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과 함께 어스럼이 깔리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솜이 발기 발기 찟기듯이 소담스레 내리고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어 고요함만이 눈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왔었어도 민우는 살릴수 있었는데....`
대풍은 조금만 빨리왔어도 민우는 살릴수 있었다는 의사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사태를 짐
작하고도 늦게 나타나 영월에 가보자고 얘기하던 정아가 원망스러웠다. 대풍이 입술을 깨물
며 뒤돌아 섰다. 정아는 영안실 출입문 옆에 놓인 목재 의자에 앉은채 벽에 머리를 의지하
고 있었고 그녀는 눈은 촛점이 없었다.
상열은 의자 등에 허리를 기댄체 팔장을 하고 정아옆에 머리를 숙이고 서 있었다.
"정아씨!"
대풍이 정아를 경멸에 찬눈으로 쳐다 보았다. 정아는 대풍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여전히 움직 임이 있었다.
"정아씨! 조금만 일찍 왔었어도 민우는 살릴수 있었다잖아요!"
대풍이 미간을 찡그리며 정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정아는 눈동자만 대풍을 향해
한번 돌아갈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선...배님...이제 그만 하세요! 좀."
상열이 상기된 얼굴을 들며 대풍에게 언성을 높였다. 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대풍을 돌아보
는 정아의 눈은 빨갛게 충열되어 있었다.
"그래..요. 제가 민우씨의 죽음을 방치했군요. 제가 어제 혜원이가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민우
선배 전화를 받고도 미적거렸어요. 정재오빠 죽음이 저한테 이렇게 많은 뒷감당을 줄지를
미쳐 몰랐어요. 사람은 죽으면 그만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정재오빠 죽은지 며칠
됐죠? 이제 겨우 5일 됐어요! 아직도 정재오빠 죽음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그런 와중에
혜원이가 병원에서 사라졌어요...... 말씀을 자꾸 그렇게 하시니 정말 어처구니 없군요. 그래
서 지금 민우씨죽음이 제 탓이라는 거예요! 설사 우리가 조금 일찍와서 민우씨의 죽음을
막을수 있었다 쳐요. 그래서 민우씨가 버젓히,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까요? 혜원
이와 민우씬 공동 운명체를 타고 났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민우씨와 혜원인 혜원
이가 민우씨의 첫사랑인 은혜씨의 심장을 이식 받으면서 이미 같은 운명이 되어버렸어요.
두사람은 떨어져서는.....더군다나 죽음이 두사람을 갈라놓고서는, 민우씨는 혜원이 없이는 살
아갈수 없을 거예요. 대풍씨는 민우씨를 그렇게 몰라요!
대풍씨는 민우선배의 죽음을 안타
까워 하지만 저는 대풍씨 못지않게 혜원이의 죽음이 충격이예요. 그렇지만 대풍씨는 저보다
는 그래도 나은편이 아닌가요? 대풍씨는 한사람을 잃었지만 저는 두사람을 잃었어요. 정재
오빠를 보낸지 며칠만에 혜원이 마져 이렇게 되었어요. 제가 처한 상황이 대풍씨만 못하나
요?
전 정재오빠, 그리고 혜원이 마져 잃었어요! 혜원인 친자매나 마찬가지였어요! 대풍씬 한 사
람을 잃었지만 전 두사람을 잃었다구요! 민우선배가 대풍씨한테 소중한만큼 저한텐 혜원이
가 소중해요! 하지만....하지만 민우씨는 아니예요! 왜냐구요? 저한테 있어서 민우선배는 옛
날 제가 연정을 느꼈던 그때 그사람이 아니거든요! 민우씨 죽음은 안 슬퍼요, 하나도 안슬
펐다구요! 아시겠어요!"
정아는 무릎에 머리를 묻고는 흐느꼈다. 대풍은 창문틀에 팔꿈치를 대고는 두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조금 열린 창문틈으로 싸늘한 냉기가 삐져들며 대풍의 목덜미속으로 스며들었다.
대풍은 민우모친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는 자명한 일이다. 일은 걷잡을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영안실 문이 열리며 의사와 형사가 나오고 있었다.
"지대풍씨라고 여기 계십니까?"
형사는 세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저 분인데요."
"남자분 호주머니에서 나온겁니다."
형사의 손에 종이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형사가 종이를 대풍에게 내밀었다. 대풍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일단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해야 겠습니다."
"예....? 부검을 한다...구요?"
정아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녀가 일어나며 되물었다.
"아니...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자살인지 타살인지 밝혀야 할거 아닙니까."
형사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거....칼을 갖다 대겠다는 거잖아요. 전 그런거 상상하기조차 싫어요. 꼭 부검을 해야하
나요? 그냥...정황으로만 판단을 할수도 있잖아요."
정아가 간절한 표정으로 형사를 쳐다보았다.
"정황이라뇨? 남자분이 여성분을 죽이고 자살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뭐요!"
대풍이 형사에게 달려들려 하자 상열이 대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풍이 한 동안 형사를 노
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절차상 부검을 해야 합니다."
형사가 냉정한 표정으로 대풍을 쏘아보았다.
"아니 형사님, 무슨 범죄와 관련있는 사건도 아닌데 해부까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냥 외표검사로만 사인을 확인할수 있는거 아닙니까. 제발 검안으로 끝내 주세요. 부탁입니
다."
상열이 형사에게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사는 상열이 입에서 외표검사란 전문용
어가 나오자 놀란표정을 지었다.
"저...의사 선생님. 의사선생님은 아실거 아닙니까. 확실한 검안을 해서 여기 형사님을 설득
좀 해주세요."
상열이 가운호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형사옆에 서있는 의사에게 말했다.
