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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은평구의 문화유적 찾기
◇ 고양 밥할머니 석상 :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374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46호)
- 얼굴 부분이 훼손된 약사여래상 모습의 할머니 석상
고양 밥할머니 석상은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창릉 모퉁이의 ‘밥할머니 석상 공원’에 있다. 이 석상은 1993년 통일로 확장 사업 때 오금동 숫돌고개로 이전하였다가 2005년 1월에 도시 개발로 이 공원 안에 이전하였다.
이 석상은 고양시에서는 보기 드문 약사여래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2004년 12월에 정비한 이 공원 내에는 현재 이 석상 이외에도 선정비(善政碑) 2개, 교비명(橋碑銘) 1개 등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밥할머니 석상은 다른 석물과는 달리 북한산을 바라보며 45° 정도 옆으로 세워져 있다.
이 석상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고양 지역에 실존하였던 인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이 지역에서 여성 의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며, 주민들에게 밥을 많이 보시(普施)하였다고 해서 ‘밥할머니’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밥할머니는 불광리, 즉 연신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밑 마을(지금의 수양관 아래쪽 마을) 부근에서 해주오씨(海州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남달랐고, 생김새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단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큰 일을 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저 처녀는 큰 부잣집의 맏며느리감'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고 했는데, 과연 성장하여 인근에 있는 문씨(文氏)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1592년(선조 25년) 4월 왜군이 부산으로 침입한 후 파죽지세로 양산(梁山)을 거쳐 상주(尙州) 등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밥할머니는 단신으로 앞장서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이 강산을 내가 지키자”라고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섬거적과 새끼줄을 수없이 많이 만들게 하였다. 이것을 삼각산 노적봉으로 가지고 가서 노적봉을 둘러싸게 하였다. 멀리서 일본군이 볼 때 마치 쌀가마니를 쌓아둔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을 마친 후 밥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조용히 하시오, 왜군들에게 이 노적봉을 꼭 한번 사용할 때가 올 것이요.”하고 하였다.
이후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는 조선군과 연합하여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한양을 목전에 두고 1593년(선조 26년) 1월 27일 양군 연합군은 고양 벽제관 혜음령고개에서 매복한 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애석하게도 대패하였다.
혜음령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들이 고양 창릉내에 진격하여 물을 마시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개울물이 희부연 색깔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왜군들이 물마시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마침 창릉내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물이 뿌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노적봉을 가리키며 “지금 저 산에는 조선군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주둔해 있소. 저 군량미들을 쌓아놓은 것을 보시오. 아마 지금 저녁시간이라 쌀 씻은 뜨물이 흘러 이 냇물이 흐려진 것 같소”라고 대답하고는 총총히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
왜군들은 이 이야기를 듣자 두려움에 떨면서도 목의 갈증이 심한지라 허겁지겁 개울물을 마셨고, 말에게도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 개울물은 삼간산 밑 개천 상류쪽에서 생석회를 풀어 흘려 보낸 물이었다. 생석회물을 마신 왜군은 물론 말까지 모두 회독(灰毒)으로 심한 복통을 일으켜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더군다나 노적봉에 있는 식량이 풍부한 조선의 대군(大軍)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결국에는 퇴각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밥할머니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때에는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치마 위에 덮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주변의 돌들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행주치마의 설화를 낳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혼란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밥할머니는 인근 동리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아군들의 밥을 일일이 만들어 나눠주었고, 이런 연유로 오씨 할머니를 밥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 온다.
밥할머니는 이후 전멸 위기에 놓인 아군을 구출한 슬기로운 사람으로 여겨져 민간신앙에서 높이 추앙되었다. 본래 밥할머니의 석상(石像)은 삼각산 노적봉이 잘 보이는 창릉 모퉁이에 있었는데,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밥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석상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인들이 국도 옆에 서 있는 밥할머니 석상의 내력을 알고는 석상 머리 부분을 망치로 깨뜨려서 머리가 없는 불구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들은 석상을 땅속 깊숙이 묻어 버렸는데, 광복 직후 뜻 있는 사람들이 찾아 다시 세웠다.
밥할머니의 실제 묘가 불광동 150번지에 최근까지 있었으나, 1976년 자손들에 의해 화장되었다고 전하며, 밥할머니의 재실은 진관외동 186-2 폭포동 싱아굴에 있었는데, 1957년경에 화재가 나서 전소되었다고 한다.
이 석상은 최근에 만들어진 대좌(臺座)를 포함하여 총 높이 155.5cm이고, 현재 얼굴 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석상의 팔목과 어깨 등은 매우 풍만하여 전체적으로 얇은 곡선들이 몸을 휘감은 듯 보인다. 수인(手印)의 경우 왼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편 상태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모습)을 하고 오른손은 약함을 받치고 있다.
