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만족스런 체험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귀차니즘이 발동(하려 )했으나, 리뷰를 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또 이런 공연은 역시 제 나름대로 정리해 두는 게 낫겠다 싶어 글 남깁니다.
작년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각 요소별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존칭 역시 생략...
1. 관현악 - B+
우선,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다.
다들 아는 얘기지만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지휘자가 교체되었다.
잡지 SPO에는 이 공연의 지휘자가 정명훈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분명 그 이후에 교체된 것이다.
이 정도면 상당히 갑작스런 교체라는 데 다들 동의하실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틴 트링크스는 6월 10일 서울시향 공연을 지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이라는 것 빼고는
나는 솔직히 잘 몰랐다. 바그너 지휘 경험은 많다고 들었지만 솔직히 별반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잘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1막에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다. 내가 듣기에 1막의 관현악은 그저 실수하지 않는 데 급급한 연주였다.
전주곡은 무슨 모기떼가 웽웽거리는 거 아니면 잘 해야 돌개바람 정도? 너무 얌전해서 느낌이 살지 않았고
지크문트가 봄날의 마법적인 분위기를 찬미하는 장면 역시 밋밋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1분(아니 30초?) 동안은 힘을 주긴 주던데, 이건 우리나라에선 빤한 얘기니까 좋게 볼 필요는 없고...
굳이 말하면 금관보다 현이 더 허약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2막은... 전주곡부터가 앞서와 확연히 달랐다.
'사랑의 동기'도 더 화려하고 힘찼으며, '발퀴레의 동기'의 역동성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래! 진작에 이랬어야지!'와 동시에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
'인터미션 때 지휘자가 땡깡(?) 좀 부린 게 틀림없어!'
많은 이들이 내 생각에 동의해 주셨지만, 진실은 지휘자 아니면 악단원들만 알리라.
2막 후반부의 전투 장면과 그 뒤의 추격 장면 역시 대단히 옹골차고 힘찬 연주였다.
3악장은... 일단 연주의 스케일 자체는 줄지 않았지만, 기복이 좀 있었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게, 발퀴레가 노래하는 순간에 음량을 빼는 것은 외국에서도 하는 일이다.
긴장감은 끝까지 잘 유지되었고 마지막 '마술 불꽃' 연주는 대단히 섬세했다. 특히 목관이 그랬다.
다만, 바그너의 악극에 걸맞은 스케일을 확보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내가 듣기에 그 대목의 연주는 바그너라기보다는 차이콥스키에 가까웠다.
스케일과 섬세함을 동시에 잘 살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물론 앞서 말했듯이 대단히 좋은 연주긴 했다.
2. 성악
2-1. 지크문트 - B-
나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일단 발성이 독일적이지 않았고(어차피 알아듣지 못하긴 매한가지라지만)
목소리 자체에 그리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좀 평면적이랄까.
그리고 그 '벨제!'... 제임스 킹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페르마타... 는 좋다 쳐도
저러다 진짜 숨 넘어가지 싶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부르는 건 시각적으로 너무 부담스러웠다.
2-2. 지클린데 - B+
별로인 분도 계시는 것 같지만... 일단 비독일어권 성악가 치고는 발성이 꽤 좋았고
내가 보기엔 나름대로 연기력도 있었다. 2막에서 신경과민적인 연기가 보여주었듯이.
2-3. 훈딩 - B
훈딩치고는 좀 너무 점잖았다. 저열하고 거친 면을 더 드러내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게를 잡기는 했지만 또 그만큼 무게가 잡히지는 않았다는 게 문제다. 아니 잡히면 더 문제인가;;;
지크문트만큼은 아니지만, 러시아식 발성이 약간씩 신경쓰이기도 했다.
2-4. 브륀힐데 - B-
맨 처음 등장할 때, 그러니까 2막 첫머리의 '호요토호!', 아니 '호요토~와!'를 부르는 순간 나는 좌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ㅠㅠ
일단 호흡이 너무 짧았다. 그리고 그걸 만회하겠답시고 무리하기 목소리를 올리는 게 영...
(이봐요 아줌마, 당신 그래도 명색이 여신이라고! 훈딩 마누라가 아니란 말야! 무슨 조폭처럼 노래해!)
