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라는 병을 공산주의라는 약으로 고칠 수는 없다.
- 량치차오
Event 9: 지팡구
미군이 일본에서 철수하는 때를 노려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일본 협동당의 계획은 자유당 정권이 미일안보조약을 맺어 미군 주둔을 영구화한다는 다른 계획을 세우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의 친중국가화라는 대계가 엎어질 위기에 처하자, 라이징썬을 비롯한 민국 정계의 엘리트들은 “조선에서처럼 유엔 감독 하 총선거를 치르는 안”, “미국이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는 것처럼 뜬소문을 뿌려 안보조약 반대투쟁을 촉발하는 안“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장했습니다. 그 중 가장 과감하면서도 위험하게 행동했던 건 국가안전부의 해외파트 담당자 난진톈이었는데, 그는 아예 공식 방문으로 위장해 연합군최고사령부 건물에서 자료를 직접 훔쳐내는 위험천만한 공작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알아낸 안보조약 초안의 내용은 미군이 일본 영내에 주둔하며 국내 소요사태를 미군이 직접 진압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무장혁명 지원을 주장하던 왕이는 원래 계획, 즉 쿠데타 속행을 재촉했습니다. 협동당과 별개로 움직이던 급진 학생운동 세력을 지원하자는 안은 폐기되었죠. 협동당이 선거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는 것조차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자, 쑨유얀은 즉각 “협동당을 가짜로 분열시켜 자유당과 협조하는 척 하다가 뒤통수를 친다”는 기만작전을 고안해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 여부를 두고 이미 부풀 대로 부푼 당내 내홍은 이 계획이 전해지자마자 폭발해버렸고, 협동당은 진짜로 온건파와 강경파로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류웨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유당 우익에게도 조약의 내용을 과장해서 폭로해 정국을 안개 속으로 집어넣자는 급진적인 안을 주장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는 “미국과 척지는 행동을 삼가고 먹을 게 없어 보인다면 과감히 포기하라”는 장제스의 훈령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었지만, 현장은 패닉 속에서 돌아갔습니다. 그 와중에 미국에 대한 공포심에 빠진 난진톈이 협동당 급진파(유신회)의 쿠데타 강행 계획을 입수해 미군에 유출하는 사고가 터진 것은 덤이었죠.
결국 연합군 부사령관 류웨이는 자신들이 손수 엉망으로 만든 일본 정국을 계엄령으로써 수습하기로 마음먹었고, 오마 브래들리 사령관이 이를 수용하면서 정국은 정리되었습니다. 미국은 “중국이 일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친미정권 수립“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죠. 쿠데타에 직접 가담한 왕이는 일부 협동당 인사들과 함께 중립국인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즉, 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은 미국과 척지면서 일본의 친미국가회도 막지 못한 실패를 겪게 된 것입니다.
장제스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전원을 기소해 감옥에 넣을 것을 고려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감사 결과는 직접적인 간첩죄를 저지른 난진톈 한 명만을 처벌하는 쪽으로 나왔습니다. 난진톈은 비밀정보를 미국에 넘기고 캐나다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순찰 중이던 미군 구축함에 정면 추돌해 마리아나 해구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죠.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Event 10: 인간에게는 몇 개의 인터내셔널이 필요한가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는 자신들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무려 30년간 소련을 철권 통치해오던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전세계가 그의 후계를 둔 권력투쟁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중화민국 조문단 역시 국민당 명의로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 주소련대사 쑨유얀은 미리 말렌코프와 연줄을 대어두고 있었는데, 장관회의 주석(정부수반)직을 승계한 말렌코프는 “실용주의“ 계파를 대표하는 자로서 베리야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말렌코프는 중국의 제3세력화와 미소 데탕트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에 그가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여겨졌고, 조문단 역시 여기 초점을 두고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러나 쑨유얀, 류웨이 등 ”좌익“들을 감시할 요량으로 조문지원단에 포함된 국가안전부 대공조사국장 베이베이는 오히려 소련에 혼란을 유도하는 것이 중국에 이득이 된다고 봤고, 베리야 측에게 ”스탈린이 티토를 후계자로 내정했었다”는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물론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베이베이의 의중과 달리 사회주의자들의 심장은 더 새빨갰습니다. 이념적 지향성의 부족이 약점이었던 실용파는 편지의 진위여부 따위와 상관없이 티토 주석을 “진짜로” 다음 수령으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재건과 국제주의 부활을 공약으로 내세운 티토를 막을 지는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자가 세계혁명을 부정하고 국가주의, 민족주의 따위에 경도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전세계 공산당 지도부가 모두 모인 곳에서” 보이는 것은 마치 고위공직자가 생방송에서 “민중은 개돼지”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았으니까요.
