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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유대인의 믿지 않음,
구원을 예정하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
(찬송 359장)
2023-2-17, 금
맥락과 의미
로마서 11장은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택한 사람과 버려진 사람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서 나오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아직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더 많은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앞에서 사도는 찬양합니다. 우리도 모두 찬양하도록 초청합니다.
1. 이스라엘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만 구원, 나머지는 악하게 됨(1-10절)
1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2절) 5절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야 시대에 거의 모든 백성이 우상 숭배로 향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선택한 사람 7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열왕기상 19:10,14). 개인적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선택하신 백성 가운데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은 눈이 어두워서 믿지 못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은혜의 선택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과 버려진 사람이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와 시편도 증언합니다(8-10절, 이사야 29:10, 시편 69:22,23).
2.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의로우심(11-32절)
1)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이방인을 받아들이게 함(11-15)
유대인 중에는 믿지 않는 자가 많고, 오히려 이방인 가운데 믿는 자가 생기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이방인이 믿는 것을 통해서 유대인에게 시기심을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것입니다. 더 많은 유대인이 앞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교회가 더 충만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2)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뿌리는 이스라엘, 교만하지 말아야(16-24절)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유대인을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원래 백성에게 접붙여짐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16-18절).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뒤를 따르는 믿음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 신약 성도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20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원래 백성 중에도 넘어지는 사람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을 보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지 않으면 찍어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게 일하십니다. 구원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십니다. 또 심판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 은혜의 자리에 계속 있으면서 은혜를 의지하기 바랍니다.
3) 유대인도 구원받게 하여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25-32절)
25절 이후에서는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25-26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26-27절은 이사야 59장을 인용합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그들이 회개할 것이다. 그때 그들과 내 언약을 세우겠다(사 59:20,21). 하나님께서 백성을 부르셨기 때문에 후회하심이 없습니다(29절). 그들을 돌이켜서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31절).
이사야서 59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사람이 점점 많아질 것을 말합니다. 역사의 어느 마지막 시점에는 그동안 회개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이 더 많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울수록, 유대인 가운데 구원 얻는 자가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 구원받는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또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더 확장하고 계십니다. 은혜를 확장하는 은혜의 시대를 열어가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신비합니다. 유대인이 불순종하는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온 민족에게 복음을 확장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방인이 오히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온 땅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에게 영향을 줍니다. 결국 복음이 더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예정과 신비로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자(33-36절)
33-36절은, 유대인 가운데 믿는 자가 많아질 것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은혜의 신비함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주권과 은혜 앞에서 그냥 겸손히 엎드려 감사 찬양할 뿐입니다.
34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36절에 나오는 한 마디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그 분으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그분을 통하고) 주에게로(그분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유지하십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갑니다. 이 앞에서 우리는 엎드려 경배할 따름입니다. 온 세계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는 그 은혜를 겸손히 찬양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구원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 안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유대인이 다시 구원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 경험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할 따름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믿음과 행함의 결과로 선택받음을 확신하며 계속되는 믿음과 행함으로 굳게 됨: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우리에게는 항상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정 받았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시고 택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믿음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왜냐하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라.” (데살로니가전서 1:5) 그 결과 굳센 믿음과 서로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가운데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있는 것입니다(살전 1:3).
복음을 믿는 것과 삶의 열매를 통해 선택된 것을 확신한 형제 자매님, “그러므로 형제들(자매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베드로후서 1:10)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은 믿음, 지식(구원받은 성도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 절제, 인내, 경건 등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 우애와 사랑 등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벧후 1:5-9).
‘구원받기로 예정받았으니 대충 살아도 천국 간다!’ 이것은 예정받지 않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계속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자비하심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치 자동적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일하심과 찬양: 우리 자신의 구원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계속 확신을 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을 계속 의지하는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은혜를 주신 그분 안에서 삼위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고 나가는 거기에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은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도 하나님이 다시 그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버려진 자들 중에서 다시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놀라움으로 경배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감사합시다. 불순종하는 자를 심판하시는 언약의 저주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엎드려 경배합시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다 알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우리의 구원도 이루어 가십니다. 그분 앞에서 감사합시다. 엎드려 경배하는 우리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하나님께서는 먼저 믿은 나를 사용하셔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내 주변의 가족이나 친지나 성도들 중에서 나의 섬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복음 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아포-태오) 그럴 수 없느니라”(1절).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아포-태오) 아니하셨나니”(2절).