"제가 검안의는 아니지만...... 제가 확인하기론 남자분은 특별한 외상이 없는 걸로 봐서 내
질식에 의한 사망으로 보입니다."
"내질식에 의한 사망...요?"
상열이 의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예, 통상 이런경우에는 내질식과 외질식사로 구분을 하는데 외질식사는 기계적인 질식사라
고도 하는데....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내질식사는 자살이고 외질식사는 타살이랄수 있는거
죠. 남자분은 목에 특별한 외상이 없는걸로 봐서는 선생님들의 말씀대로 차안에서 히터를
켜둔체 잠을 잔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여성분은
심장병이 있었다고 하니 조금 더 조사를 해보면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사는 작은눈을 크게 뜨려고 하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일단 세분은 경찰서로 좀 갑시다. 간단한 조사를 좀 받으셔야 겠어요."
형사가 세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하고는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간밤에 내리던 눈은 언제 그쳤는지 한점 구름조차 찾아볼수 없었다. 햇살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풍은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두개골
이 햄머에 맞은것처럼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갈증을 느끼며 탁자위에 놓인 물주전자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반대편 침대에 눈길을 돌렸다.
"이 친구가 어디 갔지? "
대풍은 통증이 밀려오는 머리를 만지며 세면장 문을 열었다. 하지만 세면장에는 아무도 없
었다.
"이 친구 대체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간거야.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대풍은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정아씨, 일어났어요? 어서 나와요. 여관앞에서 기다릴께요."
"정아씨, 상열씨 못봤어요?"
대풍은 목도리를 걸치며 여관현관문 계단을 내려오는 정아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 밤에 대풍씨와 같이 주무셨잖아요."
"............."
"왜요, 상열씨가 없어요?"
"눈을 뜨니 없어졌어요."
"깨우기 싫어서 먼저 경찰서에 갔겠죠 뭐. 어서 가봐요."
"정아씨... 괜...찮아요? 어제 많이 마시는 것 같았는데...."
"괜찮아요. 이럴 때 안마시면 언제 마셔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은 밤새 술을 마셨다. 대풍은 여자가 저렇게 술을 마실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간밤의
정아를 보면서 느꼈다. 누가 그랬던가... 술먹으면 과거로 돌아간다고.....
그녀는 많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혜원의 죽음은 정재의 죽음과는 또 다르게 그녀에게 다
가온 것 같았다. 어릴적 학창시절에 자신은 혜원을 무척 괴롭혔다고 했다. 혜원의 부모님이
살아 계실때는 친한 친구였는데 혜원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혜원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살게 되면서 부터는 오히려 사이가 더 안좋아졌다고 했다. 자신에게 오는 부모님의 사랑이
분산되는 듯한 착각에 괜스레 혜원이 미울때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혜원은 원래 천성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남의 집에 살려면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뭔짓을 해도 웃기만
할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정아는 지금까지도 혜원의 성격을 알수 없다고 했다. 하
지만 분명한건 혜원한텐 이제 빚질게 없다고 했다. 3년전 혜원이가 자신의 사랑을 뺏어갔
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가 죽든 죽음은 모든걸 용서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깨 달았다
고 했다. 사랑은 아름답고 때론 숭고하지만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겪고보니 두렵다고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또하나 두려운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정재
오빠, 민우씨, 혜원이가 저 세상에서도 다시 만나서 삼각구도를 형성하지 않을까 겁난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대풍은 정아의 말을 들으며 병원에서 정아에게 화를 낸것에 대해서 미안
하다며 사과했다.
"거기 두분, 이리좀 오세요."
대풍과 장미가 경찰관의 거만하게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검안결과가 나왔습니다."
담당경찰관이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서는 뒤적거렸다.
"에....남자분은 질식사했고요 여자분은 심부전증악화로 인한 심장마비사입니다. 이거 검안서
입니다. 지대풍씨라고 했나요? 신원이 확실하니까 검안서는 미리 드립니다. 사망신고 하
든지 하세요. 그리고 내일 사망자 가족 모시고 시신 인수하러 오세요."
경찰관은 무슨 선심이라도 배푸는것처럼 A4용지 두장을 대풍앞으로 내밀었다. 대풍은 떨
리는 손으로 검안서를 집어들었다.
`사망신고.... 민우야, 이제야 실감난다. 넌 이제 법적으로도 죽었어...`
대풍은 길고긴 심호흡을 했다. 정아는 대풍을 등지고 반대편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아씨, 그만 갑시다. 근데 대체 상열씨는 어디간거야?"
대풍은 정아와 경찰서를 나오며 휴대폰을 꺼냈다.
"혼자 올라간건 아닐텐데...."
정아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 친구 전화를 안받는데......정말 짜증나네....대체 어딜간거야."
대풍이 휴대폰을 접으며 투덜거렸다.
"대풍씨..."
대풍이 돌아보았다. 정아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한번 가봐요. 어서요."
"병원....에요?"
정아는 벌써 주차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두사람은 병원에 도착해서 영안실로 걸음을 옮겼다. 영안실 문앞에서 정아는 숨을 한번 크
게 내쉬고는 문을 살며시 젖혔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상열이 영안실에 있었다. 그는 혜원의 사체보관함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멍하니 서있었다. 정
아가 대풍의 팔을 잡았다. 나가자는 시늉이었다. 둘은 살며시 영안실을 나왔다.
"정아씨....어떻게 알았어요?"
정아가 두 손으로 자신의 두어깨를 감싸쥐며 대풍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제밤에 술먹을 때 알았어요. 그 사람이 혜원이에 대한 감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았
어요."
"난...별로 못느꼈는데..."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예요. 남자가 어떻게 여자의 직감을 따라오겠어요."