그 대목의 임팩트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나머지 부분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자먼 ㅡㅡ;
적어도 내 인상을 개선할 뭔가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2-5. 보탄 - B-
일단 성역 자체가 좀 안 맞았다. 보탄을 맡기에는 너무 높았다.
한스 호터건 테오 아담이건 제임스 모리스건 존 톰린슨이건 하다못해 피셔-디스카우건 간에
이 역을 맡은 역대 성악가 중 누가 저런 음역으로 이 역을 맡았단 말인가?
목소리 자체가 안 맞으니 그에 맞는 연기도 잘 될 턱이 없었다. 애는 썼지만, 그게 다인 듯.
2-6. 프리카 - A+
엘레나 지드코바... 지난해의 미셸 드 영보다 더 낫지 않았나 싶다.
표독스러운 표정과 앙칼진 목소리로 집요하게 보탄을 몰아붙이는 모습은 실로 압권이었다.
(인터미션 때 얘기한 아는 형은 '셰익스피어 연극 보는 줄 알았다'고 했다 ㅎ)
내가 보탄이었어도 저렇게 몰린대서야 별 도리 없었을 것이다. 저러다 암 걸리지 싶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어떻게 된 게 프리카 역이 브륀힐데보다 더 젊고 예쁘고 날씬할 수가 있을까?
결론은 하나다. 보탄이 새장가를 간 것이다! 그래서 맏딸과 사이가 그리 나쁜...
2-7. 발퀴레 - C+
한국 성악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골고루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였다 ㅡ.ㅡ;;
누구는 성량 자체가 안 되고, 누구는 성량은 되는데 가사 전달이 안 되고,
누구는 안 되는 성량을 내려고 무리하게 애쓰는 게 딱하리만치 역력히 드러나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로스바이세 역을 맡은 성악가가 그나마 나았던 듯하다.
3. 연출 - A
조명 구사가 작년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정교해졌다.
무대 연출을 맡은 분이 작품 공부를 상당히 한 듯했다. 대체로 무척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과하다고 볼 여지도 있을 듯하기는 하지만,
악단원들이나 성악진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막은 '지크'를 '지그'라고 예스럽게 표기한 건 그렇다 쳐도,
일부 대목에서 실수가 더러 있었는데 대체로 그리 어렵지 않은 데서 그랬다는 게 좀 안타까웠다.
이 트링크스라는 지휘자(음... 왠지 드래곤볼 시리즈가 생각나는 이름입니다만^^;) 상당히 관심이 가네요.
젊은 지휘자인데도 앙상블을 다루는 솜씨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더군요.
다음번 서울시향 공연에서는 어떻게 할지 가서 들어볼 생각입니다.
첫댓글 제가 이 글을 처음 읽게 되는 영광이..ㅎㅎ 프리카가 더 젊고 예쁘네?라고 생각한 게 저만은 아니었군요.ㅋㅋㅋ 물론 노래도 좋았지만.. 좋은 감상글 감사합니다.
2막을 안자고 말똥말똥 잘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합니다. 발퀴레라는 작품이 요구하는 엄청난 스태미너와 15분(외국에선 막간 40분)이라는 짧은 인터미션을 감안하면 성악진들의 노고는 분명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바그너 음악 만족스럽게 들은것 같습니다.
이렇게 쫄깃쫄깃한 글을 읽고, 그냥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흔적 남깁니다. ㅋㅋㅋ ... 발퀴레는 C+도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에서 소란피우고 나간 듯한 느낌이라면 지나친 건가요? 프리카는 ...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말씀 듣고 보니 저도 C나 C- 줄 걸 그랬다 싶어지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리안님의 촌평,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오늘 연주회는 제게 개인적으로도,이전의 '바그너 트라우마' 깨트릴 수 있어 무척 다행스럽고 만족스러웠습니다.바그너 오페라는 잘 모르지만,무엇보다 '콘스탄틴 트링크스'의 노련하고 안정적인 지휘가 '발퀴레'의 전체적인 흐름을 잘 읽은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안정감 있는 지휘자, 한층 가깝게 느껴진 성악진, 지휘자 교체 속에 격동하는 서울 시향, 이 모두 기억나는 연주회로 남을 듯 합니다.참,이번 기회를 통해,회원 여러분께 오페라는 1층 좌석을 살짝 추천해드리고 싶어집니다.ㅎㅎ
시니컬한듯 하면서도 세부적으로 꼼꼼한 도리안님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