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그는 김태촌(57)의 편지를 꺼내 보였다. 2004년부로 16년6개월 징역형이 만료됐음에도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여전히 수감중인 조폭의 두목이 3월 18일에 부친 안부였다. “외부에 이야기하는 건 처음입니다.”
편지지 한 장에 거친 볼펜 글씨로 빽빽하게 써 내려 간 안부 편지는 뜻밖에도 ‘장로님’이자 ‘주 안에서 영원한 친구’에게 부쳐 온 사연이었다. 김태촌 집사가 이상훈 장로한테 편지 보낸 게 뭐 그리 대수랴? 더군다나 이 씨는 옥중의 김 씨를 위해 몇 년째 기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최근 면회를 갔다 와서 밤에 혼자 울었죠. 그 건강했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장애 3급 환자가 돼 있다니…. 게다가 폐암 전이 현상까지….” 못 먹는 술이지만, 그 편지는 맥주 3병을 비우게 했다.
김태촌이라니, 누군가? 1970~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안다. 범서방파의 두목 김태촌이라면 말 그대로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서울의 밤을 쥐고 흔들던 왕초였고, 이상훈이라면 ‘사시미’의 원조로 전국을 누빈 칼잡이였다는 것을. 최근 조폭 영화가 범람하기 훨씬 전, 그들은 조폭의 원형(原形)으로서 완벽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종로3가 귀금속 상가에서 널찍하게 위치한 황룡 피카귀금속 타운의 대표이사실에서 왕년의 사시미 이상훈 씨는 과거로 잦아 들어 갔다. 어느덧 55세 아닌가. “그 건장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장애 3급 환자가 돼 있더군요. 인천구치소에서 형집행 정지를 시켰는데, 검찰에서 기각됐죠.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감옥에 가서 대신 (옥살이를) 해 주고 싶습니다. 사회보호법이란 게 인간의 정신과 인권을 유린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레마르크의 말을 인용했다. 내 편, 네 편 가리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이 사회에 대한 경고일까.
교정사상 전무후무한 3명 탈주극 “1993년 12월 25일, 13년 6개월 27일 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어요. 1994년 4월 이 지역으로 왔죠.”그의 기억은 허튼 짐작을 불허했다. 며칠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그에게서는 하루하루를 칼날 위에서 살던 긴장감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하기사 13년의 시간을 그는 영어와 일어를, 그 중 독방 수감 기간은 무역 실무를 떼는 데 고스란히 바쳤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두뇌 아니던가.
“영등포 조직은 완전히 떠났지요. 과거 사람들은 절대 안 만난다고 다짐에 결심했죠.”요컨대 그는 거듭 난 것이다. 시계를 앞으로 돌려 보자. 1981년 6월 5일 오후 1시 영등포의 서울 남부지원. 그 해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해밀턴호텔 습격 사건 재판정에 그가 주범으로 모습을 드러 냈다. 전무후무한 법정 탈주극의 현장이었다. 영등포 구치소; 법정 탈출; 서울구치소; 청주교도소; 청송교도소; 청송감호소; 안동교도소; 대구로 이송; 청송교도소- 청송감호소로 이어지는 형극의 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리 확보해 둔 철심을 1시간여 동?사포로 갈아 종이도 자를 수 있는 흉기로 만들었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구형 받고 나오던 길, 재판정에서 비둘기장(유치장)까지의 20여m는 마지막 기회였다. 재판을 지켜 보러 온 어머니 코앞에서, 그는 사전에 함께 결행하기로 한 2명과 순식간에 탈출한 것이다. 대호파 두목 이상훈과 공범 2명 등 3명에게는 전두환 대통령의 현상금 3,000만원이 걸렸고(당시 간첩이 500만원이었다), 서울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한국 교정 사상 전무후무한 3명 탈주극이었다. 곧 후배들의 처까지 합류했다. 희대의 사건에 전국은 뒤집어졌다.
