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가 많고 기후가 좋고 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 바르셀로나.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이 도시 곳곳에서는 춤과 음악과 미술을 만날 수 있다. 휴일과 휴가를 최대한 즐기는 이곳 사람들은 축구시합이 열리는 날엔 광란의 도가니에 빠진다.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바르셀로나를 찾은 지 4일째 되던 날 기자는 한국의 서울역에 해당하는 산츠역에서 북쪽의 소도시 블라니스행 국철을 타고 바르셀로나 교외로 나가봤다. 출발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림 같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르셀로나를 감싸고 있는 지중해다. 물빛만 봐서는 한국의 동해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다르다. 우선 동해에 비해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동해가 남성적이라면 지중해는 여성스럽다. 해변의 풍광도 적잖이 다르다. 해안선이 꾸불꾸불하지 않고 거의 직선으로 뻗어있다. 이런 해변이 수백km에 이른다. 기찻길 발목까지 바닷물이 차오른 구간도 꽤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장에서 사람들은 공놀이를 하거나 일광욕을 즐긴다. 스스럼없이 입맞춤을 하고 껴안고 해변에 나뒹군다. 더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도 보인다. 해변엔 야자수같이 잎이 큼지막한 나무들이 넉넉한 품으로 서있다. 캠핑용으로 보이는 통나무집, 그리고 아주 가끔씩 카페가 눈에 띈다. 바다에서는 요트들이 커다란 새처럼 빠르고 강하게 물살을 가른다.
바르셀로나는 해마다 여름에 인구의 5배에 이르는 관광객을 맞는다. 주로 중부 및 북부 유럽 사람들이다. 따뜻한 해변이 그리운 이들에게는 바다구경이 시내관광 못지않다. 일부 해변엔 나체촌까지 형성돼 있다. 피부암에 좋다는 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바르셀로나에서 해안을 따라 죽 올라가면 프랑스 남부지방에 닿는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빈민층을 빼고는 다들 별장을 갖고 있거나 임차해 쓰고 있다. 주말이나 휴가 때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별장이 밀집한 지역이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블라니스에 이르는 해안지구다. 이곳 지형은 앞에는 바다가, 뒤로는 나즈막한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블라니스까지는 약 한 시간 반 가량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바르셀로나와 블라니스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한 역(Vilassar de Mar)에 내려 잠시 해변을 거닐었다. 이미 해는 고개를 뒤로 꺾은 터였다. 바다는 저녁식사를 하듯 시나브로 노을을 베어먹고 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바르셀로나의 밤이 고양이 눈빛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여자들이 예쁘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강렬한’ 느낌 다섯 가지. 첫째, 미녀가 많다. 미의 기준이 뭐냐고 따진다면 기자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저 ‘보편적 관점에서’라고 둘러댈 수밖에. 눈이 크고 깊고 콧날이 오뚝하며, 하체가 길고 전반적으로 늘씬한 편이다. 이런 얘기는 바르셀로나에 살거나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현지에서 숙박업을 하는 교민 K씨,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국제무역에 종사해온 B씨, 미국 한 언론사의 서울지국장인 D씨, 가정주부 L씨 같은 사람들이다. 특히 L씨는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여자들이 예쁘다”고 찬탄을 늘어놓았다.
둘째, 기후가 그만이다. 바닷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살기 좋은 기후의 대명사’인 지중해성기후에 폭 싸여 연중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은 15.8℃. ‘해를 팔아먹고 사는 도시’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일년 내내 햇볕이 따뜻하다. 여름과 가을에 일시적인 우기가 있지만 한국처럼 장마가 지는 경우는 없고 내리더라도 금방 그친다. 여름은 평균 25℃로 적당히 덥고 겨울은 10℃ 안팎으로 따뜻한 편이다. 그렇다고 바르셀로나에서 눈구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차를 타고 한두 시간 교외로 나가면 스키장을 만날 수 있다.
셋째, 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다. 사그라다 패밀리아 성당을 비롯한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화려한 건축물들이 도시 전체에 예술적 생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피카소미술관, 미로미술관, 타피에스미술관 등 도심 곳곳에 자리잡은 대형 미술관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거리마다 악사와 행위예술가, 노래 부르는 사람, 춤추는 사람 등으로 늘 소란스럽고 흥겨운 분위기다.
