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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문화원은
“문화비전의 또 하나 창세기를 열어가기 위해
푸른 ‘삶을 담는 그릇’ 빚어내는 도공의 산실이다!”
-전남문화원의날 행사 70여명 회원 참여
어르신 짚공예 전시 눈길 끌고 다산초당 답사
세상의 아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일과 길을 찾는 이에게 아침은 손을 내민다. 모처럼 진도문화원 행사길 에 동참하였다.
가을은 나를 찾는 여행의 길이자 결실의 계절이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 문제로 나라가 어수선하여 밤잠을 설치다보니 아침이 늦었다. 문화원 마당에 도착하니 이미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진도문화원(원장 박정석)은 지난 10월 28일 오전 8시 30분 회원들과 함께 국제의학박람회가 열리는 장흥에서 제8회 전라남도 문화원의날 행사에 참여하였다.
촉촉한 가을비가 또 다른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날씨다. 진도사람들은 흥이 많은 사람들이다. 비가 내려도 흥, 눈이 펄펄 나려도 흥이다.
지산면 상보전에 계시는 초아(황삼순) 선생이 내게 “왜 어제 오지 않았느냐”며 웃음어린 핀잔을 하신다. 어제 집으로 우리 예향신문사 사람들을 초대하였는데 나는 부러 가지 않았다. 몸이 두려웠다. 건강하신 고산 선생과 홍주 대작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산 선생은 저번 진도문화원의날에 옥주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런 날씨에도 진도 문화원 어르신들이 2대의 관광버스를 이용해 많이 참여하셨다.
우리가 가는 장흥군은 문학특구지정을 추진 중으로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한승원 작가를 비롯하여, 일제하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소설가 송기숙 교수, 무엇보다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등 시대를 울린 이청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임권택 감독과 이청준 작가는 진도에 와 ‘천년학’ 촬영지를 물색하며 첨찰산을 오르기 전 제 어머니 목로주점에서 막걸리를 드시기도 했었다.
한승원의 따님인 한 강 씨는 올해 영국에서 맨부커상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3년 고교선배인 김영남(중앙대 교수)시인이 적극 나서 천관산에 이미 문학관을 지어놓았다. 진도도 천년 유배문학관과 유배체험시설 등이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라져가는 유배 고적들에 표석도 해놓아야 할 것이다.
장흥은 이래저래 인연이 많다. 둘째 형이 이곳에서 교감선생으로 여러 해 근무를 하였다. 관산에 머물고 있을 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찾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20대 초반 군 입대를 하루 앞두고 장흥에서 밤을 잔적도 있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장흥 관산 출신의 지방 연극배우와 연애의 감정을 품었던 때도 있었다. 광주에서 출판인쇄사업을 할 때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그녀가 출연하는 연극 공연장인 민들레 소극장을 찾아 관람하기도 했다. 일종의 선을 보인 것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젠 이승의 모든 사연으로부터 벗어나신지 오래다.
해남 강진을 거쳐 11시경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이낙연 전남도지사, 김희웅 전남문화원연합회장, 등 많은 하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1천여 명의 전남 문화원 회원들이 속속 행사장에 몰렸다. 안양면이다. 이미 와 본 곳이지만 건축물이 새로 들어섰고 진입로도 좋아졌다. 쉴새없이 관광버스가 들어오고 셔틀버스까지 여러대 운행되고 있었다. 가을비는 계속 내린다.
본 행사장 주제관 앞마당에는 진도어르신(옥주골 공예연구회)들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짚공예품들이 정성스레 전시되고 있었다. 진도문화원에서는 어르신동아리 활성화 사업으로 사라져가는 짚·풀·청등·공예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진도지역에서 자생한 넝쿨을 재료로 어르신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지역축제 때 관광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전통문화를 널리 홍보하고 있다.
2층 행사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각 문화원에서는 소속 회원단체에서 만든 다양한 제품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과 달리 저작 출판물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행사가 시작되었다. 자리가 부족해 행사장을 빙 돌았다. 혼자 중얼거린다.“당신 덕분에 행복을 깨닫게 되어 오늘도 덕분 덕분입니다. 하늘, 땅, 바다에 사는 모든 생명 덕분입니다.”
이곳 전남문화의날 행사장 벽에는 특별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소박한 글들이 걸려 있었다.
아무도 보거나 읽지 않습니다.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세 벽을 다 돌았다. 잠시 소개한다. 한 알의 쌀을 위하여(노광섭.80) “여든 여덟 번 손길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는 쌀.”이라고 썼다. 또 다른 분은 ‘오일시장’이란 시화에서
“아침 일찍 보따리 풀어/ 팔 물건 벌려놓고/ 첫 손님 맞이하는 간절함”
물건을 사러가는 사람도 산나물 뜯어 팔러가는 할머니도 다 같이 기다리는 오일장“이라고 소묘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조금리 전통오일장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정서다.
