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횡단열차
이숙남
자정이 넘어서야 뻬떼르부르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모스크바의 밤은 참 덥고 지루했다. 기차역에서 자정까지 기다리기란 여간 지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다가 모기는 또 얼마나 달려 드는지? 모기도 이곳의 것들이 참 독했다. 그리고 기다림은 지루했다.
좀 비싸더라도 차라리 비행기로 가는 여행사를 선택할 걸 하고 후회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인데도 자꾸만 후회가 되었다.
무릇 인간이란게 지나놓고 후회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후회를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기다림이 하도 지루해서 기차역 세면실에 가서 얼굴을 씻었다.고양이 세수로 옹색했지만 마음은 한결 시원했다.
그리고 또 한없는 기다림의 시간 ...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에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인간사 어디나 내 것 이라고 이름 지어져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우리 자리로 들어 갔더니 반대편 침대에는 이미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왠지 움추러들면서 조심스럽게 가방을 침대 아래에 밀어 넣고 조용히 누웠다. 그러나 쉽게 잠이 들지는 미지수였다.
러시아의 횡단열차 하면 항상 마음속으로 동경하고 그리는 것은 눈 큰 오마샤리프가 떠오르고 시베리아의 귀족들이 떠오르고 낭만과 로맨스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유치한 낭만이어서일까?
혼자서 별별 상상을 다 하면서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단 이틀 동안에 모스크바를 강행군한 탓 이기도 했지만 레일 위를 굴러가면서 내는 규칙적인 열차 바퀴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주었든지 연해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나보다.
깊은 잠에 빠져서 코를 골았는지 혹은 방귀를 뀌었는지 아무 세상 모르고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15년 전에 장 폐쇄로 수술을 하고 난 뒤부터 장에 가스가 차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내미는 통에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방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잠을 자기가 조심스러워 항상 신경이 쓰이는 탓에 또 그 부분이 걱정이 되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였나 보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깊고 푸른 새벽안개가 차창 밖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깊고 푸른 새벽이었다.
아스라이 먼 기억으로 어릴 때 내 고향 진주 남강가의 새벽은 아침마다 깊고 푸른 안개가 드리워진 골짜기였다.
그러나 내가 철이 들고 난 뒤부터는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의 깊은 새벽은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 페테르브르그의 근교에서 그와 같은 새벽을 만나다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이 잠을 깰까봐 살며시 문을 열고 나왔다. 덜컹대며 굴러가는 열차의 바퀴 소리는 더 시끄러웠지만 더 선명한 러시아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광활한 구릉을 가로지르며 달려가며 가끔 내지르는 기적 소리와 눈앞에 펼쳐지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풀꽃들의 이슬 머금은 모습이며 그러다 숲이 빽빽한 밀림 속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는 것 같은 오싹함이며 그 감동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오래 서 있지 못한 까닭은 서늘한 냉기가 온 몸을 휘감아와서 긴 시간을 버틸 수 없는 한기 때문이었다.
'극동의 불라디보스톡에서 시작해서 모스크바까지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체력이 강해서일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나보다는 훨씬 강인한 사람이겠지.'
날이 밝아오자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구릉에 보리와 밀을 추수한 밭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저 드넓은 들판의 곡식은 누가 걷어 들였을까? 라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가 잠시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내 어릴 때의 생각은 농사일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받아들인 백인에 대한 개념-그들은 날마다 예쁜 옷을 입은 채 파티만 하고 음악회나 연극 관람 같은 것만 하면서 우아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생각했었다.
백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 것이 생기는 동화속의 주인공 쯤으로 생각했다고나 할까?
해가 떠오르면서 나는 차창에 기대어 러시아 농촌의 풍경을 지치도록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대위의 딸에 나오는 마샤를 생각 하면서 나는 열일곱 소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러시아 장교와의 사랑하는 마샤를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의 그 감동이 광활한 러시아 평원을 지나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진 러시아에 대한 동경이 얼마나 절절한 것이었나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세상에 대한 것은 오직 책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만나고 있던 어린 날의 그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들을 붙들고 서 있는 동안 내게는 시간의 흐름도 ,내가 나라는 것조차도 잊어버리도록 긴 시간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제정 말 러시아로 돌아간 나는 아름다운 러시아 평원의 고즈넉한 평화를 온전한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