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5 - 공야장(公冶長) - ㉕ |
1 | 顔淵 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안연, 계로가 곁에서 모실 적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각자 너희들의 뜻을 말하지 않는 것인가?” 盍, 音合. ○ 盍, 何不也. 합은 어찌 않느냐라는 말이다. |
2 |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자로가 말했다. “수레와 마차를 몰고 가벼운 가죽옷을 입고 친구들과 더불어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다 헤져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衣, 去聲. ○ 衣, 服之也. 裘, 皮服. 敝, 壞也. 憾, 恨也. 의는 입는다는 말이다. 구는 가죽 옷이다. 폐는 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감은 한스럽다는 말이다. |
3 |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안연이 말했다. “저는 잘난 것을 자랑함이 없고, 공로를 과시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伐, 誇也. 善, 謂有能. 施, 亦張大之意. 勞, 謂有功, 『易』曰“勞而不伐” 是也. 或曰: “勞, 勞事也. 勞事非己所欲, 故亦不欲施之於人.” 亦通. 伐이란 자랑(과시)하는 것이다. 善이란 유능한 것이다. 施란 크게 펼친다는 의미다. 勞는 공이 있음을 말한다. 주역에 이르길 “勞而不伐”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뜻이다. 혹자는 말하길, “勞는 수고로운 일이다. 수고로운 일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므로, 역시 남에게 그것을 베풀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역시 통한다. 易繫辭上 子曰 勞而不伐 有功而不德 厚之至 주역 계사 상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이 있어도 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후중함이 지극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前說與上句皆謙也 後說恕也 앞의 설은 윗 구절과 함께 모두 겸손함이고, 뒷 설은 恕다. 朱子曰 顔子是治箇驕字 子路是治箇吝字 顔子之志不以己之長 方人之短 不以己之能媿人之不能 是與物共 주자가 말하길, “안자는 하나의 驕(교만)라는 글자를 다스렸고, 자로는 하나의 吝(인색)이란 글자를 다스렸다. 안자의 뜻은 자기의 장점으로 남의 단점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의 능함으로 남의 능하지 못함을 창피주지 않겠다는 것이니, 이는 남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無伐善無施勞 善與勞如何分別 曰 善是自家所有之善 勞是自家做出來底 누군가 묻기를, “선을 자랑함이 없고 공로를 자랑함이 없다고 하는 것에서, 善과 勞를 어떻게 분별합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善은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善이고, 勞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無伐善是不矜己能 無施勞是不矜己功 伐善함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유능함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고, 施勞함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南軒張氏曰 人之不仁病於有己 故雖衣服車馬之間 此意未嘗不存焉 子路蓋欲克其私於事物間者 其志可謂篤 而用功可謂實矣 至於顔子 則又宏焉 理之所在 何有於己 其於善也 奚伐 爲吾之所當爲而己 其爲勞也 奚施 蓋存乎公理而無物我之間也 學者有志於求仁 則子路之事 亦未宜忽 要當如此用力以爲入德之塗 則顔子之事 可以馴致矣 남헌장씨가 말하길, “사람이 어질지 못함은 그 病因이 ‘자기가 있음(자기를 염두에 둠)’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의복이나 차마 사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뜻이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로는 대체로 그 사사로움을 사물지간에서 극복하고자 바랐던 사람이었으니, 그 뜻이 돈독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힘써 노력함도 성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안자에 이르면, 또한 이보다 더 컸으니, 이치의 소재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기 善에 대하여, 어찌 자랑한단 말인가? 그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할 따름이다. 자기 공로를 위하여, 어찌 자랑한단 말인가? 대체로 公理에 보존되어서 사물과 나 사이에 차이가 없을 따름이다. 배우는 자가 仁을 추구함에 뜻을 둔다면, 자로의 일 역시 소홀해서는 합당하지 않다. 