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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색(色)이 바랜 세계지도가 하나 걸려 있다. 1885년에 창업(創業)하여 140여 년이 된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 굴지의 해운(海運)회사인 닛뽄유센[日本郵船, NYK]이 1985년 창업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것으로, 이 회사에 용선(傭船)되어 운항한 인연으로 특별히 선물로 받은 것인데, 벌써 40여 년이 되었다. 붉은 선으로 세계 주요 항로(航路)가 복잡하게 그어져 있는데, 각 항로에는 거리가 마일(mile)단위로 적혀있고, 회사의 지사나 주요 Agent(대리점)도 표시되어 있다.
벽에 걸린채로 폰으로 찍어 명확하지 못하네요.
책상에 앉거나 눕거나 가끔 쳐다보면 20여 년 동안 젊음을 바친 바다 위의 날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을 숱하게 헤멘 날도, 영욕(榮辱)의 시간들이 겹치고 쌓여온 기억을 떠올려 본다.
우선 닛뽄유센[日本郵船, NYK : Nippon Yusen Kaisha] 회사의 역사부터 간략히 보면,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이전에 근대화를 시작한 시절, 시코쿠(四国)의 도사번(土佐藩 : 지금의 高知) 출신인 이와자키 야타로[岩崎 彌太郎]란 사람이 자그마한 선박사업체인 쓰쿠모상회(九十九商會)를 설립함으로 시작했던 것이, 1885년에 닛뽄유센[日本郵船]이 되고 후에 세계적 재벌인 미쓰비시[三菱]가 되었다.
2010년 일본 국영방송인 NHK(Nipon Hoso Kyokai : 일본방송협회)에서 방송되어 시청률 24.4%의 최고 기록을 낸, 일본의 국민작가라 불리던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씨의 원작인 대하드라마 「사카모도 료마[坂本 龍馬]」를 보면, 일본 에도[江戶] 막부 말기의 풍운아로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카모토 료마’와 ‘이와사키 야타로’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다. 둘은 친한 친구이었으나 다른 재능을 시기하고 견제하면서도 서로를 배워나갔다. 한창 젊은 시절, 료마가 암살 당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의 발전은 서양을 배우고 해운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료마의 선구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야타로는 해운사업에 눈을 뜨고 쓰쿠모상회(九十九商會)로 출발한 것이다.
NYK(日本郵船)을 설립하는 등 일본 재계(財界)에서 큰 성공을 이룬 후에 야타로는 기자(記者)에게 ‘료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밉고 싫은 놈’이라고 그의 우정(友情)을 표현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 龍馬]」는 하급무사 출신이나 독특하게 앞선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당시 일본을 이끈 사람이다. 당시 성행했던 사무라이[武士]들이 료마가 주창한 개혁으로 자신들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료마를 암살함으로 생을 마쳤다. 그의 어록에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왼쪽이 이와자키 야타로 오른쪽이 사카모토 료마(빌려온 사진)
이 닛뽄유센[日本郵船] 회사는 일본의 선구적인 회사답게 일찍이 선원노동인력의 장래를 내다보고 당시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저개발국가의 선원들을 고용하고 그들의 근무상태를 음밀히 체크하여 그 결과를 각 민간인 선사(船社) 알려주기도 했다. 그 결과를 보면 인도, 방글라데시 등 서양의 지배를 경험한 국가의 선원들은 시간관념이 투철하며 상관(上官)이 시키는 일 이외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한국 선원은 기술적으로도 우수하며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판단하여 주위를 정돈하는 등 유능하나 단,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야말로 오대양을 구석구석 누볐다. 항해할 수 있었던 범위 중, 북쪽으로 최고 위도(緯度)는 영국 최북단인 Dunnet Head 등대 위쪽을 지났으니 위도는 대강 북위 58도 68분 정도로 북극의 그린랜드 최남단과 거의 같은 위도이다.