정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친구 어제 계속 술만 마시고 별다른 말도 없었던 것 같은데...."
"누굴 좋아한다는게 꼭 말로만 표현이 되나요? 중요한건 스치듯 지나가는 표정하나 만으로
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수 있는거 아니예요?"
"나도 사실 그 친구가 혜원씨를 어느정도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어요. 몇 개월동안
같이 일했는데 왜 그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정도 감정은 남자면 누구든 갖고 있는 것 아
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저렇게 죽음으로 자신앞에 나타나
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정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풍이 정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
를 가볍게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두 사람은 기다리다못해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걸어
영안실문이 있는 기억자로 꺽인 복도를 돌았다. 상열이 영안실 밖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는
꽃다발을 무릎에 놓은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대풍이 상열에게 다가가 가만히 그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상열씨, 그만..가."
"......."
대풍이 다시 상열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게... 꿈이면 좋겠....어요. 선배님....우린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거겠죠?"
상열은 고개를 들지않고 대답했다. 그의 음성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대풍은 상열의 눈에
맺힌 눈물을 언뜻 보았다. 정아는 외면한채 영안실 문 옆 벽에 걸린 예수의 그림을 응
시하고 있었다.
"저, 혜원씨한테 할말이 있어요. 혜원씨한테 잘못한게 있어요. 꼭 사과를 해야 하는데.....
병원에서 안된...데요. 영안실에는 이 꽃다발 놓을곳도 없...어요."
꽃을 들어보이는 상열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네가 혜원씨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혜원씨도 이젠 용서할거야."
대풍이 상열을 일으켜 가볍게 안았다.
"정아씨, 부모님한테 연락했어요?"
대풍은 운전을 하면서 정아를 돌아보았다.
"대풍...씨는요? 민우씨 어머니한테 얘기했어요?"
"누구 죽었다는 얘기가 쉽게 나올거 같으면 사람이 아니죠.....정말 캄캄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과들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창밖에
시선을 두는가 싶더니 다시 대풍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대풍씨, 어제 병원에서 형사가 준.......민우씨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면서 준게 뭐예요?"
대풍은 대답을 않고 한동안 정면을 응시하다가 정아를 돌아보았다.
"혜원씨와 결혼식을 올려...달래요."
"녜?"
"사실입니다."
"결혼식이라니.....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핸들을 잡고 있던 대풍의 오른손이 점퍼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그는 뭔가를 꺼내 정아에게
건넸다.
"민우 호주머니에서 나온겁니다."
정아는 여러겹으로 접힌 노란색깔의 종이를 펼쳤다. A4용지 크기의 절반쯤 되는 메모지 서
너장이었다. 종이는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정아는 깨알같은 글씨가 삐뚤삐뚤 적혀있
는 메모지를 눈앞에 가져갔다.
`지대풍씨..... 형 이름앞에 성을 붙여서 이렇게 불러본 기억이 전혀 없는걸 보면 아마 이번
이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괜찮지 형? 어떤때는 형의 성이 뭔지
기억이 안날때도 있었어. 가끔 일 때문에 누가 형을 찾으면 갑자기 형의 성이 생각이 안
나서 당황한적이 몇 번 있었어.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줄곧 이름만 불러왔으니.......앞으론
절대 안 잊어버릴게 미안해 형..........
지금 내 무릎에 혜원씨가 잠들어 있어 아주 깊은잠에 빠졌나봐. 깨워도 눈을 뜨지 않아....혜
원씨가 잠이 많은건 아는데 이제는 영원히 잠에서 깰것 같지가 않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
말 괘씸해. 아주 나쁜 여자야......자기 혼자 편하자고 이렇게 잠들어 버리면....나는 어떡하란
거야. 혜원씨가 나보고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아. 혼자 살던지 자신을 따라오든지 둘중 하나
를 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어. 내가 혜원씨 없이는 살수없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혼자 가버리
면 결국 나보고 죽으라는 말과 같잖아. 세상에 이렇게 나쁜 여자가 어디있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서 홀연히 떠나버리면 난 대체 혜원씨의 뭘 가지란 말이야. 결국은
자신의 환청이나 듣고 잔상이나 보고 살란 얘기밖에 더돼나구.....
형, 내가 혜원씨와 만난시간이 다 합쳐봐야 기껏 1년도 안되는 세월인데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은 뭔지 모르겠어..... 형.........나 정말 죽기... 싫어, 그런데....그런데 혜원씨 없인... 내가
살수가 없어....정말...이야....지금 내가슴은 누가 칼로 도려내는 것 처럼 고통스러워... 그리..
고.....불쌍한 이 여자를 어떻게 혼자...먼길을 보낼수 있...어....
형, 날 부디 용서 해줘.....미안해 정말.....형과의 10년 우정을 파기하는 날 용서해줘. 그리고
형수 한테 내 얘기 좀 잘해줘.....내가 혜원씨 따라가서 잘 보살펴 줄거라고 얘기좀 해줘. 형
수나 혜원씨는 친자매나 마찬가진...데 이제 혜원씨가 이렇게 돼었으니......형수가 혜원씨의
죽음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야.
형....마지막 부탁인데 한가지만 들어줘.....나와 혜원씨의 결혼식을 올려줘.....예식장은 양평에
짓고 있는 집이야.....사무실 내 서랍뒤져보면 위치와 주소가 있어....형....내 마지막 부탁이
야....꼭이야.....그리고 정아가족과 협의해서 합장을 해주던지 강물에 뿌려줘....또 그리고 내 오
른쪽 바지호주머니에 반지 두 개가 있을거야. 그것도 유골과 함께 강물에 뿌려줘.