넷째, 사람들이 수다스럽고 친절(?)하다. 전철에서든 버스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쉴새없이 떠들어댄다. 외국인이 말을 걸었을 때 말이 안 통하면 웬만하면 입을 다물거나 피하기 마련인데, 상대방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 말로 열심히 설명한다. 공항이나 역 안내소, 호텔과 식당 등 몇몇 장소를 빼면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다섯째, 정말 많이 먹는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사람들,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다. 식사 횟수도 많을 뿐더러 시간도 길다. 일하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일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먹는 데 바치는 정열이 대단하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북동쪽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주(州)의 수도다. 카탈루냐주의 인구는 스페인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약 600만명. 그중 70%가 바르셀로나에 몰려 있다. 카탈루냐는 면적은 스페인 전체의 6.5%에 지나지 않지만 국민총생산량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스페인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지방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바르셀로나는 한마디로 카탈루냐의 보물이다. 흔히 수도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 제2의 도시로 불리지만, 경제적으로는 제1의 도시다. 일찍이 섬유공업이 발달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화학·금속공업도 자리를 잡았다. 스페인 내란(1936∼1939년) 후 한동안 침체에 빠지기도 했으나 관개시설이 갖춰진 에브로강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산맥(프랑스와 경계)의 수력으로 자동차와 항공기 산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기를 띠면서 번영을 지속했다. 가죽 제조업의 발달로 구두나 가방값이 싸고, 유리나 세라믹, 타일 등을 이용한 공예품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다.
스페인에는 모두 17개의 자치정부가 있는데, 예로부터 독립성향이 가장 강한 주가 바로 카탈루냐다. 지금도 카탈루냐주에서는 공용어로 스페인어보다 카탈루냐어를 더 많이 쓴다. 중세와 근대에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19세기 말 스페인 전역을 휩쓴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스페인 내란 당시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내란에서 승리한 프랑코의 군부세력은 이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저항기질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하지만 카탈루냐지방 사람들은 1977년 종신 총통 프랑코가 죽은 직후 기어이 자치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1992년에는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 획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로 올림픽을 치렀고 그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기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투우장이었다. 투우 경기는 특정한 날에만 열리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에는 투우장이 두 군데 있다. 에스파냐 광장 주변에 있는 라스 아라네스와 사그라다 패밀리아 성당에서 가까운 모뉴멘탈이 그곳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큰 역인 산츠역 내 관광안내소 직원은 이 지역 언어가 반쯤 섞인 영어로 “라스 아라네스 투우장은 폐쇄된 지 오래됐고, 모뉴멘탈은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으니 직접 찾아가 보라”고 일러줬다. 바르셀로나에는 전철이 잘 발달돼 웬만한 데는 전철로 다 찾아갈 수 있다. 5호선까지 있는데, 시내 전구간 요금이 160페세타로 동일하다(2001년 10월 현재 1페세타는 약 7원). 10회분인 할인티켓 T10(885페세타)을 끊으면 전철과 버스를 다 탈 수 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햇볕 즐기기
전철 이용방법은 서울과 비슷한데, 큰 차이점은 좌석 배치다. 한국은 여러 사람이 구분 없이 앉는 집단좌석 형태지만 여기선 모든 좌석이 개별용이다. 2인용 의자가 기본인데, 이것은 독립적인 형태의 1인용 의자 두 개를 조금 간격을 떨어뜨려 연결해 놓은 것이다. 옆에 앉은 승객의 엉덩이나 허리가 붙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셈이다. 바르셀로나 전철에는 이런 2인용 의자를 마주보도록 설치한 4인용 좌석이 주종을 이룬다.
