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문학, 음악, 미술과 달리 그 화려함과 직접성에 비해 여운이 그리 길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너무 직접적인 이야기 구조와 기술 발달에 지나치게 민감한 제작 방식에 있을 것이다.
영화을 전공한 사람과 영화 매니아을 제외한 일반사람에게 세월이 한 참 흐른 후에도 기억나는,
세익스피어의 문학,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고호의 그림과 같은 영화작품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리 빠른 시간에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장면 하나 하나에 상징성을 부여하고 일관된 주제의식으로 그림을 그리듯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 그렇게 영화를 만든 한국 감독도 있을까?
대답은 ‘Absolutely Yes'이다.
60년대 한국영화는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던 때였다.
배우 신성일이 남산공원을 하루에 4,5번 오르내리던 시절,(한 번에 4,5편 겹치기 출연을 한다는 이야기)
감독들 중 그림 그리듯, 음악 작곡하듯, 소설을 쓰듯 영화를 만든 부류들이 있었다.
유현목, 김기영, 김수용, 이만희 등이 그러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감독인 유현목 선생이 지난 28일,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영화학도들은 세계 선각자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며 공부를 한다.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의 ‘전함 포템킨’,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빅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프랑수와 튀루포의 ‘400번의 구타’ 페데리코 페리니의 ‘8과1/2’
그리고 챨리 채플린의 영화 등은 영화학도들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이다.
그럼 한국영화 중에도 영화학도들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가 있을까?
한국영화 중에도 위의 영화와 같은 대접을 받을 만한 작품이 있을까?
안목에 따라 여러 작품들이 거론될 수 있으나 많은 영화학도들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유현목 감독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7년,
영화예술 연구회를 창설하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영향을 받은 ‘해풍’을 만들면서
영화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임자없는 나룻배’의 이규환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55년 ‘교차로’로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1961년 그의 대표작 ‘오발탄’을 만든다.
이범석 원작의 ‘오발탄’은 자유당 말기의 부패한 상황, 남북 분단의 고통,
이산가족의 아픔 등의 주제를 방향감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통해 그려내
국내외 평단의 극찬을 받았지만 개봉 당시에는 상영 한 달 만에 반사회적이고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상영이 중지되기도 했다.
이후, '임꺽정'(1961), '아낌없이 주련다'(1962), '잉여인간'(1964), '카인의 후예'(1968),
'분례기'(1971), '사람의 아들'(1980), 그리고 일흔의 나이에 만든 ‘말미잘 '(1995) 까지
4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유현목 감독의 작품은 원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 쓸 만한 창작 시나리오가 많지 않았고 이태리 네오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은 감독의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당시 시대 상황(6.25전쟁, 이산기족, 정치적 암흑기, 독재 등)과
맞물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의 주요 작품경향은 사회 현실의 비판적 묘사와 이념적 갈등에 대한 비판,
종교에 관한 구도자적 주제를 다룬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쟁 직후 무너져가는 한 가족의 비극을 각자의 시선으로 다룬 ‘오발탄 1961’.
참담한 사회 현실을 리얼하게 그린 ‘인생차압 1958’ ‘잉여인간 1964’ 등이
사회 현실의 비판적 묘사라면,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서로를 증오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카인의 후예 1968’, ‘불꽃 1975’, ‘장마 1979’ 등은 이념적 갈등을 비판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쟁 중에 일어난 진정한 순교와 신앙의 문제를 다룬 ‘순교자 1965’,
神의 존재와 세상의 타락 사이에서 번민하는 한 청년의 삶을 그린 ‘사람의 아들 1980’ 등은
유현목 감독이 지닌 종교와 구도의 문제에 대한 단상들이다.
박경리 원작의 ‘김약국의 딸들 1963’은 한 가족과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는
역사적 시선을 느낄 수 있게 하며, ‘공처가 삼대 1967’, ‘수학여행 1969’은
가볍지만 정겨운 코미디 영화이다.
그는 촬영할 때 그림 위주의 영화를 먼저 생각한다.
