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경
선생님의 책 "꽃은 제힘으로 피어나고" 중에서 '영상에 담은 시간'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고 쓰신 글이었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그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고 읽었습니다.
제 소년시절에 즐겨 찾던 극장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끝까지 버텼던 극장 중의 하나가 광주극장이었습니다. 자체적으로는 운영이 어려워 지자체의 보조를 받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개봉관을 찾기도 어렵고 설혹 찾았다 해도 하룻만에 내려야 하는 소위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들을 상영한다는 조건으로 말이죠. 관객이 거의 없는 그런 영화 중의 하나가 위대한 침묵이었고 역시 광주극장에서 상영했습니다.
관객은 가뭄에 콩나듯이 앉아 있었고 극장은 나간 집처럼 을씨년스러웠고 난방이 안 돼 있어 영화 보는 내내 이가 부딪힐 정도로 추웠습니다. 오죽하면 극장측에서 담요를 하나씩 나눠주었고 우리는 그 담요를 뒤집어 쓰고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받은 지배적 인상 중의 하나가 추운 돌집에 사는 수도사들은 왠지 굉장히 추워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조경선생의 글을 읽고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글은 흔한 영화평이 아니었습니다. 작가의 글에는 미장센이니 롱테이크니 누벨바그니 하는 전문 용어를 쓰지 않고도 영화를 심도있게 해석해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흔히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하여 글을 씁니다. 그것을 텍스트로 하여 쓰인 글을 비평이라고 합니다. 영화 역시 삶을 소재로 하고 그 영화를 텍스트로 삼아 쓰는 글을 영화 비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글은 영화만을 대상으로 썼다기보다는 영화 속의 삶에 더 천착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영화를 다시 보면서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는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얼마만큼 해석해내느냐는 각자의 역량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은 섬세하게 읽었고 재해석된 의미를 견결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단순히 감독의 의도를 해석했다기보다는 카메라 앵글에 잡힌 삶과 자연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새로운 의미를 재발견했다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또 다른 창조를 유발하는 힘은 또한 모든 참된 예술에 숨겨져 있는 의도치 않은 잠재력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품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의 믿음이 어떠하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그곳이 폐쇄된 공간이라면 그들과 나머지 인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단계를 암시하는 입전수수도 결국 사람 사는 시장으로 나아가 손을 내밀라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물론 영화를 찍도록 허용한 조건 중의 하나가 일체의 종교적 질문이나 해석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 수련이 어떤 목표를 지향하며 어디에서 그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늙은 수도사들과 병상에서 임종을 맞는 듯한 한 수도사의 모습으로 미루어 그들의 수행은 죽음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짐작할 뿐입니다. 이렇게 영화나 문자로나마 외부에 알려지지 않으면 그들의 존재 의의는 영원히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신비 그 자체로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나는 이조경 작가의 아름다운 다음 글에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직으로 내려다본 파문들의 영상미가 훌륭하다. 아무리 작은 빗방울이라 할지라도 떨어지는 순간, 수면은 그것을 받아 안으며 동심원을 그린다. 그 어떤 것이라도 물 위에 떨어지면, 물은 바로 그 순간 제 품을 열어준다. 존재의 세계도 물과 같지 싶다. 아무리 사소한 존재일지라도 존재의 자리는 언제나 열리고, 그 존재는 주변에 어떤 식으로든 파문을 남긴다. 감독은 긴 시간을 할애하여 빗방울이 떨어지는 수면을 비춰준다.
작가의 새로운 수필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그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인문학적 열정으로 이어지고, 단단하고 완벽한 글들이 하나 하나 그 결실로 맺혀져 있었습니다.
-정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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