형, 우리 어머니, 보성 어머니 설득하는것도 형몫이야....난 어머니한테 아무말도 안했어.....아
니 못했어, 할 수가 없었어....내 죽음을 접한 어머니의 모습 역시 생각하기 싫어....정말 미안
해 형....
형, 옆에 정아있지? 박정아씨 말이야....
정아야, 내가 지금 천벌을 받고 있는거지? 너한텐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과거사지만 내가
니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잘된다면 나도 사람이 아니지...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고 있나봐. 그
리고 사랑해선 안될 여인을 사랑한죄 말이야.....내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후회하는거 같지?
아냐.....정아한텐 미안하지만 난 이미 혜원씨를 3년전 카라리조트에서 세 번째로 만났을 때
혜원씨는 내 마음에 깊숙이 뙤아리를 틀어버렸어. 이태리에 있을때도 죽었다던 그녀를 한
시도 떨쳐버리지 못했어.....그런 내가 이제와서 혜원씨가 잘못됐다고 해서 혜원씨에 대한 나
의 마음이 달라질수는 없지 않겠니. 정아야.......내 마음이 어떤지 알겠지.....혜원씨를 사랑
한죄가 벌이라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어....
그리고.....내가....아직도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를 외면하고 친구를 사랑`한 나쁜인간
으로 네 기억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젠 그 기억을 지울때가 온 것
같구나.....혜원씨와 내가 떠나면 아마 그 기억은 연기처럼 사라질거야. 단지 시간문제 일뿐이
야. 이제 영원한 작별인데 한번만 웃어줘......
그리고....이젠 그럴리는 없지만 혜원씨가 너의 사랑을 뺏은 친구라고 미워하지마....이젠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렸어.... 부모잃고 천애고아로 살아오다가 이젠 자신마저 이렇게 영
원한 잠속으로 빠져들었어....니 친구지만 이렇게 불쌍한 여인이 어디 있겠니......
날씨가 꽤 쌀쌀한데도 실내는 덥구나. 새차라서 그런지 히터가 빵빵하게 잘 나온다.
정아야 안녕...........혜원씨는 내가... 데려간다......
메모지에 적힌 글씨를 다 읽은 정아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풍은
차창밖으로 빠르게 비켜가는 아스팔트와 차량들만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흐느끼던 정아가 울음을 그치자 대풍은 정아에게 화장지를 뽑아 내밀었다.
"바보같이... 따라죽긴 왜 따라죽어....."
정아는 눈물을 찍어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사태가 막
상 현실로 나타나자 기가 막히는 느낌이었다. 정아는 죽음의 도미노 현상이 계속 되지는
않을까 두려기까지 했다.
정아는 차안 공기가 탁한지 창문을 살짝내렸다. 대풍은 정아가 안정을 되찾자 뭔가 생각이
난 듯 차 휴대폰 거치대에 꽂혀있는 휴대폰을 열고 버튼을 눌렀다. 대풍의 머리뒤 천정에
달려있는 카폰 스피커에서 `삐`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면서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대풍씨!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요. 메시지 받으면 빨리 전화 좀 해줘요! 혜원인 찾았어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장미의 목소리가 차 실내를 쿵쿵하고 울렸다. 대풍은 다시 버튼을
몇 번 눌렀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장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대풍씨예요?"
"응, 철이엄마, 나야."
"대체 어떻게 됐어요! 왜 전화를 안받아요! 혜원이는 찾았어요? 민우씨는요?"
장미의 화가 잔뜩나 있었다.
"대풍씨! 어떻게 됐냐니까요!"
"응....그래 찾았....어."
"정말이예요? 혜원인 괜찮아요?"
대풍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응, 그래...괜찮..아."
"지금 올라오는 중이예요?"
"그래....올라가는 중이야."
"대풍씨, 민우씨는 휴대폰 밧데리가 다됐어요? 민우씬 왜 또 전화를 안받아요. 빨리 보성 어
머니한테 전화좀 드리라고 얘기좀 해줘요. 어서요! 어제 민우씨와 연락이 안된다고 민우어
머니께서 이쪽으로 전화를 하셨어요! 어머니가 걱정을 하시니까 빨리 전화좀 하라고 해요!"
대풍의 안면 근육이 굳어졌다.
"그래 장미씨는 민우어머니한테 뭐라고 얘기했어?"
"예...그냥 얼버무렸어요. 혜원씨 찾으려 갔다는 얘기를 할순 없잖아요."
"그래 잘했어. 올라가서 보자 그만 끊는다."
대풍은 전화를 끊고는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차 옆으로 트레일러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
나가고 있었다.
"대풍씨, 혹시 민우씨 어머니가 알고 계신거 아녜...요?
"..............."
대풍은 호주머니에서 또하나의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두 개씩이나 갖고 다녀요?"
"민우 겁니다. 이자식이 휴대폰을 아예 꺼놨네."
대풍은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채 오른손으로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대풍씨, 위험해요! 차 세우고 해요!"
정아는 정면과 좌우 백미러를 번갈아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대풍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
라보았다.
"이보다 더 나빠질일이 남았습니까?"
민우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일곱 개나 찍혀 있었다. 그 중 다섯 개는 보성 민우어머니
집 전화번호였다. 대풍은 다시 음성사서함으로 들어갔다. 메시지가 두 개 들어있었다. 대풍
은 그중 어제 날짜가 찍힌 메시지를 눌렀다.
`민우야, 엄마다. 너 무슨 일 있는거지 응? 정재씨 조문하고 바로 내려온다더니 왜 안내려
오니? 무슨일 있는거 아니니? 전화는 또 왜 안 받는 거니? 이 메시지 확인하는 즉시 전
화해라. 오늘까지 전화 안하면 내일 내가 서울 올라간다.`
대풍은 한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풍은 알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대풍씨, 왜....그래요?"
