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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자 문학의 산실, 청향당(聽香堂)을 찾아서>
집을 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4번 째 집을 짓기 위한 터를 닦고 골격을 세우기 위해 편집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편집회의에서 ‘隨筆’로 경향각처에 수필을 통하여 많은 독자들로 큰 호응을 얻고 계신 수필가 김애자 선생님의 문학과 삶을 조명해 보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가을 볕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클래식 ‘도나우강의 잔물결’이 귀에 흐른다. 필담을 준비하는 새벽 선생님의 서재 ‘聽香堂’에 고요히 흐르고 있을 달빛위에 34번째의 집에 노름마치의 큰 대들보를 상량한다.
<진행자 : 임연규 시인, 김애자 수필가>
Q. 저도 엄정이라는 지명을 생각하면 아련함이 있어요. 엄정을 말할 때 가을 ‘추평’ 봄 ‘가춘’이라고 하는 속설이 있는데요. 선생님 집이 참 아늑하고 좋습니다. 거처하시는 가춘리는 어떤 연관이 있으신지요.
A. 엄정면은 제가 태어난 출생지입니다. 열여섯 살에 고향을 떠나 사뭇 객지에서 살았어요. 그러나 마음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고향’이란 명사만 떠올려도 평화롭던 날들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또 자신이 태어난 생의 첫자리란 특별한 감정도 작용했고요. 그래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와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했었어요.
그러나 쉽게 도시생활을 접을 수 없어 마음속으로만 귀거래사를 읊다가 1999년 6월에 남편이 퇴직을 하자 이를 기점으로 이곳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겁니다.
임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가춘리는 봄이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가춘리에 딸린 세 개의 마을 지명도 첫 동네는 봄이 오는 문턱이라 하여 ‘春門’이라고 지었어요. 그 다음은 ‘佳陽’입니다. 봄볕이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이지요. 그리고 이곳은 술 익는 마을이라고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좋은 것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입니다. 높고 낮은 산맥들이 장엄하게 너울지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부드럽게 자물여 있잖아요. 봄이면 산벚꽃이 온산을 뒤덮습니다.
Q. 제가 알기로는 선생님은 유년시절부터 건강이 안 좋으셔서 힘들게 보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A. 그렇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해요. 돌 안에 두 번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정도로 어머니는 애간장을 녹이며 저를 키웠답니다. 초등학교 입학도 세 번이나 했어요. 봄바람만 쐬면 기관지염이나 폐렴을 앓아 열 살에 입학했어도 3학년까지 둘째 오빠가 자전거로 태우고 다녀야 했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 끝에 선 커다란 미루나무 밑에서 혼자 쓸쓸하게 오빠를 기다리던 일이예요. 그때 사금 빛으로 가물거리던 넓은 운동장이 말할 수 없이 막막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 막막함이 무척이나 지루하고 슬프기까지 했어요.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진학을 포기했던 일이예요. 둘째 오빠가 이런 사정을 알고 대전으로 데려갔어요. 당시 오빠는 대전에서 직장을 잡고 있었을 때라 동생을 곁에다 두고 문창동에 있는 메디칼센터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었던 거지요. 저는 그 시절을 ‘아름답고 슬픈 문창동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오빠가 사다준 전축으로 클래식 음악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고, 좋은 책들을 원하는 대로 사서 읽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2년 후엔 숨어 있던 결핵균이 폐로 전이되어 이번엔 거처를 산골 암자로 옮겨야 했어요. 저의 집안에선 결핵을 앓는 저를 비밀문서 다루듯 했거든요. 오빠들 혼사 길 막힌다고 어머니께서 철저하게 단속을 시켜 가족들 외엔 아무도 알지 못했답니다. 다행이 산골 암자에서 약물과 섭생을 잘하여 완치되었고, 3년 후에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Q. 저는 이곳에서 선생님의 생활을 생각하면 타계하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이 텃밭에 손수 농사를 지으며 대작 「토지」를 완성하셨듯이 선생님도 心田耕作이라 할까 그렇게 글밭을 일구고 있지 않나 싶어요.
