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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당시 남한의 빨치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의 입장을 중심으로-
6·25당시 빨치산은 과연 남과 북으로부터 다 버림받았는가? 이제 남한에서는 통념으로 되어버린 이 문제에 대한 북의 입장은 과연 어떤 것인가? 김남식 선생은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박헌영 도당의 간첩질"이라는 이북의 견해를 6·25전쟁의 전체구도에서 조망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6·25전쟁은 조국해방전쟁으로서 해방된 뒤부터 축성해온 민주기지노선에 입각하여 조국통일이라는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한 점은 해방 뒤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북한의 북로당과 남한의 남로당이 연합해서 통합된 하나의 변혁세력으로서 투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반도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유엔결의에 따라 38선 이남지역에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남북이 연합된 세력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은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남한의 모든 진보세력들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은 북한에 조직된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치 아래 남한지역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해방전략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부터 남한지역에서는 대한민국정부를 반대하는 정치투쟁의 최고형태인 무장투쟁이 전개된다. 이러한 무장투쟁은 6·25전부터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6·25를 통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북한은 6·25 전에 남한에서 구남로당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무장투쟁이 반드시 북한의 정규군과 연합하여 전개될 것으로 평가를 했고,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북한의 인민군 정규군이 진격했을 때 남한에서는 그에 대한 호응작전이 거의 없는 상태였고, 지리산 일대에 일부 잔존해 있던 100여 명 남짓한 이현상부대만이 낙동강계선에서 부분적인 호응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 남한에서 전개된 모든 무장투쟁들이 북한 인민군 정규군의 진격에 호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남한의 모든 진보세력들을 대표하여 투쟁을 이끌었던 구남로당 지도부 성원들은 자기과오에 대해서 철저한 자기반성과 책임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오늘날 6·25전쟁의 성격에 대해 여러 갈래의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북한의 정규군이 진격했을 때 남한의 이른바 혁명세력들이 호응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점이 공통된 의견이다.
이에 대해 남한혁명을 지도했던 박헌영을 비롯한 구남로당계의 간부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했지만, 아무튼 6·25 조국해방 전쟁이 초기단계에서 소기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 기본요인이 호응투쟁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민군의 진격은 파죽지세로 이루어져 낙동강계선까지 나아감으로써 부산, 대구 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을 해방하게 된다.
2. 제2전선의 역할변화에 따른 조직적 대응조치의 실패
그러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게 된다. 이때 총체적인 전쟁상황은 인민군 정규군이 후퇴를 순조롭게 하여, 전국(戰局)을 새롭게 전환하는 깃이 기본과제였다. 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2전선이 요구되었는데, 이때 제2전선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인민군 후퇴기에 남한 각지에서 조직된 유격부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형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기본 주력부대를 안전한 지역으로 후퇴시키고, 대오를 재편성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적 여유를 조성해 주는 것이 인민군 후퇴기에 산으로 올라가서 전개한 유격투쟁의 기본임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임무는 인민군 후퇴기에 남한의 모든 지역에서 유격부대들이 조직되어, 인민군 주력부대가 일정지역까지 후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해 주는 데 그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을 볼 때 상당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민군의 재진격으로 전선이 새로운 전국으로 바뀌면서부터, 제2전선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남한 유격대의 편성과 조직, 투쟁은 이제 주전선을 배후에서 지원해 주는 역할로 바뀌게 된다. 즉 인민군이 다시 정비를 갖추고 중국인민지원군과 협동작전으로 재진격해 올 때, 남한 유격대의 투쟁은 인민군의 후퇴를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 주전선 부대들의 재진격을 도와주는 역할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유격대의 조직은 당의 지도 아래 지대편성으로 개편된다. 지대편성으로 개편한다는 것은 제2전선의 역할이 주전선의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협동작전을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휴전협정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고, 전신이 38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로 접어들면서 남한유격대의 제2전선으로서 임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휴전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주전선 부대들은 전투를 성과 있게 수행하려 했고, 남한의 유격투쟁이 그것을 지원할 수 있었으나, 휴전회담이 머지않아 성사된다는 것이 확실해짐으로써 제2전선의 역할이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는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얼마 뒤인 1951년 말 휴전회담과 관련된 장기적 전망 속에서 유격대의 하산을 지시하는 제111호 결정을 채택하고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 제2전선을 직접 지도했던 526군부대 (유격지도처)는 종래의 지대편성을 지구당편성으로 바꿀 것을 지시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하산하여 부락과 도시, 농촌지대로 잠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1952년 중반부터 조직개편이 시작되었다. 