"휴........"
대풍은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대풍씨...."
"민우 어머니의 메시지가 들어있어요. 아마 민우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메시지를 남겼나
봐요."
"민우씨 어머니가 알고 계신거 같아요?"
"아직 알고 계실리는 없겠죠......민우가 정재씨 조문하고 바로 내려온다구 하고선 안내려오고
연락도 없으니 불안해 하시는 것 같아요. 오늘 서울 올라오신데요."
"그래..요. 오늘 민우씨 어머니께서 서울 올라오신다구요?"
"............."
대풍은 방향지시등을 켜고 백미러를 한번 보더니 갓길에다 차를 세웠다. 앞에는 왕복4차선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세워진 전광판이 보였다. 전광판에는 `눈길 안전운행` 이란 노란색 글
씨가 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풍은 핸들에 머리를 숙였다.
`대체.....이제 어떡하란 말인가...`
대풍은 갖은 상념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아씨."
"......"
정아는 대답도 없이 정면만 보고 있었다.
"정아씨, 민우와 혜원씨의 죽음을 분리해서 처리합시다. 그래야 민우소원을 들어줄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는것만이 민우, 혜원씨, 그리고 민우어머니를 위한 길입니다. 그리고 정아
씨 부모님을 위한길이기도 하구요."
정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얘기...예요?"
"민우어머니가 혜원씨 죽음 때문에 민우가 자살을 했다는걸 안다면.......한번 생각해 봤어
요? 민우어머니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이런 사실을 안다면 민우어머니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거 아닙니까? 민우는 민우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식입니
다. 그 하나뿐인 자식이 죽었다면...그것도 자살을 했다면...."
대풍은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한듯한 표정으로 정아를 보았다.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정아가 대풍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겠네요. 전 미쳐 그기까진 생각못했어요. 하지만 의도는 좋은데....그게 가능할까요?"
"정아씨 아버지한테 부탁을 하는겁니다."
"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회장님의 막강한 영향력을 좀 이용하자구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아씨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고 계실겁니다."
"정아 왔니?"
정아가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정아모친이 부엌에서 뛰어 나온다.
"너 대체 어디있다 오는거니? 혜원이는 어디갔어? 지금 병원이 발칵 뒤집혔어 이것아!"
"............."
정아는 아무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말좀 해봐 이것아! 혜원이 어디갔니? 그몸으로 대체 어디간거야!"
안방문이 열리며 박재덕씨가 나온다.
"혜원이 어디있어?"
박재덕씨의 얼굴이 마치 마른 진흙처럼 굳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숙이고 소파에 앉아있는
정아를 보자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정아야, 이것아 뭐라고 말좀해봐!"
정아모친이 정아의 팔을 잡고 흔든다. 그러나 정아는 말이 없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새고 있었다.
"너, 혜원이 한테 무슨일 생긴거지 그렇지? 응."
정아가 소파팔걸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엄...마...혜원이가 죽었...어."
"뭐...뭐라...구..."
정아모친이 마치 썩은 나무가 넘어가듯 쓰러졌다. 박재덕씨의 얼굴에는 한순간 경련이 일
었다.
"정아...야..."
정아를 부르는 박재덕씨의 목소리는 전율에 떨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둔중한 통증이 일었
다.
"엄마! 괜찮아?"
정아가 소파에서 일어나 쓰러진 모친을 붙잡아 소파에 앉혔다.
"아빠.....좀 앉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박재덕씨가 소파에 앉으면서 두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엄마, 아빠.... 민우씨도 죽었어요."
정아가 울먹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뭐....뭐라구? 민우씨는 왜?"
"자...살했..어요."
박재덕씨가 입술을 깨물며 두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흔들었다. 정아모친은 소파에 기댄체 가
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빠, 검찰청에 친구분 계시죠."
대풍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슴을 돌로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끼며 아
파트에 둘러싸인 쪽빛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마치 하늘이 빙빙도는 것 같았다. 한무리의
철새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대풍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장미에게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과연.....혜원씨가 죽었다고 장미의 그 큰 두눈
을 마주보며 말할수 있을까. 상열씨의 말처럼 이건 정말 악몽이 아닐까.......`
대풍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걸 느끼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대풍은 장미가 문을 따자 점퍼를 벗으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장미가 철이를 안고 맞은편에
앉으며 대풍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자 대풍은 애써 장미의 얼굴을 외면하려는지 소파에 팔
을 걸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대풍씨, 혜원이는요? 병원갔어요? 혜원이 휴대폰이 고장나서 전화도 안되고....."
"응....지금 강원도 영월 병원에 있어. 내일 올라올거야."
"그....그게 무슨 소리예요? 같이 올라오지 않았어요?"
장미의 목소리는 사리가 든것처럼 쿨럭거렸다. 대풍은 테이블위에 놓인 냉수를 들이키고
는 장미를 착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풍씨,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말좀 해봐요. 설마 혜원이가 많이 아픈건 아니죠?"
"괜찮다니까.... 영월 병원에 잠시 입원한 것 뿐이야. 나 배고프니까 점심이나 좀줘."
대풍은 점퍼를 집어들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대풍씨, 그럼 민우씨는요? 민우씨는 혜원이와 같이 있겠죠?"
"그래...같이 있어. 걱정하지마. 그리고 민우어머니한테서 아마 전화가 올거야. 오면 나한테
얘기해줘."
대풍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을 하고는 문을 닫아버린다. 장미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
리지 못하고 멍하니 안방문을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너, 임마 출소한지 몇 개월 되었다고 그새 또 사고를 쳐. 교도소가 너네 집이야? 너 언제
인간될래? 응?"