남으로의 최저 위도는 남미대륙 끝에 있는 마젤란해협 내의 칠레령 최남단인 Punto Mas al Surde로 위도가 남위 55도 60분쯤이다. 남극대륙의 북단(北端)인 사우스 세틀랜드제도(South Shetland islands)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자연이 아닌 인공으로 만든 스에즈와 파나마, 키엘 운하를 포함하여 영국 스콧틀랜드 최북단의 존오그로츠(John o' Groats) 해협, 도버해협. 지부랄탈, 남아공 최남단 Agulhas 곶, 남미 최남단 마젤란해협, 호주 타스만해, 지중해 튀르키에의 다라다날레스 해협(Dardanells Straite)과 보스포르스 해협(Bosporus), 싱가폴 해협,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소코트라 부근, 겨울철 북태평양 캄챠카 연안 등등이다.
이들 중 가장 어려웠고 잊혀지지 않는 것을 적어보고자 한다.
1. 영국의 최북단 Route(영국 본토와 오크니(Orkney)섬 사이를 지나는 항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시 신조(新造)한 최신형 냉동 · 냉장선 Royal Lyli호로 1979년 5월 북유럽 덴마크(Denmark) 북쪽을 지나 스웨덴(Sweden)의 말뫼(Malmo)항에 입항했다. 자그만 하면서도 깨끗한 도시였다. 먼저 시내 곳곳에 버젓이 있는 Sex shop(성인용품점)과 포르노 전용 영화관을 보고 진짜 깜짝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입구에 ‘xx세 미만 출입금지’라는 조그만 표시로 미성년자는 아예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점잖은 버버리코트 차림에다 굵은 뿔테 안경의, 마치 대학교수 같은 신사분이 젊은 여주인에게 유유히 포르노 잡지 한 권을 사 가방에 넣고 나간다. 그런 책 하나를 가지고 있기만 해도 처벌을 받았던 것이 우리의 실정인 때였다. Sex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강열한 느낌도 받았다.
아무런 수속이나 검열 없이 해협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었던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도 동네 마실 가듯 당일로 다녀올 수 있었다. 국가는 달라도 사람의 일상은 마치 한 나라이듯 했다. 선진국의 사고방식이 앞서고 있음을 절감하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자국(自國) 스웨덴의 오슬로 공항보다 덴마크의 공항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부산사람들도 해외여행을 할 때 서울보다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공항을 이용하면 얼마나 편리할까를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1999년 8월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개통된 총 길이는 7.8km의 외레순교(橋)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비싼 통행료 때문에 차량통행이 적었으나, 스웨덴 말뫼의 집값이 덴마크보다 쌌기 때문에 덴마크인들이 말뫼 지역에서 집을 사서 덴마크로 통근하기 시작한 탓으로 급속히 증가, 2007년에는 약 2500만명이 왕래하였다고 한다. 20년의 세월이 무섭게 세상을 바꾼 것이다.
스웨덴 말뫼항과 덴마크 고펜가겐을 연결하는 외래순교(빌려온 사진)
이곳 말뫼(Malmo)항을 떠나 미국의 플로리다로 가야 하는데, 출항전 ‘Ocean Route’에서 좋은 계절이니 번잡한 도버 해협보다 영국의 북단 존오그로츠(Jojn O’ Groat)와 오크니(Orkney)섬 사이를 항과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다.
‘Ocean Route’란 회사는 세계적 항로의 기상을 관찰, 선박들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기업이다. 선박의 명칭과 제원(諸元), 선속(船速), 출항지와 목적항, 출항일시를 알려주면 항로상의 기상을 관측하여 매일매일 선박에 추천해 준다. 만만찮은 유료(有料)이지만 선주나 용선자측에서도 이용하기를 권장한다. 그러나 이용 여부나 항로의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선장(船長)에게 있다.
연중 항시 통항선이 많아 마치 옛날 부산 서면로타리의 자동차처럼 분주하기 그지없는 영불(英佛) 사이의 도버해협(Strait of Dover)은 여간 골치아픈 곳이 아니다. 강풍보다 안개가 더 무서웠다. 지금이야 선교에 앉아서 위성항법 장치의 모니터로 훤히 볼 수 있지만, 당시엔 망원경과 레이다(Radar)와 사람의 눈이 유일한 감시 도구였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편하게 항해하는가 보다 하고 바로 대리점에 해당지역의 해도(海圖)를 청구하고 기대를 하면서 항로를 그었다.