마땅히 이와 같이 힘을 쓰는 것으로 덕으로 들어가는 길을 삼아야 하는데, 이렇게 한다면, 안자의 일에도 차근차근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원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늙은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는 믿어주고, 어린 사람은 품어주고 싶다.” 老者養之以安, 朋友與之以信, 少者懷之以恩. 一說: 安之, 安我也; 信之, 信我也; 懷之, 懷我也. 亦通. 늙은 사람은 편안함으로 봉양하고, 친구는 믿음으로써 함께 어울리고, 어린 사람은 은혜로써 품어준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安之를 나를 편안하게 하고, 信之를 나를 믿어주고, 懷之를 나를 품어준다고 해석하는데, 역시 통한다. 合二說 其義方備 老者我養之以安 而後方安於我 두 설을 합해야 그 의미가 바야흐로 잘 갖추어진다. 늙은 사람은 내가 그를 편안함으로 봉양한 뒤에야 비로소 나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問孔子擧此三者 莫是朋友是其等輩 老者是上一等人 少者是下一等人 三者足以盡該天下之人否 朱子曰 然 누군가 묻기를, “공자께서 이 세 가지 사람을 들었는데, 혹시 朋友란 그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고, 老者란 한 등급 위의 사람이며, 少者란 한 등급 아래의 사람으로서, 세 부류의 사람은 천하의 모든 사람에 전부 다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黃氏曰 集註前說是作用 後說是效驗 後說與綏斯來動斯和意思相類 自是聖人地位 但前說却有仁心自然物各付物之意 有天地發生氣象 況顔子子路皆是就作用上說 故前說爲勝 황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앞 설은 작용을 말한 것이고, 뒷 설은 효험을 말한 것이다. 뒷 설은 ‘편안하게 해주니 곧 몰려오고, 감동을 시키니 곧 화합한다’는 말과 의미가 서로 비슷하니, 저절로 성인의 경지인 것이다. 다만 앞 설에는 도리어 어진 마음은 자연히 사물마다 각자 그 사물의 이치에 맡긴다는 뜻이 있으니, 천지가 발현하여 만들어내는 기상이 있다. 하물며 안자와 자로도 모두 작용 위로 나아가 말하였기 때문에, 앞의 학설이 더 낫다.”라고 하였다. |
5 | ○ 程子曰: “夫子安仁, 顔淵不違仁, 子路求仁.” 정자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仁을 편안하게 여기셨고, 안연은 仁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자로는 仁을 구하였다.” 朱子曰 他人於微小物事尙戀不能捨 仲由能如此其心廣大而不私己矣 非意在於求仁乎 주자가 말하길, “타인은 미세한 사물에 대하여 여전히 연연해 하면서 버리지 못하지만, 중유는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으니, 그 마음이 광대하였고 자신을 사사롭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이 仁을 추구함에 있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 子路顔子孔子皆是將己與物對說 子路便是箇舍己忘私底意思 今若守定他這說 謂此便是求仁不成 子路每日都無事只是如此 當時只因子路偶然如此說出 故顔子孔子各就上面說去 使子路若別說出一般事 則顔子孔子又就他那一般事上說 然意思却只如此 자로와 안자와 공자는 모두 자신을 가지고 외물과 상대하여 말한 것이다. 자로는 곧바로 자기를 버리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린다는 뜻이었지만, 지금 만약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지켜낸다고 할지라도, 仁을 추구해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로는 매일처럼 항상 일삼은 바 없이 그저 이렇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당시에 단지 자로는 우연히 이렇게 말을 하였기 때문에, 안자와 공자는 각자 그 위로 나아가 말하였던 것이다. 만약 자로가 달리 일반적인 일을 말하였다면, 안자와 공자는 또한 그가 말한 일반적인 일 위로 나아가 말하였을 것이나, 그 뜻은 오히려 단지 이와 같았을 따름이다. 趙氏曰 求仁猶與仁爲二 不違仁 則身已居仁而常不去 安仁 則心卽仁 仁卽心 安而行之 無適非仁矣 조씨가 말하길, “仁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직도 仁과 더불어 둘이라는 것이고, 仁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제 몸이 이미 仁에 거처하여 항상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仁을 편안히 여긴다는 것은 마음이 곧 仁이고 仁이 마음이어서 그것을 편안히 여겨서 행한다는 것이므로, 어디를 가더라도 仁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6 | 又曰: “子路ㆍ顔淵ㆍ孔子之志, 皆與物共者也, 但有小大之差爾.” 또 말하길, “자로, 안연, 공자의 뜻은 모두 외물과 더불어 같이 하는 것들이다. 단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顔子所言不及孔子 無伐善無施勞 是他顔子性分上事 孔子言安之信之懷之 是天理上事 정자가 말하길, “안자가 말한 것은 공자에 미치지 못한다. 