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민족 뿌리역사 |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 |
沙月 李盛永(2010. 8. 9) |
증산도 발간 월간개벽 2003년 10월호 별책부록 『한민족의 뿌리역사와 종교, 그 진실을 밝힌다』에 실린 우리민족의 뿌리역사에 관한 부분을 추려 보완(增補)하여 엮어 보았다.(청색은 원문 내용이고, 흑색은 보완한 내용이다)
이 책은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물든 강단사학계(講壇史學界)가 사서(史書)로 인정하지 않고, 위서(僞書)로 몰아부치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 도가서(道家書)인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단기고사(檀奇古史)』,『규원사화(揆園史話)』등의 역사기록을 통해 우리민족의 시원(始原)과 국통(國統)을 정리한다 하였다.
(增補)『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 1911년 계연수가 엮은 『한단고기(桓檀古記)』중에 『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와 함께 수록되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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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와 단군세기가 포함된 『환단고기(桓檀古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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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이 '桓'자의 표음을 '환' 과 '한'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
(增補)*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 조한범(曺한凡) 편저 『한역사 한사상』에 의하면 “「桓」자는 밝음을 의미하는 ‘환하다’의 音表記(음표기)로서 글자대로 ‘환’으로 발음되나 ‘한’도 ‘明’(명)의 뜻을 포함하고 있고 또 ‘환’이 ‘한’의 전음(轉音)이기도 하며, ‘한’(韓)이 우리민족과 국가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바이칼 호수를 중심한 전 대륙에 ‘한’(汗)과 같이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한’으로 발음토록 함”이라는 주를 달고 있다.
(增補)* 『단기고사(檀奇古史)』: 792년 대진국(大震國: 渤海)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동생 대야발(大野勃)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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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역사가 수록된 『단기고사(檀奇古史)』와 『檀君朝鮮47代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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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규원사화(揆園史話)』: 1675년 북애노인(北崖子) 지음
보통 한 민족의 역사를 상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데 이를 우리 한(韓)민족에 적용한다면 ① 상대(上代) : 삼성조시대(三聖祖時代) -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 열국시대(列國時代) - 북부여(北夫餘), 삼한(三韓), 낙랑(樂浪), 옥저(沃沮) 등 ② 고대(古代) : 사국시대(四國時代) -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 대진국(大震國: 渤海), 신라(新羅: 統一新羅) ③ 중세(中世) : 고려(高麗), 조선(朝鮮) ④ 근대(近代) : 구한말(舊韓末),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⑤ 현대(現代) : 8.15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 중 우리 한(韓)민족의 뿌리역사는 삼성조시대(三聖祖時代)가 된다
◆ 한민족 뿌리역사, 환국시대와 배달환웅시대 <환국(桓國)>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수록된 『삼성기(三聖紀)』하편에 따르면 “옛날에 환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 되는 대(大) 제국(帝國)으로서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었고,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우루국(虞婁國), 수밀이국(須密爾國), 구다천국(句茶川國), 구모액구(句牟額國), 사납아국(斯納阿國), 객현한국(客賢汗國), 매구여국(賣句餘國), 구막한국(寇莫汗國), 일군국(一郡國), 선비국(鮮卑國 : 增補) 등 12환국(桓國)으로 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환국의 통치자는 환인(桓因)이라 불렀으며, 초대 환인인 안파견(安巴堅)환인으로부터 지위리(智爲利)환인까지 7명의 환인이 있어 그 역년이 서기전 7199년-3896년까지 총 3301년간 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增補) 7대 환인의 이름 제1세 환인 안파견(安巴堅) 제2세 환인 혁서(赫胥) 제3세 환인 고시리(古是利) 제4세 환인 주우양(朱于襄) 제5세 환인 석제인(釋提壬) 제6세 환인 구을리(邱乙利) 또는 단인(檀因) 제7세 환인 지위리(智爲利) (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에도 엄연히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昔有桓國: 增補)고 명기해 놓은 것을 일제 총독부 관변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슬쩍 고쳐놓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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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고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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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일제가 삼국유사 정덕본을 사개(詐改)한 내력(클릭) : 昔有桓因(석유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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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정덕본(正德本) : 중종 1년(1506)-16년(1521) 정덕(正德: 明 武宗의 연호) 연간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이 쓴 삼국유사의 주해본(註解本)
물론 지금의 대학강단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환국(桓國) 기록을 비웃으면서, 그 시대를 어떻게 민족의 고대사 시대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학술논리를 앞세워 연구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학술적 시대구분은 실증주의사관(實證主義史觀)에 편향된 오늘날의 학자(植民史學者)들이 창조해 낸 관념이요 주관적 가치일 뿐이다.
