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교구 소속 본당.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旺場里) 357-3 소재. 1896년 9월 17일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매괴의 성모. 설립 당시의 명칭은 ‘장호원 본당’(長湖院本堂). 관할 구역은 음성군 감곡면 · 생극면, 중원군 양성면.
설립과 정착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 본당 관할 지역에 들어 있었다. 부엉골은 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康川面 釜坪里)에 있던 산간 마을로, 1885년 예수 성심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우촌으로 조성되었고, 1887년 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얼마 동안 본당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장호원 지역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94년 봄 부엉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 때였다. 그는 이곳에 부임한 뒤 본당 위치가 적당치 않음을 깨닫고 장차 이를 이전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1896년 5월 장호원의 매산(玫山)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한옥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 집은 본래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일시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閔應植)의 한옥으로 그 전해 말 의병과 일본군의 전쟁 속에서 불타 버린 상태였다.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허락을 얻어 이를 매입하게 된 부이용 신부는 부엉골에 거처하면서 불탄 집을 수리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예정을 앞당겨 1896년 9월 17일 장호원으로의 본당 이전을 결행하였다. 이로써 부엉골 본당은 폐지되었다. 당시 장호원에는 신자수가 5-6명에 불과하였지만, 본당의 관할 지역은 매우 넓어 경기도 여주 · 이천, 충청도 단양 · 제천 · 충주 · 음성 · 괴산 · 진천 · 청주 · 보은 등이 여기에 속하였으며, 공소수 27개에 총 신자수는 1,3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장호원에 정착한 뒤 부이용 신부는 우선 사제관과 그에 딸린 소성당 공사를 계속하여 그 해 12월 5일 이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장호원 자체의 신자수가 증가하였고, 또 20여 개에 이르는 공소의 신자들도 증가하는 상태였으므로 성당 건립이 시급하였다. 이에 그는 1903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이를 완공하고, 그 해 10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신축 성당의 규모는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으로 총 80평에 달했다.
성장과 변모
본당이 점차 정착되면서 부이용 신부는 우선 교육 사업에 눈을 돌렸다. 이에 그는 1907년 남학교인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이어 1912년에는 여학교를 설립했는데, 그중 여학교는 그 해 본당에 부임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 학교는 이듬해 6년제 보통학교로 과정이 변경되었다. 한편 부이용 신부는 조림 사업에 솔선수범하였으며, 1914년부터 매산(장미의 언덕)에서 성체 거동을 시작하였고, 1922년에 학교 건물을 1차 개축하였다가 1936년 정식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로 증축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본당에서는 1930년10월 7일에는 종각 높이가 130척이 넘는 현재의 고딕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고, 1933년 본당 성가집을 편찬 간행하였다. 이렇듯 부이용 신부와 신자들의 열성으로 본당의 교세도 크게 증가하여 1937년에는 총 신자수가 2,150명이 되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다른 본당들과 마찬가지로 장호원 본당도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본인들의 감시와 간섭이 계속되었고, 1942년에는 보좌 조인환(曺仁煥, 베드로) 신부가 사소한 일로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한편 일제 당국에서는 매산 언덕에 자기네들의 신사(神社)를 건립하려고 획책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해 부이용 신부가 일본인들의 적국인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용산 신학교에 연금되어야 했다. 그 결과 莊金龜(장금구,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제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이어 다음해에는 유영근(劉榮根,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한일합병 당시 부이용 신부가 제대 밑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부이용 신부를 맞이하여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다. 부이용 신부는 이해 11월 제4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선종하였고, 그 뒤를 이어 보좌로 활동하던 박고안(朴稿安, 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어 6·25 동란을 겪었으며, 그 후 1953년 3월에 매괴학교를 매괴상업학교로 변경하였다. 이 학교는 1966년에 여자 중학교를 병설한 뒤 학칙을 변경하여 매괴여자중·상업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나, 국민학교는 1972년에 폐교되었다.
한편 감곡 본당은 충청북도의 모본당으로서 그 동안 많은 자본당을 낳게 되었다. 1920년 고마리 본당(증평 본당의 전신), 1932년 청주 본당(수동 본당의 전신), 1945년 충주 본당, 1957년 무극 본당(현 금왕 본당) 등이 분할 설립되었으며, 다시 이로부터 여러 자본당들이 분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묘지의 매입, 자선 활동, 신심 활동 등을 통하여 지역 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공동체로 성장시켜 왔으며, 1986년 본당 설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성모 동산을 정비하고 부이용 신부의 입상을 제작, 축성하는 동시에 “감곡 본당 90년사”를 편찬 간행하였다.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