제2전선의 역할이란 인민군 후퇴시기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휴전협정이 머지않아 성립된다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의 역할이며, 그 뒤부터는 제2전선으로서 역할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대편성을 해체하고 지구당편성으로 해서 본래의 당조직과 대중정치사업을 주로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유격부대들은 지구당편성을 하기는 하였으나, 본래의 지시대로 하산하여 당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바꾸어내지 못하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유격지구에서는 끝까지 유격투쟁의 형태만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남부군이라 할 수 있다. 휴전회담이 확실해지고 있는 시점, 또는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에는 산에 남아 있는 유격대의 생존이란 사실상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은 전멸, 투항, 포로라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약 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는 거제도 또는 봉암도에 있는 포로송환에 공식적인 명분을 두고 있으나, 이미 중앙당에서는 유격대들은 하산하여 지구당을 편성하고 본래의 당사업으로 조직을 개편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휴전회담 2년 동안에 유격대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중앙당의 지시를 따랐어야만 했다. 물론 통신연락이 두절되어 지시전달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이유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제2전선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은 꼭 상부의 지시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남한의 유격부대 지휘부에서는 휴전회담을 감안하여 상부의 지시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독자적인 상황판단에 따라 하산했어야 했다. 하산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도 있을 수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볼 때 그것이 주된 이유일 수는 없다고 평가된다. 휴전회담 2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3. 주전선의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는 제2전선의 전술적 성격
그런데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군사작전에서 제2전선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군사작전에서 제2전선이라는 것은 그 용어가 말해주듯 기본전선이 아닌 하나의 보조전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전선을 측면 또는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전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전실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전개되는 하나의 보조진선을 제2전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2전선은 주전선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희생을 각오하고 큰 것을 살리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는 내장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제2전선은 처음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황변화에 따라 형성될 수 있는 것이며, 주전선으로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면 제2전선은 형성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주 전선만으로는 곤란하기 때문에 제2전선이 측면 또는 적후방에서 전개되었으면 하는 요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25전쟁에서 북한의 인민군 정규군은 제2전선의 역할을 필요로 했고, 또 제2전선이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해야만 인민군의 주전선은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6·25당시 북한의 인민군 정규군이 모든 전선에서 진격할 경우 남한에서 유격부대들이 제2전선의 역할을 했어야만 했고, 또 6·25라는 민족해방전쟁은 분명히 그것을 전제로 해서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6·25 전에 남한에서 전개되었던 유격투쟁들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자기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민군 후퇴기에 전개된 유격투쟁들은 주전선을 살리기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희생을 각오한 제2전선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쟁일반 경험에서 볼 때 제2전선은 주전선에 종속되는 전선으로서 주전선을 살리고 주전선이 제대로 자기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직되는 것인 만큼, 반드시 희생을 전제로 한 전술형태라 할 수 있다. 전략전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제2전선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부분적인 전술의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전략적 목표의 실현에 도움이 되면 만족한다는, 희생을 전제로 한 전술적 전선형태라 할 수 있다.