이와는 별도로 우리 역사는 그 자체의 생성기원을 갖고 있으며 고인(古人)들은 당대(當代)의 기준으로 환국(桓國)을 '국가(國家)'라 부르고, 그것을 사서(史書)에 기록한 것이지 결코 없는 사실을 임의로 지어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환국(桓國)은 우리민족의 시원사(始原史)연구에 반드시 포함하여야 하는 것이다. 북미 인디언이 근대적 시대구분으로 국가를 세운 적이 없다고 해서 인디언 역사가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엄연한 오류가 아닌가.
도가사서들의 기록에 따르면 환국(桓國) 말기 제7세 지위리(智爲利)환인께서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제세핵랑군(濟世核郎君 : 세상을 구제할 젊은이) 3천명을 주어 동방으로 보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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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에서 벋어나간 인류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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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말년 초대 환웅천황이 동방으로 이주하여 배달국을 건설하던 그 이전부터 (환국의) 일파는 동쪽으로 베링해협을 건너 이주한 무리가 아메리카 인디언이되고, 더 남쪽 남아메리카로 내려간 무리들이 인디오가 되었다. 이는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모양 등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이미 밝혀진 바이며, 미국의 고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윷놀이, 실뜨기 같은 인디언과 인디오의 풍습, 유물만 봐도 우리와 유사한 것이 너무도 많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2환국의 한 갈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수메르문화를 열었다. 수메르문명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크래머는 BC3500년 전 서구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인들이 원주민인지 혹은 어느 지역에서 이주해 왔는지를 연구한 결과 그들은 동방에서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수메르인의 언어가 한국어와 동일한 교착어이고,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란 점 등등에서 밝혀졌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수메르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의 이름들에 우르, 우루크, 수밀리국 등이 있는데, 12환국의 이름 중에도 우르국(우루국 虞婁國)과 수밀리국(수밀이국 須密爾國)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류문명의 시원(始源)이 바로 환국(桓國)에서 벋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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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오른쪽) 소장품들(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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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倍達國)> 환웅(桓雄)은 태백산(太白山 : 현 白頭山) 아래 천평(天坪)에서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로부터 배달국(倍達國)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 제단(神壇)을 만들고 천제(天祭)를 올렸다.
배달국(倍達國)시대는 초대 거발환(居發桓)환웅으로부터 18세 거불단(居弗檀)환웅까지 서기전 3898년-2333년까지 1565년 동안 지속되었다. 흔히 우리민족을 ‘배달민족’, ‘배달겨레’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增補) 18대 환웅의 이름과 재위년수 제1세 환웅 거발환(居發桓) ; 재위 94년 제2세 환웅 거불리(居佛理) : 재위 86년 제3세 환웅 우야고(右耶古) : 재위 99년 제4세 환웅 모사라(慕士羅) : 재위 107년 제5세 환웅 태우의(太虞義) : 재위 93년 제6세 환웅 다의발(多義發) : 재위 98년 제7세 환웅 거련(居連) : 재위 81년 제8세 환웅 안부련(安夫連) : 재위 73년 제9세 환웅 양운(養雲) : 재위 96년 제10세 환웅 갈고(葛古) : 재위 100년 제11세 환웅 거야발(居耶發) : 재위 92년 제12세 환웅 주무신(州武愼) : 재위 105년 제13세 환웅 사와라(斯瓦羅) : 재위 67년 제14세 환웅 자오지(慈烏支) : 재위 109년 제15세 환웅 치액특(蚩額特) : 재위 89년 제16세 환웅 축다리(祝多利) : 재위 56년 제17세 환웅 혁다세(赫多世) : 재위 98년 제18세 환웅 거불단(居弗檀) : 재위 48년 (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이 배달환웅(倍達桓雄)시대가 후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데 사회 신분과 경제상의 계층(階層) 분화(分化)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실질적인 국가(國家) 형태를 갖추게 되고, 문화영웅들이 출세하여 인류문명의 새 장을 열게 된다.