진도군은 매년 한글학교에서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지역어르신들의 글솜씨자랑대회을 열고 있다. 그 진솔한 내용들은 늘 우리를 감동시킨다. 올해도 군청 대회의실에서 백일장이 열린다. 대부분 편지글이다. 도시에 사는 손주들에게 안부글이다.
앞은 무대입니다. 이날 행사를 축하하는 고귀한, 높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사회자가 안간 힘을 씁니다.
앉아있는 어르신들은 좁은 자리에서 행사 진행을 기다립니다. 실버문화공연단들의 공연이 가끔 눈길을 끕니다. 상을 받는 자들은 잔뜩 긴장해 있습니다. 상을 주는 자들은 잔뜩 어깨가 굳어있습니다.
이곳 주제관은 자연 언덕을 이용해 독특한 2층 건물을 지어놓았다. 9월부터 10월 말까지 약 두 달간의 행사를 치르는 장흥국제통합의학박람회 기간을 이용해 제8회 전남문화원의 날 기념식과 2016 전남어르신문화축제 한마당이 펼쳐졌다. 빗방울이 떨치는 가운데도 농악단들이 흥겨운 풍물을 선보이고 식전행사로 민요, 스포츠댄스, 목포문화원의 실버신바람 북놀이단 공연, 광양문화원 시니어 기악단 “아빠의 청춘”봉사단이 젊은 아빠를 자랑한다.
특히 이날 행사에서 진도문화원 신주생(의신면 초중리) 이사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청자매병 상패를 받았다. 신 이사님은 오래 동안 진도한시반에 참여하면서 많은 시편들을 창작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여러 회원들과 함께 전국진도한시백일장 탄생에 일조하였다. 오랜 공직생활을 끝내고 다양한 취미를 살려 더 뜻 깊고 분주한 삶을 영위하고 계신다. 팔순에 이른 박규배 전 진도군의회의장을 비롯한 홍익장(弘益壯)들이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또 박정석 문화원장은 직접 단상에 올라 제28회 전남향토문화상을 시상하였다. 이어 대회가 끝난 뒤 회원들은 통합의학박람회를 구경하였다. 다양한 의학정보와 체험도 하며 다양한 제품들을 둘러보았다. 특히 재래종 고대미 쌀(적토미)과 버섯제품이 눈에 들어온다. 진도도 검정쌀 그리고 첨찰산 천년의 숲에서 나는 친환경 표고버섯이 위판까지 하지만 제품 가공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 강진 귤동에 있는 다산초당을 둘러보았다.(이곳은 그 제자들이 지은 집) 예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산길은 미끄러웠다. 앞장서 길을 오른 고산 김민재 서예가는 회원들과 함께 ‘뿌리의 길’을 조심스레 딛고 만덕산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다산 선생의 뛰어난 안목에 탄복하며 고매한 성품과 깊은 학문의 향기에 젖기도 했다.
이곳은 야생차밭으로 유명한 백련사와도 매우 가깝다. 다산 선생은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수많은 저술을 하여 후세에 길이 빛난 여유당전서를 남겼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500여 편의 방대한 작품은 청백한 학자의 표상으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분의 생은 불우했다. 흑산도로 함께 유배 간 형님 자산(玆山) 정약전은 ‘현산어보’를 남겼지만 결국 그곳에서 사약을 받아야 했다. 다산초당 옆 동암에 올라 멀리 구강포 끝을 바라보며 늘 형님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초당이 자리한 산을 내려오자 문화원 사무실 직원들이 한 판 술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잔디밭 등나무 아래 탁자에 묵무침 반찬에 진도에서 공수해 온 울금막걸리 소주 등을 펼쳐놓았다. 출발하기 전 새벽부터 떡과 과일 그리고 안주를 마련하느라 애쓴 서만석 사무국장, 강미옥 과장, 정 여사, 송 여사, 이철현 직원들의 수고가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이곳을 20대 젊은 시절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태호(미술평론가)교수를 따라 대구면 청자 터를 비롯하여 칠량면 봉황리 옹기마을에 이어 이곳 다산초당을 들렸던 것이다. e시 광주로 가는 무위사에서는 낮술에 취한 주지스님에 봉변을 당할 뻔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월남사지와 무위사 벽화 중 관음보살(파랑새가 그리다 마지막 동공을 그리지 못하고 날아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의 모습은 잊지 못한다.
그리고 늦게 운림산방에서 결혼식을 가진 나는 아내와 함께 첫 신혼여행지로 이곳 강진을 찾았다. 아침부터 막걸리나 마시다 진도읍에서 버스를 타고 해남 강진으로 와서 배낭을 메고 시골버스에 올라 백련사를 둘러보고 다산초당에 올랐다. 초로의 한 백발어른이 차 한 잔을 권했다. 2월이었지만 차는 따스했었다. 지금은 정류장 입구에 차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나도 동암에서 멀리 강진만을 바라보았다. 함께 간 김귀열 회원(인지리. 진도문화해설사)이 그곳을 가리키며 가우도 출렁다리를 설명해준다. 무엇보다 고산 선생의 다산의 삶과 학문에 대한 경의와 넓은 식견에 더더욱 감흥이 절로 일어난다.
