면을 지켜보던 직원이 혹시 카드라도 있으면 신고부터 하셔야지요, 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 카드 분실 신고를 했다. 나는 찜질방 직원이 가져다준 체육복을 입고 밤의 거리로 나왔다. 도로가 축축이 젖어 있다. 그 사이에 비가 내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거리에서 흙 냄새와 섞인 비릿한 물비린내가 풍겨온다.
나는 705호 할머니가 앉았던 벤치에 가서 앉는다. 서늘한 기운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온다. 얼마 후에 놀이터 공터에 고인 어둠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고양이다. 말간 유리창에 금이 가듯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내 가슴속에 선명히 새겨지면서 사위는 더욱 조용해진다. 나는 좌우 측으로 보이는 거대한 시멘트벽 속의 불빛들이 꺼지는 숫자를 번갈아 가며 하나 둘… 세어나간다. …아홉. 다른 층과 달리 15층 불빛은 한 집도 꺼지지 않는다. 왼쪽에 두 집, 오른쪽에 세 집 모두 다섯 집이다. 나는 어느 한 집이라도 15층 불빛이 꺼지면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15층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문득 거대한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벤치가 어둡고 축축한 무덤 속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덩굴장미꽃들이 검은 조화처럼 보인다. 벤치에 더 앉아있고 싶은 마음이 이내 사라진다. 벤치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내게 아파트 입구문을 열 수 있는 체킹 카드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아파트 입구 유리문에 어린 내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본다. 어쩐지 내 모습이 낯설어 보인다. 나는 경비 버튼을 누른다. 곧이어 잠에 취한 경비실 직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스피커에 대고 찜질방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한다. 경비실 직원은 내 주민등록 번호와 세대주 이름, 그리고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나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곳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곧이어 아파트 입구문이 스르르 열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랫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있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열한시 삼십오분. 나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다. 초침이 10을 넘어서지 못한 채 저 혼자 제자리에서 떨고 있다. 그녀가 집을 나가는 것을 지켜봤을 마지막 시계가 멈춘 것이다. 그녀가 집을 나간 뒤로 집에 있던 네 개의 시계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멈추어버렸다. 나는 서재에 걸려있던 벽시계와 두 개의 자명종 시계를 갖다가 그녀의 화장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시계들은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한참 동안 나는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노려본다. 바늘이 멈춘 시계들은 한순간 수백 년을 건너뛴 것처럼 낡아 보이고, 곤충의 탈피각처럼 가벼워 보인다. 문득 나 자신이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난 자리에 여전히 그녀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희미하다. 수많은 파편처럼 흩어진 그녀의 잔상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돈다.
거실로 나온 나는 비디오 플레이어 테크 밖으로 밀려나와 있던 테이프를 밀어 넣는다. 그러곤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켠다. 화질이 나쁜 화면 속에 그녀의 모습의 나타난다. 그녀는 여전히 화면 속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인출하고 있다. 그러곤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나는 리모콘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다.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그녀는 화면 밖에서 화면 안으로 성급히 들어와서는 옷을 넣은 쇼핑가방을 들고는 성급히 빠져나가기를 되풀이한다. 한순간이라도 화면 밖이나 화면 속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사람 같다. 그런데 옅은 핑크빛 2단 도트 원피스를 입은 화면 속 그녀의 모습이 의외로 생기발랄해 보인다. 갑자기 그녀에 대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되감기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른다. 그리고 느린 화면 버튼을 누른다. 그녀는… 쇼핑가방을 들고… 화면 안으로 들어와서는… 빈손으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나는 화면 정지 버튼을 누른다. 오른쪽 화면 밖에서 뒷걸음으로 들어오던 그녀가 반쯤 잘린 모습으로 화면에 멈춘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그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등이 축축하다. 바늘구멍, 흡사 블랙홀처럼 보이는 바늘구멍이었다. 빛을 발하던 많은 별들과 내 눈에 익숙한 모든 집기들이 일그러지며 바늘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나는 모든 세계와 유리되어 바늘구멍 이편에 홀로 남아 있었다. 빛 하나 없는 우주의 한 복판에 나 홀로 유령처럼 존재했다. 모든 세계는 바늘구멍 저편에 존재하고 나 홀로 캄캄한 우주 공간 속에 영원히 떨어져 있는 듯한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거실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얼마 안 있어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실내가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베란다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비는 시원스럽게 내리지 않고 생색을 내며 도와주는 구호품처럼 찔끔찔끔 내린다. 그녀는 여전히 텔레비전 화면에 반쯤 걸려 있다. 화면 밖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이물질이 달라붙은 것처럼 몸이 끈적거린다. 나는 장식장 나무상자에서 스틱형 향 세 개를 꺼내 불을 붙인다. 향 끝이 검게 그을리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나는 입으로 훅, 하고 향 끝에 붙은 불을 끄고는 향로에 꽂는다. 마치 혼령이라도 되듯 가늘게 피어오르는 향연이 베란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어도 몸은 여전히 끈적거린다.
나는 화장대 서랍 속에서 그녀의 안경을 꺼내어 쓴다. 지극히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이 썼을 안경이다. 눈에 들어온 집안의 사물들이 살아있는 듯이 꿈틀거린다. 나는 커다란 잎새 모양의 화장대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에 안경을 쓴 낯선 남자가 서 있다. 시간의 한 면이 깊이 함몰된 듯이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찜질방에서 내어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의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거울 속의 남자가 더욱 낯설게 보인다. 나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옷을 모두 벗어버린다.
