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떠난 동해안 여행기/ 전 성훈
가을 속으로 떠나는 동해안 여행, 봄철 여행이 아닌 깊어가는 가을에 동해안으로 떠나는 여행은 또 다른 설렘이다. 가을에 떠나는 여행은 봄에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봄이 절정으로 치닫는 5월 중순경 길을 나서는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다. 우리 산하 어디든지 물이 오른 나무와 풀, 활짝 핀 봄꽃을 보면 저절로 힘이 솟아나 추운 겨울철에 웅크렸던 활력을 되찾는다. 하지만 가을의 여행은 다르다.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중순은 단풍 구경이 아니라 아름다운 옷을 모두 벗어버린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는 여정이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만추의 가을 여행은 인생의 황혼기를 맛보게 한다.
용띠 동갑내기 천주교 신자인 우리는 2012년 환갑을 맞으며 처음 여행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매년 또는 한 해 걸러 1박2일이나 2박3일씩 우리나라 일주여행을 약속하였다. 그동안 항상 봄철에 여행을 했으나 올해는 봄에 이어 가을에도 길을 나서게 되어 더욱 뜻 깊었다. 재미있고 맛있는 맛집 여행 계획을 짜주는 친구가 봄철 여행에 함께 하지 못해 섭섭했는데 대신에 동해안으로 떠나는 가을 여행을 마련했다. 16년 전 처음 모임을 가질 때에는 50대 초반의 모두 같은 성당 신자였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제는 사는 곳도 제각기이고 이마 주름살도 늘었지만 마음만은 늘 변함없다.
동해안으로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동안 다녔던 여행지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2012년 꽃피는 5월, 1박2일 일정으로 서해안에 다녀왔다. 아산 공세리 성당, 꽃지 해수욕장, 안면도 수목원을 거쳐 대천해수욕장 요나 성당에 들려 미사를 보았다. 대천을 벗어나 변산반도 곰소항을 구경하고 격포항에서 머물렀다. 다음날 변산반도 채석강과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의 하나인 고즈넉한 내소사 길을 걸었다. 서울로 올라올 때는 새만금 방조제를 거쳐 군산의 한적한 길거리에서 매운 홍합굴짬뽕을 먹었고 도고성당에 들렸다. 도고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동갑내기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2015년엔 남해안 여행을 하였다. 함평 나비축제를 보고 비 내리는 목포 유달산을 찾았다. 목포 북항 횟집에서 한 상 잘 차려진 생선회를 맛보고 목포에서 묵었다. 다음날 목포를 출발하여 강진으로 가서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구경하고 해남 땅끝 마을을 찾았다. 해남에서 배를 타고 ‘어부사시사’의 고장 윤선도 선생의 보길도를 찾았다. 보길도를 나오며 굴 생각이 간절하여 완도어촌계를 찾아 양식 굴을 사서 강진으로 넘어왔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고창 선운사 절집 구경을 하고 갑오징어를 먹고 싶은 유혹에 빠져 대천항을 찾았다.
2016년에는 남해안 여행이었다. 순천을 거쳐 소록도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던 비극의 주인공들을 생각하였다. 여수로 건너가 하루 머물고 다음 날 여수 향일암을 구경하고 남해로 갔다. 남해 미조항 부근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말로만 들었던 멸치회와 멸치 쌈밥을 먹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진주촉석루에 올라 말없이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진주성 전투와 논개를 떠올렸다. 진주를 떠나기 전에 진주의 명물 냉면 맛을 보았다.