북한산 밑에 잠적해 있던 그는 일행에게 나름의 작별 파티를 차려 주었다. 그??도피 6일째, 덕수궁 옆 대검중수부로 걸어 갔다. 평생 살아 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을 사건이 김도언 당시 부장검사에게 벌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탈옥을 한 후 대검찰청으로 들어 와 자수 한 사람 때문이었다.
“수위실에서 전화하고 있다니, 대번에 뛰어 내려 와서는 ‘잘 했다’며 데려 가 직접 조사하더군요.” 도망 중 장미를 보고 써 둔 시 한 줄(나도 저렇게 세상 향한 가시를 꽃으로 피우자)과 함께 ‘형은 무사하니 자수하라’며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신문에 대서특필됐고, 거짓말처럼 공범 둘은 바로 뒷날 자수했다. 당시 희대의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들에게는 식당 계산서를 비롯, 먹은 것들을 꼼꼼히 기록해 둔 그가 무척 좋은 인상으로 남아 호의적 기사가 줄을 섰다.
세상이 뒤틀려 있을 때, 올바로 가는 것은 오히려 교도소일 수도 있다. 그 때가 그랬다. 서울구치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옮긴 그는 다시, 올곧게 태어났다. 자신이 배정된 9동이 하필이면 시국사범 수용소였던 것. 술과 여자, 사치와 향락에 허우적대던 인간들만 보아 온 그에게 그 곳은 별천지였다. 고은, 김대중 씨 등이 변소 냄새속에서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반정부 시위를 하던 곳이었다.
그들의 커뮤케이션 법은 바깥 사람들의 상상을 절한다. “운동 시간이 되면 식구통(식사 반입구)에 책을 재빨리 던져 주며 며칠날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죠. 오늘은 그 페이지를 보라는 소리죠.” 독일문학선, ‘해방신학’,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등이었다.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학생들의 정성에 감동해 책을 읽어 나갔다. 1981년 포고령 13호로 들어 온 서울대 독문과 학생, 사북탄광노조위원장, 부산대신학대학생위원장 등 모두 0.75평의 엄중 독방에 철저히 격리돼 있던 사람들이 한입으로 전두환 퇴진을 외쳤다. 펜이 없으니 못 같은 것으로 긁어서 글자를 쓰던 곳이다.
DJ 때문에 교도관 폭행 그는 DJ 때문에 교도관을 폭행하기까지 했다. 당시 DJ의 독방은 병사를 개조한 것이어서 시설이 더욱 열악했다 한다. 여름이면 모기 천지였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다리를 절며 교도소 담벼락에 핀 꽃들을 유심히 살펴 보는 것이었는데, 한 교도관이 그 화단을 망치는 걸 보고는 아구통을 날렸죠.”험악한 세월속에서 어떻게 저렇듯 단정한 용모를 갖췄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올라 올 정도로, 그의 삶은 초(超)논리적이다.
1950년 평양에서 태어났으나 얼마 뒤 월남, 부산에 미군의 강냉이 가루로 굶주림을 달래며 컸다. 서울의 해방촌으로 온 건 6살때였다. 태원에서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인근의 보광ㆍ용산 국민학교 학생들과 맞짱을 뜨며 그는 세상을 배워 갔다. 상대는 자기보다 너댓살 많기 일쑤였다.고등학교만 서너 군데 전전해야 했던 불량 학생이었다. 지금의 단정한 머리는 가발이다. 일찍이 이마 부위가 다 까졌기 때문.
“어릴 적 동네에 있던 악명 높은 쌍둥이 형제를 물리치려 남산에 가서 소나무를 들이 받는 연습을 하다 보니 이마가 다 까졌죠.” 그가 ‘아저씨’라고 부르며 회고하는 사람은 저 유명한 시라소니, 이화룡(대동강동지회), 정팔이(서북청년단) 등 한국 주먹의 원조들이다. “어린 시절, 아저씨들은 동대문 사단에 린치당하고 보복하는 이야기 같은 데 골몰했죠. 내가 싸움꾼이 된 것 시라소니 같은 아저씨들을 보고 컸기 때문이지요.”