산츠역에서 5호선을 타고 사그라다 패밀리아역까지 간 다음 2호선으로 바꿔 한 구간만 더 가면 모뉴멘탈역이다. 역에서 나오자 투우장이 곧 눈에 들어왔다. 성벽과도 같은 거대한 원형 체육관인데, 빙 돌아가며 철문이 여러 개 설치돼 있다. ‘유감스럽게도’ 투우장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여대생으로 보이는 행인에게 물어보니 시즌이 막 끝나 올해는 더 이상 경기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투우사들은 한국의 프로씨름꾼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다. 바르셀로나가 스페인에서 가장 잘사는 도시인 까닭에 상당수 1급 투우사가 이곳에 몰려 있다고 한다. 여기에도 한국의 ‘연예가중계’ 같은 TV 프로그램이 있는데, 투우사의 연애 스캔들이 주요 화제다. TV에서 경기마다 중계하는데, 한 번 경기할 때마다 한두 명의 투우사가 소에 받혀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생긴다. 투우장 건너편 작은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대사나 노래 없이 춤으로만 진행하는 무용극이다. 무용수는 여자 셋에 남자 하나다. 그들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부드럽고 우아하게 때론 격렬한 몸짓을 보여줬는데, 대사가 없어서 그런지 표정 연기가 볼 만했다. 흥겨운 음악이 흐를 때면 관객들이 박수로 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가족 단위의 관객이 많았다.
이런 야외공연은 바르셀로나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 도시에는 스페인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광장이 발달해 있는데, 광장에서는 여러 형태의 야외공연을 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 시내는 카테드랄(대성당)을 비롯한 옛 건축물이 잘 보존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공간인 카탈루냐광장이다.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숲으로 둘러싸인 이 광장은 바르셀로나 관광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외국인을 위한 순환관광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돌아온다. 카탈루냐광장역은 국철과 전철 1호선, 3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기도 하다. 광장 바로 옆에 엘 코르테 잉글레스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자리잡고 있다. 수백 마리의 비둘기가 광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사람들은 나무의자나 보도블록에 앉아 햇볕을 즐기거나 공원을 산책한다. 한쪽에선 남미풍의 악단이 비틀스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다들 반팔 차림이다. 특히 여자들의 옷차림이 경쾌하고 대담하다. 하나같이 아랫배를 과감하게 드러낸 것이 인상적이다. 가슴 가리개에 핫팬츠만 걸친 여자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아예 웃옷을 벗은 남자도 있다. 바르셀로나의 10월 평균기온은 17.6℃. 늦가을과 겨울 날씨는 한국의 봄과 비슷하다. 11월이 13.5℃, 12월이 10.3℃, 그리고 가장 추운 1월이 9.5℃에 지나지 않는다. 10월 하순인데도 오전 11시만 되면 햇볕이 눈부시다. 그렇지만 땀을 흘릴 정도의 더위는 아니다.
카탈루냐광장에서 콜럼버스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항구까지 곧게 뻗은 길이 바로 이 도시에서 가장 번화가인 람블라스거리다. 전철 두 구간 거리다. 람블라스란, ‘물이 흐른 흔적’이라는 뜻으로 원래 시내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였다. 서울의 대학로와 인사동을 연상시키는 람블라스거리는 크게 3등분돼 있다. 한가운데는 폭 30m 가량의 보도가 있다. 그 양옆으로 각각 1차선 일방도로가 뻗어있다. 도로 바깥으로는 호텔, 레스토랑, 바, 옷가게, 환전소, 기념품 가게, 극장 등이 줄지어 있다.
람블라스 거리의 열기
구경거리가 즐비한 곳은 한가운데 있는 보도다. 서울의 명동거리처럼 사람들이 발에 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각양각색의 마임가다. 이들은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있다가 사람들이 돈통에 동전을 던지면 재미있는 몸짓을 보여준다. 예컨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빛으로 분장한 마임가는 손에 트럼펫을 든 채 서있는데 돈을 건네면 약 20초간 트럼펫을 연주했다가 다시 원래의 부동자세로 돌아간다. 정지동작과 순간동작이 워낙 정교해 처음 보면 사람인지 조각상인지 헷갈릴 정도다.
