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닷가 일기
이태호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친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말이 떠올랐다.
아내의 안경에 붙은 굴 껍데기의 파편 때문이다. 나도 루이 14세처럼 생굴 마니아다.
아내는 굴을 찍고 나는 톳과 다시마를 벤다.
톳을 베면서 살짝 데친 녀석의 몸뚱이를 그린다. 된장과 고춧가루, 마늘 등 갖은 양념을
곁들인 톳무침이야말로 바다의 향기를 한 숟갈씩 떠먹는 것 같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그 초록의 몸뚱이를 보면 늙음을 이내 젊음으로 되돌리는 것 같다.
먹을 만큼만 베어 놓고 갯바위 틈을 들여다보거나 들친다. 그곳에는 해삼과 전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내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들도 엎어치기 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그래서 더듬는다. 손가락에도 눈알이 달려서 촉감 하나만으로도 전복이 붙었는지
해삼인지 이내 알 수 있다. 아무나 손가락 끝에 예리한 촉감의 눈알을 가질 수 없다.
장장 십여 년이나 걸렸다. 가끔 더듬다가 박하지(꽃게 종류)에게 물리는 경우도 있다.
바다의 파수꾼이다. 얼른 포기하지 않으면 손가락에 큰 상처를 입는다.
양팔을 번쩍 치켜들고 집게발을 쩍! 벌린 녀석은 참 당당하다.
똬리 고동 반 바구니, 해삼 여덟 마리, 전복 열두 마리, 톳과 다시마 한 망, 이 정도면
충분했다. 녀석들 따라 자리를 옮기다 보면 어림잡아도 2Km는 족히 돌아다닌 것 같다.
발바닥이 얼얼한 것은 지압의 왕자 갯바위 덕분이다. 아내는 거의 한 자리에서 맴돈다.
그러니까 엉덩이 걸음이다. 석화가 만발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오금이 저리다고 한다.
물 때맞춰 오전 9시 30분에 바다를 만났으니 4시간 남짓 자연과 함께한 셈이다.
아내는 갯물에 찍은 굴을 씻고, 나는 갯것을 분리한다. 고동은 고동대로 해삼과 전복
등을 따로 담아둔다. 아내가 굴을 다 씻는 동안 나는, 카메라 렌즈를 연다.
왈칵, 자연이 렌즈 안으로 든다. 파란 하늘과 너른 바다, 천 년을 갈고 닦은 갯바위,
생을 예찬하는 해초의 춤, 해송 숲에서 전달되는 피톤치드, 다 담고 싶었다.
행복이 별것이 아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린 참 행복하다.
정치하는 동창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야, 나도 너처럼 바다 곁에서 살고 싶다.
이번만 하고 네 곁으로 갈 테니 집터 좀 구해 달라.” 5년 전 이야기다.
나는 그를 만나면 농담 반 진담으로 이렇게 말한다. “국개의원 왔냐?”
그 녀석들은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변명할 것이다.
“난 말이여~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뿐이 없단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일러 ‘국개의원’이라 부른다.
지위와 권력 돈이 행복의 척도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실력도 금력도
없거니와 적성에도 안 맞는다. 감히 적성이라 단정 짓는 것은 애초부터 오르지 못할
나무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선택하나는 잘했다. 오히려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이 불행의 늪에 자주 빠지는 것을 보면.
오늘만 하더라도 기쁨이 배가됐다.
집을 나설 때부터 욕심 없이 조금만 얻어가자고 다짐했었다. 그러던 것이
하나님께서 한 보따리의 성취감을 주셨다.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낙향하면서
나의 꿈은 완전히 바뀌었다. 낮게 살면서 낮은 사람들의 본을 받자는 것이었다.
그 안에 꿈과 행복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회상한다. 동안 세웠던 목푯값에 대하여. 젊은 시절에는 경제적 성을 쌓자는 것이 목표였다.
낙향한 다음에는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게 여생을 보내자. 그러던 것이 내 나이 65세 때
최종적으로 재설정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대로, 여생을 살기로.
찍어온 생굴과 톳을 적당히 넣고 밥을 짓는다. 바다와 농부, 아내의 손맛이 어우러진
밥상이다. 바다와 대지, 아내의 손맛을 대접에 넣고 쓱쓱 비빈다.
밥숟가락 속에서 빙그레 행복이 웃는다. 오늘도 나의 일기장은 감사로 가득하다.
첫댓글 천국이 지상에 있는 줄 알았더니 만리포 바다에 있군요.
루이 14세 뿐만아니라 진시황이 부럽지 않겠습니다.
아, 나는 언제 바다 천국에서 살 수 있을까나~~
그 밥이 참 맛있을 것 같아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바다와 대지, 아름다운 사모님..^^
운치 있고 넉넉한 저녁의 행복이 저에게도 느껴집니다.
나의 일기장에서 많은 깨우침을 받습니다.
선생님네 밥상에 수저 하나 올려놓고 싶네요 ㅎㅎㅎ그야말로 안빈낙도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