빨간줄은 항로. 원내가 추천받은 해협
이 해협은 길이 약 22km, 너비 10∼13km. 대서양과 북해를 잇는 항로(航路)이다. 조류(潮流)가 빨라 소형 선박이나 저속선(低速船)의 운항은 위험하지만 25놋트까지 낼 수 있는 본선의 선속(Speed)로서는 염려없을 것으로 판단. 일단 권유에 따르기로 하고 코스를 잡았다.
지구상의 어느 곳이나 지역적인 특성으로 발생하는 계절풍과 운무(雲霧)와 바다의 결빙(結氷), 해조류(海潮流), 해수면의 온도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그곳만의 특별한 자연 현상을 만들어 낸다. 이를 모두 아울러 우리나라 연안 사람들은 기(氣)라고 하고 기가 세다는 말도 한다.
새벽 2시인데도 부옇게 밝아오는 여명(黎明) 속에 해협에 들어섰다. 기상(氣象)과 해상(海床)이 수시로 변한다. 강한 해류가 흐를 때는 바람이 없어도 흰 머리의 잔잔한 물결이 생기기도 하는 데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짙은 안개가 끼었다 벗어났다를 반복한다. 위도가 그린랜드의 남쪽 끝과 거의 같은 북위 59도나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듬직하게 우뚝 선 등대의 모습을 보며 무사히 빠졌다.
오션루터의 관측에 의한 정보가 있기는 하지만 현지의 해상은 달랐다. 밤 9시경 영국의 최북단 서쪽 끝을 돌아 남하하려는데 986밀리바(mb : 기압의 단위로 지금은 헥토파스칼로 칭함)의 저기압이 북쪽에서 발생,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본선에서 받는 기상예보에도 없었다. 아마도 오션루트(Ocean Routes)도 예상치 못한 것 같다.
항과할 해협에 해류로 인한 잔 파도가 생김(빌려온 사진)
강풍과 격심한 파도가 선박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생사(生死)가 걸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더구나 아무 화물(貨物)도 싣고 있지 않은 공선(空船) 상태이었기에 8,000톤의 선박이 마치 물에 뜬 바가지처럼 촐랑댔다. 선수(船首)가 깊은 파곡(波谷)으로 내리박힐 때는 선미(船尾)의 스쿠류(프로펠러)가 해수면 가까이 올라와 수압(水壓)이 약해짐으로 순간적으로 회전수가 급상승하기도 했다. 심하면 기관 자체가 정지되는 수도 있다.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상황이었다.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빠르고 심한 흔들림에 더 정신이 없다. 통상 항해사와 조타수 두 명이 당직에 임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선장이 직접 선교(Bridge)에서 긴급상황이 끝날 때까지 당연히 지휘해야 한다.
선속(船速) 조정간을 항해사에게, 조타기(操舵機)는 조타수에게 맡기고 선체의 균형을 파곡(波谷)과 일정 각도로 유지하며 선박의 전복(顚覆)을 방지하기에 온 정신을 쏟았다. 야간에는 규정된 항해등(航海燈) 외에도 갑판상의 작업등을 대낮같이 밝히고 파고와 방향을 눈으로 쉽게 볼 수 있게도 했다.