1)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셔서 그 백성을 버리지 않고 찾으심
‘버린다’는 구약 성경(히브리어)에 여러 말로 쓰였습니다.
첫째는 ‘아마스’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신 것을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 “그들(이스라엘)이 듣지 아니함으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호 9:17).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방 나라에 의해 고통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야서의 마지막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호 14:5)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호 14:8)로 끝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부르짖었습니다.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버림당하게) 하시고”(에레미야 애가 3:44).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바벨론 포로의 후예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버린다’는 신약 성경에 여섯 번 나옵니다. 로마서(11:1,2) 외에 네 곳에 더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과 축복을 버리고 배척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모세를 거절했습니다(행 7:27,39). 이스라엘 백성은 사도 바울이 전한 영생의 말씀도 버렸습니다(행 13:46). 그래서 바울은 “이방의 빛”으로서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심지어 사도의 복음을 듣고 교인이 된 사람(유대인 혹은 이방인) 중에서도 “믿음과 착한 양심을 … 버렸고”(딤전 1:19) 교회의 권징을 받아 출교 되어 “사단에게 내준”(딤전 1:20) 바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을 버려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로마서 11:1,2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신실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계속 신실하셔서 그 백성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거절하고 혹시 방황하고 있습니까? 바로 지금 돌아오십시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보다 더 큰, 무한한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두 팔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감사하며 회개하며 돌아오십시오.
2) “버리셨느냐”,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 구약 시편의 탄식과 엘리야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된 응답
‘버린다’는 둘째로, 구약의 히브리어 ‘자나흐’의 번역입니다. 백성이 탄식하며 기도할 때 쓴 표현입니다. 구약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이 버림받은 것에 대해 부르짖고 하나님이 응답하신 과거의 일이 사도 바울에게 계속 이어집니다.
시편 60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에서 밀리면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1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10절).
기도는 확신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12절).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말 것을 기도했고, 그 응답 가운데 일부를 로마서 11:1,2에서 말합니다.
시편 44편에서도 구약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44:9).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23절).
바로 앞 구절인 시편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것을 로마서 8:36이 그대로 인용합니다. 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고난 가운데 탄식했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아 기록했습니다. 성도가 버림을 당한 것 같은 고난에서 하나님은 건져 주십니다.
그러나 고난보다 더 크고 근본적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시편의 전통에 따라 백성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마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로마서 9,10장에 그의 탄식 기도가 나옵니다. 9:1-3에서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10:1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 탄식기도에 대한 응답이 바로 로마서 11:1,2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리 아니하셨나니”. 이 기도와 응답은 단지 사도 바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 기도와 응답을 기록하여 보편 교회가 읽게 하셨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기도와 응답에 대해 말하면서 그 사례로서 구약 엘리야를 기억합니다(롬 11:2-5).
엘리야의 기도: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을 찾나이다.”
하나님의 응답: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바울과 신약 교회에 대한 응답: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이 엘리야와 바울에게 계시해주신 말씀은, 경건한 성도와 교회가 적어 보이는 때에 항상 위로가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참 경배자”가 모든 시대의 교회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당시 교황의 로마 교회가 근본적으로 교회일 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곳에 바른 성례와 말씀의 전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교회들 가운데 그분의 남은 백성을 놀랍게도 보존하시고, 교회의 어떤 표지들이 남아있는 그 정도에서는” 교회들이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기독교강요. 4.2.12).
지금도 사람들은 “교회의 타락”을 말하면서 비관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한국 곳곳에서, 세계 곳곳에서 참 성도와 예배자를 남겨두셨습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쉽게 부정적으로 말하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니니까, 겸손하게 행합시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사도 바울처럼, 칼빈처럼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하시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처럼 영적 폐허의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깨달음과 희망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노래하고 기뻐하게 하실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참고> 로마서 11장은 비슷한 단어 두 쌍을 연결시켜서 말씀을 효과적으로 강조합니다.