A. 저는 산촌으로 들어온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두 번째 수필집 「숨은 촉」에서도 밝혔지만, 산촌으로 들어와 낮은 땅에 엎드려 텃밭을 일구며 하심을 배웠어요. 제 손으로 가꾼 채소를 뜯어다 상을 차리고, 간장과 고추장을 담그고, 입동 무렵엔 배추를 뽑아 절이면서 비로소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존재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아마도 박경리 선생님께서도 시간만 나면 밭일을 하셨던 것은 흙을 만지면 영혼이 정화되고 심성이 그지없이 순해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Q. 모든 예술은 누구나 처음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일생 그 고독한 길로 입문을 하게 되는 데 선생님께서 처음 수필을 쓰게 된 동기를 알고 싶습니다.
A. 저는 60평생을 책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청주에서도 살 때는 독서모임을 만들어 출판저널에 소개되는 책들을 서로 돌아가며 사서 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 청주에 있는 일성문고는 저의 단골서점이었고, 저는 최고의 고객으로 대접을 받았어요. 충청일보사에서 처음으로 백목련이란 여성칼럼난을 만들고 필진을 구할 때 서점 사장이 저를 추천해주었어요.
사실 처음엔 무척 긴장했었어요. 독자 입장에서 책만 읽었지 제가 글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그래 기자에게 우선 세 편을 써 줄 터이니 읽어보고 결정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앉은 자리에서 세 편을 단숨에 써내려갔어요. 그래 다음 날 아침에 전화로 담당기자를 불러 넘겨주었지요.
기자는 월척을 했다면서 무척 좋아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칼럼은 충청일보에서 중부매일로 이어졌고, 동양일보사가 창간되자 동양일보사로 넘어가면서 ‘손바닥 이야기’를 자주 썼었어요. 그러다가 국민일보에서 만든 ‘여의도 칼럼’까지 쓰게 되었지요. 그렇게 칼럼을 쓰다가 충북대학에 재직 중인 김홍은 교수님의 주선으로 1991년 월간수필문학으로 2회를 거쳐 추천완료를 받았던 겁니다. 주변에서 시를 써보라는 분들도 여럿 있었어요. 백수 정완영 선생님은 우정 집으로 찾아와 시조를 쓰기를 권했지만 저는 수필을 선택한 것은 수필은 수신의 문학이란 점이 좋아서였어요. 시나 소설은 나를 숨길 수 있지만 수필은 숨을 곳이 없어요. 때문에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지 않으면 한 편도 쓸 수 없는 것이 수필입니다.
Q. 선생님께서 첫 수필집 ‘달의 序曲’을 출간하신이래 ‘점은 생명이다’를 출간하기까지 여섯 권의 수필집을 내셨어요. 처음 수필집과 최근에 펴내신 수필집과는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수필집은 탈 도시적이면서 그냥 농촌이 아니고 현대문명 탈출을 해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지구의 환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난 봄 정경문학상 수상 자리에서 김우종 선생님께서 수상 선정 이유로 우리에게 좀 생소한 문학언어로 ‘생명수필’의 새 지평을 여셨다고 하셨어요. 수상작인 ‘점은 생명이다’에 대해서 쓰신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A. 「점은 생명이다」는 사실 생태수필만 수록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수필과 비평>이란 잡지사에서 생태수필을 연재로 써달라고 했어요. 어려운 제안이라 며칠 망설이다가 거절을 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도 없이 생태수필을 쓴다는 것은 자칫 억지춘양으로 짜 맞출 우려가 있거든요. 그러나 잡지사에선 「수렛골에서 띄우는 편지」도 친환경적인 수필이 아니었냐며 통사정을 하는 거였어요. 사실 수필 쪽에선 생태수필을 온전하게 쓴 사람이없었거든요. 이런 불모지에서 제가 자연을 성찰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자신감이 서질 않았어요.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알고 보면 커다란 인드라망속에서 인간의 생활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잖아요. 그걸 제대로 찾아서 연재를 해 달라는 것이 두렵고 막막했어요. 잡지사 주간은 삼고초려 하듯 매달려 결국 승낙을 한 것이 생태수필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래 매달 발표할 작품을 쓸 적마다 저는 고시생처럼 공부를 했어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들은 것과 책을 통한 간접체험과 지식을 모아 문학적인 문장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서사와 서정을 날줄과 씨줄로 삼았지요. 책의 제목을 「점은 생명이다」로 잡은 것은 제가 살펴보니 모든 생명이 태어날 때는 하나의 점(알)에서 작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니깐 점은 탄생. 번식, 부활을 상징하는 첫 기호이자 완성, 해체, 그리고 죽음을 의미하는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Q. 선생님 끊임없이 길러 올리는 옹달샘처럼 수필의 소재의 원천이랄까 그 바탕이 있을 듯 하고요. 차기 작품집을 준비하고 있겠지요.