FAO(국제농업식량기구)의 유엔(UN) 직원이었던 스웨덴 사람 Mr. Lusin이 얘기한, “바람은 공기지만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고, 파도는 물이지만 단순한 물의 흐름이 아니다”는 말이 정말이란 생각이 든다. 분명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파도 끝에서 튀어나오는 물방울마져 마치 나뭇잎이나 숲속의 벌레들처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님’,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신령님’ ‘조상님’을 수도 없이 불렀다. “누구시든 좋습니다. 저는 죽어도 좋지만 저를 믿고 물밑 침실에서 잠자는 선원들은 살려 주십시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어느 님(?)도 나타나지 않는다. 밖을 내다볼 엄두가 나질 않지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종교가 이런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그랬다. 의지할 것은 보이지 않는 신(神)들이 아니라 선박 자체의 기관(機關)과 감항성을 믿고, 그리고 순간순간 상황에 따른 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초치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장의 오더에 따라 키를 돌리던 조타수가 갑자기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선교(船橋)의 한복판이라 바다의 상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이런 판에 한낮에 갑판장(甲板掌) 영감님이 선교(船橋)에 올라왔다. 좀처럼 없는 일이다. 워낙 선체의 동요가 심한 탓에 해상(海狀)을 보러 온 것이라고 했다. 제 몸 가누기도 힘들었다.
“어~엇따! 대단하네.”
통상 갑판장은 연세가 많고 승선 경륜이 오래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분들이다. 선내에선 직위를 떠나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기에 어른인 셈이다. 기관부에서는 조기장(造機掌)장이란 직책으로 기관에 대한 실무는 도사(?)인 분이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줄처럼 긴장된 선교의 분위기를 즉각 눈치챈다. 정신없이 키를 잡고 있는 조타수에게,
“야! 김 군아 겁나나?”
“예, 곧 가라앉을 것 같심더.”
“야 임마, 물밑에도 땅 안 있나. 뭐가 걱정이고,” 일갈(一喝)했다.
“……?”
“물밑에도 땅이 있다?” 지극히 옳은 말임엔 틀림없지만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모두가 ‘픽’ 웃음이 터지며,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이 탁 풀린다. 순간 정신이 번쩍든다. 그러자 조타수도 제 정신으로 돌아온다.
조타수가 아닌 바로 선장인 나보고 하는 소리인 듯도 하다. 당장 뭐가 필요한지를 판단하고 즉시 실행하라는 꾸중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지난날의 경험담을 풀어 놓으며 모두를 안심시킨다. 역시 경험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래서 나이든 어른을 공경하라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 이 상황에서부터 빨리 벗어나는 것이 최급선무다. 최대한의 감항성을 유지하며 가야 할 코스를 완전 무시하고 무조건 저기압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달렸다. 36시간! 하루 반 만에 제 코스를 되찾았고 위기를 벗어났다.
“물밑에도 땅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듯한 느낌이 오래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조선(操船)에 온 정신없이 팔려 어떻게 상황을 견뎌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신령님, 조상님 감사합니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보다 더한 강풍과 파도를 겪었지만 유독 이 당시의 상황이 잊혀지질 않는다.(이 얘기는 졸저 「흔적」에서도 실었던 내용임) - 계속 -
첫댓글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생과 사를 사이에 두고 겨루는 씨름같이 파도와 강풍에 맞서 항해하신 경험을 기록하셨지만
실제 상황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귀한 경험을 글로 적어둔 글이 좋은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함다. 자이가르닉(Zeigarnik) 효과라는 것이 있다네요. 사람들은 완결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더 궁금증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지만 끝나면 잊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연속극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만든다네요. 사실이데요. 그렇게 겁나고 긴장됐으도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나...' 하거든요. 건강하세요. 부산넘
급진적 개혁을 원했던 사카모도 료마와 선박사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합동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기에 궁합이 딱이었군요. 이들과 동시대 한국엔 쇄국정책을 한 흥선 대원군이 있었으니 한국과 일본의 발전은 격차가 클 수 밖에.^^
후진국 한국의 재능있는 늑점이님이 오대양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음은 이웃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네요. 덕분에 늑점이님을 따라다니며 간접경험을 하게 되었구요.
7월~10월까지 동해안 해변을 맨발걷기 하면서 늑점이님을 떠올리곤 하였습니다.
망망대해와 큰 파도를 바라보면서........
ㅎㅎㅎ. 역시 지기님의 맴이 보이는 듯 함다. 감사. 건강하소.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