묘사에 있어 포토제닉한 장면을 만들려 애쓰고 장면 속에 상징성을 부여하려 노력한다.
대표작 ‘오발탄’에 나타난 리얼리즘 경향 때문에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세계를
리얼리즘 성향이라 말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순수한 리얼리즘적 성향이라기보다는
영상적 표현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과 심리적 묘사 그리고 공간 활용이 두드러진 작품세계를 가졌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모더니즘적 입장도 작품의 군데군데 녹아 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와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혼재되어 있다.
유현목 감독을 비롯한 60,70년대의 영화감독들은 시나리오 검열과 정부 간섭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고, 이것은 감독들 스스로가 자기검열에 빠져 자유로운 창작정신을
망각케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가장 자유스러워야 할 감독이 ‘이런 소재는 허가가 안 날 텐데,
이런 장면은 짤릴건데, 이 거 찍으면 감옥 가는 거 아냐?’라는 자기검열은 독재권력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얼마나
저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찍기 편하고 검열 상관없는 하이틴 영화, 호스테스 영화가 70년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아픈 역사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현목, 김기영, 김수용, 강대진, 이만희, 이강천 등의 감독은
그런 시절에도 자신의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 감독들이다.
보통 검열에서 작품당 10,20분 이상 잘려 나가는 것은 다반사였던 그 시절, 유현목 감독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검열당국은 ‘오발탄’의 경우 상이군인을 소외계층으로 그리고 ‘가자 가자’라고
한 대사에서 가자고 하는 그 곳이 어디냐며 시비를 걸었고 ‘춘몽 1965’은 외설시비에 걸려 3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사실 ‘춘몽’의 외설시비는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와 관계가 있었다.
‘7인의 여포로’에서 인민을 인간적으로 그렸다 해서 이만희 감독은 곤경에 처했고
이만희 감독 편을 들어준 유현목 감독에게 딴죽을 건 것이다.
하긴 이강천 감독은 ‘피아골 1955’에서 빨치산을 사람답게 묘사하고 연민했다 해서
상영금지를 당하기도 했으니 그 시절의 검열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정진우, 김기영 감독과 공동으로 연출한 ‘女’의 원래 제목은 ‘女∙女∙女’이다.
헌데 문화부 검열담당자가 ‘女’가 3개 모이면 ‘姦’이 되니 안 된다 하여 ‘女’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웃기는 코메디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젊은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에 심취해 희곡작가를 꿈꾸며 동국대에 입학한 이후부터
유현목 감독의 인생은 ‘영화’ 그 자체였다.
많은 후학들이, 영화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그의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일생동안 영화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과 후배들을 위해 많은 작품외적 일을 했다는 것이다.
‘영화학회’ ‘소형영화작가협의회’ 등은 그의 주도로 만들어진 단체이고 동국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며 단편영화, 디지털 영화에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자식이 없어 영화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는 유현목 감독.
작가라는 호칭이 겸연쩍어 장인이라 불리길 원했던 유현목 감독.
그는 한국영화 초창기, 단단한 벽돌을 쌓아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
한국영화의 큰 어른이고 한국영화 美學의 개척자였다.
유현목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蛇足) 사오모 회원 님 중 미국에 계신 분들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8년 DVD로 미국에서 출시 되었습니다.
첫댓글 아 영화는 무척 좋아 하면서 한국 영화 역사에 아무 지식이 없었던 저에게 너무 좋은 기회이군요..감사 합니다. 오발탄 당장 봐야겠는데요 근데 한국에선 어디가서 영화를 빌린데요 ...