그 시작이 바로 팔괘(八卦)를 그려 역학(易學)의 기초를 세운 태호(太 白皐) 복희씨(伏羲氏 : 배달국 제5세 태우의 환울의 12번째 아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농사짓는 법을 최초로 가르치고, 수많은 약초의 약성(藥性)을 구분하여 의학(醫學)의 기초를 세운 신농씨(神農氏)도 제8세 환웅 안부련(安夫連) 때의 인물이다.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깃발에 그려진 그림의 주인공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제14세 자오지(慈烏支)환웅이다.
이처럼 배달환웅시대 우리 선조들의 업적들이 우리민족의 문화를 형성한 바탕이 되어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데, 그 역사를 어찌 신화(神話)로만 치부해 버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짧게 잡아도 우리민족의 역사는 배달환웅시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개천절 또한 단군조선의 개국일이 아니라 환웅천황의 신시(神市)개천이 진정한 개천절인 것이다.
▶ 인류문명의 조종(祖宗) 태호(太 白皐) 복희(伏羲) > 태호(太 白皐) 복희씨(伏羲氏) 의 성은 풍(風)이고, 이름은 방아(方牙). 배달국 5세 태우의(太虞義) 환웅의 12번째 아들이자 6세 다의발(多義發) 환웅의 막냇동생이다.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에 (일부)그려져 있는 팔괘(八卦)를 처음 그렸고, 주역(周易)의 동양 역(易)철학의 시조이다. 남녀의 혼인제도를 정하고, 글자(書契)를 만들어 의사소통의 불편을 해소한 ‘문자(文字)의 아버지’이다.
풍산(風山)에 살면서 성(姓)을 풍(風)이라 하여 인류 성씨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나 태호 복희씨의 나라는 15대 동안 이어오다가 혈통이 끊어져 성이 사라지고 대신 우리 말에 풍신(風身), 풍체(風體), 풍골(風骨) 등 체상(體相)의 칭호로 남아 쓰이고 있다.
태호 복희씨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인륜과 도덕의 푯대를 세웠고, 우주 창조의 원리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밝혀내 정립한 인류문명사(人類文明史)의 첫 개벽자(開闢者)이다.
태호 복희씨가 마지막으로 도읍을 정했던 곳이 진(陳)국, 지금의 중국 하남성 회양현인데 거기에는 태호 복희씨의 무덤이 있고 그 앞에 ‘태호복희지묘(太 白皐 伏羲之墓)’ 라고 쓴 표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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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씨 팔괘(八卦)와 복희씨 묘(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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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태호(太 白皐) 복희씨(伏羲氏) : 배달국 제세 환웅 태우의(太虞義)의 맏아들은 다의발(多義發 ; 제6세 환웅)이고, 막내 아들이 태호씨(太 白皐 氏) 또는 복희씨(伏羲氏)라고도 한다.
어느날 삼신(三神)의 영(靈)이 몸에 내려 만가지 일을 두루 알게 되었다. 그러자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었다. 괘도(卦圖)는 천하(天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그림(圖)을 지고 올라왔기 때문에 하도(河圖)라고도 한다.
그 괘도의 획은 세 번 끊어지고, 세 번 이어져서 위치를 서로 바꾸면 미래의 일을 알 수 있어 그 오묘함이 끝이 없었다. 팔괘(八卦)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복희씨(伏羲氏)는 우사(雨師)의 직책을 맡아 육축(六畜)을 기르며 신룡(神龍)이 날마다 12번씩 나타나는 것을 보고 천부경을 바탕으로 환역(桓易)을 지었다. 또 계해역(癸亥曆)은 갑자(甲子)를 세수(歲首)로 하는 역법으로 고쳤다.