"정형사님, 저 정말 억울해요. 전 어제 그시간에 인제 시내에 있어다니까요. 알리바이를 댈
까요? 칼치 아시죠? 그놈과 짝두놈하고 인제시내 당구장에 있었다니까요. 정말이예요! 그
놈들 데려올까요?"
"이 새끼가 누굴 핫바지로 아나...."
정형사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침을 튀기는 남자를 책상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들어 머리
를 내리쳤다. 전화기가 딸려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가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이씨...왜 때려요! 지금 투캅스 찍나요? 진짜 뭣같네...."
"그래 이새끼야, 오늘 투캅스 쓰리 한번 찍어보자. 이새끼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정형사가 조서를 꾸미던 컴퓨터 자판기를 냅다 집어들었다. 남자가 본능적으로 머리를 뒤
로 제꼈다. 정형사는 씩씩거리며 자판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너, 이실직고 실토하지 않으면 오늘 여기서 살아서 못나갈줄 알어, 알았어!"
"어이, 정형사! 이리좀 와봐."
정형사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새끼 너 이따 보자."
정형사가 콧김을 내뿜으며 일어나 반장쪽으로 갔다. 반장이 책상에 앉으며 뭔가를 책상위
에다 놓았다.
"이게 뭔가요 반장님?"
"어제 있었던 신동읍 남녀 변사사건조서야."
"어..? 그런데 그걸 왜 갖고 오셨어요?" 경찰청으로 넘어가지 않았나요?"
"이거 다시 작성해."
"예? 무슨 말씀이세요?"
"남자는 여기서 교통사고로 죽은걸로 처리하고 여자에 대한 검안자료는 내일 시신과 함께
서울로 보내. 내일 아침 일찍 서울에서 여자 시신을 인수하러 올거야."
"아니...반장님 대체..."
정형사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더 이상 묻지말고 시키는데로 해. 상부의 특별지시야."
"........"
"두 사람 시신이 어느 병원에 있다고 했지?"
"성심의료원에 있어요."
"그래...빨리 의사와 의논해서 사고 경위서를 교통사고로 해서 다시 작성하도록해 남자는 반
드시 교통사고야. 명심해."
대풍은 초조한 얼굴로 벽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거실에서는 장미가 철이를 안고 얼르고 있
었다. 시간은 오후 5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대풍은 다시 문을 닫고 휴대폰을 꺼내자 휴
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풍씨, 저 정아....예요."
"그래, 어떻게 됐어요? 부모님이 충격을 많이 받으셨죠? 엄마, 아빠 괜찮으세요?"
"엄마가 실신...했어요,"
"........."
"대풍씨, 일은 잘되었어요. 아빠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내일 일찍 혜원이
데리려 갈거예요. 대풍씨도 우리가 출발한후 시간간격을 충분히 두고 내려오세요. 알았죠?"
"정아씨, 정말 수고 했어요. 정아씨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고맙긴요.... 오히려 우리가 고맙죠. 그런데 민우씨 어머니는 오셨어요?"
"아뇨...아직..."
대풍은 전화를 끊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하는것만이 민우와 혜원씨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대풍씨!"
거실에서 장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풍은 민우어머니가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거
실로 나갔다.
"민우씨 어머니 잠깐만요, 대풍씨 바꿔 드릴께요."
장미가 수화기를 대풍에게 건네자 대풍은 장미를 한번 쳐다보고는 수화기를 받았다.
"대풍씨예요? 나 민우 애미입니다."
"예, 어머니.... 지금 어디세요?"
"예, 지금 민우집으로 갈려구 전철을 기다리고 있어요. 여긴 서울역이에요."
"예....."
"대풍씨, 우리민우 지금 어디 있어요? 정재란분 조문갔다가 내려온다던 애가 소식이 없
어요. 대체 어떻게 된거죠? 대풍씨 뭐 아는거 없어요? 민우 지금 어디있는지 몰라요?"
"아...예 어머니...민우가 지금 다음 공사건 때문에 강원도에 출장가 있거든요."
"민우가 출장이라구요? 며칠전에 내려왔을땐 그런얘기 없었는데....."
"예, 어머니....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지금 민우 휴대폰도 고장났나봐요. 연락이 안돼요. 내일
저와 같이 가보도록 하죠."
"그....그래요."
민우모친은 대풍의 말에 다소 안심을 하는 듯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어머니, 일단 저희집으로 오세요. 민우집은 아무도 없어서 썰렁할텐데 오늘 여기 오셔서 식
사하시고 여기서 주무시도록 하세요."
"아...아녜요. 민우가 어떡하고 사는지 한번 보고 싶어요. 와본지도 오래 됐는데....."
"그럼, 어머니 편하신데로 하세요. 제가 내일 오전중에 모시러 갈께요."
"예....알았어요....참! 대풍씨, 심혜원씨는 지금 어디있어요?"
대풍은 혜원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예, 어머니, 혜원...씨는 지금..고향에 가 있어요."
"고향요.....?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봐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대풍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대풍씨, 대체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그럼, 내입으로 혜원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얘기하란 말이야? 적어도 시어머니라면
건강한 며느리를 원해. 민우어머니는 혜원씨가 아무리 아들의 연인이라지만 지금 혜원씨의
저런 모습은 원치 않을거야.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장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하예지는 것 같았다. 대
풍은 소파에 앉은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두 사람 또 헤어져야 하나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시
는 민우씨 어머니와 병원가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혜원이 병원에 있는거 보여주겠다는 거예
요? 더군다나 혜원이는 고향에 가 있다고 하구선....."
"..........."