불과 6~7년 전까지만 해도 자운 곽의진 작가와 동행하여 백련사와 이곳 초당 주변을 돌아보고 윤동환 전 강진군수 부부가 운영하던 찻집에 쉬어가기도 했었다. 이제는 이 골짜기에 작년부터 ‘저녁이 있는 식탁’을 주창한 손학규 전 민주당 고문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번 문화원 여행에서 백련사는 그냥 스쳤다. 그러나 이곳은 고려 후기 백련결사의 가람으로 유명한 곳이다. 서민불교운동이 한창이던 1236년 요세가 백련결사를 일으켜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시대에 8명의 대사를 배출하였다. 또 혜장선사가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이웃 다산초당에 유배된 정약용(세례명 요한)과 교우 하였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만덕산자락에는 동백나무 숲이 자생하고 있으며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차나무가 곁들어져 나들이객에게 겸손한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준다. 지도 첨찰산의 동백 숲과 고려 말 최우의 아들 중 만전이 머물렀다는 용장사가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소치 허련 선생가와 다산의 후손들과는 교분이 깊었다.(「소치 허련」저자 소치연구회장 김상엽) 소치는 다산의 애제자가 머물던 집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그가 45세 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의 제자인 치원(巵園) 황상(黃裳)에게 선 물로 그려준 황상의 별서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의 실경산수화이다. 1853년(철종 4) 3월 30일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소치(小癡) ‧ 다산(茶山) ‧ 초의(草衣) 3사람의 정성으로 그렸고,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가 여기(餘技)로 수묵과 담채(淡彩)를 사용하여 그린 간일(簡逸)하고 온화하다. 그림에 대가인 그가 일속산방을 방문하지 아니하고, 초의선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렸다. 황상이 기거한 백적산(白蹟山) 산중의 전원적 삶이 선비정신과 스승 정약용에 대한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준 인품의 큰 감동이 진하게 녹아있다고 한다.
그림내용은 집을 빙 둘러 에워싼 산자락에 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 3채의 집이 있다. 그리고 집 왼쪽 위편골짜기에 다시 한 채의 작은 집이 보인다. 이 한 채의 집이 일속산방이다. 소치는 초의선사가 첫 스승이니 한번 보여드리니 초의선사가 조금 수정하고 바로잡았다고 기록했다. 참으로 기이한 것이 인연이다.
정학연과 소치의 인연도 깊다. 정학연은 다산 정약용의 큰아들이다. 한양에서 권돈인(전에 우수영 근무) 정학연 등과 시와 글을 즐겨 나눈 사이다. 미산(米山) 허형은 그에게서 시와 글을 배웠다고 한다.
다시 20세기를 넘어 진도출신의 화가 한 분이 강진으로 초대받아 스무 점이 넘는 작품을 그린다. 모두 다산과 관련된 작품들이다. 바로 올 해 운림산방 안에 미술관이 들어선 금봉(金峰) 박행보 화백이다. 애절양, 그리고 다산의 죽음에 만덕산에 올라 애도하는 제자들의 모습 등이다. 직접 화제시를 쓰지 못하는 화가는 절대 그릴 수 없는 서사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니 진도의 씻김굿이다. 열두 마디 인생고를 다 풀어주는 서원과 길 닦음의 의례가 담겨있는 강진문화재가 될 것이다.
이제 다시 200여 년을 훌쩍 지나 이날 진도한시협회 회원들이 진도문화원의 행사에 참여하여 이곳을 들러 물방울 같은 시운에 젖었으니 해민 초정 우암 옥천 도암 매헌 이정 등 누구의 손끝에서 또 하나 시의 묵연에 스민 향기 어찌 천년을 가지 못하겠는가. 흥취가 조금 오른 돌아오는 길, 옥천 박정석 원장은 “진도의 향토문화역사에 대한 연구 활성화가 면지역까지 넓혀져야 한다”고 주문을 놓치지 않는다. 지난 해 문화원은 박주언(문화콘텐츠 담당)이사와 조성문씨가 동외리와 의신면 침계리 등 진도 지역 마을 전적을 순서대로 정밀복사를 해 놓았다. 문중에 내려오는 문적들의 번역 해석, 마을사 들의 깊이 있는 연구가 결국 진도군의 향토문화역사의 물줄기가 되기 때문이다.
예불여 진도. 양무골 진도문화원은 진도라는 드넓은 예술의 바다를, 그 웅혼한 역사의 물줄기를 이끌어가는 전함이다. 삶이 문화요 경제 또한 문화를 떠날 수 없다. 진도회원들은 문화원과 평생의 수어지교를 맺어진 인연들이 아니겠는가. 가을이 깊어진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에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잊지 못하네.(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중에서) 어찌 잊을 것인가. 아무리 세월이 간다 해도.
(박남인. 진도 사천리 출신. 예향진도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