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과 못 깨달음을 판별해 보세요( 7)
운봉스님과 진제스님의 오도송
[진제스님]은
******************************************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毘盧頂上=비로자나부처님 머리) 무너지고
▶벽력같은 일 할(喝)에 천만 갈등 흔적 없네.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1) [진제스님 오도송의 핵심]
▶몽둥이로 비로자나 부처님(법신)의 머리를 부수고,(一棒打倒毘盧頂)
[용어해석]=법신; 모든 것의 본체, 우주 자체.
******************************************
******************************************
[운봉스님]은
*******************************************
▶문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레 차가운 기운이 뼛속에 사무치자
▶가슴 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자취가 없네.
▶서릿발 날리는 달 밝은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뒤에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모두 다 공 하도다.
(2)[운봉스님 오도송의 핵심]
▶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모두 다 공 하도다.”라 했다.(彩樓獨在空山水)
********************************************
********************************************
[종곡해석]
(1)(진제스님)“비로자나 법신”을 부수는 것과,
(2)(운봉스님)“산과 물”을 공하게 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해 보자.
[용어해석]
법신(비로자나불)=본체
보신(노사나불)=본체가 인격으로 나타난 덕성.
화신(석가모니불)=본체의 덕성이 바깥으로 나타난 역사적인 인물.
(1)진제스님은 [비로자나불(법신)의 머리를 부수다.]
비로자나불은 최고의 의미를 가진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최고라는 상징성을 부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최고의 “의미를 가진 상징성”이라는 것은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를 뜻한다.
그러므로, 만약 “의미”를 부쉈다면, 당연히 “형상”이 부서진 모습이, 의미와는 다르게, 별도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별도로 형상을 부순 표현이 없다.
******************************************
즉 “비로자나불의 머리를 부수니 텅 빈 대 허공이 나타나더라”라고 해야 옳다는 뜻이다.
운봉스님처럼, “산과 물을 보는 순간 텅 비어지더라”라고 하듯이.
그렇게 하지 않고, 단지 비로자나불의 머리를 부쉈다는 이 글 하나만으로는, 온 우주가 텅 비어지는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 체험한 것이 아니라, 지식적 알음알이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만약 직접 체험했다면, 텅 빈 허공을 못 봤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제스님은 못 깨달았다고 판단 한 것이다.
.....................................................................
그와 반대로,
(2)운봉스님은 [산과 물이 모두 다 공 하도다]라고 한 것은,
산과 물이라는 “형상(相)”이 부서졌다는 표현이다.
(“산과 물”은 “의미”가 아니라 “형상”이다.)
형상이 부서졌기 때문에 텅 비어있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공, 법공, 구공이 갖춰졌다고 한 것.
그래서 운봉스님은 깨달았다고 봤다.
그러나 운봉스님의 아쉬운 점은 텅 빈 허공 속에 좀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통찰의 지혜를 발휘하여 “앞뒤” “좌우”와 “시간”(공간과 시간)이 모두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또 이 세상이 가짜며 허상이라는 것을 밝혔으면 삼법인(三法印)이 훤하게 드러나 더 완벽했을 것이다.
[용어해석]
아상; 내가 있는 것.
법상; 바깥세상이 있는 것.
아공; 내가 공한 것.
법공; 바깥세상이 공한 것.
삼법인(三法印): 무아, 무상, 고.
공간과 시간: 우주는 공간과 시간으로 구성되어있다.
****************************************
[결론]
이런 이유로,
진제스님은 못 깨달았고,
운봉스님은 깨달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
[부언]
1. 실제적 체험은 못하고 지식적 알음알이로 안 사람은,
“무한대 텅 빈 허공”이라는 표현을 할 수 없다.
2. 원각경에서
(무변허공 각소현발 無邊虛空 覺所顯發)이라 했다.
[각(覺)=깨달음]
즉, “깨달으면 무한대의 허공이 나타나느니라!”라고 했다.
3. 해심밀경에서는
10가지 상(相=형상)을 부수는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상을 부수는 수행이 불교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보충 설명]
운봉스님의 부족한 부분을 설명해 보자.
이것을 설명하게 되면,
조계종 간화선 수행의 한계점을 먼저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시작하자.
먼 옛날 석가모니께서 왜 6년 고행을 하셨는질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는 알라라깔라마 스승으로부터 무색계제7선정을 얻고,
우따까라마붓따 스승으로부터 무색계제8선정을 얻었다.
이 삼매의 위대한 점은 힌두교 최고의 경지인 “우아일여(우주와 내가 하나됨)” 또는 신인합일(神人合一신과 내가 하나 됨)을 성취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얻고 나니까 두 스승이 권하기를 “나와 함께 힌두교를 부흥시키자!”고 했으나 그것을 거절하고 6년 고행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선정에 들어갔을 때는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무한한 즐거움이 일어나지만, 그 선정에서 깨어나서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번뇌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6년 고행을 끝마치고, 부다가야로 가서, 보리수 밑에서 49일간 명상을 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어 수행을 완성했는데, 무엇을 얻어셨을까?