이 석상은 입상(立像)으로 무릎 아랫부분이 결손되어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석상의 뒷면은 비교적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따로 광배(光背)를 만들어 받쳤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조 중기의 약사 보살상의 모습으로 세워진 여성 의병장 밥할머니 석상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았을 때 대단한 배려 속에서 유지되었다. 중국의 사신들과 고위관리들이 지나는 의주길(관서대로)에 세워진 밥할머니의 위상은 매우 컸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 머리 부분을 새로 만들어 드리면 자꾸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옛 모습 그대로 있어야 민속, 문화적 가치가 높으므로 지금 모습 그대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요즈음도 마을 주민들과 후손들로 이루어진 밥할머니 보존회에서 매년 가을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 흥창사 : 은평구 진관동 71-9
- 통일로 변의 개인사찰로 왕족 은언군의 신도비가 개창주의 송덕비로 변모
구파발역이 가까운 통일로 변에 흥창사가 있다. 이 절의 대웅전 앞에는 흥창사의 개창주(開倉主)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공덕비는 은언군(恩彦君)의 신도비 뒷면에 붙여서 세웠다.
비신의 앞면에는 원래 아무 글자가 없는 상태였으나 현재 흥창사란 사찰명과 개창주 부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넣은 상태이다. 또한 비신의 뒷면인 비음(碑陰)에는 페인트칠을 하고, 시멘트를 부분적으로 덧씌웠지만 ‘은언군휘인자명흥(恩彦君諱䄄字明興)……’등이 보임으로 비석이 은언군의 묘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보였다.
비신 위의 옥개석(屋蓋石)은 ‘절두산 순교기념관’ 경내에 있는 은언군 묘표(墓表)의 옥개석을 뜯어다가 조립해 놓아서 비신과의 조립부분이 약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밑둥이 파손된 비신(8자비)은 밑둥을 잘라내고 귀부 위에 올려져 있다.
절 뒤쪽의 산 96-2호 개창주의 묘역 안에는 장군석 1쌍,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장명등, 향로석, 상석, 고석, 제초석 등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은평구 진관외동 제각말 은언군 묘터에서 이전해 온 것이다.
이말산에 있던 은언군의 묘역은 6.25 전쟁 중에 유실되어 사라지고, 묘비는 절두산 성지, 석물은 흥창사에 옮겨져 개창주(開倉主 : 孫城君 李昌根)의 송덕비로 변모하였다.
참고로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1801년)은 조선 후기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셋째아들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 중 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은 왕족이다. (은언군은 철종의 할아버지로 그의 아들은 전계대원군이고,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셋째아들이 철종이 되었다.)
은언군은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의 지산 이말산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분묘는 6.25 전쟁 중에 유실되어 묘비는 절두산 성지, 석물은 흥창사로 이전되었다.
현재 이 절은 ‘서락원’이라는 납골당을 운영하고 있다.
◇ 청담사 터(靑潭寺 址) : 은평구 진관내동 429번지(진관탑골문화공원)
- 발굴조사로 드러난 통일신라 시대의 청담사 터
통일신라 시대 대표적인 화엄 10찰 중의 하나인 청담사(靑潭寺) 터가 통이로 옆에 있다. 2008년 서울시의 ‘은평뉴타운 사업 예정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청담사 터는, 발견 당시 ‘청담사’라는 글자가 적힌 명문(銘文) 평기와와 고려시대 석조미륵입상 등 유물 수백 점이 출토돼 주목을 받았다.
신라 시대 화엄종 10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청담사는 그동안 문헌 기록에만 언급되고,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 최치원이 904년(효공왕 8)에 저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라는 한 스님의 전기에서 “해동의 화엄의 큰 학문 장소로는 10군데가 있으니 한주(漢州)의 부아악(負兒岳) 청담사도 그중의 하나이다.(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漢州負兒山靑潭寺也)”라고 적었으나 그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화엄10찰(華嚴十刹)은 신라 때, 의상(義相)이 당(唐)에 가서 지장사의 지엄(智儼)에게 『화엄경(華嚴經)』을 배우고 돌아와 창건한 10개의 절이다.
문무왕 16년(676)에 부석사(浮石寺)를 지어 화엄도량으로 삼고, 『화엄경』을 널리 펴기 위해
합천 가야산(伽倻山)에 해인사(海印寺), 보광사(普光寺), 경북 달성군 비슬산(琵瑟山)에 옥천사(玉泉寺), 부산 금정산(金井山)에 범어사(梵魚寺), 지리산(구례)에 화엄사(華嚴寺), 공주 계룡산(鷄龍山)에 갑사(甲寺), 서산 상왕산(象王山)에 보원사(普願寺), 경북 달성군에 미리사(美理寺 또는 美利寺), 청담사(淸潭寺)의 10개 절을 지었다고 하며, 이를 화엄 10찰이라고 한다.
※ 미리사•청담사•보광사 대신, 비마라사(毘摩羅寺)•청계사(淸溪寺)•미현사를 꼽기도 한다.
