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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의 略史
I. 한국 천주교회 초기 역사의 개요.
1. 조선 천주교회 약사 - 한국 천주교회가 걸어온 길 (변기영 신부 씀)
온 세계의 모든 겨레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으나, 우리 배달겨레만은 스스로의 진리탐구의 노력과 천주를 찾는 거룩한 정신으로 천주교 진리를 연구하여 마침내 자랑스러운 한국천주교회를 세웠고 목자 없이 평신도들의 힘으로 50년 여 년 간을 칼 아래 목을 늘이면서까지 교회를 지키고 발전시켰고 또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의 힘만으로 교구를 설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지나온 200년의 피로 물든 발자취를 간결히 더듬어보자.
1779년 겨울 천진암에서 권철신, 정약전 등 학자들이 개최한 학문연구 강학회에 이벽 성조의 개입으로 천학(天學)논증과 신앙수련의 첫발을 내닫은 후, 수차에 걸쳐 북경천주교회와의 연락을 시도하던 끝에 1783년 가을에는 이 승훈 선생이 파견되어 마침내 1784년 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세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 김범우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쓰면서 전교하였으며, 1785년에 최초의 박해인「을사박해」가 일어나, 그 해 이 벽 성조께서는 문중의 탄압으로 집안에 감금되자 거룩히 단식순교(斷食殉敎)하였다. 그래도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위대한 창립성현들은 자발적으로 「임시준성직자단」(臨時準聖職者團)을 구성하여, 새로 입교한 신자들을 돌보며 교회를 발전시켰다.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등 교회창립자들이 모두 거룩히 피를 뿌리며 순교하였고, 정하상과 유 진길 등 젊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마침내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으니, 북경에 9차례 이상 드나들면서 조선교구설정을 주선한 순교복자 정 하상은 「조선교구설정자」라는 칭호를 받으실 만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피를 흘렸으며, 1846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였으며, 1866년에는「병인박해로」가장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하였다. 마침내 1886년 한불조약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1925년에 순교자 79위가, 1968년에는 24위가 복자품위에 올랐다. 이제 피로써 지켜온 한국천주교회의 과거역사는 우리의 힘이 되고 거울이 되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교정신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스스로 진리를 찾아 배달겨레 스스로 싹틔운 교회가 피를 뿌리며 달려온 길이 어느덧 200여 년이 되어가니, 선조들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는 거룩하고 성실하게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들을 본받아, 스스로 진리탐구에 힘쓰고 스스로 복음전파에 애쓰며 스스로 주를 증거 하는 일에 목숨까지라도 바쳐야 할 것이다. 2000년 한국천주교회가 걸어온 길은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길이었다. < 변기영 신부 편저. ⌜트리덴틴 공의회 간추린 교리문답⌟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1991년. 서문에서 발췌>
이후 조선교구(실질적으로는 조선 대목구)는 이후 조선대목구의 뒤를 이은 서울 대목구(1911년)를 거쳐 서울 대교구로 발전하고(1962년)는 1963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10번째 교구로 수원교구를 분할하게 되었고, 수원교구는 2001년에 대략 150번째로 오전동 성당을 신설하게 되었다.
2. 조선 천주교회 순교사 보고서 (김대건 신부 씀)
-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1)
조선은 처음부터 잡다한 여러 가지 미신과 우스꽝스런 토속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조상의 신령. 중국 철학인 유교, 석가의 불교, 또 성주(가족을 지키는 신), 터주(집터를 지키는 신), 삼신(아기를 점지한다는 삼신령), 제석(帝釋:집안의 안녕을 맡아보는 신), 구눙(무당의 열두 거리 굿에서 아홉째로 부르는 귀신), 만명(萬明:무당이 김유신의 어머니를 신격화하여 위하는 신), 성황당(城隍堂:마을의 수호신), 영등(靈登:영등날 세상에 내려와서 농촌의 실정을 조사하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할머니), 태백(太白:선인과 악인을 상벌하는 가신, 즉 가정의 신), 관우(關羽: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전쟁의 신,) 직성(直城:사람의 행년을 따라 그의 운명을 맡은 별), 미륵(彌勒:돌부처의 범칭)등을 주로 섬기고 있습니다. 주요한 종파로는 불교의 여러 종파, 무당, 하늘의 구지학, 태우긴, 소우긴 등입니다. 처음부터 이처럼 가소로운 오류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양심이 올바른 몇 사람이 자연적이고 이성적 빛으로 참 하느님을 인식하고 종교를 통하여 하느님을 섬겼습니다.2)
이즈음에 북경에서는 예수회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고 학자의 칭호를 얻은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북경을 드나들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조선에 천주교 사상이 전파되었고 천주교 서적이 전해졌습니다. 같은 시기에 홍유한(洪儒漢)이라는 철학자는 이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연적 사물의 이치로 스스로 깨닫고 가톨릭 교회의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하였으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주교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라서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킬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옛 전통을 따라 일곱째 날을 다른 날보다는 공경할 만한 날이라고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성덕을 찬양받으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결국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李蘗)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즉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 5명의 동지사 사절단이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제3인자인 서장관(書狀官)의 아들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이벽을 찾아가서 자기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이벽은 좋은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도착하거든 