4. 제2전선의 지도부인 남로당계를 중심으로 한 526군부대
또 하나 매우 중요한 문제는 이와 같이 6·25를 전후해서 전개된 제2전선을 과연 어디서 직접 장악하였으며, 총체적인 지도를 행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원래 해방 뒤 남북한에서는 작기 남로당과 북로당이 조직되었으며, 북한지역에서 수행하는 혁명과업과 남한지역에서 수행하는 혁명과업은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구체적인 과업수행에는 차별성이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은 곧 북로당의 노선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데, 특히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고 유엔결의에 따라 이남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남로당의 역할은 북로당의 역할과는 더욱 달라지면서 북한지역을 기지로 한 통일정부수립이라는 방향으로 남로당의 투쟁의 성격과 내용이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이남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투쟁의 성격과 내용은 인민공화국 기치 아래 남한을 해방하는 것으로 달라지게 되며, 따라서 남로당의 활동은 인민공화국의 기치 아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한다는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둘 점은 남한지역에서 전개되는 투쟁과업과 북한지역에서 전개되는 투쟁과업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남한지역에서 전개되는 투쟁에 대한 지도는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중요 지도부가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북로당의 과업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전개되는 투쟁이었지만,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서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지도부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남에서 전개되는 모든 투쟁은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지도부 사람들이 담당하였다. 특히 6·25 이후 해방구가 생겨나자 해방구애 대한 모든 당사업, 모든 민주개혁들 역시 구남로당계 지도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민군의 후퇴에 따른 제2전선의 형성에서도 주로 구남로당계 간부들이 그 지도부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동안에 이남에서 전개된 모든 유격투쟁은 해방 뒤에 있었던 유격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으로서 해방 뒤부터 이남에서 유격투쟁을 지도해왔던 남로당 간부들이 지도했는데, 그 지도부가 바로 앞서 말한 바 있는 인민군 총사령부 직속인 526부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유격지도처`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부대장 배철, 부부대장 윤순달, 박승원 등은 모두 남로당계 간부였으며, 그것은 다시 중앙당의 이승엽, 박헌영으로 이어지는 지도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남한 유격부대의 간부양성소로서 금강정치학원이 설립되었는데, 금강정치학원은 원장 김응빈(서울시 당위원장), 부원장 이인동(전평 간부), 송을수(남로당 간부) 등 남로당계 간부들이 운영하고 있었으며, 연백지역에서 약 2, 3천 명의 규모로 활동하고 있던 10지대의 지대장은 남로당 서울시 중구역 책임비서이던 맹종호였으며, 남한의 유격대와 연결시키는 동부, 중부, 서부 연락소의 조직도 구남로당계 간부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처럼 남한에서 제2전선으로서 전개된 유격투쟁에 대한 총체적 지도는 박헌영, 이승엽, 배철로 이어지는 남로당계 간부들이 책임지고 있었다. 물론 526부대는 인민군 총사령부의 직속부대인 만큼, 인민군 총사령부의 지휘를 받아야 했지만, 제2전선의 역할의 특수성과 그 부대의 특성 때문에 실제로는 박헌영, 이승엽의 지도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따라서 남한에서 전개된 모든 유격대와 통신, 보고, 지시들은 역시 남로당계 간부들이 직접 장악하였으며, 북로당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관계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물론 제2전선의 역할로서 전개된 남한의 유격투쟁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인민군 총사령부에서는 남한의 유격대에 대한 최대한의 지원을 하였다. 또 유격투쟁에 대한 보고는 항상 배철 또는 김응빈 등 구남로당계 간부들이 했으며, 그들의 보고에 따라 인민군 총사령부에서는 유격투쟁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그것을 최고인민회의에 상신하여 유격대에 대한 훈장도 아울러 수여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6·25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1948넌 10월에 전개된 여순 사건의 김지회, 홍순석 등에 대해서는 1949년에 제정된 국기훈장 3급을 수여한 바 있으며, 전쟁 동안에는 남도부(경북지대 유격대 부대장)에게 1952년 2월 5일(인민군 창건일) 자유독립훈장 1급을 수여하였으며, 5지구당위원장인 이현상에게는 1953년 2월 5일 최고훈장인 영웅칭호와 국기훈장 1급을 수여한 바 있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기록에는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이현상과 남도부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은 그들 개인에 대한 표창이 아니라 그 부대원 전체를 대표해서 그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이기 때문에 부대원 전체에 대한 표창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지난해 새로 민족통일상을 제정하면서 이현상에게 민족통일상을 수여하였으며, 1962∼1963년 경 여성빨치산 정순덕의 투쟁을 영화와 오페라로 작품화하려고 한 바 있다.