복희씨(伏羲氏)가 천부경와 팔괘로 환역을 만들어 여왜(女 鍋金대신女 : 복희씨의 여동생), 주양(朱襄 : 神農)을 거쳐 주(周)나라에 이어져 주역(周易)이 되었는데 중국 역사가들이 복희씨(伏羲氏)를 중국사람(漢族)이라 하고, 팔괘(八卦)와 하도(河圖)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역(周易)은 본래의 이름인 환역(桓易)으로 고쳐 불러야 맞는 것이다.
후에 복희씨(伏羲氏)는 청구(靑丘)와 낙랑(樂浪)을 거쳐 진(陳)으로 옮겨 수인(遂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쪽 제후가 되었다. 그 후손이 풍산(風山)에 나누어 살면서 성을 풍(風)이라 하였다.(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 경농(耕農)과 동양의학(東洋醫學)의 아버지, 신농(神農) 성은 강(姜) 이름은 궤(軌) 또는 석년(石年), 배달국 8세 안부련(安夫連) 환웅 때 아버지 소전(小典: 벼슬 이름, 곰토템부족 有熊國의 왕으로도 알려짐)이 섬서성 강수(姜水)의 감병관(監兵官)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유씨의 딸 여등(女登)과 혼인하여 신농씨를 낳았다. 신농씨가 강수(姜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강(姜)씨를 성으로 삼았다.
오늘날 동양의학의 창시자가 바로 신농씨다. 백초(百草)의 맛을 보아 약을 만들어 구제창생(救濟蒼生)에 공헌하였고, 70여종의 독초(毒草)를 일일이 맛보다가 중독되었다가 다시 해독하여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수없이 하였다. 산야를 돌아다니다가 자편(紫鞭: 신통력이 있는 빨간 채찍)으로 화초를 때려보면서 약효를 감별하여 사람의 병을 고치는데 큰 업적을 남겼고, 인류 최초로 시장경제(市場經濟)를 창시하여 활성화 시켰으며,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중국사람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즉 염제(炎帝) 신농(神農)과 황제(黃帝) 헌원(軒轅)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근래에 하는 말이다. 공자(孔子)시대에는 요순(堯舜)을 뿌리로 삼고, 한(漢)나라 때는 황제(黃帝) 헌원(軒轅)으로 소급시키더니, 서기 1980년대에 와서 ‘염황(炎黃)의 자손’ 자손이라고 담론을 늘어놓고 있는데 실상 염제(炎帝) 신농(神農)은 우리 동방민족의 조상이지 결코 중국민족(漢族)과는 관계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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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 상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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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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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최근에는 치우(蚩尤)까지 보태서 '염황치(炎黃蚩)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탁록현에 조성한 귀근원(歸根苑)의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에는 염제(炎帝), 황제(黃帝), 치우(蚩尤)의 세 석상을 모셔놓고 있다.
(增補)* 신농씨(神農氏) : 우리겨례 인물인 고시(高矢)의 후손인 소전(小典)이 임금(안부련 환웅)의 명을 받들어 강수(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는데 소전의 아들이 신농씨(神農氏)이다.
신농씨(神農氏)는 일찍이 백가지 풀을 가지고 약을 만들었다. 그 후 열산(烈山)으로 옮겨 살면서 백성들이 필요한 물건을 서로 바꾸어 쓰게 하므로 교역(交易)이 활발하여 생활이 편하게 되었다.
