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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논쟁 스크랩 ??반대 속에 이어진 30년 관계, ‘최태민 미스테리’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996 13.09.18 09: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공식적으로 ‘박근혜-최태민’에 대해 언급된 건 지난 대선 때다. 당시 이명박 후보측은 세간에 떠도는 ‘설’을 토대로 최태민과 관련된 다양한 의혹을 제기하며 공세를 폈다.

 

부실 검증, 현대사 미스테리가 된 ‘최태민 의혹’

 

당시 경선후보청문회에서 박근혜는 “최 목사(최태민)는 내가 어려운 시절 나를 도운 사람”이며 “고맙고 훌륭한 분”이라며 그를 끝까지 두둔했다. 2007년의 ‘최태민 검증’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당내 선거에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상대 후보에게 가벼운 ‘상처’ 정도는 줄지언정, ‘목숨’을 거두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스파링’이었다.

 

‘진검’ 승부가 아닌 ‘목검’ 승부였던 만큼 의혹이 제대로 밝혀지긴 어려웠다. 그러나 보니 최태민과 관련된 무성한 의혹들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최태민 의혹’을 현대사의 ‘미스테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번 대선은 ‘최태민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태민 의혹’에는 풍부한 얘깃거리와 함께 박정희 시절의 ‘어두운 흔적’까지 담겨 있어 ‘흥행성’도 높은 편이다. 박근혜 측은 ‘단순한 과거사를 가지고 정치공세를 편다’며 ‘문제될 것 없다’는 입장이다. 과연 그럴까? ‘최태민 의혹’을 들여다보면  ‘뇌관’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박정희 생전에 직접 친국한 사건

 

육영수의 사망 직후 박근혜는 최태민으로 부터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육여사(육영수)가 3차례에 걸처 자신(최태민)에게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현몽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박근혜는 그에게 구국봉사단 총재를 맡겼고,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 기업들로부터 운영비와 입단찬조금을 걷으며 각종 이권에 개입한다.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련의 1977년 9월 20일자 비망록에는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백광현 정보부 7국장과 박근혜를 배석시켜 최태민의 비리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직접 친국을 한 장면이 묘사돼 있다.

 

“박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 영애인 근혜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던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최태민을 거세하고, 향후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라.’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 근혜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근혜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딸을 친국했을까? 박정희는 “최태민과 관련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태민과 딸 박근혜의 관계가 어땠으며,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당시 세간에서는 최태민을 ‘박근혜의 그림자’라고 불렀다.

 

당시 중앙정보부도 특별수사를 했다

 

관련된 수사는 조심스럽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영애이자 퍼스트레이디인 박근혜와의 관계 때문이다. 중정에 의해 밝혀진 ‘인간 최태민’의 모습을 보면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훌륭하고 고마운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최태민은 해방 전후 경찰공무원으로 있다가 1949년 육군헌병대 문관으로 근무했다. 1954년에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고, 이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되기도 했다. ‘영생교’를 만들어 사이비종교의 교주를 하다가 박근혜를 만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7개의 이름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결혼도 6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정기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최태민 가계보'>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친분과 관계를 내세워 정계와 재계, 정부 관료와 접촉해 인사, 승진, 공천, 공사 수주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하고, 입회비와 후원금을 빼돌리는 등 공금을 횡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중정 수사자료에는 총 44건 3억1700만원(현재 약 40억원 상당)의 비리 사실이 적시돼 있다.

 

‘박정희 사살’ 이유 중 하나가 ‘최태민’

 

박정희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는 10.26사건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항소이유서에 ‘최태민 사건’을 거론했다.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과 여자들과의 온갖 추문까지 있는 사이비 목사가 자칭 ‘태자마마’라며 청와대를 드나들고, 박근혜를 내세워 부정을 저질러 국민과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고 있어, 이를 박정희에게 호소했지만 박정희가 듣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재규 변호인은 “(박정희가)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했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주변의 비리에 대해 직보 하고 충언을 했지만 딸을 감싸기만 한 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박정희에 대해 그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서 크게 실망했고, 이것이 박정희 제거의 한 가지 이유가 됐다는 주장이다.