마임가들 못지않게 인기를 끄는 것은 연주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독특한 자세로 연주한다. 고둥 모양의 긴 나무 악기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가 하면 원숭이나 개를 앉혀놓고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한다. 아코디언에 맞춰 탱고를 추는 남녀도 있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수금원이 구경꾼들에게 모자를 내미는데, 돈 안 낸다고 인상 찌푸리는 일은 없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도 눈요깃거리.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뽐내고 있다. 그밖에 유리판에 그림을 그려 파는 청년, 야바위꾼처럼 카드패를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젊은 여자, 웃통을 벗은 채 칼을 입 속 깊이 넣는 노인 차력사의 모습이 이채롭다. 꽃가게와 노천카페도 성업중이다. 람블라스거리는 새벽녘까지 젊은이들의 입맞춤과 포옹의 열기로 가득하다.
바르셀로나에는 유난히 거리악사, 특히 기타 연주가가 많다. 람블라스거리 외에도 관광지라면 어디든 거리악사를 만날 수 있다. 광장과 지하도에는 늘 기타나 바이올린 소리가 울리고, 레스토랑이나 카페 또는 바 주변에서도 기타를 연주한 후 웃는 얼굴로 돈을 요구하는 악사를 흔히 볼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여럿이 어울려 춤추기를 즐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속무용인 사르다나다. 이 춤은 토·일요일에 특정장소에서만 볼 수 있다. 기자는 ‘분수 쇼’를 보기 위해 람블라스거리에서 멀지 않은 카테드랄지구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사르다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사르다나는 여러 사람이 원을 만들어 악대의 반주에 맞춰 3박자 스텝을 밟으며 빙글빙글 도는 춤이다. 처음엔 느리지만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외국인도 소정의 ‘입장료’를 내면 대열에 끼어들 수 있는데 발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사르다나 스텝을 맞추면서 오랜 세월 지켜온 독립정신과 특유의 연대감을 확인한다고 한다.
바르셀로나는 예술의 도시답게 오페라나 발레, 연극, 영화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 중심지가 바로 람블라스거리와 인근 골목이다. 람블라스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리세우극장이다. 국내외에서 열성적인 오페라 팬이 몰려들기 때문에 예매를 해두지 않으면 공연을 보기가 어렵다. 기자가 둘러본 날엔 ‘맥베스’가 공연되고 있었다. 극장이 밀집해 있기로는 람블라스거리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파라렐거리가 더하다. 이 거리에 있는 극장들에서는 촌극, 고전극, 현대극, 플라멩코쇼 등이 밤늦도록 펼쳐진다. 한편 영화에 대한 관심도 커 바르셀로나 중심가에만 100여 군데의 영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도 부쩍 늘어난 시네마콤플렉스, 곧 하나의 건물에 몇 개의 영화관이 있는 대형극장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스페인의 밤을 타오르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플라멩코쇼다. 남쪽 안달루시아지방의 세비아가 본고장이긴 하지만 솜씨 좋은 악단과 무용수는 바르셀로나에 몰려 있다는 게 정평이다. 바르셀로나에서 플라멩코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백승구(34)씨는 “플라멩코는 원래 춤이 아니라 음악”이라며 “우리나라의 창과 비슷한 집시들의 노래에서 출발했는데, 박수장단과 기타 연주 등이 더해지고 나중에 춤이 결부됐다”고 말했다.
백씨에 따르면 플라멩코쇼가 가장 상업적으로 발전한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다. 이유는 어느 도시보다 플라멩코 연기자들에게 대우를 잘해 주기 때문이다. 기자는 호텔 안내대에 비치된 플라멩코쇼 관람권을 사서 밤 10시 공연을 봤다. 값은 4000페세타. 로스 타란토스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멩코 공연장이다. 바를 겸하고 있는 이런 형태의 공연장을 이곳에서는 타블라오라고 부른다. 공연을 보는 동안 술이나 음료수가 무료로 제공된다.
