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청전 靑田 이상범 李象範(1897~1972)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30대후반에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그는 첫번째로 손꼽힌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것은 산수화에서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개성과 창의력은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고 국민적 공감력을 지닌 한국적 풍경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게 생각된다. 이상범은 구한말에 무반武班의 아들로 태어나 전통세계의 가치와 일제시기의 문화적 개량주의 경향에 토대를 두고 당시 화단등용의 거의 유이란 통로였던 관전官展을 통해 명성을 쌓은 화가이다. 따라서 그의 일부 행적과의식세계와 화풍에는 식민지 관전 화가로서의 한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한계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 자연의 향토성과 서정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표현하는데 평생을 바쳐 노력했다. 고전규범을 답습하던 종래의 정형산수화에서 서구 풍경화의 사생개념과 화법을 도입하여 근대저인 사경산수화를 앞장서 개척했던 이상범이 추구한 향토적 자연은 민족정서와 감정과 심미의식을 배양시킨 모태로서의 의의와 결핍된 현실을 초월하는 소망 충족적인 이상세계로서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중세적 가치나 이념과 밀착되어 우리 산천의 특정 경관을 주로 다루었던데 비해 그가 추구했던 것은 평범한 야산과 시냇물이 보이는 시골과 산골의 일상적인 풍토미였던 것이다. 이상범은 바로 이러한 향토경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토속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계절감과 아침, 점심, 저녁의 미묘한 기상감의 무궁한 조화와 더불어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특유의 개성적인 수묵화법을 통해 담아냄으로써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성취했다. 그리고 이를 무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우리들 삶의 기본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촌부의 순박한 모습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국인 고유의 심성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서정 세계를 창조했던 것이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이상범의 산수화를 보고 심취하여 "산도화3"에서 그 감흥을 읊었던 것도 그의 작품세계가 가장 향토적이며 전통적인 저어가 어린 풍경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이상범은 미술의 사회적 기반이 아직 취약했던 근대기에 관변 화가라는 제한된 의식세계 속에서도 개인과 민족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자각 위에서 새로운 전형의 한국적 풍경을 이룩하고 대중적 친밀성을 획득한 국민화가인 것이다.[산가청류(山家淸流)]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3×129㎝ [귀려(歸驢)]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77×196㎝ [강상어락(江上漁樂)]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6×74㎝ [향촌청류(鄕村淸流)]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52×107㎝ [임천고은(林泉高隱)]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28×45㎝ [상림소사(霜林蕭寺)]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28×45㎝ . [춘산유거(春山幽居)]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83×84㎝ [산고수장山高水長] 1960 / 종이에 수묵담채 / 45×99cm / 용인 호암미술관 높은 산과 긴 강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산고수장'이란 화제를 붙인 그림이다. 이러한 화제는 그가 종종 사용했지만 실제 그림의 경관은 그리 높지도 길지도 않은 평범한 산수로 이루어지곤 한다. 이 그림에서도 산의 웅대한 맛과 강의 심장한 맛보다는 우리에게 낯익은 정경을 과장없이 보여준다. 옛 기와집 건물을 화면중심 상단에 핵심적 경물로 포치하고, 그 가파른 언덕 아래로 계류를 길게 설정한 구도는 1959년 여름에 그린 <산사청류山寺淸流>나 1961년 가을에 그린 <산고수장>등과 기본적으로 같으며, 지반을 단단한 암석질로 나타낸 것도 동일하다. 다만 화중 인물의 모습과 수목의 양태가 다르고 기와집이 여기서는 산사가 아닌 성황당이나 비각碑閣의 분위기인 것이 다를 뿐이다. '청전양식'의 특징적인 부벽준과 절대준을 혼합한 모습의 바위 주름법이 보다 성글게 다루어져 있어 단풍들고 낙엽진 잡목의 헝클어진 양태와 함께 가을 산골의 스산한 야취를 잔잔하게 풍겨준다 [계류溪流] 1955 / 종이에 수묵담채 / 34×67cm / 동아일보사 물이 많은 여름 계류의 한 단면을 근접시로 포착하여 나타낸 작품으로, 1955년 8월 19일에 그린 것이다. 그 무렵 시골의 어느 냇가를 현지 스케치한 후 작품화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사생적이고 현장감이 잘 살아있다. 이러한 계류의 모습은 뒤에 이상범 산수의 한 전형적 요소로 정착되었으며, 특히 경관을 가까운 시점에서 다룬 작품들에서 거의 같은 모습으로 등장된다. 그의 작품 규모로는 작은 편에 속하는데, 힘차고 강한 붓자국과 담채와 먹빛의 맑고 신선한 기운, 화면에 넘치는 무르익은 정취가 특히 돋보인다 [귀로(歸路)] 194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9×108㎝ 1940년대 작품 [초동初冬] 1926 / 종이에 수묵담채 / 153×185cm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초겨울 산촌의 스산한 정경을 그린 것으로, 1926년의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던 작품이다. 스승인 안중식의 화풍을 배우며 수련기를 보냈던 이상범은 1923년의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인 <모연暮煙>을 통해 새로운 회화세계의 모색과 방향을 제시했었다. 그의 변모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종래 이상경理想境의 구현을 중시했던 이념산수理念山水에서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산촌이나 농촌과 같은 시골경관을 현실적 생활감정이 배인 향토적 실경산수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그는 풍경의 사실감과 현실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고원적高遠的 구성에서 눈높이로 바라보는 평원적平遠的 구성으로 전환시켰으며, 실제로 원근법에 따라 근경을 강조하고 중경과 원경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구도와 공간개념을 구사하였다. 즉 서양화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 입각한 사생풍寫生風의 산수화로 급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변모는 1925년까지만 해도 수련기의 전통화법과 새로운 사생기법의 혼용에서 오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나타냈으나 이 그림에서부터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 보다 강화된 단일시점과 미점米點으로 꾸며진 통일된 화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야산을 배경으로 비탈진 논밭과, 그 위의 초가와 잡목들이 자아내는 스산한 초겨울의 정경을 짙고 옅은 먹빛을 품은 작은 입자모양의 미점들을 통해 서정적 분위기로 환원시킨 수법은 이상범 예술의 본원적 요소를 대하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묵점 위에 묵점을 덧보태며 화면에 특이한 질감의 반향을 일으키는 수묵층을 형성하는 기법은 淸代의 개성파 화가인 공현▩賢의 화풍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의 이러한 분위기 위주의 농도 짙은 서정적 화면과 개별적으로 분리된 필선의 효과보다 옅은 먹에서 짙은 먹으로 반복적으로 쌓아올라가는 축적된 수묵층의 미묘한 울림과 이를 차분하게 중화시키며 스며들 듯 배어든 담채의 정취가 풍기는 화면은 1930년대를 통하여 더욱 치밀하게 정리된 상태로 심화되어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