자기의 善을 자랑함이 없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함이 없다는 것은 저 안자의 천성과 분수 위의 일이고, 공자가 말한 편안하게 해주고 믿음을 주고 품어준다는 것은 천리 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子路有濟人利物之心 顔子有平物我之心 夫子有萬物得其所之心 주자가 말하길, “자로는 남을 구제하고 외물을 이롭게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 안자는 외물과 나를 공평하게 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공자께서는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게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라고 하였다. 子路須是有箇車馬輕裘方把與朋友共 如顔子只就性分上理會無伐善無施勞 車馬輕裘 則不足言矣 然以顔子比之孔子 則顔子猶有箇善勞在 若孔子便不見有痕迹了 又曰 子路底淺 顔子底深 二子底小 聖人底大 子路底較粗 顔子底較細膩 然都是去得箇私意了 只是有粗細 자로는 반드시 수레와 말과 가벼운 가죽옷이 있어야만 비로소 친구와 더불어 함께 써야함을 파악하는데, 안자의 경우에는 그저 천성과 분수 위에 나아가 자기의 善을 자랑함이 없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함이 없는 것을 이해한 것으로서, 수레와 말과 가벼운 가죽옷은 말할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안자를 공자와 비교한다면, 안자는 그래도 善과 공로가 있는 것이니, 공자의 경우라면, 곧 어 떤 흔적이라도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또 말하길, 자로의 것은 얕고, 안자의 것은 깊으며, 두 제자의 것은 작고, 성인의 것은 크다고 하였고, 자로의 것은 비교적 거칠고, 안자의 것은 비교적 세밀하고 매끈하지만, 모두 가서 얼마간은 사사로운 뜻을 얻었던 것이다. 그저 거칠고 세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子路收斂細密可到顔子地位 顔子底純熟又展拓開可到孔子地位 자로가 收斂(심신을 다잡음)하여 세밀하게 한다면, 안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안자의 순수함과 익숙함을 또다시 펼쳐서 개척해낸다면, 공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西山眞氏曰 聖門學者誠實端慤 言者卽其所行 行者卽其所言 苟躬行有一毫未到 斷不敢輕以自許 子路爲人勇於爲善而篤於朋友 故所願如此 蓋私之一字乃人心之深害 私苟未忘 雖於骨肉親戚之間 尙不能無彼此物我之分 況朋友乎 子路之言 雖只及朋友 然觀其用心 則其至公無私 可見矣 顔淵之志 又大於子路 蓋視己之善 如未有善 視己之勞 若初無勞 觀其用心 雖至堯舜地位 亦歉然常若不足 子路所謂車馬衣裘與朋友共 特顔子善中之一善耳 夫子之言志又大於顏淵 蓋二子猶未免於用意 若聖人則如天地然一元之氣運之於上而天地之間無一物不得其所 不待物物著力然後能之 又非二子所及 然今學者且當從子路學起 必如子路之忘私 然後方可進步 不然則物我之私 梗於胸中 如蟊賊如戈戟然 又安能有善不伐有勞不矜 如顔子乎 況於聖人地位又高又遠 非用力所可到 須德成仁熟從容中道 然後不期而自至耳 此非始學之事 故必先學子路之忘私而後可 서산진씨가 말하길, “聖人 門下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성실하고 단정하였으니, 말한 것은 곧 그가 행하고 바였고, 행한 것은 곧 그가 말한 바였다. 만약 몸소 행함에 터럭 하나라도 이르지 못함이 있다면, 결단코 감히 쉽게 스스로를 허용하지 못하였다. 자로의 사람됨은 선을 행함에 용감하였고 친구에게 독실하였기 때문에, 원하는 바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대체로 私라는 글자 하나가 도리어 사람의 마음을 깊이 해치는 것이니, 사사로움을 만약 아직 잊지 못하였다면, 비록 골육지간이나 친척지간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피차와 물아의 구분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친구지간에 있어서랴! 자로의 말은 비록 단지 친구에게만 미쳤지만, 그러나 그 마음 씀씀이를 살펴본다면, 지극히 공평하고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안연의 뜻은 또한 자로보다 컸으니, 대체로 자기 善을 보기를 아직 善이 없는 것처럼 하였고, 자기 공로를 보기를 마치 처음부터 공로가 없었던 것처럼 하였다. 그 마음 씀씀이를 살펴본다면, 비록 요순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라도, 또한 섭섭한 듯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였다. 자로가 수레와 말과 가죽옷을 친구와 더불어 같이 쓰겠다고 말한 것은 단지 안자의 善 중에 있는 하나의 善일 따름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그 의지는 또한 안연보다 컸으니, 대체로 두 제자는 그래도 아직 뜻을 사용함(의도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성인의 경우는 곧 하늘과 땅처럼 一元之氣가 위에서 운행되어 천지간에 사물 하나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으니, 사물마다 모두 힘을 쓰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두 제자가 미칠 수 있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배우는 사람은 또한 마땅히 자로를 따라서 배워야 한다. 