<참고> ‘고발하다’(엔-튕카노, 2절)와 ‘얻다’(에피-튕카노, 7절에 두 번)
이 두 말은 같은 어원(튕카노: 받다)에서 나왔습니다.
‘고발하다’
2절,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을 고발한다는 것보다는 재판장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신약에는 다섯 번 나오는데, 그 중에 로마서에서 세 번 나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부르짖을 때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 8:27, 엔-튕카노). 우리가 죄로 인해서 두려워할 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 8:34, 엔-튕카노 ). 비록 다른 사람이나 사단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고발-고소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시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는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 25:24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여달라고 총독에게 청원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백성의 핍박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백성을 벌해달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엘리야처럼 백성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을 벌해달라고 간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구원을 ‘얻다’(에피-튕카노, 7절에 두 번)
청원하는 것(엔-팅카노)과 비슷한 말이 구원을 ‘얻는다’(에피-팅카노)입니다. ‘얻는다’는 신약 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데, 그 중 두 번이 로마서 11:7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7절).
나머지 세 번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원한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야고보서 4:2). 하나님이 은혜로 주십니다.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야고보서 4:7-8). 히브리서 6:15과 11:33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도는 믿음으로 얻는다”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선택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원해주시고 우리가 얻도록(에피-튕카노) 우리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엔-튕카노).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 하심을 의지하여 성부 하나님께 구원을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참고> 무릎을 ‘꿇다’(캄프토, 4절 )와 등이 ‘굽혀지다’(신-캄프토, 10절)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자는(캄프트, 4절) 등이 항상 굽게 될 것입니다(쉼-캄프토,10절). 등이 굽어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캄프토)은 신약에 네 번 나오는데, 그 중 두 번이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 14:11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는 이사야서 45:43을 인용하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말합니다(롬 14:10, 빌 2:11).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찬양합니다(엡 3:14).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지 맙시다. 기쁨으로 지금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예수님 재림의 날을 소망합시다. 어떤 우상적 경향이나 악과 핍박에도 무릎을 꿇지 맙시다.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오직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찬양합시다.
<참고> “내가 말한다”(1,11절), “나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25절)
“내가 말한다”(1, 11절)
사도는 “내가 말한다”(1,11절)고 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 가져야 할 생각을 가르치면서 이 표현을 씁니다.
이 표현은 사도가 성령님의 영감으로 교회에 새로운 계시의 말씀을 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구원받아 교회의 지체가 되는 때에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계시의 말씀을 전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분의 성령을 사도에게 보내셔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유대인이 한 교회로 되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과 의문에 대해 답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배우자 중 한 쪽이 믿지 않는 경우에 이혼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방인 사회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교회에 속한 부부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부부 가운데 한 쪽만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부부가 이혼하지 말라는 명령은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명령한다”(고전 7:10)고 말합니다. 그러나 원래 부부가 믿지 않다가 한 쪽이 믿은 경우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다”고 합니다(고전 10:12). “내가 말하노니”는 사도 개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고전 7:40) 자로서 말합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내가 말한다”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신 내용을 이제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25절)
이것도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면서 새롭게 알아야 할 문제를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우상 숭배를 하다가 멸망한 것을 일깨웁니다. 이 일을 이방인의 우상 신전에 가서 제물을 먹는 것에 적용합니다(고린도전서 10:1).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이방 지역으로 교회를 확장하시면서 주신 은사에 대해 가르칠 때 이 표현을 씁니다(고전 12:1).
사도가 “내가 말한다”고 한 것은 엘리야가 말한 것(3절), 다윗이 말한 것(9절)을 계속 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구약 시대와 신약의 사도 시대에도 계속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는 것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귀히 여기는 교회에 목사를 통해 계속 가르치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읽고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에게 성령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가정의 가장 된 부모 여러분, 오늘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내가 말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자녀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따라 말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선지자와 사도의 전통 속에서 계속 말합니다. 직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나는 말합니다” 하고 말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뿐 아니라 복잡한 업무에 대해 말할 때도,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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