2018년 올봄에는 경상도 여행이었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에서 멍게비빔밥에 먹고 동피랑 벽화마을을 둘러본 다음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탔다. 미륵산 정상에 올라가 한려수도를 다도해라고 말하는 이유를 실감하였다. 통영 중앙시장에서 횟감을 떠서 거제도 KT수련관에 머물며 한바탕 축제의 파티를 열었다. 다음 날, 입담 좋은 유람선 선장의 거제도 해금강 소나무와 기암괴석 그리고 자연이 빚어낸 만물상에 대한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고, 어느 부부의 땀과 열정과 끈기로 이루어놓은 외도-보타니아 섬을 구경하였다. 거제도를 벗어나 해저터널로 이어진 가거대교(가덕도와 거제도)를 지나 부산으로 가서 동백섬을 일주하였다. 유감스럽게 제철이 아닌지라 동백꽃은 볼 수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엔 부산을 벗어나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많은 보물과 국보를 가진 법보사찰 통도사는 고색창연하였다.
그리고 올해의 두 번째 여행인 가을여행이다. 첫째 날, 서울을 출발하여 강릉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서 간단히 늦은 아침을 먹고 경상북도 온양 간절곶을 찾았다. 강릉 정동진, 포항 호미곶과 함께 동해안 일출로 유명한 간절곶은 동해안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라고 한다. 간절한 염원을 바란다는 뜻인지 한자 간절곶(艮絶串)의 모양이 어딘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평일이라 관광객이 거의 없는 이곳은 거제도 ‘바람의 언덕’보다 훨씬 경치가 좋았다. 오후 3시 넘어서 간절곶 한 식당에서 처음 먹어본 ‘물메기 매운탕’지리는 맛이 담백해서 좋았다.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맛이 좋다고 하였다. 맵고 톡 쏘는 맛 대신 담백한 맛이 입안에서 향내가 났다. 서울을 출발할 때 머물 곳을 정하지 않았다. KT출신 친구가 신청한 경주 KT수련관 입실이 가능하다고 연락이 와서 자동차 안에서 모두 박수를 치고 환호하였다. 이른바 가성비가 높은 KT수련관을 이용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 수련관에 도착하여 사우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늦은 점심 탓에 저녁 대신 술자리를 마련하고 실컷 수다를 떨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둘째 날, KT수련관의 저렴한 아침 식사를 맛보고 불국사를 찾았다. 65세 이상은 입장료가 무료라는 안내문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깊어가는 가을 이른 아침 조용한 절집의 운치를 감상하였다. 불국사 주차장 앞에서 파는 군밤과 구운 은행을 사서 먹어보니 맛이 매우 고소하였다. 불국사를 벗어나 포항 구룡포 호미곶을 찾았다. 호미곶의 상징인 바다에 떠있는 주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구룡포의 명물 과메기에 소주 한 잔 씩 나누며 새참을 즐겼다. 청어가 잡히지 않아 청어과메기는 없고 꽁치과메기뿐이었다. 게다가 모두 내장을 말라낸 과메기였다. 내장이 들어있는 과메기를 먹어본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20년 전 처음 맛보았던 과메기는 내장이 삭은 꽁치과메기로 그 냄새가 매우 역겹고 지독하여 먹기가 무척 힘들었다. 호미곶을 뒤로하고 우리나라의 가장 멋진 드라이브 코스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오른편으로는 동해의 푸른 파도가 넘실넘실 거리고 왼쪽으로는 단풍이 남아있거나 이미 낙엽이 진 숲과 추수가 끝난 논에 사료용으로 만드는 볏짐을 하얀 비닐로 둥글게 말아놓은 싸이로짚이 많이 보였다. 영덕 삼사해상공원에 들렸다. 삼사(三思)는 이 고장에 들어올 때, 살 때, 그리고 떠날 때를 생각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영덕을 지나가면서 왼쪽으로 멀리 칠보산이 보이자, 2012년 5월 영덕 고래불 해변에서 강릉 옥계해수욕장까지 나그네가 되어 혼자 걸었던 때가 생각났다. 영덕을 지나 죽변항을 찾았다. 죽변항 한 횟집에서 대게와 고래고기 맛을 보았다. 고래고기 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대게 발라 먹는 일이 귀찮아 대게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밑반찬에 소주만 들이켰다. 하지만 친구들은 싱글벙글하면서 대게를 잘 발라서 먹었다. 죽변항을 떠나 저녁 무렵 애국가 일출 장면을 찍은 추암 촛대바위를 찾았다. 일출대신 일몰일 때의 촛대바위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강릉으로 올라가 왕산 한옥마을에서 숙박하였다. 한적한 곳에 떨어져 있는 왕산 한옥마을은 어찌된 일인지 그 큰 한옥마을에 머무는 손님은 우리일행뿐이었다.