공연팀은 남자 기타 연주자 2명과 여자 가수 1명, 여자 무용수 2명 및 남자 무용수 1명으로 구성됐다.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됐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여가수의 노래는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팔 동작이 크고 손을 허리에 대고(여자 무용수의 경우 한 손으로 치마를 쳐들면서) 발을 구르는 동작이 무척 역동적이었다. 남녀 무용수의 신기에 가까운 탭댄스에 관객들은 열광하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의 예술을 논하면서 안토니 가우디를 빼놓는 것은 스페인의 문화를 다루면서 투우나 플라멩코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태양과 더불어 바르셀로나를 살찌우는 일등공신이 바로 가우디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후 80년이 다 돼가는 지금 가우디가 남긴 작품들은 바로셀로나 관광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사그라다 패밀리아 성당. 170m 높이의 8개의 거대한 뾰족탑으로 상징되는 이 성당은 가우디 최후의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우디는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1883년부터 관여했는데, 그때부터는 모든 공사가 가우디의 설계대로 진행됐다. 특이한 것은 지금도 건축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 워낙 디자인이 정교하고 복잡한 데다 교회재단의 만성적인 적자로 공사가 자주 중단되다보니 완공이 한없이 늦춰진 것이다.
가우디의 영혼
독신으로 지낸 가우디는 반평생을 이 공사에 바쳤다. 실제로 1914년부터는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고 작업실도 현장 사무실로 옮기고 숙식도 이곳에서 인부들과 함께 했다. 1926년 가우디는 일터인 이 성당 앞에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전차에 받혀 죽었다. 사그라다 패밀리아 성당은 앞으로도 200년 후에나 완공될 예정이다. 건축 재원은 관광객의 관람료로 충당하고 있다. 1년에 약 100만명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입장료가 850페세타이니 연 8억5000만페세타(59억5000만원)의 관광수입을 올리는 셈이다.
전철 2호선 또는 5호선 사그라다 패밀리아역에 내리면 곧바로 성당 입구다. ‘어떻게 저렇게 기묘하고 웅장한 탑과 문과 창을 돌로 빚을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솟구친다. 한쪽에선 흉물스러운 철골이 그물망처럼 퍼져 있고 기중기가 움직이는 등 어수선한데, 이 신비의 성당은 경외스럽기만 하다. 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꾸불꾸불한 돌계단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다. 사이사이에 있는 돌창문 밖으로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조각나 있다. 성당 뒤편에는 커다란 호수가 잠자듯 누워 있다. 참으로 가우디의 영혼이 바르셀로나 창공에 떠도는 듯한 느낌이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에 지어놓은 건축물은 시내와 근교를 포함하면 모두 12개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구엘공원에 가보면 왜 바르셀로나가 ‘가우디의 도시’로 불리는지 실감하게 된다.
전철 3호선 발카라역에서 내려 15분 가량 비탈길을 오르면 공원 뒤쪽 입구가 나타난다. 십자가가 세워진 돌탑에 올라서자 바르셀로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후 3시.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햇빛이 강렬하다. 원래 이곳은 가우디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구엘의 사유지였다. 가우디는 여기에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공사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계획한 60여 개의 주택 중 두 채만이 건설됐다. 이후 소유주가 바르셀로나시로 바뀌면서 1922년 시립공원이 되었다.
이 공원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모자이크 장식과 동굴 형태의 산책로다. 거기에 수십 개 기둥이 받치고 있는 거대한 돌 쟁반 모양의 휴식공간과 인체 특징을 고려해 만든 돌 벤치, 요술의 집을 연상시키는 주택, 알로에를 비롯한 인공수림이 조화를 이뤄 공원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 같은 느낌을 준다.
오후 2시면 문 닫는 관공서
구엘공원에서 카탈루냐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갈 때와 달리 버스를 탔다. 한국 버스와 다른 점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먼저 맨 앞자리에 아동용 좌석 2개가 따로 마련된 것. 이 좌석은 일반 좌석보다 작고 별도의 보호손잡이가 설치돼 있다. 좌석은 전철과 마찬가지로 모두 1인용 의자다. 또 장애인 보호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타고 내릴 때는 버스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지면서 깔판이 미끄러져 나와 편의를 제공한다.