양공주들은 화대로 받은 C 레이션이나 푼돈을 식구들에게 주는 존재였지만, 때로는 벌건 대낮에 미군한테 마구 구타당하는 광경을 아무런 여과 없이 보여 준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가만 있었을 리 없다. 학교 파하면 홍등가로 달려가 일을 치르고 있는 방안으로 연탄재와 개구리를 던져 넣었다. “친구의 누나 위에 미군 흑인이 벌거벗고 올라 가 유린하는 모습을 보고 학굘 다녔어요.”그러나 해방촌이 철거돼 영등포로 가면서 화려한 영등포 시절이 열렸다.
시라소니를 사사, 싸움의 달인으로 변모 “소매치기하는 걸 보고는 달려가 옆에 있던 냉차병으로 얼굴을 찍어 수십 바늘의 상처를 입히기도 했죠. 그 대가로 왼팔에는 면도칼 자국이 났지만.” 그의 싸움은 처절했다. 왜? “싸움은 피하는 게 아니다, 막으며 공奮求?거다, 바로 시라소니 아저씨한테 배운 원칙이었죠.”그는 또 여럿과 상대하는 싸움의 달인이 돼 갔다. “1 대 1 싸움은 절대 재미없어요. 싸움꾼은 혼자서 패거리를 상대하는 법이죠. 패거리가 운동이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자기네끼리 부딪쳐 무너져요.”혼자서 여럿을 때려 눕히는 그의 지위는 그 동네에서 일약 격상될 수 밖에 없었다.
영등포 유흥가를 평정하고 캬바레 영업 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에어포트호텔 나이트로 한 장성이 놀러 왔다. 전두환 씨였다. “부수입 들어 오는 건 부하들한테 다 나눠 준, 참 멋있는 군인이었죠.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이뻐했다죠. 시바스리갈이 남으면 전 장군에게 줄 정도로.” 그 술을 1971년 8월 3일, 자신의 생일 때 줄 정도로 두 사람은 꽤나 막역했다 한다. 전 씨의 큰 아들 재국이 국민학교 다닐 때, 자신은 태권도 개인 사범이었다고.
그러나 1970년대 후반, 그 호텔에서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잠수’해 호국청년단 대표 이승완 등 전주 식구에게 피신해 있는 동안 부산 극동 호텔 테러 사건에 연루되는 등 그에겐 사회 1면 톱감 사건이 늘 따라 다녔다. 1975년 일본 밀항을 결행한 그는 일본 여대생과 동거하며 야쿠자와 4대 1로 싸우는 등 칼잡이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다, 사건이 해결됐다는 말을 듣고는 1년 뒤 귀국했다. 그러나 거짓이었다. 풍전호텔에서 붙잡힌 그는 납치, 범죄단체 조직, 알선 등의 혐의로 3년을 선고받았다.
최근 그가 구술한 자서전 ‘코리안 마피아’(답게 刊)에는 그러나 어릴적 이야기 등 1980년대 이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요 서점에서 비소설 부문 판매량 10위 안에 너끈히 드는 인기 도서다. 1980년대의 그 화려한 전력을 비롯해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나 ‘고삐’의 작가 윤정모 씨 등 저명 인사들과 알게 되는 1990년대 이후가 기록돼 있다. 그를 통해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라는 말은 육화(肉化)된다.
이제부터 그는 참으로 거듭난다. “13년 동안 영어와 일어를 머리맡에 두고 외웠어요. 인질이나 난동 사건 같은 것으로 묶여 있을 때는 그걸 다시 외웠죠.”그가 택한 새 길은 무역이었다. 1994년 3월 그는 부평역앞 안경ㆍ시계 좌판상으로 거듭났다. “남대문에서 떼다 팔았는데, 처음에는 물정에 어두워 속아가며 배웠죠.”그러나 벼룩의 간을 빼먹는 텃세 때문에 오래할 일이 못 됐다. “10개를 팔아야 나오는 2만원을 자릿값으로 내라는 겁니다. 나보다 서너배는 싼 중국 물건 때문에 장사도 안 되는 통에….”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가발 사업이었다.
