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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rius. AD 14-37. AR Denarius "Tribute Penny" type. Lugdunum (Lyon) mint
Tiberius. AD 14-37. AR Denarius. "Tribute Penny" type. Lugdunum (Lyon) mint. Group 4, AD 18-35
Obv: TI CAESAR DIVI AVG F AVG VSTVS - Laureate head right; one ribbon on shoulder
Rev: PONTIF MAXIM - Livia, as Pax, seated right, holding scepter and branch; ornamented chair legs, single line below
Diameter: 18.6~19.5mm Weight: 3.72g RIC I 30; Lyon 150; RSC 16a
2018.5.16 Classical Numismatic
티베리우스(재위: AD 13~37) - 공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Tiberius Iulius Ca
esar Augustus)로서, 로마 제국 의 2대 황제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며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
usilla, 기원전 58~ 기원후 29)의 친아들이다. 고대 로마가 능력본위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국의 2번째 황제부
터 초대 황제와 혈연관계가 없었다는 점은 로마의 특성을 한눈에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으로, 그의 정책을 받들어 로마 제국
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잡았고,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정
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맏아들로 기원전 42년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는 반 아우구스투스파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때 참여하자 1세때 부터 로
마를 떠나서 페루시아와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치며 생활해야 했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3세가 된 무렵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협약을 계기로 친아버지 네로에게 사면령이 내려지자 부모와 함께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때 옥타비아
누스는 당시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내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아내와 이혼할 것을 요
구해 부모가 이혼, 곧바로 아우구스투스는 아직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다. 이 때 티베리우스는 결혼 직
후, 갓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에게서 살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여 이들 형제
는 옥타비아누스와 재혼한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아니였음에도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엄청난 후원을 받는다. 티베리우스가 9세의
나이에 친아버지 네로가 죽자 티베리우스는 로스트라에 올라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아버지를 기리는 추도 연설을 했고 이어
12살이 되는 기원전 29년 양아버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연합함대를 악티움에서 격파한 이후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는데 이때 사촌이였던 마르켈루스와 같이 아우구스투스 옆에서 개선식에 참여한다. 그후로도 로마에서 축제를 주관하거나 키루
크스에서 트로이 경기의 연장자 무리를 이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에 19세가 되자 콰이스토르(재무관) 직위까지 부여받는다
티베리우스는 성년식 이후 에퀴테스 계급이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이후, 그는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중용되어, 게르마니
아 전선을 휩쓰는 등 출중한 군사적 재능을 뽐냈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주재하는 재판정에서 아르켈라우스 왕, 트
랄레스인, 테살리아인들의 변호를 통해 공적인 삶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는 지진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원조를 호소하는 라오디
케아, 티아티라, 키오스 사람들을 위해 원로원에 탄원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검사로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음모를 꾸민 파니우스 카
이피오, 무레나를 대역죄로 고소하여 유죄 선고를 받아내기도 했다.
드루수스가 중간에 게르마니아에서 낙마 사고로 숨지고 난후, 그는 게르마니아에서 동생의 유해와 대면하고 동생의 시신을 직접 로마
까지 운반했다. 이때 그는 가는 길 내내 말을 타지 않고 동생의 관 앞에서 걸었다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마르켈루스와 아그리파가 사망하자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공동 황제로 아우구스투스와 책임을 나누어 지게 되
며, 황제의 특권 중 하나인 호민관 특권까지 부여받았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본래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들이
자 양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자신보다 건강
했던 아그리파가 먼저 죽자 그는 아그리파의 아내였던 딸 율리아를 다시 티베리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이는 그가 티베리우스를 사실상
의 후계자이자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후견인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이 갑작스러
운 사망 등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임시로 앉게 될 대타로 생각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해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결혼은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와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
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산도 담겨 있었다.
재혼 후 처음에는 티베리우스도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율리아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얼마 안 되어 죽고, 율리아의 사생활과 성격
차이 등으로 부부 관계는 급속히 나빠지게 되었다. 결국 품행이 좋지 않은 율리아와의 갈등 등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기
원전 6년 모든 공직을 내놓고 로도스 섬으로 은퇴한다. 한편,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간통죄를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가 7년간 로도스 섬에 틀어박힌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성장하여 공직을 경험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재목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로마 귀환 3년 후,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모두 죽고 말았다. 그
러자 서기 4년, 로마로 귀환했던 티베리우스는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름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
고,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를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때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모든 특권도 포기
했으며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친조카이자 옥타비아의 손자였던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같은 해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2번째로 호민관 직권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아들이자 양아들로 입적
되어 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양아들 관계가 파기되고 추방되게 된다. 이로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아들이자 율
리우스 가문의 후계자이며 유일한 정치적 후계자임이 확고히 굳혀지게 된다. 로도스 섬에서 복귀한 이후 티베리우스는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게르마니아 땅에서 궤멸당했을 때 라인 강을 지키면서 뒷처리를 담당했고, 달마티아의 반란 진압에서도 공을 세워 입지를 더
욱 단단히 굳히기도 했다.