그밖에 가우디의 걸작으로는 작은 궁전과도 같은 구엘 저택, 건물을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놓은 듯한 카사 밀라, 해골 눈구멍 같은 창문 탓에 밤이 되면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카사 바트요 등이 꼽힌다. 가우디 외에도 바르셀로나에는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바로 피카소, 미로, 달리 등이다. 안달루시아지방 말라가에서 태어난 파블로 피카소는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해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최초의 개인전도 바르셀로나에서 열었다. 현대 미술의 또다른 거장인 호안 미로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미술학교를 다녔다. 바르셀로나 근교인 피게라스 출생인 살바도르 달리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일찍이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전철 4호선 하우메역에 내려 5분 정도 걸으니 주택가 골목 안쪽에 피카소미술관이 보였다. 습작 형태의 초기작품이 많았다. 특히 인물 초상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어둡고 침울한 느낌이다. 미술관 1층과 주변상가에는 ‘피카소 상품’을 둘러보는 관광객의 발길이 넘친다. 이제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제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얘기를 끝맺자. 먼저 식사문화. 현지에서 언어연수중인 교민 박현아씨는 “스페인의 식사문화란 한마디로 많이 먹고 많이 떠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나 직장에서는 하루 세끼의 식사시간 외에 두 차례의 간식시간이 따로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시간이다. 보통 오전 8시쯤 빵이나 우유 등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오전 10시∼11시는 간식시간이다. 바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등을 먹는다. 10시반이 되면 동네 바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찬다.
오후 1시에 시작되는 점심시간은 오후 4시까지 이어진다. 점심 후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라는 풍습에서 유래된 것인데, 대부분 먹고 떠드는 시간으로 이용된다. 이 시간에는 직장은 물론이고 관광지 가게나 큰 쇼핑몰, 식당을 빼놓고는 일반 가게도 다 문을 닫는다. 오후 대여섯시엔 다시 간식시간을 갖는다. 오후 8시반. 하루의 마지막 식사인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저녁식사는 보통 10시 안에 끝나지만, 늦으면 11시, 12시까지도 이어진다.
식사량도 대단하다. 점심이나 저녁 등 정식은 보통 네 단계에 걸쳐 먹는다. 처음엔 야채나 스프 또는 스파게티를 먹는다. 이어 고기나 생선 등의 본 요리를 든다. 그것이 끝난 다음에는 케이크나 과일을 먹고, 마지막으로 커피나 차 등 음료를 마신다. 바르셀로나에서 업무시간은 식사시간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오전 9시∼오후 1시반 또는 2시, 오후 4시∼오후 8시가 업무시간이다. 하지만 관공서와 은행, 우체국은 오후 2시면 문을 닫는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일은 언제 하냐는 것. 이와 관련해 교민 김현욱(37·새누리교회 목사)씨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하루에 되는 일이 없다. 대신 주어진 시간 내에 정확하고 꼼꼼하게 일한다. 전화를 신청해 설치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그렇지만 매끄러운 일솜씨를 보고 감탄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식사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킨다. 손님이 뭘 사려해도 문을 닫아걸고 팔지 않는다. 처음엔 답답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여기 사람들이 정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에선 뭐든지 서두르고 쫓기고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니 삶에 여유가 없다.”
식사문화 못지않게 부러운(?) 것은 휴일과 휴가 사용 풍토다. 토·일요일을 뺀 연간 공휴일 수는 16일이다. 성모승천일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등 기독교 관련 휴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순절을 앞두고는 모든 학교가 10일간 방학에 들어간다. 공휴일 외에 각종 축제 때도 쉰다. 그런데 공휴일이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걸리면 월요일이나 금요일도 휴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 경우엔 토·일요일을 포함해 4일 연휴가 된다.