모든 계획이 무로 돌아갔지만, 민국 지도부는 아예 이 급진주의 바람에 올라타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당은 코민테른에 정식으로 가맹했고, 이는 1인자 미국에 맞서 2인자 소련과 3인자 중국이 균형동맹을 이룸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당장 분쟁을 격화시킬 의지는 없는 미국 민주당 정권이 중국을 향해 전면적 제재를 가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Event 11: East vs West
공산권의 콘클라베에서 티토가 새 주석으로 선출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사실상 국가연합 수준으로 공화국들의 자치권을 허용하며 공산권 전체가 국제주의 물결에 휩싸이는 와중에, 장제스는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정신없는 정계개편으로 자유파가 몰락하고 국민당이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 정당으로 개편되며 마르크스주의-국제주의 노선에 동참하는 국민당 혁명위원회 주류가 “농공민주당”으로 분리되는 어지러움 속에서, 국민당의 신임 총재 겸 중화민국 총통으로 당선된 것은 쑨원의 아들 쑨커였습니다.
장제스가 은퇴하자 홍콩 범죄조직과 연계된 그의 비자금 조성작업에 주목한 국가안전부의 대공조사국장 베이베이는 삼합회에 대한 대대적인 타격을 기획했고, 놀랍게도 돈의 주인 장제스가 이를 허가하면서 광동 엄타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미하일 수슬로프가 이끄는 소련 내 반-국제주의 파벌이 유대인 테러조직을 용병으로 고용해 돈을 채가려 했지만, 이는 모종의 루트로 정보를 파악한 왕년의 대군벌 펑위샹의 기지로 극복되었습니다. 장제스의 청지기 류즈를 족쳐 돈의 위치를 알아낸 일행들은 이 막대한 자금을 나눠먹는다는 달콤한 꿈에 부풀었지만… 장제스가 “이제는 무의미해진” 비자금을 공금으로 전환하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라이징썬 등 돈에 눈독을 들이던 이들은 실망했지만, 이 비자금의 존재는 다름아닌 대일강화협상에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본 내 친공산세력을 육성하려던 코민테른이 무배상 평화를 추진하면서 홀로 남겨질 뻔한 중화민국은 이 공적 자금을 매개로 “개인 청구권 인정”이라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배상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코민테른은 좌경모험주의(라기보다는 사실상 아나코-코뮤니즘) 세력인 반파쇼공투위원회(반공투)를 지원하는 강수를 두었고, 이는 일본에서 내전에 준하는 정치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이 아예 망해서 배상금을 못 받게 되면 모두의 손해였지만, 모스크바와 베오그라드는 아무렴 혁명만 일으킬 수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였고 난징은 “형님 노릇”이 더 중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미국은 중국이 끝끝내 소련(또는 코민테른)에 붙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대전략을 새로 짜게 되었지만요.
아무튼 대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유태공화국을 주도로 한 아시아피해보상법원이 장제스의 비자금을 모태로 설립, 일본은 55년 분할로 아시아 국가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줘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돈이야 제대로 받을 수 있든 말든, 중국은 명실상부 동아시아 세력의 맹주로서 가만히만 있어도 주변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열강”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대일강화조약 체결은 2차대전이 비로소 완전히 끝남을 의미했죠.