1994년 5월 중국 칭타오 무역전을 참관한 그는 가발 회사 매장에서 중국과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으로 가발 장사를 하면 일고여덟 배는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후 다섯시에 페리호 4등석을 60달러에 사서 짐짝처럼 시달리면 다음날 새벽 6시에 중국땅을 밟았다. 그가 숨도 돌리지 않고 들르는 곳은 가발 공장. OEM 방식으로 2,000개를 만들면 3,000만원이 남는다는 계산이었다. 1995년 가발사 피앙새를 설립한 그는 가발 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2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가발이 사양 산업으로 되자, 그는 새 길을 찾기 위해 1997년 홍콩 보석쇼를 참관했다. 거기서 만난 것이 대용 진주. 큰 조개 안에 콩알만한 핵을 심어 진주를 만든다는 원리다. 대용 진주(일명 핵진주)는 새 빛이었다.국내 시장은 카드 침체로 불황의 조짐이 있었지만,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등지에서는 대용 진주(핵진주)가 50여만 달러나 수출되는 실적을 거두었다. “조개는 고통에 겨워 담즙을 내는데, 그것이 핵에 누적돼 진주로 거듭나는 원리죠.”진주 조개의 원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통에서 거듭난 삶을.
"한 번은 인정받으며 살자" 그에겐 큰 빚이 있다. 그는 기독교도였던 모친이 옥중의 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올린 새벽 기도의 결과가 곧 현재의 자신이라고 믿는다. 모친은 권사로서 과테말라에 가서 선교 활동을 펴고 있는 김옥련(79)씨. 눈앞에서 재판 받다 탈출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으로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믿는다. 또 하나의 축은 사회과학이다. 수감 기간 중 학생들의 도움으로 체득할 수 있었던 진보에의 신념이다.
“추가형을 두 번 살고, 지옥 같은 독방 생활까지 겪은 나를 가리켜 한국의 빠삐용이라고들 하더군요….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학생들로부터 받은 소중한 교훈 덕분입니다. ‘한 번은 인정 받으며 살자’는 거죠.”그가 어느 책상물림 못지 않게 방대한, 또 체계적인 독서를 한 까닭이다. 대학 초년병들이 거듭 나듯, 그 역시 잘 짜여진 독서 과정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철학(과거와의 삶을 차단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그는 말했다) – 심리학 – 역사(토인비의 책만 열 다섯 번 봤다) – 문학으로 이어 지는 의식 개웰엽堧潔駭? “학생들이 일러 준 것을 나름대로 심화 확대한 거죠. 결국은 미치지 않기 위해 읽은 거지만….”
늦은 깨우침에 뜨거운 실천이 따랐다. 이 세상의 버림 받은 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불도저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1984년 청송교도소에서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박영두의 원혼을 2001년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공권력에 의한 사망” 판결로 달랬다. 오지에 감금돼 있는 윤락녀들에 대한 끊임 없는 환기 덕택에 그 문제가 방송을 크게 타면서 사회 문제화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요즘 그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 본부’의 상임 대표라고 선명히 기재돼 있다. 종로와 영등포 등지의 매장에 있는 사장 10여명과 함께 기금을 마련, 교도소를 직접 방문한다거나 언론사를 통해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도와 온 결과다. 오는 5월 북한의 조선크리스트교연맹 리춘구 부위원장의 초청으로 봉수빵공장 복지 센터의 증축 문제를 논의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이다.
굶어 본 사람만이 굶주림을 아는걸까. 그는 말한다. “북한 어린이 돕는 문제를 제발 정치와 연결 짓지 말라”고. 또 “최근 미국 정부의 대북 조치는 어린이들 굶어 죽으라는 것 아니냐”고. 그는 “현재 상태라면 대북 지원 사업 자체가 2중 3중의 고통”이라며 “현대에만 주어진 통로를 더욱 개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이렇게 오래, 굶어가며 인터뷰 해 보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서양화가 아내는 '하늘이 준 선물' 아내 심재숙(44)씨는 제 9회 대한민국 미술 대전 금상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서양 화가다. 1994년 교회에서 목사의 소개로 알게 된 아내를 가리켜 그는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라 했다.