5. 주전선의 기본임무인 북한지역의 사수와 제2전선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해 둘 점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주전선의 기본임무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10월 1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진격하는 시점을 전후하여 유엔은 새로운 결의를 채택하고, 그러한 유엔결의를 맥아더 사령부에 새로운 임무로 하달한다. 이 유엔결의는 유엔군이 북한을 점령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말살하고 통일을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통일은 북한을 대한민국정부에 그대로 편입시키든가 아니면 총선을 통해서 다시 정부를 구성하든가 그것은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적당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지시가 맥아더 사령부에게 하달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막강한 화력과 특히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주전선의 기본임무도 달라지게 되는데 그것은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즉 유엔군의 참전에 따라 주전선의 기본임무는, 남한지역까지 해방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렵게 되면서 최소한 38도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 내려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북한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임무에 따라 막강한 항공력을 동원하여 북한지역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함으로써 북한은 엄청난 파괴와 인명살상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지역을 사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투쟁이었으며, 또 그러한 역경 속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수한다는 절대적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인민군 정규군이 주전선에서 보여준 투쟁은 사실상 후방지역에서 벌인 인민유격대의 투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부여된 유엔군의 임무와 유엔군의 참전으로 변화된 주전선의 기본임무로 인해 현재의 휴전선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교착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다시 말해 휴전선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은, 북한을 점령하여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말살하고자 하는 유엔군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수하고자하는 인민군 정규군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휴전협정의 조인은 유엔군으로서는 북한의 군사적 점령이라는 임무를 실패했음을 의미하며, 북한으로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수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6·25를 승리의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유엔결의가 북한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인민공화국을 붕괴시키고 남한 쪽으로 편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유엔군이 그러한 유엔결의를 수행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 6·25를 처음부터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유엔결의는 미국이 북한지역을 항상 하나의 수복재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제2전선은 주전선이 기본임무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유엔군의 발을 그곳에 묶어두는 그런 역할을 하는데, 휴전이 성립되면 진압부대가 제2전선 쪽으로 돌려질 게 분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중앙당에서는 빨리 하산하라는 조치를 하달하는데, 하산을 하지 못한 것은 유격대의 전략전술상의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주전선에서 북한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인민군의 투쟁은 유격대의 투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치루었다는 것을 북한의 문헌들에서 확인한 수 있다. 예컨대 동해안의 351고지전투에서는 화력을 몸으로 막아 화력을 무력화시키는 육탄돌격대들이 수십 명씩 줄지어 자원했으며, 이 전투에서 영웅칭호만도 십여 명이 수여 받았으며, 1211고지전투에서는 산 자체가 10여m 낮아졌을 정도로 포탄들이 투하되었는데, 그 속에서도 인민군은 물러서지 않고 고지를 사수한다는 수많은 영웅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투쟁들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전쟁 동안 북한지역에는 1평방 km에 1t짜리 폭탄 18개가 투하되었다고 발표되고 있는데,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전방, 후방할 것 없이 많은 희생이 동반되었다는 짓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희생들은 휴전이 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6. 제2전선에 대한 평가의 의미
이상과 같이 6·25를 계기로 한 제2전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주전선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전선은 보급이나 장비를 자체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제2전선의 역할에 대해 분명하고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전략적 목표의 실현을 위한 전술적 수단과 방법으로서 제2전선을 조직 전개하는 만큼 항상 신축성 있는 활동을 전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제2전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될 때에는 신속하게 새로운 대응조치들을 강구해야 하며, 그와 같은 기동성 있는 전술구사 없이는 제2전선으로서 유격대활동은 자기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2전선은 희생을 각오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큰 것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설사 희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군사적 상식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휴전과 더불어 주전선의 기본임무인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사수된 이상 제2전선의 역할과 임무는 완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유격대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제2전선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제2전선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이해도 중요한데, 그것은 물론 인민군의 후퇴에 따른 것이며, 인민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엔군의 참전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포로문제에서도 정규군의 포로송환문제는 제2전선에 참여한 사람들의 포로문제하고는 성격이 다른 문제라는 깃도 이해한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제2전선의 임무와 역한, 그리고 당시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 출처 : 「청년」제1호(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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