셋째 날, 왕산 한옥마을을 출발하여 주문진으로 향했다. 아침식사는 주문진항 곰치국(물곰국)을 먹기로 하였다. 그동안 동해안을 많이 다녀갔지만 곰치국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해 늘 아쉬움이 남았다. 묵은지를 잘게 썰어 넣은 새빨간 곰치국은 매워 보였다. 혀끝이 알싸한 곰치국물을 몇 숟가락 입에 떠 넣으니 입술에 착 달라붙는다. ‘음, 국물이 감칠맛이 있구나!’ 그리고 입으로 떠 넣은 곰치살덩어리, 양지바른 언덕위에 떨어지자마자 사르르 녹는 함박눈처럼 입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곰치살 맛을 느끼고 한 마디 던졌다. ‘여태껏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곰치국이다.’
곰치국을 먹고 나서 기분 좋게 38휴게소를 거쳐서 양양 낙산사, 하조대, 고성 통일전망대를 찾았다. 38휴게소 앞바다에서는 늦가을 추위에도 불구하고 파도타기를 즐기는 서핑 매니아들이 보였다. 그들의 용기와 젊음이 참 부러웠다. 해수관음상과 의상대가 있는 낙산사, 10여 년 전 산불로 절집 대분이 소실되는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이제는 화마로부터 회복의 단계에 들어서 절집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조대해수욕장은 가 보았으나 하조대는 처음이었다. 조선왕조 창업 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잠시 은둔하면서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꾀하는 일을 모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통일 전망대 밑에 커다란 성모상과 그 보다 더 큰 부처상이 북녘 땅을 향해 서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서 있는 성모상과 부처상에게 끝없는 미망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빌었다.
고성 통일전망대 구경을 마치고 고성에서 가장 맛있다는 메밀막국수 집을 찾아갔다. 산속으로 한참 들어갔는데 중간에 인가가 보이지 않았다. 메밀막국수보다 더 맛있는 게 투박한 강된장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조금 팔든지 한 두 숟가락만큼 줄 수 있나 물어보니, 된장 담그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팔지도 줄 수도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메밀막국수 집을 떠나서 옛 진부령 길을 달렸다. 양양-서울간 고속도로가 생긴 이후로 옛 진부령을 찾는 자동차가 거의 없어 한산했다. 한가한 길을 달리는 자동차 창문을 열고 가을바람을 맞으며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는 옛날 노래를 불렀다.
이번 동갑내기 여행은 하나의 주제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구름 따라 떠난 여정이었다. 아무 속박 없이 길을 가다가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때에 관계없이 아침이나 점심이나 술 생각이 나면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한 모금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행한 친구들과 흉허물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할 수 없는 초로의 늙은이들의 신세에 대해 끊임없는 수다를 떨면서 박수 치고 깔깔거리며 웃고 또 웃었다. 너무 많이 웃어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마음의 상처와 쳐다보기도 싫은 이상야릇한 요즈음 세상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즐겁게 보냈다.
여행은 가슴 떨리는 추억을 만드는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거울이다. 또한 낯선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인간의 삶과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텃밭이다. 여행은 떠나고 싶지만 과연 떠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의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그냥 떠나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 대문을 나서는 순간 여행이 시작된다. 몸담아 사는 곳이 힘들고 괴롭다 해도 그곳에서 살짝 한 발자국 옆으로 내밀 수 있는 용기를 내면 그게 바로 나그네 길이요 여행의 시작이다. (201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