여기서 이 문화공원 앞에 세워진 안내문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003년 은평지구 뉴타운 도시개발사업 문화재 지표조사로 알려진 자씨각慈氏閣 일대의 석조문화재를 보존하고, 고려 시대 건물지 초석과 기단석을 재현하여 2023년에 조성하였다. 2011년 서울특별시 문화재로 지정된 '진관동 석 아미타불좌상'과 '진관동 석 보살입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은 나말여초기에 창건되거나 경영되었다가 고려중기에 중창되었던 절터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2007년 발굴조사로 고려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 6동, 담장지 3기, 조선시대 분묘 17기가 확인되고, 다량의 기와, 청자와 백자 편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 "三角山靑潭寺三宝草삼각산청담사삼보초"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키와 편들이 발견되어 이곳이 청담사지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신라시대학자 최치원이 904년에 저술한 "법장화상전法裝和尙傳"에 언급된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에서 "부아산負兒山(북한산) 청담사"가 포함된다. 청담사는 역사적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서울의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개성과 남경을 잇는 교통로에 입지함으로써 고려 왕실과 밀접하고 위상이 높았던 사찰로 여겨진다.」
이 공원에는 발굴조사로 출토된 고려시대의 건물지 초석과 기단석을 진열하고, 미륵을 뜻하는 <자씨각(慈氏閣)> 건물을 세워 놓았다. 이곳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진관동 석 보살입상 ·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진관동 석 아미타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 은평구 진관동 45-5 (금암문화공원 내 : 서울 유형문화재 제38호)
- 조선 후기의 정조가 조부 영조의 옛일을 회상하여 건립한 비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는 조선 후기 정조가 1781년 8월 증조할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 사적 제98호)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5~1776)의 옛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써서 건립한 비이다.
금암참은 의주(義州)로 가는 역참(驛站)이었다. 정조는 1781년 8월 명릉을 참배하는 길에 금암참에 이르러 할아버지 영조가 남긴 자취를 둘러보고, 경기도관찰사에게 오랜 세월에 스러진 참사(站舍)를 새로 짓고 빈터를 닦아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이 얹혀있다. 비문 끝에 “소자가 왕위를 이은 지 5년째 되는 신축년 가을 팔월 초 길일에 삼가 짓고 써서 15일에 세우다”(小子嗣位之五年辛丑八月初吉日 敬製敬書 十五日立)라고 했듯이 정조가 직접 짓고 쓴 것이다.
금암기적비 비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으로 있었을 때인 경종 원년(1721) 8월 15일 부친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사(農舍)에서 닷새 동안 머물렀다.
장차 대궐로 돌아가 기거하기 위해 말 한 필과 시동(侍童) 두 명을 데리고 저녁에 출발했는데,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러 밤이 깊고 불도 없어 금암(黔巖)의 참사(站舍)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를 몰고 앞내를 건너고 있었는데, 뒤따르던 사람이 도둑이라고 알렸다. 영조는 이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참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작년의 흉년으로 기한(飢寒)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밭을 갈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리이나 그 또한 직책이니 그대가 처리하라”고 했다.
이에 참장은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적을 관청에 알리지 않았다. 날이 밝자 길을 떠나 도성에 도착했는데, 이미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어 학가(鶴駕, 세자의 수레)가 궁문 밖에서 의례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 영조 32년(1756년) 봄, 영조는 명릉에 일이 있어 거둥하는 차에 그 참사에서 다시 머무르게 되었고, 이에 이성신을 찾았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 이인량(李寅亮)을 찾아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아비의 옛 관직을 주어 세습하도록 하였다.
이 비문을 보면 영조는 소도둑을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를 본받아 어진 정치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파발에서의 파발제 문화행사
◇ 구파발(舊擺撥) 터 : 은평구 진관동 산 25번지(서울시 기념물 제35호)
- 조선 후기의 통신제도인 파발(擺撥)막이 있었던 곳
구파발은 조선 후기에 통신을 위해 파발마(擺撥馬)를 두어 서울과 의주 사이의 긴급한 업무를 연락하던 곳이다. 구파발은 옛날(舊)에 파발(擺撥)이 지나던 곳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곳에는 파발마를 쉬게 하는 마방이 자리했다.
임진왜란 이후 횃불에 의존하는 봉수제(熢燧制)의 의미가 없어지면서, 이를 대신한 것이 파발제도였다. 풍전등화와 같은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길은, 발 빠른 사람과 말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에 응원군으로 들어온 명나라 군사 제도에서 모방한 것으로, 1597년(선조)에 비로소 시행되었다.
파발의 1차적 기능은 화급을 다투는 공문서의 전달에 있었다. 방법은 사람의 속보에 의존하는 보발(步撥), 말의 등에 의존하는 기발(騎撥)로 나누었다. 기발은 25리 간격으로 교대해야만 되므로, 그곳에 참(站)과 파발막이 세워졌다.
서울에서 의주(義州) 사이에(1,050리) 파발참(擺撥站)은 40여 개로 이것을 서발(西撥)이라 하고, 서울에서 경흥(慶興)까지(2,300리)는 그 참수(站數)가 60여 개인 북발(北撥), 서울에서 동래(東萊)까지 920리에 30여 개가 되는 남발(南撥)이 있었는데 이 참수는 시대에 따라서 증감(增減)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