예수회원이라는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서 천주교라는 종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자 북경의 주교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교님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때 베드로라는 본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북경을 떠나올 때 가톨릭 교회의 서적과 성물을 조선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1784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관인들이 가톨릭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오류를 떠나 참 하느님에게로 전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이존창(李存昌), 이단원(李端源), 최창현(崔昌賢), 유항검(柳恒儉)등이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사제를 선출하고 세례 ․ 견진 ․ 고해 등 온갖 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모여 거창하게 미사를 드렸습니다.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주교와 사제들은 조선 전체를 천주교로 전향시키려 진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우연히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게 되자 즉시 미사거행과 성사집전을 중지하고 북경 주교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들의 포교 방법과 지금까지의 모든 행적을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듣고 북경 주교님은 앞으로는 그 주교와 사제들이 더 이상 성사를 집행하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고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모두가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종교 활동은 별로 오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에 천주교가 소개된 지 7년 후, 즉 1791년에 조선왕국의 조정 대신 중 벽파가 시파를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습니다. 벽파(僻派)의 반대파를 시파(時派)라 불렀는데 시파에 의하여 천주교가 조선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시파에 대한 원한을 천주교인에게 쏟았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라는 이름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왕의 허가를 얻어 박해하였습니다. 왕은 마지못해 억지로 허가하였습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신해박해였습니다.3) 이 박해에서 탁원한 학자인 윤지충(尹持忠)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용맹히 투쟁하다가 가톨릭교의 신앙을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이분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1795년에 이르러(을묘)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그해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신자들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동안 신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인에게 관대하게 대하던 왕(정조)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의 최고 권력이 김 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노론이라고도 불리던 벽파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남인의 세력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제 남인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벽파 사람들은 천주교를 적대시하고 있었고 남인들은 대개가 시파로서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습니다. 남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이제 나라의 실권이 남인에서 노론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리하여 노론의 벽파에 속한 정순왕후는 벽파 노론 대신들의 권고대로 주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여 조선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말살하려고 광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형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8년만에 즉 1801년에 일어난 세 번째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로 수많은 고관과 양반, 또 왕의 제수 등 왕족의 신자 부인들까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도 김여삼(金汝三)이라는 마귀 같은 신자의 배반으로 순교의 화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박해자 김 대왕대비가 죽자 몇 년 동안 신자들에게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816년 신자들에 대한 대박해가 맹위를 떨쳤습니다.
이 네 번째 박해에서 조선 신자들 사이에 유명한 김군미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의 신앙 때문에 자진하여 잡혔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46일 동안 옥중에서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4) 왕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黃嗣永)알렉산델이라는 고명한 철학자가 이 땅의 천주교가 너무나도 억압당하고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보다 못해, 교묘하게 써서 종교의 자유를 폭력으로 얻기 위하여 군함을 보내주도록 교황청에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의주(義州)에서 포졸들에게 들켜 압수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뜯어보니 흰 종이 외에는 아무 글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가 교묘하게 씌어진 것임을 알아차린 자들이 읽는 방법을 알아내어 모든 내용을 판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전하려던 사람도 잡혀 수도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알렉산델 황사영은 단지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이 작성한 이 편지로 인하여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찢기었습니다.