반드시 자로가 사사로움을 잊은 것처럼 한 연후에 비로소 진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物我를 차별하는 사사로움이 마음속에서 사납기가 마치 해충과 도적과 같고 창칼과 같을 것이니, 또한 어찌 능히 善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 것을 안자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성인의 경지는 높고 또한 멀기에 힘을 써서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반드시 덕이 이루어지고 仁이 원숙해져서 조용히 도에 들어맞게 된 연후에,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는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자로의 사사로움을 잊는 것을 배운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7 | 又曰: “子路勇於義者, 觀其志, 豈可以勢利拘之哉? 亞於浴沂者也. 顔子不自私己, 故無伐善; 知同於人, 故無施勞. 其志可謂大矣, 然未免出於有意也. 至於夫子, 則如天地之化工, 付與萬物而己不勞焉, 此聖人之所爲也. 今夫羈靮以御馬而不以制牛, 人皆知羈靮之作在乎人, 而不知羈靮之生由於馬, 聖人之化, 亦猶是也. 先觀二子之言, 後觀聖人之言, 分明天地氣象. 凡看『論語』, 非但欲理會文字, 須要識得聖賢氣象.” 또 말했다. “자로는 의로움에 용감한 사람이었기에 그 뜻을 살펴보면 어찌 권세와 이익으로 그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욕기자(기수에 목욕하며 상춘하고 싶다는 증점과 같은 부류)에 버금가는 사람이다. 안자는 스스로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기에 잘 난 것을 뽐냄이 없었고, 남과 같음을 알기에 공로를 자랑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 뜻이 크다고 말할 만 하였지만, 그러나 의식적으로 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공자께 이르러서는 천지의 조화옹처럼 만물에 부여해 주었을 뿐 자신은 수고롭게 일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행하시는 바이다. 지금 대저 굴레와 고삐로 말을 제어하지만 소를 제어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모두 굴레와 고삐가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것만 알뿐 굴레와 고삐가 말에게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성인의 교화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먼저 두 분의 말을 살펴보고, 나중에 성인의 말씀을 살펴보면, 천지의 기상이 분명하다. 무릇 논어를 보면, 단지 문자를 이해하고자 할 뿐 아니라 모름지기 성현의 기상도 체득하여 알려고 해야 한다.” ※ 말고삐와 소고삐는 다르므로 혼용할 수 없다. 問浴沂地位恁高 程子稱子路言志亞於浴沂 何也 朱子曰 子路學雖粗 然他資質也高 如人告以有過 則喜 有聞未之能行 惟恐有聞 見善必遷 聞義必徙 皆是資質高 車馬輕裘 都不做事看 所以亞於浴沂 故程子曰 子路地位不達爲國以禮道理 若達 便是這氣象也 又問浴沂是自得於中而外物不能以累之 子路雖未至自得 然亦不爲外物所動矣 曰是 누군가 묻기를, “浴沂(기수에서 목욕하겠다는 증점의 지향)의 경지가 이렇게 높은데도, 정자는 자로를 칭찬하면서 말하길 그 지향이 浴沂에 버금간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자로의 학문은 비록 거칠었지만, 그러나 그의 자질은 높았다. 예컨대, 남이 잘못이 있다고 알려주면 기뻐하였고, 들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아직 행하지 못하면 오직 더 듣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였으며, 善을 보면 반드시 그쪽으로 옮겼고, 義를 들으면 반드시 옮겼으니, 이 모두가 자질이 높은 것이다. 수레와 말과 가벼운 가죽옷은 모두 무슨 일로도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浴沂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자가 말하길, 자로의 경지는 나라를 예와 도리로써 다스림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만약 이르렀다면 곧바로 이러한 기상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浴沂는 마음속에서 자득한 것이어서 외물이 그것을 얽어맬 수 없는 것인데, 자로는 비록 자득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또한 외물에 의해 동요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옳다!”고 하였다. 