신농씨(神農氏)는 강수(姜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라 하였으며, 복희씨의 여동생 여왜(女 鍋에서金대신女)로부터 환역(桓易)을 이어받고, 왕이 되었다. (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 배달국(倍達國)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 치우(蚩尤)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 환웅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제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이 곧 치우천황(蚩尤天皇)이다. ‘치우(蚩尤)’란 '우뢰와 비를 크게 내려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염제(炎帝) 신농(神農)씨 나라의 8대 임금인 유망(木兪 罔)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 공상(空桑)을 함락 시킨다. 이 때 유망의 한 제후로 있던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치우천황(蚩尤天皇)에게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최초의 전쟁인 저 유명한 탁록대전투(탁鹿大戰鬪)가 벌어져 10여 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도술로 큰 안개를 일으키며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해 마침내 대승을 걷우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
중국인(漢族)들이 우리 동방의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게 된 것도 치우천황(蚩尤天皇) 군사가 큰활(大弓: 夷)을 만들어 쓴 이때부터 이다. (增補)* 동이(東夷)는 '동방(東方)의 큰 활(大弓=夷)을 쓰는 족속'이란 뜻으로 종족을 부르는 호칭이었으나, 진시황의 중원 통일 이후는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함께 '동쪽 오랑케'라는 뜻으로 비하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후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始原)이 되어 수 천년 동안 동방의 배달민족은 물론 중국의 한(漢)나라, 진(晉)나라 사람들까지도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增補)* 한고조(漢高祖) 유방도 진(秦)나라를 멸하고 항우와 천하의 주인을 다툴 때 출정에 앞서 치우천황(蚩尤天皇)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러던 것이 위(魏), 촉(蜀), 오(吳)가 천하를 겨룬 이른바 삼국지(三國誌)시대를 지난 후에는 촉의 맹장 관우(關羽)를 군신(軍神)으로 섬기는 관습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치우(蚩尤)가 헌원(軒轅)에게 죽었다'고 왜곡하여 기술하였다.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蚩尤天皇: 蚩尤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 군사가 헌원(軒轅)군에게 성급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몰살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먼 훗날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漢武帝)와 그의 사관(史官)이었던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를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꺼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도 기록하였는데 실상은 제후의 위치에 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고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기록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원은 황제(皇帝)로 격상하여 지존(至尊)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드는 미사여구로 수식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즉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한다’고 묘사하여 마치 짐승 같은 존재, 요술을 부리는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중국사람(한족)들이 우리 역사의 근원적인 역사왜곡(歷史歪曲)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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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채(蚩尤寨) 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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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삼조당에 배향한 치우석상(蚩尤石像)과 평양 단군릉의 치우상(蚩尤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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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황의 중원 정벌 상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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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蚩尤)이야기(1)(클릭) : 치우이야기 I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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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蚩尤)이야기(2)(클릭) : 치우이야기 II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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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치우천황(蚩尤天皇) : 임금의 보위에 오르면서 백성들과 함께 신시(神市)의 전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더욱 발전시켰고, 도읍을 청구(靑丘)로 옮겼다.
신농씨(神農氏)의 후손인 유망(木兪 罔)이 정치가 쇠약해지자 친척 중에 장수가 될만한 사람 81인(어떤 기록에는 81형제)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고, 갈로산(葛盧山)에서 쇠<鐵>를 캐어 창과 투구 등 쇠병기를 만들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1년 동안에 모두 9제후의 땅을 함락시키고, 다시 병기를 정비하여 공상(空桑)을 점령하는 등 또 한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하였다.
치우천황의 위세가 공상(空桑)에서 떨치자 헌원(軒轅)이 병마를 이끌고 와서 싸우고자 하니 치우천황은 곧 탁록(탁鹿)을 포위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니 헌원의 군사들은 떨며 도망쳤다. 이렇게 되자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淮岱: 회수와 대산, 현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일대)에 집을 지었다. 치우천황의 위세가 천하를 누비니 겁먹은 헌원의 무리들이 와서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서쪽에 사는 사람들(漢族)은 화살이나 돌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을 입을 줄 몰랐다. 그래서 치우천황이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것을 보고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헌원은 그 대가 끊어질 때까지 베게를 높이 베고 자지 못하였다. 그 뒤 300년 동안은 아무일이 없었다. (黃帝는 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부선생(紫府先生)이 치우천황께 나아가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바쳤다. 치우천황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청구(靑丘)의 대풍산(大風山) 양지바른 곳에 삼청궁(三淸宮)을 지어주고 살게 하였다. (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增補)* 자부선생(紫府先生) :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고도 한다. 복희씨(伏羲氏)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發貴里) 선인의 후손으로 나면서부터 신령스런 도를 얻어 공중에 날아오르는 비법도 가지고 있었다. 헌원(軒轅)이 치우천황을 뵈러 가는 길에 선생의 명성을 듣고 찾아 뵙자 선생이 '마음을 고치라고 고치라'고 하면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주었다.