 

전두환까지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우려했다

 

박근혜가 최태민을 크게 의존했다는 주장과 증언이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의 저서에 ‘박근혜에게 최태민과의 관계를 끊도록 건의한 비서 3명이 모두 잘렸고, 최태민이 추천한 사람만 박근혜의 비서가 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최태민은 탁명환(작고) 당시 현대종교연구소장에게 ‘박근혜의 지프를 타고 왔으며 청와대를 수시로 출입하고 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박정희 피살 이후 ‘최태민 거세’가 흐지부지 되자 박근혜를 걱정한 청와대 비서관이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에게 최태민을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선우련의 부탁을 받은 전두환은 최태민을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로 보냈다가, 12.12직후 사기와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1년6개월을 선고했다.

 

형제들도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걱정했다

 

박근혜는 1982년 전두환 정권의 암묵적 배려로 1969년 육영수가 설립한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두 동생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청와대 시절부터 ‘박근혜의 그림자’로 불리던 최태민이 육영재단 운영 등에 깊숙이 관여해 재산을 착취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갈등과 반목이 깊어지던 1990년, 드디어 일이 터진다. 박근령과 박지만 두 남매가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그 탄원서의 일부다.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결국 박근혜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육영재단의 난’은 박근령과 박지만의 승리로 끝난다. ‘난’의 목적은 ‘박근혜 사퇴’ 보다 ‘최태민 제거’에 있었다. 형제들은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변의 반대 속에도 이어진 ‘30년 관계’

 

아버지 박정희도, 형제들도, 비서진도, 전두환도, 중앙정보부도, 당시 언론과 사회단체들까지 부정적으로 봤던 ‘박근혜-최태민’의 관계는 30년 동안 이어진다. 박정희의 사망사건이 터지고, 전두환 군부에 의해 최태민이 격리되며 소원해졌던 관계는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복원된다.

 

최태민은 육영재단의 이사로, 고문으로 활동하며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태민 뿐만 아니다. 그의 사위까지 육영재단에 관여했다. 최태민이 사망(1994년)한 뒤 그이 다섯째 부인의 딸인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는 1996년부터 2004년 까지 박근혜의 보좌관 혹은 비서실장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총재가 됐을 때 정윤회는 총재비서실장이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은 강남에 빌딩 두채를 보유한 수백억대 재산가로 알려졌다. 최순실이 부동산을 사들인 때와 최태민이 육영재단의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던 시점이 일치해 이와 관련된 의혹도 무성하다. 또 항간에는 2004년 이후에도 ‘정윤회 보고라인’이 가동돼 왔고, 4.11 총선 공천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최태민과 그 인척, 육영재단 영남학원까지 좌지우지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박근혜에게 영남대 재단을 맡긴다.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일어나 몇달 만에 이사장직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부정입학, 장학금 횡령, 영남대병원 비리 등이 불거져 관선이사 체제가 들어선 1988년까지 이사직을 유지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영남대의 ‘교주(校主)’가 된 어버지 덕분에 영남학원을 맡았지만, 여기에도 ‘최태민의 흔적’이 발견된다. 영남학원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재단운영을 좌지우지해온 4명 중 두 명이 최태민의 인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남학원 산하 영남투자금융 등을 관리하며 재단의 실세였던 조순제는 최태민 처의 전남편의 아들이었다.

 

 

영남대병원 관리부원장을 맡아 의료원 관련 비자금 총책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손윤호는 조순제의 외삼촌이었다. 편법과 비리가 판쳤다. 병원장 해외출장비가 박지만의 항공료로 지급되고, 육영재단에 수천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육영재단이 발행하던 <어깨동무> <보물섬> 등에 영남투자금융이 장기 광고를 제재하거나 거액을 기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맡은 곳 마다 부실, 이런데도 ‘빅토리아 여왕’?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가졌던 직함 중 대표적인 게 육영재단과 영남학원 이사와 이사장이다. 두 곳 모두 부실운영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영남학원은 공금 횡령과 기금 전용, 부정 입학 등이 문제가 돼 1988년 사학재단 처음으로 국정감사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다가 2009년에야 정상화가 됐다.

 

육영재단은 방만한 운영과 경영부실에 두 차례의 ‘형제의 난’까지 겹치며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부터 박지만이 추천한 임시이사 9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선거에서는 ‘여왕’일지는 모르겠으나, 경영에는 재주가 없나 보다. 박근혜가 맡았던 두 기관 모두 풍비박산의 위기를 겪었다. 두 기관의 부실운영에 공교롭게도 최태민이 있었다.

 

육영재단과 영남학원, 모두 현존해 있는 기관들이다. 또 관련 인물들 상당수가 생존해 있다. 제대로 검증한다면 ‘미스테리’가 웬만큼 해소될 수도 있어 보인다. 아무튼 ‘최태민 미스테리’는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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