A. 저는 처음부터 출간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적은 없어요. 원고청탁을 받아 쓰다보면 그게 모여 책을 엮게 되곤 했으니까요. 지금도 “그린에세이”란 수필전문지에 “수렛골 단상”이란 천자 이내의 단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2년 계약을 맺었는데 그렇게 모이다 보면 또 책을 엮게 됩니다. 「수렛골에서 띄우는 편지」도 3년 동안 연재 한 것을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어주었어요. 저는 가능한 원고료를 받지 않고 책을 내 주는 조건으로 연재를 맡아요. 푼돈을 받는 것보다 그 편이 더 좋아서요. 지금까지 첫 수필집만 자비로 출판을 했고 나머지는 출판사나 진흥기금을 받아 냈어요. 「점은 생명이다」는 처음으로 충청북도 문화재단에서 3백만 원을 지원금으로 받았지만 나머지 출판비는 연재를 했던 출판사에서 맡아주었습니다.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저는 자신에게 주어지거나 맡겨진 일들은 가능한 순리에 따라 결정합니다.
Q. 선생님을 뵐 때 마다 인자하신 큰 누님을 뵙는 것 같아요. 요즘 참으로 나라가 경천동지할 상황으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어요. 이럴 때 우리 문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저는 어려운 일이 생길 적마다 감동하는 게 있어요. 아무리 경천동지할 일이 생기어도 엄마들은 아침이면 쌀을 씻어 밥을 짓고, 공무원들은 직장으로, 산업근로자들은 일터로 달려갑니다. 또 농민들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손가락 끝이 갈라지도록 일손을 놓지 못하지요. 이렇게 범부들의 한결같은 일상이 이 나라를 경제를 일으켜 세웠고, 땅을 기름지게 했으며, 근대문화를 발전시켜왔던 겁니다. 정치인들만이 저렇듯 당파싸움을 일삼고 있어 배가 산으로도 올라가고 바다로도 내려가고 그러다 이것도 아니다 싶으면 나라 안팎을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안보(安保)가 걱정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문인들은 정치에 대한 실망과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안겨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운 일이 생길 적이면 정 호승 선생의 시 「나뭇잎을 닦다」를 읊조립니다. 그러면 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이게 문학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나기가 되고 가랑비가 되어 시대의 아픔으로 얼룩진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메시지를 안겨주다 보면 우리 스스로도 나뭇잎이 되고 푸른 하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시인이 많은 충주문협 회원들도 이렇게 밥심이 되는 시를 써주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Q. 지난번 정경문학상 수상식에서 제가 느낀 소감인데요. 선생님의 따뜻한 심성이 늘 글 속에 배여 있어요. 문단에 나오셔서 특별한 인연을 맺어온 문우라 할까 잊지 못할 분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A. 임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학벌이 없습니다. 문단에서 저를 이끌어줄 스승도 인맥도 없는 천애고아와 같았지요. 게다가 학벌에 대한 트라우마가 저 스스로를 주눅 들게 했어요. 등단은 했지만 문단행사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습니다. 혼자 쓰는 규방작가였지요. 그런 제가 월간 수필문학에 작품 세 편이 잇달아 발표되자 수필의 종가집이라고 칭하는 수필공원(현재 에세이 문학) 발행인이었던 박연구 선생께서 원고청탁을 보내왔습니다. 겁이 털컥 났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긴장을 풀고 조심스럽게「 독의 만가」를 써 보냈습니다. 그 작품을 계기로 선생께선 계간지임에도 어떤 때는 제게 1년에 두 번씩 지면을 내 주었어요. 작심하고 저를 키워주었던 거지요.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바턴을 물려받은 일현 손광성 선생님과 맹난자 선생님께서 변함없이 저를 아껴주었고, 다른 잡지에도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주선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신아미디어그룹 서정환 회장님이십니다. 