AD 13년에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사실상 공동황제가 되었으며, AD 14년부터
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노환으로 실질적으로 단독 황제가 된다. AD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의 유언장에 의해 유산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처음부터 상당한 약점을 안고 시작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대타라고 명시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정국 운영에서 자
신의 뜻을 마음껏 펴기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황제라는 칭호를 받지 않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여 근위병을 부른 뒤, 자신을 호위케 했다.
사실 티베리우스가 제위 이양 과정에서 조심히 행동했던 이유는 사방에서 대두되는 위험 때문이었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
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귀족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비밀리에 반란을 계획하기
도 했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를 "나는 늑대의 두 귀를 붙잡고 있다."고 종종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장군으로서 공적을 수없이 쌓은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주둔 군대들로부터 파업을 선포받기에 이른다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땅의 군대는 봉급 인상, 복무연한 단축,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 증액 등을 요구했고, 자신들이 티베리우스를
투표로 뽑지 않았기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도나우 전선에서 일어난 파업은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를 파견해
수습하도록 했고,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가 있는 라인 강에서의 파업은 심각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게
르마니쿠스가 파견되었지만, 군대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옹립해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들었다
상황이 안정되자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이어받아 티베리우스는 귀족들과 부유층 시민들에게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하지 말 것을 촉구
했으며, 검소한 절약 생활로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본인 역시 겸손하게 행동하고 일개 시민보다 더 공손하게 굴었다. 특
히 그는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평민들의 축제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에 봉헌하거나 동상과 흉상을 허락없이 세우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공공건물을 만들지도 않았고, 검투사 경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시민들은 지루해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잠깐 중단되었던 게르마니아 정복은 게르마니쿠스의 주도 하에 계속 이어졌다. 게르마니쿠스는 토이토부르크 전
투에서 궤멸당했던 바루스의 군단기 3개 중 2개를 되찾았으며, 상당한 전과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원정이 진행되는 와
중에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에 파견한다는 명목 하에 수도로 소환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라
인 강 너머로 진격하는 것을 금지했고, 게르마니아 정복은 조용히 일단락되었다.
서기 19년에 일어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면- 티베리우스의 치세를 곤
란하게 만들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에 파견되어 시리아 총독인 피소와의 불화 끝에 급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티베리우스가 피소
를 사주해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했다. 전국적으로 게르마니쿠스 추모 열기가 일었던 것에 반해 티베리우스는 오
히려 암살 혐의자들에게 관대했고, 추모 열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이것이 티베리
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였다는 소문과 결부되면서 의혹이 끊임없이 커져갔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서기 23년에는 아들
인 드루수스마저 급사한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후 서기 26년부터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근위대장 세야누
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섬에 은둔해버렸다. 이는 치세 끝까지 이어져. 심지어는 어머니 리비아가 사망했을 때에도 오지 않았다.
로마는 세야누스의 세상이 되어, 그는 티베리우스가 자신에게 준 권한으로 많은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한다. 대(大) 아그리피
나와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인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유폐시킨다. 하지만 세야누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티베리우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이 음모는 부하의 밀고로 들통나고 만
다. 역모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그답게 대처해 사전에 세야누스를 체포하여 참수형에 처해버렸다. 세야누스가 죽자
로마는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반대파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가 '폭군'이라
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다 보니 그의 말년에는 모두가 '저 더러운 늙은이 왜 이렇게 안 죽어'라고 한마음으로 생각했을 지경이었다. 그는 결국 서기 37
년 7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손자인 게멜루스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남은 아들인 칼리굴라를
차기 황제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18세의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온 제국의 환호에 뒤덮여 그의 뒤를 이었다. 환호하는 민중들은
"티베리우스를 테베레 강에 던지자!"라고 외쳐댔을 지경이었다.
Tiberius and his mother Livia Paestum,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of Spain, Madrid
Ruins from the Villa Jovis on the island of Capri, where Tiberius spent much of his final years, leaving control of the empire in the hands of the prefect Lucius Aelius Sejanus
말년 로마에 염증을 느낀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고 카프리섬에 은둔해버렸다. 이는 치세 끝까지 이어
져 심지어 어머니 리비아가 사망했을 때에도 오지 않았다. 사진은 카프리섬의 빌라 조비스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