옷을 다 벗어버린 뒤에도 등위로 수많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은 떨어지지 않는다. 집안에 떠도는 공기가 찐득거리는 점액질처럼 느껴진다.
나는 몸에 달라붙은 이물감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룸 안으로 들어간다. 탕, 하고 등뒤에서 닫히던 문이 두 뼘 정도 다시 열린다. 나는 샤워꼭지에서 쏟아지는 강한 물줄기를 향해 얼굴을 치켜든다. 그러곤 깊은숨을 들이킨다. 비릿한 물 냄새가 머리끝까지 번져온다.
김으로 들어차기 시작한 샤워룸은 금세 옅은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게 흐려진다. 열린 샤워룸 문 사이로 보이는 침실의 반사상이 지워지면서 거울 속의 내 모습도 지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집안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이제 나는 눈을 감고도 조감도를 내려다보듯이 집안에 놓여있는 모든 것들을 머리 속에 정확히 그려낼 수가 있다. 집안 구석구석에 놓여있는 물건들과 벽지의 색상과 무늬, 장판과 커튼의 색깔. 그리고 그녀의 물건들조차도. 어느 곳에 무엇이 놓여있는지조차 선명하다. 심지어 베란다의 타일이나 크기조차도 기억해낼 수 있을 정도다. 손으로 더듬어 보지 않아도 집안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고, 이 방 저 방을 혼백처럼 자유롭게 옮겨다닐 수도 있다. 눈을 감고 생활을 해도 불편함을 느낄 것 같지 않다.
겨드랑이 밑에 실타래처럼 뭉쳐있던 시간이 술술술 풀려나가는 듯하다. 몸이 나른하게 풀린다. 어쩐지 겨드랑이 밑이 허전하다. 오른팔을 들어 겨드랑이 밑을 거울에 비춰본다. 김이 잔뜩 낀 거울이 흐릿하다. 쳐든 손으로 거울에 서린 김을 닦아낸다. 물방울이 거울 밑으로 흘러내린다. 갑자기 내 손이 뻣뻣하게 얼어붙듯 멈춘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거울 속에 보여야 할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꿈이 잠 밖으로 뛰쳐나오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물에 젖은 머리칼이 양쪽 뺨을 후려친다. 꿈이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김이 서린 거울을 바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아낸다. 하지만 여전히 거울 속에 있어야 할 내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을 비벼댄다. 그리곤 거울과 손끝을 번갈아 본다. 거울 밖 손끝은 보였고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단숨에 샤워룸의 공기가 딱딱하게 바뀌며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순간, 거울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어, 바람이 불고 있네….”
저 혼자 웅얼거리던 그녀의 목소리다. 나는 거울 표면에 귀를 바짝 갖다댄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불현듯 집안의 모든 물건들 속에 그녀가 존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당장 엑스레이로 집안의 물건들을 찍는다면 그녀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다. 먼지들만 살아서 부유하는 그녀의 거울 속에서도, 멈추어버린 시계 속에서도, 벽 속에서도, 아니면 그녀가 사용했던 화장품이나 그릇 속에서도 그녀가 스윽 걸어나올 것 같다. 순간 망막이 박리되는 듯한 강한 통증과 함께 몸 속에서 무엇인가가 송두리째 빠져나간다. 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분자들이 미세한 입자들로 해체되는 듯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내 영역 안에 머물고 있던 그녀가 내 영역 밖으로 영원히 벗어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세계로 통하는 시간의 구멍 속으로 내가 그녀의 영역에서 옮겨온 것일까.
불현듯 그녀가 나에게 집을 남겨놓은 채 아니, 유령이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집을 남겨놓은 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그녀가 그린 폐가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폐가 안에 들어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온다. 나는 거울을 향해 어, 바람이 부네,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내 목소리가 부연 수증기 속으로 공허하게 흩어진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러고는 반복해서 같은 말을 되뇐다. 그녀의 말투로 되뇌어 본다. 내 생각이 실리지도 않고, 내 생각이 거치지도 않게…. 어느 순간 알연한 바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하다.
샤워룸을 빠져나온 수증기가 집안 구석구석을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침대에 눕는다. 감은 눈 속으로 많은 뼈들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 뼈들을 맞추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골격에 혈관과 살을 붙이고 살갗을 입힌다. 그녀의 발목과 허벅지, 배와 가슴을 차례대로 지나 표정 없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다란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흰 이마와 눈썹,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기다란 속눈썹과 코를 그려 넣는다. 지금까지 딱딱하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을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는 모양으로 바꾸어 그린다. 입술 모양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얼굴 표정은 크게 달라 보인다. 눈앞으로 많은 눈빛들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가물가물거린다. 기억을 더듬어도 좀처럼 그녀의 눈빛이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눈을 그려 넣는다. 어딘지 모르게 눈이 과장되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화장대 속에 있던 안경을 그 눈 위에 씌운다.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음이 멈춰지질 않는다. 더욱이 안경을 쓴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미친 듯이 웃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오래도록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처음부터 그녀의 모습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다시 안경을 씌웠을 때 나는 조금 전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안경 속의 눈빛이 축축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축축하게 젖은 눈빛이 무연히 베란다 밖을 내다보거나, TV를 시청하다가 바람이 분다고 중얼거릴 때의 그녀 얼굴과 너무나 잘 어울려 보인다. 안경 속의 눈빛은 많은 말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그 눈빛이 자꾸만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네는 것 같다. 무슨 말일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얼른 알아챌 수가 없다. 어쩌면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집안을 떠도는 짙은 향냄새를 폐 깊숙이 들이마신다. 혈관을 타고 향냄새가 몸 구석구석으로 파랗게 번져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