이 어르신은 제게 멍석을 깔아줄 터이니 맘껏 글풀이를 해보라며 두 번씩이나 연재를 맡겨주었거든요. 또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시던 유경환 선생님께서도 저를 문우회에 가입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집으로 발간된 「未完의 집」 총평을 자청해서 써 주셨어요. 그게 화제가 되어 수필문단 중심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또 한국수필문학 이사장을 맡았던 유혜자 선생님은 제가 자문을 구할 일이 생기면 기꺼이 도움을 주십니다. 그린에세이 이선우 사장은 평생지기고요. 끝으로 제 인생에 가장 빛을 안겨준 분이 따로 있습니다. 저의 서간집 「수렛골에서 띄우는 편지」의 수신자였던 남민정 선생님은 전화로 제 목소리만 들어도 제 건강상태를 단박에 알아차릴 정도로 저를 사랑으로 지켜주십니다. 이 선생님을 생각하면 가끔은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인연이라서요.
Q. 어디든 지방에 거주하는 문인들은 중앙 문단하고는 변방인데요,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수필부문에 권위 있는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셨어요. 이 특집도 정경문학상 수상 기념으로 선생님 특집을 하게 됐는데요. 수상식에서 고인이 되신 정경 선생님과의 인연을 담담하게 말씀하실 때 저는 가슴이 울컥 했어요 이 지면에 정경선생님을 회고하시는 말씀 좀 해 주세요.
A. 정경 선생은 체구가 큰 여장부입니다. 부산대 약대를 나와 약국을 개업하였고 서울대 법대출신인 남편은 부산대학 법대교수로 재직했었어요. 어느 모로도 부족한 것 없는 부부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슬하에 자손을 두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워낙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 모두 부러워 할 정도로 잘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60대 초반에 남편이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 만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정경 선생은 약국을 거두고 허탈함을 달래기 위해 세계 일주에 나섰어요. 3년간의 방황이었지만 문단에 등단한 이후엔 그 방황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 문학으로 승화되는 보물이 되었지요. 그것도 우연히 서울에 갔다가 지인의 소개로 소설가 임선영 선생이 지도하는 수필문학 강좌를 듣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1년 만에 「라지스탄의 밤하늘」이란 기행문으로 조명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작가들 대다수가 그러하듯 우리도 먼저 지면에 실린 글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활달한 성격이라 소극적인 저와는 상대적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저에게 전화로 소상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곤 했어요. 그는 늘 입버릇처럼 한국에서 최고의 수필지를 만들겠다고 장담을 했어요. 출판사를 시작하기 직전엔 기별도 없이 저의 집으로 찾아와 밤 깊도록 출판에 관한 여러 가지 계획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곤 에세이스트란 격월간행지를 창간하고 1년 만에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녀는 죽기 전날 밤에도 20분 남짓 전화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이튿 날 저녁 무렵에 부음을 받았어요. 참 어이가 없었어요.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가 싶었거든요.
정경 선생이 떠나고 주간을 맡았던 김종완 선생이 뒤를 이어 지금은 어느 잡지보다 탄탄하게 기반을 쌓았습니다. 정경문학상을 제정한 것도 이런 선생의 뜻을 기리기위해서였어요. 이 상의 특징은 그해에 출간된 수백 권의 작품집을 모아 선정하는 겁니다. 처음엔 독자들에게 맡기어 선별시키고 거기서 뽑힌 열 권의 책 중에서 수상자를 결정하는 건데 이때는 평론가들에게 결정권을 넘겨줍니다. 제가 수상자로 결정되었단 소식을 받았을 적에 정경 선생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어요.