선생은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五行)의 수리(수리)를 고찰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성력(七星曆)의 시작이다. (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增補)* 헌원(軒轅): 중국사람(漢族)은 황제(黃帝)라고 부르며 그들 중국인(夏華族, 漢族)의 시조(始祖)로 받들어 왔다. 원래 성이 공손(公孫)인데 뒤에 희수(姬水)가에 살면서 성을 희(姬)로 바꾸었다.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받아 이의 뜻을 풀어 음부경(陰符經)을 썼는데 이것이 노자(老子)로 이어져 도교(道敎)의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도가(道家)는 황제(黃帝)를 도교(道敎)의 개조(開祖)로 숭배하고 있다.
◆ 47세를 이어온 단군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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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마지막 18대 거불단(居弗檀) 환웅천황 이 웅씨(熊氏)의 왕녀와 혼인하여 신묘년(辛卯年) 5월 2일 인시(寅時)에 아들을 출산하니 이가 바로 단군조선을 개국한 초대 단군 왕검(王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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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에 봉안된 단군 어진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의 단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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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王儉)은 14살 때 웅씨국(熊氏國: 외가)의 비왕(裨王: 임금을 보좌하는 으뜸가는 벼슬)으로 봉해졌다가 38세 때 구환국(舊桓國) 을 다시 통일하여 도읍을 송화강 부근의 아사달(阿斯達: 하얼빈)에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개천1565년(서기전 2333년) 10월 3일, 단군(檀君) 왕검(王儉)은 삼신(三神) 상제(上帝)에게 천제(天祭)를 올리고 나라이름을 '조선(조선)’이라 했는데, 그 시기에 중국에서는 요(堯)임금이 즉위하였던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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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신(三神) 이야기(클릭) : 삼신오제(三神五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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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檀君王儉)에서 ‘단군(檀君)’은 소도제전(蘇塗祭奠)을 주관하던 제사장으로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며, ‘왕검(王儉)’은 본래 임검(壬儉)인데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며 통치자(임금)을 뜻한다. 따라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한다.
* 요즈음 MBC에서 방영중인 수목역사드라마 '김수로'에 가야국의 전신인 구야국에 '천군(天君)'이 제사장으로 등장한다.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塹城壇)은 초대 단군왕검이 88세 되던 해에 쌓고, 91세 되던 해에 친히 상제(上帝)에게 천제(天祭)를 올렸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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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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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단군왕검 재위 시 중국에서 큰 홍수가 나서 단군왕검은 네 아들 중 맏아들인 부루태자를 우(禹)에게 보내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시키므로써 9년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增補) * 이로 인하여 우(禹)는 순(舜)으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를 세웠다. 이 때문에 중국 민족을 '하화족(夏華族)'이라고 하며, 한(漢)나라 이후에는 '한족(漢族)'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단군조선(고조선)은 서기전 2333년-서기전 238년까지 2096년 동안에 47대 왕위가 이어졌는데 고고학에서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청동기(靑銅器)문화의 시작을 서기전 2400년경으로 보고 있으니 이 시기가 바로 단군조건의 건국시점인 것이다.
단군왕검은 전국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아사달(阿斯達: 현 하얼빈)을 수도로 한 진한(辰韓)은 단군왕검이 직접 통치하고, 당산시를 중신으로 한 번한(番韓)과 평양(平壤)을 중심으로 한 마한(馬韓)에는 부(副) 단군을 두어 통치하는 이른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시행하였는데, 이 사실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밝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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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시대의 삼한관경(三韓管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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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補) *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밝힌 단재 신체호선생의 『 조선상고사 』상하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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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시대를 3단계로 구분한다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단군(BC2333-BC1286) 1049년간 송화강아사달(하얼빈)시대 22세 색불루단군-43세 물리단군(BC1285-BC426) 860년간 백악산아사달(農安, 長春))시대 44세 구무담군-47세 고열가단군(BC425-BC238) 187년간 장당경아사달(開原)시대 라 한다.