"뭐라고 말좀 해봐요! 오늘따라 왜 그렇게 대풍씨의 말이 종잡을수 없는거예요. 아무리 민우
씨 어머니를 안심시키기위한 거짓말이지만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풍씨가 한말은 도대체
정리가 안돼요. 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민우씨는 뭐래요? 민우씨는 어떡하겠대요? 민우씨도
생각이 있을거 아녜요!"
정아는 속에서 열이 받치는지 왼손을 이마에 가져갔다.
"혜원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어디예요? 영월 무슨 병원에 있어요?"
"아니....내일되면 볼텐데.....병원은 알아서 뭐...하려구...."
"좀 가르쳐 줘요! 전화라도 한번 해보게요!"
장미의 목소리가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영월...무...슨 병원...이더라...뒷글자가 의료원이라는건 기억이 나는데....."
대풍은 갑자기 생각이 안난다는 듯이 정아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대풍의
귓불에 한줄기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장미는 한동안 대풍을 노려보다가 철이를 안고는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도시는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엄마....괜찮아?"
"여보!"
그녀의 팔에 꽂힌 호스에 링겔액이 한방울 한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혜원이가 ...죽은거...니? 그리고 유민우씨도?"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는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는것처
럼 담담했다.
"여...보."
정아모친이 박재덕씨에게 눈길을 돌렸다.
"여보, 나 여기있어. 괜...찮아?"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이런 벌을 받는거예요.....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세사
람씩이나 데려갈수 있어요....이젠 나까지 데려갈려나...."
정아모친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못하며 탄식을 했다.
"여보...무슨말을 그렇게 해..."
박재덕씨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억장이 무너지는 충격에 숨조차 제대로 쉴수가 없었다.
병실문을 누가 두드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리며 이박사가 들어온다. 희끗희끗한 이박사의
머리가 형광등불빛에 반짝였다.
"제수씨, 좀 괜찮습니까?"
이박사의 목소리가 침울하다.
"혜원씨가 그렇게 되다니....자네 보기가 면목이 없네...내 책임이 클세."
"이사람도...왜 그게 자네 탓이야...그런소리 하지마. 우리가 전생에 죄를 많이 졌나봐. 그래서
하늘이 벌을 내리나봐."
대풍은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그는 머리가 가려운지 두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깜박 잠이 들었던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거실을 둘러보다가 벽시계를 쳐다보았
다. 밤 8시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주방을 한번 보고는 안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장
미와 철이가 없었다.
`어디 갔지?`
그는 다시 문을 닫으려다가 방바닥에 펼쳐진 노란색깔의 책에 시선이 쏠렸다. 대풍이 무심
코 두손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전국종합 전화번호부였다. 대풍은 설마하는 불안한생각으로
전화번호부를 훍어내려갔다. 대풍의 눈에 영월이란 단어가 들어왔다. 대풍은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찬찬히 책을 훍어내려갔다.
`영월 성심 의료원`이란 단어가 눈에 박히면서 대풍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풍은 침대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점퍼를 집어들며 안방을 나왔다. 그는 현관으로 뛰어가
신발을 신으려다가 다시 거실로 들어와서 수화기를 들었다.
"녜, 성심의료원입니다."
"여보세요. 성심의료원이죠? 뭐하나 물어봅시다. 영월에는 의료원이 몇 개나 있습니까?"
"의료원요? 영월에는 우리성심의료원 하나밖에 없습니다."
대풍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저 혹시 조금전에 어떤 여성분한테서 전화받지 않으셨습니까?"
"녜, 그런데요?"
"혹시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런건 왜 물으시는거죠?"
전화를 받는 여성은 짜증난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예, 어제 신동읍 남녀 변사사건의 가족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요....아까 어떤 여성분이 전화를 해서는 심혜원이란 환자분을 찾는다기에 환자명단을
뒤적이다가 없기에 그런분은 없다고 했는데 그 여성분은 틀림없이 있을거라고 하기에 사
망자 명단을 뒤졌는데 .....사망자 명단에 들어있더군요. 그래서 여기 영안실에 있다구 했어
요."
대풍은 한동안 혼이 빠진듯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텅비는 것
같은 충격에 빠져들며 대풍은 아파트를 나와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대풍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풍은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나 대풍선배야."
"아....선배님. 잘 도착했어요?"
"그래....자네 저녘은 먹었어?"
"예....먹었어요. 시간이 몇신데."
"지금 어디야."
"병원주위 여관입니다."
"그래....자네 수고스럽지만 이따 한 두시간 삼십분후에 병원에 좀 나와있어."
"무...슨 말씀 이세요?"
"우리 마누라가 조금전에 영월로 갔어."
"예? 형수님이 여기로 떠났다구요? 형수님한테 혜원씨 얘기 한거예요?"
"아니...안했어. 근데 일이 그렇게 돼어버렸어. 내가 전화한 이유 알겠지?"
"하지만 선배님 제가 형수님과 혜원씨의 관계는 알지만 형수님 얼굴은 모르잖아요."
"그 시간에....그것도 영안실에 들릴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아....참! 그렇군..요. 알았어요. 선배님."
"집사람이 절대 혜원씨 시신을 봐선 안돼, 알았지?"
"예....알았....어요."
"나도 금방 뒤쫒아 갈게."
대풍은 아파트 단지를 뒤로하고 큰길가로 나왔다. 몇 명의 사람들이 추위탓인지 바쁜걸음
으로 오가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은 연무를 가득품고 있었다. 대풍은 점퍼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그는 머릿속이 텅비는 것 같은 느낌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
었다.
택시가 대풍앞에 섰다.
"아저씨.... 영월로 좀 갑시다."
기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뒤돌아보았다.
"어디라구요?"
"영월요...강원도 영월몰라요?"