그 후 1819년, 1828년, 1833년, 1836년에도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신앙을 위하여 극복될 수 없는 항구심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특히 조선의 두 번째 관할 지역인 충청도에서는 여러 차례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촌이 파멸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신자들은 33년 동안 목자 없이 지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의 보호로 신자수는 줄지 않고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마침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조선에 목자를 하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1831년 중국인 유 파치피코(劉方劑)신부가 입국하였다가 1835년 중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윽고 1834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님이 조선에 들어오고 1835년에는 샤스탕 신부님이 그리고 1836년에는 조선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이 입국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외교인들의 전향이 쉬울 것같이 보였습니다. 신자수고 많이 늘어나고 신앙의 열성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가 도입된 지 55년째인 1839년에 김여삼 요한이라는 새 신자가 돈에 눈이 어두워 먼저 일반 신자들 그리고 다음에는 신부님들까지 밀고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에 다섯 번째 (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대왕대비는 이러한 박해를 말리려 하였으나 당시 세력을 뻗기 시작한 벽파 대신들, 특히 영의정 조만영(趙萬永)의 뜻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해(1939년 기해박해)에서 조선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과 2백여 명이나 되는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조선 교회의 순교자 수는 8백 명 또는 그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839년 이후 오늘까지 5년 동안은 신자들이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이 울고 탄식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조속히 조선에 목자들을 보내시어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우리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3.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과 성립.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1779 년경 광주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이루어진 권철신 주도의 강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강학회에 1779년 스스로 천주교의 진리를 깨우친 광암 이벽이 합류하면서, 순수 학문에서 출발하였던 강학회가 종교적인 성격의 신앙모임으로 발전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과 발상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강학회의 영향으로 이승훈이 이벽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버지 동지사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갈 기회를 이용하여 1784년 봄에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세를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승훈은 돌아와서 자신의 세례받은 내용과 자료를 이벽에게 전해주어 이벽은 이를 연구한 후 이승훈에게 세례(대세)를 받고, 곧 바로 당시 유수한 학자선비들을 정연한 논리로 설득하며 세례를 받게하여 드디어 세례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명례방 집회를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명실상부한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당.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과 발상은 1779년 년간의 천진암 강학회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의 확실한 성립 즉 세례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개념으로 볼 때, 1784년 서울 명례방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광암 이벽이라고 할 수 있으니, 광암 이벽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라 창립성조(創立聖祖)라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1784년 이벽이 주도하고 당시 유수한 양반학자들 즉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종,이가환 등이 참여한 명례방 집회 이후 이 모임은 외적으로 드러나면서 천주교 공동체는 기존의 유교 가치관을 위협하는 또 다른 위험한 가치관으로 정부와 기존세례에 받아들여져서 곧 바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중과 기존 세력의 박해로 제일 먼저 명례방 집회장소의 주인인 김범우와 집회 주관자인 광암 이벽이 순교자적 죽음을 당했고, 이어서 크고 작은 박해의 역사가 근 200여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4. 천주교회의 주요 4대 박해
1) 신유(辛酉)박해 : (순조 1년, 1801년)
당시 11세였던 순조의 할머니 대왕대비 김씨가 남인계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신자를 탄압.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권철신(암브로시오), 이가환, 이승훈(베드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황사영등 주요지도자들 500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되었음.
2) 기해(己亥)박해 (헌종 5년, 1839년 )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풍양조씨 일가가 안동김씨 가문을 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며, 엥베르주교, 모방, 샤스땅신부와 정하상(바오로), 유진길과 유대철(최연소 순교자), 최경환(최양업신부 부친), 김제준 (김대건신부 부친)등이 순교하였음. 기해박해로 참수 된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가 60여명 인데 이중 70명이 시성되었음.
- 정하상의 상재상서 : 조선인 최초로 작성된 신학서, 교회를 옹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비판.
3) 병오(丙午)박해 (헌종 12년, 1846년 )
김대건 신부의 체포가 발단으로, 정부의 쇄국정책에 의해 국가 위기의 내적 위험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박해를 가하였음. 김대건(안드레아), 현석문(가를로), 한이형(라우렌시오) 등 9명이 순교했으며 1984년 모두 시성되었음.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등과 함께 체포된 김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 본당의 주보성인인 임치백 요셉, 남경문 등은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4) 병인(丙寅)박해 (고종3년, 1866 )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 박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홍봉주, 황석두 등 8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는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밖, 양화진 등에서 순교하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었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되었다.
병인박해 후 20년이 지난 1886년 조불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1898년 천주교우 김범우의 집터(명례방)에 명동성당이 들어섰음
천주교회가 탄압을 받은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상적으로 유교의 양반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서로 마찰을 빚었으며,
둘째. 사회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위협을초래하게 되었고, 셋째. 정치적으로 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천주교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당시의 지배층은 천주교 신자들을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가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커다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렇듯 한국 천주교회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후 끊임없는 박해와 탄압 속에서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흘린 피를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하였던 것이다 (2009. 9. 30일 오전동 성당 주보 참조)
* 이상의 여러 가지 자료와 서적을 참고하여, 2010년 1월 13-16일 오전동 성당 교리교사 연수 교육자료로 전가브리엘 주임신부 편집함.
주요 참고 서적
1. 가톨릭 대사전
2. 유홍렬 .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가톨릭 출판사
3. 박도식 신부. 순교자들의 신앙. 성 바오로 딸 출판사.
3. 변기영 신부. 천진암 초기 한국 천주교 창립선조 자료집.
4. 한국 교회사 연구소. 김대건 신부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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