아름다운 콘서트를 하는 누리꿈스퀘어 건물 옆에 '한국영상자료원'(http://www.koreafilm.or.kr/main/)이 있습니다. 거기 가시면 없는 영화가 거의 없으며 예약 후 CD를 빌려 10인용 소극장에서 61인치 모니터로 10인이내 일행과 함께 무슨 영화든 직접 볼 수도 있으며 개인전용 모니터를 빌려 혼자 헤드폰을 꽂고 관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위 홈피에 가면 거의 매일 상영되는 흘러간 영화 무료상영 프로그램도 알 수 있으며 같은 건물에 '한국 영화박물관'도 있으므로 각종 영화소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 할 것입니다. 나나님, 참고가 되셨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호락님, 덕분에 유현목 감독을 조금은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메이디 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네요. 일반 DVD 대여점에는 인기 영화가 아니라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 입니다. 메이디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헤헤메이디님..언제 희귀영화 함 치세요
주로 6080년대 영화를 아콘 공연장 만한 영화관에서 무료상영 하는데 저는 문오장, 박노식, 도금봉, 문희, 허장강 등등 옛 명우들을 다시 만나는 재미로 몇번 찾았었는데 의외로 애들도 재미있어 하고 때로는 텅빈 극장에서 저희 가족만 보기도 합니다. 관객이 있던, 없던 계획대로 상영하는 그런 곳이지요. 얼마전에는 위에서 알려드린 10인극장에서 가족들과 '인디아나존스 시리즈'를 섭렵하기도 했는데 번개를 치기에는 좀 허접하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아참 영화 빌려보는 거, 극장서 흘러간 영화 관람 일체 공짜
카페에서 눈팅하면서 매일 마음의 양식 많이 먹고 있습니다. 감사
별 말씀을..... 묵은 된장님은 사진에 관심이 많으시죠. 영화 스틸 사진 분야도 매력있는데.....
이 장맛비에 다시 한번 보고픈 영화는 윤길님 원작의 장마.오발탄 요즘 얘기로 하자면 '오늘 내가 쏜다.그러다 실수당' 이 거 말 되남
지금은 창작 시나리오가 대세지만 그 시절은 문학작품을 영화로 많이 만들었습니다.
아..역쉬 지호락님저 분의 성함이 You 顯目이 될겁니다..그대 마음 보이는대로 나타나기를...
유작님이 배우가 되었다면 아마도 성지루, 유해진 급은 되지 않았겠나 라는.... 으음...
말로하는 것이니 기왕이면 "충분히 주연급이 되었을 것이다." 일케 했음 더 좋았지 않을까요
성지루, 유해진 정도의 조연이면 어설픈 주연보다 훨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디요???
울산에서 약만 짜고 있기에는 아까운 재능을 가진 지호락님의 '우리나라 영화감독 되짚어 보기1탄'잘 보고 듣고 갑니다 오랜동안 우리의 뇌리에 한국 대표 감독이란 명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생각보다 많지 않은 작품을 연출하신거 같아요..왜 우리나라 영화제작 황금기였던 60년대엔 다작이 대세 아니었나요 전 유현목감독님께서 28일 타계하신 줄도 몰랐네요..가 고인의 명복을 비옵니다
년 200편을 넘게(현재는 100편 정도) 제작되던 때를 생각하면 많은 작품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영화현장에 있던 시간을 감안할 때 1년에 1편 정도 하신 것이지요. 적당한 작품 수라 할 수 있지요.
이 글을 줄 맞추지 않고 덤성한 상태로 프린터를 하니 6장이 나오네요. 지호락 님 덕분에 영화에 대한 미세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저에게는 늘 새로운 정보를 알아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지호락 님은 털털한 외모답지 않게 내면의 세계는 틀이 반듯한 즉 빈틈이 없는 듯 합니다. 저는 글을 접할 때 먼저 띄어쓰기와 철자법을 먼저 확인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한데 낙지 님 외에 띄어쓰기와 철자법이 제일 정확한 사람이 지호락 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늘 좋은 정보에 감사드리며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오늘도 약 짜능교? ^^
그린 님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셨으니 앞으로 한국영화는 탄탄대로(?)입니다. 기자도 하신 경험이 있으니 시나리오 작가에 도전해 보심이...... 톡톡티는 대사가 만만찮게 나올 것 같다는.....
