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한번은 고향 땅을 밟고 싶은데 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미국내 남북 이산가족 촉진법과 관련, 지난 9월부터 새크라멘토 지역의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오다윗 신부(사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한 그는 고향에 여동생2명과 남동생을 두고 있는 이산가족이다.
지난 60여 년 세월 생이별의 뼈를 깍는 고통을 겪어온 이산가족들이 어디 한 둘일까.
여느 이산가족들처럼 오 신부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도 너무나 애틋하다.
오죽하면 아들의 이름을 ‘통일’이라고 지었을까.
"선택의 기회가 없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때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집에도 안 보내고 결국 낙동강 전투에 투입하더군요.”
김일성의 특명으로 인민군, 의용군,중공군이 집결해 마지막 남은 부산 함락을 위해 총공세를 펼친 그 현장에 있었던 오 신부는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B29의 융단 폭격과 국군, 미군을 포함한 UN군의 총반격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했으나 북으로 후퇴하던중 미군에 포로가 돼 4년간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거쳤다.
이후 판문점에서 있었던 포로교환에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성공회 신학교를 졸업, 신부가 됐으며 평생의 든든한 반려자인 지금의 부인 오안나 변호사를 만나 가정을 꾸린 후 지난 1972년 도미했다.
그에게는 딱 한번 고향 방문의 기회가 있었다.
"김일성이 죽기 2년 전인 1992년 당시 뉴저지에서 교회협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북에서 김일성의 이름으로 편지가 왔어요.목사4명과 정치인4명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논의 끝에 이들의 비공식 방문이 결정됐어요.”
이들 방문단이 체류한 2주간 그는 북한 관계자로부터 끈질긴 고향 방문 회유를 받았다.
그토록 고대하던 고향 방문의 기회가 왔지만 오 신부는 고심 끝에 고향 방문을 포기했다.
"당시 정황도 그랬고 당장 가족들을 만나고는 싶었지만 나중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고민이 돼 심사숙고 끝에 그렇게 결정했어요.”
그냥 그때 방문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제는 고인이 됐을 부모님께 죄스러워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오 신부가 서명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도 바로 자신과 같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산가족들의 꿈같은 상봉을 위함이다.
"현재까지 500여 분이 서명을 해 주셨어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고 마침 교회협의회에서 협조를 약속한 상태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약 2천장으로 예정하고 있는 서명자 명부가 최종 준비되는 대로 복사본을 지역의 국회의원들에게 전달, 관심을 갖도록 할 예정이며 상하원 청문회에도 보낼 계획이다.
홍상호 기자 [2009.11.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주.
오용삼(吳鏞三, 다윗) 신부님은 1933년생으로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7.7.9.성미카엘신학원을 졸업하였으며, 1967. 7. 25. 진천성당에서 석균우(마가, 1939년생,은퇴후 천안거주), 박승시(마가, 1940년생,작고) 신부와 함께 부제서품을 받고, 1968.6. 2. 광혜원 성당에서 각각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후 오용삼 신부님은 미국 유학상태에서 1974년 부산교구로 전입하여 미국으로 이민, 뉴저지 한인교회 등에서 목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