이렇게 47대를 이어온 단군조선 말기에 이르러 통치기능을 상실하면서 고조선의 많은 제후들이 각기 독립된 정치세력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쇠퇴해 갔는데, 중국은 이보다 먼저 봉건제도국가인 서주(西周)가 통치력을 잃어가면서 이른바 춘추전국시재(春秋戰國時代)의 혼란기에 접어든다.
(增補) * 혹자는 단군조선이 쇠퇴해지고, 우리 한(韓)민족이 하화족(夏華族: 漢族)과의 중원에서의 세력다툼에서 우세에 있던 것이 열세에 몰리게 된 것은 한족(漢族)이 먼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철기(鐵器), 특히 철제무기(鐵製武器)면에서 철기문화가 먼저 발달하게 되었고, 진시황(秦始皇)의 중국통일 과정에서 동이족을 철저히 숙청하거나 동화시켰고, 한(漢)으로 이어지면서 북쪽은 만리장성을 의지하여 흉노의 침공을 막으면서, 동, 서, 남으로 세력을 벋어나가 청동기문화를 주축으로 하던 단군조선이 세력다툼에서 밀리게 되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예: 위만조선, 한사군 등)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增補) * 단군조선 47대 왕조 제1세 단군 왕검(王儉) 재위 93년 제2세 단군 부루(扶婁) 재위 58년 제3세 단군 가륵(嘉勒) 재위 49년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 재위 38년 제5세 단군 구을(丘乙) 재위 16년 제6세 단군 달문(達門) 재위 36년 제7세 단군 한속(翰粟) 재위 54년 제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 재위8년 제9세 단군 아술(阿述) 재위 35년 제10세 단군 노을(魯乙) 재위 59년 제11세 단군 도해(道亥) 재위 57년 제12세 단군 아한(阿漢) 재위 52년 제13세 단군 흘달(屹達) 재위 61년 제14세 단군 고불(古弗) 재위 60년 제15세 단군 벌음(伐音) 재위 51년 제16세 단군 위나(尉那) 재위 58년 제17세 단군 여을(余乙) 재위 68년 제18세 단군 동엄(冬奄) 재위 49년 제19세 단군 종년(縱年) 재위 55년 제20세 단군 고홀(固忽) 재위 43년 제21세 단군 소태(蘇台) 재위 52년 제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재위 48년 제23세 단군 아홀(阿忽) 재위 76년 제24세 단군 연나(延那) 재위 11년 제25세 단군 솔나(率那) 재위 88년 제26세 단군 추로(鄒魯) 재위 65년 제27세 단군 두밀(豆密) 재위 26년 제28세 단군 해모(亥牟) 재위 28년 제29세 단군 마휴(摩休) 재위 34년 제30세 단군 나휴(奈休) 재위 35년 제31세 단군 등올(登 山兀) 재위 25년 제32세 단군 추밀(鄒密) 재위 30년 제33세 단군 감물(甘勿) 재위 24년 제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 재위 23년 제35세 단군 사벌(沙伐) 재위 68년 제36세 단군 매륵(買勒) 재위 58년 제37세 단군 마물(麻勿) 재위 56년 제38세 단군 다물(多勿) 재위 45년 제39세 단군 두홀(豆忽) 재위 36년 제40세 단군 달음(達音) 재위 18년 제41세 단군 음차(音次) 재위 20년 제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 재위 10년 제43세 단군 물리(勿理) 재위 36년 제44세 단군 구물(丘勿) 재위 29년 제45세 단군 여루(余婁) 재위 55년 제46세 단군 보을(普乙) 재위 46년 제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 재위 58년 (高東永저 『연대순으로 엮은 檀君朝鮮47代史』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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