그린언냐 처럼 지도 프린트해서 읽어보는게 몇개 있답니다 언냐가 요즘 방학해서 좀 쉬어야 하는디 우째 여기까지 공부할거이 많아서 우짠데요~~ 그래도 즐겁지요 언냐!! 항상 예쁘게 봐주는 언냐~ 고마벼용 언니가 대전오긴 힘들거이고 제가 언제 창원가면 맛난 팥빙수 한그릇 쏠께요^^
다방면에 다양한 지식을 골고루 소유하신 지호락 님은 정말 실증나지 않을 사람 같아요. 언어에는 백두산천지를 울릴 것 같은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고....저 같이 간이 작은 여자는 아예 겁이나서 발발 떨고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지호락 님은 팔방미인 ^^ 하이고 후리지아 님! 창원에 오면 당연히 제가 쏘야지요. 시간이 되시면 오시기만 하셔요. 제가 맛있는 것 대접할게요.
지호락님은 도대체 모르는 분야가 뭐래여모르는거 빼놓구 다 아는것 가토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닙니다. 젊은 시절, 이 곳 저 곳 기웃거린 관계로 쬐끔 아는 정도라 할까요.. 즐거운 7월 맞으시길..
지호락님은 정말 지적인 호기심을 낙으로 사는 사람 같어요~~ 홧팅~ 좋은글 감사해요
후후후리지아님시방 또 직원들 몰래...컴 앞에 앉아 댓글 고 있는거징
좋게 읽어 주셔서 감솨. 지호락은 대전 회원님들이 부럽삼. 왜냐면 매일 벙개할 수 있고 여물목 산장이 있으니까요 !
며칠전 유현목감독이 타계하셨다는 뉴스를 접하긴했지요. 그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지호락님 덕분에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이런분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영화가 많은 발전을 해서 세계영화제에서도 인정 받을 수 있었겠지요 지호락님 덕분에 영화에대한 지식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감솨
목정님 안녕하시지요? 글구 보니 목정님이 그 시절 여배우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아주 클래식 하다는... 으음... 문희, 윤정희, 남정임, 문정숙, 전계현, 도금봉 중에서 누구랑 닮았을까요?
ㅁ돌림으로다가...비젓하다는....난 남정임이나 전계현누가 물어봤냐고요오나 어릴 적에 전계현씨 우리동네 제일 커다란 일본식 집에서 촬영하는거 봤는데..정말 이쁘더라구요.. 근데 어른 되서 거기 다시 가보니...동네 골목이 왜 그리 좁고 집도 그리 크지 않은지...놀라어릴 때 눈높이로 보는 거랑 어른되어 보는거랑 그렇게 다를 줄 몰랐어요
이분의 작품은 한 편도 보질 못했는데...지면을 통해 타계 소식을 접했죠.지호락님의 말씀데로 그림을 그리듯 영화를 만드신 분이라니 기회를 만들어 꼭 보고 싶어지네요.근데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 분이 어떻게 약만 짜고 계시는지요
뜨악 !! 아픈 곳을 기냥 예고도 없이 찌르시다니 ㅎ ㅎ ㅎ. 훗 날 또 다시 기회가 된다면.... 딱 한 편만이라도...
제가 본 영화중 가장 충격적으로 기억되는 영화입니다.어릴때 봤지만 영화 전편에 흐르는 암울한 장면들을 잊을 수 없더군요. "보약"같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오발탄'을 보셨군요.. 근데 난 언제쯤 선배 LP Bar에 함 가보나????
장례식장에 참 많은 분들이 운집하셨더군요.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시니 많은 분들이 오셨겠지요. 좋은 한국영화 스승이셨는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저는 그분에게 직접 강의를 들은 제자로서,지호락님의 이 글을 보니 강의할 때 인상 깊었던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통강 100분 동안 담배를 수시로 피우시던 하얀 백발의 노신사......그분의 '오발탄'은 우리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었지요.지호락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앗 ! 낙지님은 직접 강의를 들으셨군요. 예전 생각이 나셨겠네요.
아마도 지호락님? 나나님 컨서트에서 뵙던 울산분? 자주자주 영화 학습을 하게 좋은글 많이 부탁합니다.. 꼼꼼이 잘읽고 갑니다..존경하는 유현묵 감독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