이제 세계 정세는 완벽하게 동-서로 분리되었습니다. 불안한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dear0904 전 정확히 1890자입니다.
@돈이 곧 진리 도대체 뭔 내용이 나왔길래?하며 호기심만 커지는 댓글수들이군요
류웨이는 장제스와의 대담 후 총참모장 이임 준비를 마치고, 정식으로 예편원을 제출하여 퇴역했습니다. 예편 이후 플랜은 그닥 없던 류웨이는 어차피 고향에도 반겨 줄 만한 이 없고 하여 적당히 수도에 안전 가옥을 꾸려 살기로 했지요. 수도에서 적당한 필명으로 글이나 쓰면서 지내면 딱 좋겠다 싶었고...
문제는, 새 총통으로 라이징썬이 등극 한 이후였습니다. 물론, 부총통으로 류웨이를 끌고가서가 아니라... 재정 건전성을 위해, 군인과 공무원의 연금과 연봉을 대폭 삭감하는 조치를 취한것입니다. 류웨이가 봤을때는 절대 그러지 않을 인물이었는데, 누가 뒤라도 봐줬나봅니다...
아무튼, 갑자기 수입이 3/4로 줄어든 류웨이는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참았습니다. 총통이 했던 말을 기억 하면서. 수입이 줄었다고 안온한 삶이 박살나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그렇게 참는다고 일이 안 터지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 3진영임을 부각하기 위한 약속 대련. 미국과의 소규모 무역 분쟁이나, 소련과의 국지적 국경 분쟁등이 그러한 약속 대련의 일환으로 이뤄졌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약속 대련이 꼬이거나... 만에하나 사고라도 난다면, 수습에 필요한 노력은 매우 커지게 마련이었고, 그런 사고는 "하필" 소련쪽과의 일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우수리강에서의 대치가 급작스러운 혼선으로 인해 일이 크게 비화되었고, 권력을 잃을 수 없는 지도자 브레즈네프의 결정으로 극동에 사단이 추가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총통은 바로 친소파 군인인 류웨이를 끌고 오기로 결정 했습니다. 류웨이는 물론 반발했지만, 제일 명망 있는 군인이 누구냐는 말에 입을 닫고 따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명예 원수를 받아들여 소련과의 일을 해결 하고 다시 쉬려고 했지만, 일선에 다시 끌려온 사람이 그렇게 쉽게 도망 칠수 있을리 없었습니다. 베트남의 괴뢰 정권 수립, 태국의 군사적 도발, 조선에서의 노사 분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독자 노선 등등 수많은 갈등이 있었고, 그 조정에는 꼭 류웨이가 동행했습니다. 안 그러면 안온한 삶이고 뭐고 다 부셔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것 마냥 말입니다.
@dear0904 그런 날들이 약 5년간 지속 된 이후... 또 새 총통 선거가 이뤄질 즈음, 류웨이는 같이 사직을 청했고, 그것은 받아들여 졌습니다. 만, 국민대회당에서, 농공 민주당 후보 장보쥔이 당선됨이 선언 되려는 때, 살아남았던 CC파 잔당들과 그에 찬동한 극우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선언하고 국민 대회당을 점거해버리자, 그는 민국의 대의를 저버리려는 그들을 용납 할 수 없었고, 빠르게 본인의 연락이 닿는 지휘관들에게 연락해 그들을 포위하여 제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극우파의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그때 난진톈의 어설픈 단죄로 살아남았던 자들 또한 해결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류웨이는 장보쥔 정권 아래에서도 명망있는 명예 원수직을 유지하며 열심히 일하게 된 것입니다... 15년 이른 은퇴를 말한 그였지만, 결국 정년보다도 더 일하게 생겼군요... 아! 인생이란...?
마지막화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