요즘 그는 웰빙과 보석 산업을 묶어 새 사업을 시도할 꿈에 부풀어 있다. “게르마늄과 은을 재료로 한 ‘웰빙 보석’말이죠.” 그의 얼굴에 보석 같은 미소가 일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둘 있는데, 최근 언론에서 아버지가 조폭 보스로 대서 특필되니 해외로 떠나자고 해 고민이라고 웃는다. 하기사 최근 그가 구술한 ‘코리안 마피아’가 웬만한 서점에서 비소설 부문 10위 안에 다 드니. 2월 11일 초판 발행한 지 20일만에 2쇄 돌입. 그러나 모든 인세는 불우 이웃들을 위해 기증되니, 이상훈 씨, 글 써서 돈 벌 일은 팔자에 없는 게 틀림 없다.
꿈이 있다. 아직 결혼식 못 올린 김태촌 부부와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것. 몇 년 뒤가 될 지 모른다. 그는 말했다. “서방파 보스가 나한테 ‘친구야, 내가 살아 가고 싶다’고 하는 곳 아닙니까! 사회보호법이 정녕 필요한 것입니까?”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는 성경 구절의 참뜻을, 그는 되새기고 있었다.
----- 조폭두목서 이웃사랑 전도사로</b> “정치적 이념을 떠나 식량난 때문에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무조건 도와야 합니다.”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본부’ 이상훈(55·사진) 상임대표는 “지난 2월 북한의 핵보유 선언 뒤 서방의 경제 제재가 강화되면서 북한 어린이 15만여명이 하루에 한끼도 못먹는 탓에 목숨이 위태롭다”고 말했다.
이씨가 북한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1990년대 말. 수출용 가발을 중국에서 생산하면서 연변과 칭다오 등을 자주 찾던 그는 탈북자들의 비참한 삶과 특히 배가 고파 중국 각지를 떠도는 어린이들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린이를 돕기 위해 지난해 5월 중국 공산당 간부를 통해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강영섭 위원장을 만나 ‘북한 어린이 돕기 사랑의 빵 나누기’ 모임을 가졌다. 이를 통해 어린이 2만4000여명 분의 빵을 보내는 등 최근까지 빵 10만여개를 북한에 보냈다. 용천역 폭파사고로 실명위기에 처한 어린이 6명의 치료비도 보냈다.
이씨의 어린이 사랑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2월 부산초등학교 6학년 하모군이 악성 뇌종양으로 사경을 헤매자 이씨는 삼성서울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해줬다.
현재 사회·자선 사업가로 활동하는 이씨의 과거는 무척 어두웠다. 주먹계의 대부 스라소니(본명 이성순)에게 싸움을 배운 그는 중학교 때 주먹세계에 입문, 1970년대 영등포 지역을 장악한 조직 폭력 ‘대호파’ 두목이 됐다. 그러나 80년 신군부의 조직폭력배 소탕 때 검거돼 81년 6월 살인교사 등 혐의로 징역 5년, 보호감호 7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93년 12월 25일 성탄절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이후 이씨는 가발장사와 노점상 등 닥치는 대로 번 돈으로 보석 무역업체를 설립했다. 이 와중에 ‘전국 5·6공 피해자협의회’를 결성, 교도소내 의문사 규명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과거는 버러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며 “교도소에서 신앙을 접해 남은 인생을 어려운 이웃을 돌보면서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의 가장 큰 바람은 전력난 등으로 생산을 멈춘 평양 봉수로 빵공장을 재가동하는 것. 이씨는 발전기와 냉열방기 등을 북한에 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씨는 “500원짜리 동전 한닢이면 북한 어린이가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며 “작은 도움이 큰 사랑으로 발전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