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눌(訥)은 성종 15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현종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상서 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 겸 좌간의대부(兼左諫議大夫)로 되었다가 국자제주(國子祭酒) 지 이부사(知吏部事)로 옮겼다. 왕이 서눌의 딸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은 후 서눌을 중추사 우산기 상시(中樞使右散騎常侍)로 임명하였다가 문하시랑 동 내사 문하 평장사 판 상서 이부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吏部事)로 뛰어 올렸다. 덕종 초년에 검교 태사(檢校太師)를 더 주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시켰다. 정종(靖宗) 때에는 판 도병마사(判都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왕이 호부 낭중 유선(戶部郞中庾先)을 거란에 보내 사신 파송한 데 대한 답례를 하려고 하니 서눌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과 보루를 증축하려 하였는데 이제 다시 화친하자고 하므로 유선의 편에 국서를 보내서 성과 보의 설치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자”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정종 7년에 안석과 지팡이를 주고 중대광(重大匡) 벼슬을 더 주었다. 이듬해에 거듭 사표를 제출하고 퇴직을 청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병들어 지장사(地藏寺)에서 요양하였는데 왕이 우승선 김정준(右承宣金廷俊)을 보내 문병하고 어의(御衣) 두 벌과 곡식 1천 석, 말 두 필을 절에 희사하고 기도를 드리게 했다. 그래도 병이 위중하게 되자 왕이 친히 가서 위문하고 삼중 대광 내사령(三重大匡內史令) 벼슬을 더 주고 자손에겐 영업전(永業田)을 주게 하였다. 그가 사망하니 왕이 애도하였으며 간경(簡敬)이란 시호를 주었다. 후에 정종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선종(宣宗) 3년에 그의 시호(간경)가 선대(先代) 왕의 시호와 저촉된다 해서 이것을 원숙(元肅)이라고 고쳤다. 지난날 서필의 아버지 서신일(神逸)이 시골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사슴 한 마리가 그의 있는 곳으로 달려 왔다. 서신일이 본즉 사슴의 몸에 화살이 꽂히어 있으므로 그것을 뽑아 주고 또 숨기고 있느라니 미구에 사냥꾼이 쫓아 와서 찾다가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치사하기를 “사슴은 나의 아들이었는데 그대의 덕택으로 죽지 않았다. 앞날에 당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경(卿)이나 상(相)의 높은 벼슬을 하게 되리라”고 하더니 서신일이 나이 80이 되어 서필을 낳고 또 서필, 서희, 서눌 등이 과연 대대로 연이어 재상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