胡氏曰 以氣象觀之 子路發於意氣者也 顔子循其性分者也 夫子則渾然天理者也 子路所以亞於浴沂 以其胸次洒落 非勢利所得拘 使無所滯礙 則曾晳之所至矣 聖人信不可及 顔子地位亦高 誠能先於貨利之間 慕子路之勇 決而去其吝嗇之心 於求仁之方 亦庶幾矣 호씨가 말하길, “氣象으로 살펴보자면, 자로는 意氣에서 발현한 것이고, 안자는 그 본성과 분수를 따른 것이며, 공자는 혼연히 천리인 것이다. 자로가 浴沂에 버금가는 까닭은 그 흉금(胸次)이 맑고 깨끗(洒落)하기 때문이니, 권세와 잇속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막히고 거리끼는 바가 없도록 한다면, 곧바로 증석이 이르렀던 경지인 것이다. 성인의 경지는 진짜로 이를 수 없고, 안자의 경지도 역시 높았다. 진짜로 능히 재물과 잇속 사이보다 우선하여 자로의 용기를 사모하여 결단코 그 인색한 마음을 제거한다면, 仁을 추구하는 방도에 있어서 또한 거의 다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子路雖有曾點氣象 而其實亦有不同 曾點是知之事 子路是行之事 浴沂之智崇 共敝之行實 경원보씨가 말하길, “자로는 비록 증점의 기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또한 같지 않은 점도 있었다. 증점은 아는 일이었고, 자로는 실행하는 일이었다. 浴沂의 지혜는 높지만 해지도록 함께 쓴다는 실행은 실질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人心天理本自周流 特爲私欲間隔 故不得遂其與人同適之樂 與人同利之仁爾 子路之志 雖未能超然 如曾點之洒落 然常人認物爲己 知有己不知有人 以子貢尙貨殖 以子夏而孔子尙不假蓋焉 子路自甘敝縕而與人共其輕肥 私欲不間隔 其天理之周流 得遂其與人同利之仁 豈不可亞於曾點與人同適之樂乎 신안진씨가 말하길, “인심은 천리가 본래 저절로 두루 흐르는 것이지만, 다만 사욕에 의해 사이가 막히기 때문에, 남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즐거움과 남과 더불어 이로움을 함께 하는 仁을 이룰 수 없는 것일 따름이다. 자로의 지향은 비록 아직 초연하여 마치 증점처럼 맑고 깨끗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보통 사람은 외물을 자신으로 인식함에 있어 자기가 있음을 알 뿐 남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자공은 여전히 재물을 불렸고, 자하임에도 공자께서는 오히려 거짓으로 (그 허물을) 덮어주지 않았지만, 자로는 스스로 해진 솜옷도 달게 입으면서도 남과 더불어 그 가벼운 가죽옷과 살진 말을 함께 썼던 것이다. 이는 사욕이 그 천리의 두루 흐름을 가로막지 않아서, 그가 남과 더불어 이로움을 함께 하는 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 어찌 남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증점의 즐거움에 버금가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子曰 以善者己之所有不自有於己 故無伐善 以勞事人之所憚知同於人 故無施勞 주자가 말하길, “善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이지만, 저절로 나에게 있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善을 자랑함이 없는 것이다. 공로가 되는 일은 사람들이 꺼리는 바이지만, 남에게 있어서도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로를 자랑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尙有勉行克治之意 여전히 힘써 행하고 극복하여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 問夫子如化工及羈靮之喩 朱子曰 這只是理自合如此 老者安之 是他自帶得安之理來 友信少懷 是他自帶得信之理 懷之理來 聖人爲之 初無形跡 如穿牛鼻絡馬首 都是天理如此 恰似他生下便自帶得此理來 누군가 공자를 조화를 부리는 장인과 재갈과 고삐에 비유한 것에 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이것은 그저 이치가 저절로 부합함이 이와 같을 따름이다. 늙은 사람은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은 그가 저절로 편안하게 해주는 이치를 띠고서 왔다는 것이고, 친구를 믿어주고 젊은이를 품어주는 것도 그가 저절로 믿어주는 이치와 품어주는 이치를 띠고서 왔다는 것이다. 성인께서 그것을 하실 적에, 처음부터 형체와 자취가 없었는데, 마치 소의 코를 뚫고 말의 머리를 묶어내는 것이 모두 천리인 것과 같은 것이니, 흡사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곧 이러한 이치를 띠고서 나온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子路物與人共而不爲己私者也 顔子善與人同而不爲己私者也 夫子則廓然大公有造化物各付物之氣象 不爲己私 不足以言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자로는 물건을 남과 함께 쓰면서 자기의 사사로움을 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안자는 善을 남과 같이 하면서 자기의 사사로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자는 곧 매우 크게 공정하여 조화옹이 사물마다 각자 그 사물의 이치를 부여한다는 기상이 있었으니, 자기의 사사로움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