Q. 충주문학 창간호가 83년 봄에 나왔고 그때는 단출하게 출발했는데 지금은 70여 분이 각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충주문협 고문으로 이 지면을 빌어서 충주문협 회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좀 해 주세요.
A. 예술가들에게는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최소한 1만 시간은 투자해야 된다는 뜻이지요. 저는 이 말을 생각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업적이 떠오릅니다.
임 선생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란 작은 산악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가난하여 열세 살 때부터 밥벌이에 나서야 했어요. 그가 처음 밥벌이로 들어간 곳이 화가 베로키오가 운영하는 공방이었답니다. 그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지요.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도제수업을 받았어요. 미적 감각을 타고 난 천재는 어깨너머로 베로키오가 그리는 그림에 눈독을 들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서 베로키오의 그림을 모사했고 점차 고대의 훌륭한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사실주의 화풍을 완전히 익혔습니다. 그리곤 20대 중반부터는 자기만의 아우라가 들어 있는 화풍으로 만들어 나갔어요. 그는 또 건축학과 조각은 물론 인체해부학에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당시 동료화가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학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했고, 그림을 두고도 단순한 기억력에 의존해 선례만을 차용한다며 왕따를 시켰어요. 때문에 후원자도 없이 홀로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매진했던 겁니다. 그는 회화를 과학으로 간주하고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사람이 생활하는데 편리한 도구로 쓰일 기계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싸고 있는 신경조직이며 여성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를 사진처럼 그려 놓았어요. 수학과 인문학에도 통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를 두고 발명가, 과학자, 예술가, 그리고 <만능의 천재>란 수사를 붙여주었습니다.
레오나르도에겐 일만 시간의 법칙은 법칙도 아니었습니다. 일생 동안 오로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만 매진했지요. 우리 회원들도 가능한 잠을 줄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기를 권합니다. 이건 일만 시간의 법칙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법칙이기도 하니까요.
Q.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작업실을 갖기를 원하고 실제 그런 분들이 많아요. 선생님의 글쓰기도 대부분 이 서재에서 이루어지실 텐데요. 장서가 모두 선생님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글쓰기의 독특한 버릇이라 할까 서재 이름 설명과 함께 말씁 좀 해 주세요.
A. 책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서재를 따로 마련했습니다. 산 밑이고 양지바른 곳이라 사철 볕이 바릅니다. ‘청향당’은 후원에다 서재를 짓고 얼마 안 되어 불교철학을 전공하신 맹난자 선생님이 우정 찾아왔다가 서재에서 바라다보는 전망이 좋다며 ‘청향당(聽香堂)’이란 당호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소리에서 나는 향기를 제대로 맡지 못하고 있어요. 당호 값을 빚지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방(房)이란 공간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이란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일테면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가려진 공간이잖아요.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래 저는 이 방으로 들어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상태로 저를 내려놓습니다. 달이 밝으면 불도 켜지 않습니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달빛 속에 저를 맡기고, 여름날 장맛비가 따르면 그 빗소리에 또 저를 맡깁니다. 그러면 서서히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더러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방으로 들어오면 책 읽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그냥 제 안에 있는 저를 찾아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그럴 수 없이 심신이 맑아집니다. 글 쓰는 버릇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저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면 바로 책상 앞으로 다가앉지 못하고 엉뚱한 일만 하고 다닙니다. 마음은 어서 컴퓨터를 열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다가 원고마감이 목을 조이면 그 때서야 책상 앞으로 다가가는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매사 소극적인 성격 탓이지 싶어요.
이제 그만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인터뷰 답변이 너무 장황하여 편집에 지장이 없으려나 모르겠네요. 이제 한해도 다 기울어 갑니다. 임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글밭 일구어 글 쓰는 보람 한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Q. 이제 충주문학 34집이 발간될 즈음에는 겨울도 깊어지겠지요.
이 지면을 통해서 선생님의 문학세계와 삶을 성찰해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난 속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아름다운 생을 일궈오신 선생님, 존경합니다...
2017년도 더욱 건강하시고 복된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글도 감동입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멋진소식을 전해주시는 임연규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훌륭하신 선생님들은 충주문협의 힙입니다.
이대로 쭉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