그것은 12연기를 통해 무명(無明)을 통찰하는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그러면 여태 무엇을 몰랐을까?
그것은 “내 몸”과 “이 세상”이 허상(가짜)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지금까지의 모든 수행을 완결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운봉스님의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운봉스님은 산과 물을 보는 순간 공(空) 해졌다고 했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두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무색계8선정이다.
그러면, 여기서 스님의 부족한 부분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것을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명상을 통해 얻었던 것은, 12연기의 첫째인 무명(無明)의 타파다. 즉 허상임을 아는 지혜다.
그러면 답이 저절로 나왔다.
즉 운봉스님의 부족한 부분은 텅 빈 무색계8선정에서,
그다음 반드시 지혜로 얻어야 할 것은, 이 세상이 허상(12연기의 무명)이라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었다.
운봉스님의 부족한 부분은 바로 이 점, 즉 허상에 대한 통찰이기 때문에,
이것을 오도송에 보충하면 오도송이 완전하게 된다.
이점이 핵심이 되는 대목이다.
만약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힌두교식인 불성, 자성, 본성(브라만)론에 빠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계종 간화선의 본성론”은 힌두교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간화선에선 내 마음 밑바탕에 본성이 항상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운봉스님의 깨달음도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조계종에선, 불성을 깨닫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6년 고행 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연기법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기법이란 “양변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은 모두 가짜라는 것을 말한다.
(양변; 앞뒤, 좌우, 선악, 너와 나, 과거 현재 미래 등을 말함)
거듭 말하지만, 석가모니가 스승 우따가라마부따로부터 얻은 무색계제8선정을 얻고도, 다시 6년고행을 했다.
왜 했을까? 비록 선정은 얻었지만, 아직 진리가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고생하면서, 끝까지 진리를 추구한 대가로, 깊은 영감(靈感)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어느 날 보리수 밑에서 홀연히 그 영감이 튀어나와, 깨달음을 완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연기법이다.
어떻게 완성했는가?
무색계선정의 텅 빔 속에 잠겨있으면서 지혜가 발동하여, 이 속에서는 앞뒤가 없고, 좌우가 없고, 생사가 없고,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럼 여태까진 왜 못 봤을까?
석가모니께선 수없이 무색계선정에 들어갔었는데도 그땐 왜 못 봤을까?
그 이유는, 누구나 무색계선정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봐 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선정만으로 안 되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지혜를 크게 키우려면, 수많은 실험을 해봐야 한다.
어떤 실험이냐 하면,
텅 빈 허공 속에서 비록 내 몸이 보이지 않지만, 가상적으로 있다고 설정하고는, 내 몸을 큰 칼로 잘라 보라. 잘라 보면, 내 몸이 없기 때문에, 단지 허공만 자를 뿐이다.
또 내 몸을 큰 바위 속에 넣어보라, 그러면 몸이 쑥~! 들어가면서 바위가 허공이 될 것이다.
또 내 몸을 용광로 속에 넣어보라, 그러면 용광로의 불이 허상이 될 것이다.
이런 갖가지 실험을 통해서, 내 몸이 없다면 세상은 허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석가모니도 6년고행 하면서 수많은 실험을 해봤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자산이 되어, 보리수 밑 48일 동안의 명상에서, 전부 재활용되어, 위대한 지혜로 전환된 것이다.
모든 것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
운봉스님도 마찬가지다.
산과 물이 텅 빈, 즉 무색계선정에 들어갔지만, 지혜가 부족해서 연기의 도리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텅 빈 무색계선정 속에 있는 영원한 본성(아뜨만)만 발견하고는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뒤에 있어야 할 말, 즉 “허상”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부처님의 제자라면, 연기(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의 도리까지 봐야지, 지혜가 부족해서 연기를 못 보면,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무색계선정의 “영원한 자성(아뜨만)”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연기법(허상)을 발견한 것이 최대 업적이다.
(연기= 무상(無常)의 다른 이름)
그러면 간혹 연기법만 발견하면 무색계선정은 없어도 될까?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된다.
왜냐하면, 무색계선정 없이 연기법만 알면, 그것은 알음알이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무색계선정을 먼저 체험하면서 연기법을 동시에 깨달아야 선정과 지혜를 모두 갖추게 된다.
..................................................................................................................
(다른 방법)
그러면 이와 반대되는 방법은 없는가?
아니다. 방법이 있다.
그것은 지혜가 먼저가 되고 나중에 삼매가 따라오는 방법이다.
그렇게 될려고 하면, 먼저 지혜가 완벽해져야 한다.
지혜가 완벽해지면 저절로 찰나삼매가 생기면서 이루어지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그동안 여러 도반님 숙제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