실내등 불빛에 대풍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에이 손님도....농담하지 마세요. 이 차가 무슨 강원도행 나라시택시인줄 아세요."
기사가 웃긴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대풍이 운전석으로 수표두장을 던졌다.
열한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적막한 공기가 병원을 감돌고 있었다. 상열은 초조하게 병원
정문앞에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지만 겨울밤공기가 꽤나 차
가웠다. 상열은 추위를 피해보려고 두손으로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가 한번 숨을 쉴때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상열은 병원쪽으로 다가오는 자동차 엔진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문 가로등불빛에 자동차 한 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정문옆 주차장
에서 멈췄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대풍의 차가 틀림없었다.
"형수님."
"누.....누구시죠?"
어두운곳에서 누군가 아는체를 하자 장미가 두려운 시선으로 상열을 쳐다보았다.
"저.....지대풍씨 부인돼시죠?"
"녜,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는 대풍선배님의 후배인 김상열입니다."
"그..럼 같이 일하신다는 그 분...인가요?"
"예..."
장미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왼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깊은숨을 토해낸다. 그녀의 목소리
는 심하게 쉬어 있었다.
"그런데 유민우씨는 어디 있나요?"
"예?
"어서 혜원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좀 해줘요."
"형수님.....지금은 안됩...니다."
"안된다구요."
상열은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어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큰눈이 불빛에 반짝
였다. 그녀가 상열을 밀치며 병원경비실로 걸어갔다. 상열은 난감한 듯 장미의 뒤를 따
랐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금은 면회가 안됩니다."
안경을 쓴 늙수그레한 경비가 경비실 불을 켜고는 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 당직이신 한 상기 선생님을 뵈려 왔는데요.
그녀는 너무도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다시 경비실로 들어갔다. 경비가 인터폰을 누르는 것 같았다. 장미의 뒤에 서있던 상
열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장미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경비는 누군가 통화를 하는가 싶더니 쪽문으로 다시 나온다.
"들어가 보세요. 당직실은 1층 우측 맨 끝 방입니다."
장미가 성큼 성큼 정문으로 걸어들어갔다. 상열도 엉거주춤 장미의 뒤를 따랐다.
"아니 누구신데 절 찾아오셨죠?"
나이가 마흔 중반쯤 돼 보이는 의사가 가운을 걸치며 복도를 나오다가 장미와 마주쳤다.
"저 선생님, 어제 사망한 심혜원이란 사람 좀 보러왔어요. 선생님 제발 이렇게 부탁합니다.
제 동생입니다."
장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뺨을 타고 있었다. 그녀의 눈
은 이미 많이 부어있었다. 의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죠?"
"여기 자주 왔는데.... 선생님을 모를 리가 있나요."
"난 잘 모르겠는데....."
의사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장미의 호소어린 깊은 눈망울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의사가 방으로 돌아갔다가 잠시후 다시 왔다.
"따라오세요."
상열은 앞서 걸어가는 의사의 뒤를 따르는 장미의 두 다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건
물을 돌아 영안실에 도착한 의사는 영안실 문을 열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저기 시신보관함 2열 나함에 심혜원씨 시신이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장미가 떨리는 걸음으로 영안실로 들어갔다. 상열도 뒤따랐다. 상열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장미가 시신보관함 고리를 잡자 상열이
장미의 팔을 잡았다.
"형..수님...안됩니다. 내일 보세요."
장미가 상열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상열은 장미의 서슬에 놀라 그녀의 팔을 놓자 장미
가 두손으로 함의 고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서서히 혜원의 머리가 드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전신이 천정의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몸에는 방부제인 포르말린이 뿌려져
있었고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있었다. 장미는 자신의 망막에 흐릿하게 맺히는 혜
원의 참담한 모습을 보자 송곳으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상열은 보고싶던 얼
굴이지만 차마 혜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장미의 뒤에서 천정만 바라보았다.
장미의 두손이 천천히 혜원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혜원아....정말 니가 심혜원이니....니가 왜 여기 누워있니....어서 돌아가자....여기 있지말고...
혜원아 제발......이 나쁜 기집애야 나혼자 어떻게 살라고... 혼자 어떻게 살라고...날 두고 혼자
가버리니...흑흑흑.....혜원아....이 나쁜 기집애야..."
장미가 혜원의 얼굴을 가슴에 안고 절규에 가까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장미의 비명이
마치 깊은 동굴에서 돌이 부딪쳐 나는 소리처럼 메아리가 되어 영안실을 떠돌았다. 상열
은 눈앞이 침침해져 오는걸 느끼며 벽에다 몸을 기댔다. 사지가 풀리는 것 처럼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선...배님."
상열이 고개를 들자 대풍이 영안실 문에 기대어 망연자실한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대풍
은 한동안 그러고 있더니 장미에게 다가갔다.
"오장미...."
대풍이 혜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는 장미의 어깨를 만졌다. 고개를 드는 그
녀의 머리가 갈퀴처럼 헝크러져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붉게 충열된 그녀의 눈이 싸늘하
게 빛나고 있었다.
"대풍씨, 혜원이가.. 왜 이런.. 거예요....병원에 입원해 있다면서요. 근데 얘가 왜 여기 있어요?"
".........."
"왜 이런데 있냐구요! 왜!"
장미가 대풍의 가슴을 잡고 흔들었다. 대풍은 심장이 뻐개지는 듯 했다. 몸속을 흐르는 전율
로 온몸이 떨려왔다. 대풍은 장미의 절규에 찬 신음을 외면한채 고개를 돌렸다. 대풍의 옷
을 잡고 흔들던 장미의 손이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그녀의 머리가 뒤로 쳐지면서 대
풍이 붙잡을 새도 없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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