출산하는 데 5000원
여름휴가는 상당수 유럽국가에서 그렇듯 한 달간 보낸다. 또 주말 휴가는 철저하게 지키는데, 대부분 교외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다. 별장이 없는 사람들은 캠핑장을 활용한다. 다시 김목사의 얘기. “한국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오면 문화충격을 받는다. 여기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여름휴가로 일주일만 쉬고 평소에는 휴가를 거의 쓰지 않는 데 대해 크게 놀라워한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일하고 사느냐는 것이다. 특히 휴가중에도 일처리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교민 중에 태권도 사범 출신으로 침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처음 이곳에 와서 ‘내가 이 사람들처럼 살다가는 굶어죽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해졌다. 다들 똑같이 문 닫고 쉬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복지제도 중 가장 내세울 만한 것은 의료제도다. 먼저 의료보험비가 유럽 국가들의 평균치보다 싸다. 정부가 의료보험을 관장하는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병원에 개별적으로 의료보험을 든다. 또 국립병원을 이용하면 모든 것이 무료이고 약값만 내면 된다. 외국인의 경우 여권만 갖고 있으면 각 동네에 있는 1차 진료기관을 거쳐 어느 병원에서나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김현욱 목사 부부의 경우 이곳에서 둘째를 낳았는데, 입원-출산-퇴원에 이르기까지 각종 진찰과 검사를 무료로 받았다. 돈이 들어간 것은 주말 진찰료와 처방전에 따른 약값뿐이었다. 다해서 우리 돈으로 약 5000원이 들었다고 한다.
교육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인데, 국립은 학비가 들지 않는 반면 사립은 수업료를 내야 한다. 사립대학 수업료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국·공립대학의 경우 아주 싼 편이다. 바르셀로나대학만 해도 1년 수업료가 10만페세타가 채 안된다. 대학에 들어가는 문은 넓으나 졸업은 쉽지 않다.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또 명문대·비명문대 구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거의 없다고 한다. 바르셀로나를 얘기하면서 축구를 빼놓는다면 이곳 사람들에게 노여움을 살 것이다. 오늘날 스페인에서는 축구스타의 인기가 일류 투우사를 능가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는 널리 알려졌듯, F·C 바르셀로나라는 세계적인 강팀이 있다. 각국의 스타플레이어로 구성된 이 팀은 수도 마드리드의 간판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와 더불어 스페인리그의 정상을 다투고 있다.
두 팀간의 경기 열기는 한·일전 이상이다. 두 도시간의 전통적인 라이벌 의식에 카탈루냐주 특유의 민족감정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경기장 곳곳에는 스페인 국기가 아닌 카탈루냐 주깃발(노란 바탕에 빨간 줄 4개)이 휘날린다. 경기가 열리는 날은 가히 전쟁이다. 방패와 몽둥이를 든 무장경찰이 경기장 안팎에 배치되고 경기장 밖에는 경찰버스와 응급차 10여 대가 대기한다. 시합에서 지기라도 하면 폭동 수준의 소동이 일어난다. 돌과 의자가 날아가는 등 패싸움이 벌어지고 그 어느 시위보다 과격한 시위가 펼쳐진다.
‘발샤 와와와, 마드리드 우우우’
시합이 열리는 동안 거리엔 차가 다니지 않고 시내는 한산하다. 축구장에서 경기를 보려면 일주일 전에 관람권을 예매해야 한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집에서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동네 바로 몰려가 응원용 숄을 두른 채 집단응원을 펼친다. 자리가 없으면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을 정도로 열성이다. 바르셀로나팀이 골을 넣으면 일제히 터지는 함성으로 온 시내가 떠나갈 듯하다.
수도 마드리드에 대한 경쟁의식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응원 요령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은 바르셀로나팀을 응원할 때는 ‘발샤(바르셀로나팀의 애칭) 와와와’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도록 배운다. 반면 레알 마드리드팀에 대해서는 ‘마드리드 우우우’ 하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꺾는다. 이처럼 열정적인 바르셀로나 사람들이지만 돈 씀씀이에 있어서는 유태인 소리를 들을 만큼 냉정한 편이다. 한국에서 의류를 수입해 파는 권태환(62)씨에 따르면 바르셀로나 부자들은 티를 내지 않는다. 옷차림이 수수하고 저축을 많이 하며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차도 소형차가 많으며 10년, 20년 이상 된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외곽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편리하지만 사용료 내는 것이 아까워 우회도로를 이용할 정도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권씨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기부문화가 잘 발달돼 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아프리카 구호사업, 선교사업 등에 듬뿍듬뿍 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철저하게 쉬고 즐기고 절약하고 기부하는 풍토. 이만하면 살기 좋은 도시로 볼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