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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능원묘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김옥균선생 유허(충남 기념물 13-1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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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선생 묘역 전경 |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의 묘이다. 김옥균의 호는 고균, 시호는 충달공으로 조선 조 철종 2년(1851) 1월 23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종 9년(187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1884년 조국 개화를 위해 갑신 개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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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하단 주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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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내 석물 모습 |
1894년 한. 청. 일 3국의 제휴 위한 삼화주의를 제창 동양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청국의 실력자 리홍장과 의논하고자 텐진을 방문하던중 동년 3월 28일 상해 여관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으며 시체는 본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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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선생 묘 |
▲ 묘역 하단에 위치한 사당 |
갑오경장으로 개화당내각이 조직된 후 총리 김홍집등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 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 추증(追贈), 익호(謚號)는 충달(忠達)이다. 묘는 일본 동경 청산외인 묘지(靑山外人 墓地)에서 1914년 9월 11일 의발(衣髮)을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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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분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김옥균선생 유허(충남 기념물 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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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선생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로, 김옥균 생애비가 있는 곳이다. 원래는 김옥균 생가를 비롯하여 8∼9호의 민가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화재로 모두 없어졌다. 김옥균(1851∼1894)은 조선시대 말엽의 정치가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외치며 개화사상을 주장하였다. 고종 21년(1884)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만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에는 한·중·일 삼국의 제휴라는 삼화주의를 주장, 청나라의 실력자 리홍장을 만나러 상해를 방문하던 중 수구파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청나라와 수구파 세력에 의해 빼돌려진 시체는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
갑오개혁(1894)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후에 총리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었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의 청산외인무덤에 묻혔는데,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 |
김옥균 시신, 옥천 청산에 매장됐었을까 충북일보 조혁연기자 2014-01-21
현재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묘는 일본 동경시내 아오야먀(靑山) 외국인 묘역과 진정사(眞淨寺) 경내, 그리고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무덤은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오호,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때를 만나 비상한 공이 없이 비상한 죽음이 있었다. 시체는 고굴에 돌아갔어도 사지가 찢기는 욕을 당하였구나.'-<아오야마 김옥균 묘지명 일부> |
김옥균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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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살표 윗 부분에 김옥균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