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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혼 (許渾) : 791 ~ 854?
윤주(潤州) 사람으로 자는 용회(用晦)이다. 당(唐)나라 때의 관리이자 시인으로 벼슬은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 목주자사(睦州刺史), 영주자사(郢州刺史) 등을 지냈다. 당나라 말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시인 중에 한 사람으로 율시(律詩)에 능했으며, 대표작품으로 〈함양성동루(鹹陽城東樓)〉, 〈금릉회고(金陵懷古)〉, 〈고낙성(故洛城)〉, 〈도중한식(途中寒食)〉 등이 있다.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정주 헌종숙 사인 유(鄭州獻從叔舍人李褎), 義山 李商隱(812∼858)
봉도연하랑원종(蓬島煙霞閬苑鐘) 봉도산 안개 노을에 낭원의 종소리 울리네
삼관봉주부금룡(三官封奏附金龍) 세 관청이 글을 올려 아뢰니 금용에 올라탔네
모군혁세선조귀(茅君奕世仙曹貴) 대이어 가난한 현인이 관에 올라 귀하게 되어
허연전가도기농(許掾全家道氣濃) 온 집안 인연이 닿아 기세가 드높아라
강간상삼황지안(絳簡尙參黃紙案) 강간에 참여하고 황제의 칙서를 작성도 하고
단노유용자니봉(丹爐猶用紫泥封) 정성스레 화로에 구워 자주 빛 진흙으로 봉하네
부지타일화양동(不知他日華陽洞) 화양동이 언제였는지 알지를 못하겠네
허도경루제기중(許到瓊樓第幾重) 입궐을 허락받아 오니 도대체 궁궐이 몇 겹인가
* 봉도(蓬島) :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
* 랑원(閬苑) :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
* 황지(黃紙) : 임금의 칙서(勅書), 칙유(勅諭) 따위를 기록(記錄)한 것 * 경루(瓊樓) : 궁궐
* 조선시대 승문원(承文院)처럼 주요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듯하다
중추금직(中秋禁直), 간관 한악(諫官 韓握)
성두소명금루잔(星斗疏明禁漏残) 별은 반짝이고 궁궐 자격루는 날 밝음이 남아
자니봉후독빙간(紫泥封後独憑闌) 황제 조서를 봉인한 후 홀로 난간에 기대어 있네
로화옥설금반랭(露和玉屑金盤冷) 이슬은 옥가루처럼 고운데 금 쟁반은 차갑다
월사주광패궐한(月射珠光貝闕寒) 보석 같은 달빛 비치는데 아름다운 궁궐은 춥구나
천친루대롱원외(天襯樓臺籠苑外) 하늘은 궁궐의 누각들을 농원 밖에 들어내고
풍취가관하운단(風吹歌管下雲端) 미풍은 음악소리 불어와 하늘에서 내려오네
장경지위장문부(長卿只爲長門賦) 사마상여는 진 황후를 위해 장문부를 지었지만
미식군신제회난(未識君臣際會難) 임군과 신하의 만남이 어려움을 알지 못했네
< 한악(韓握) >
한악(韓握)은 혼동의 만당(晩唐)시대에 한림학사를 거쳐 간의대부란 간관의 직책을 맡게 된다. 그러므로 소종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한악과 상의하면서 위기를 돌파하려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결국 한악은 주전충의 모략으로 중앙관직에서 떠나 지방으로 유배되면서 소종과 조정에 대한 충성을 시로 표현한다. 그의 시는 일반적으로 서문에 간지와 시를 짓는 동기를 설명하고 있어 작시의 연대와 목적을 잘 알 수 있으며 역사적 사건에 주를 달아 사건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諫官 韓握의 역사시 연구, 이경규(강원대학교)
< 두보(杜甫) 712년 ~ 770년 >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胡北)·후난(胡南)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산백과)
< 이상은(李商隱) : 812 ~ 858(唐나라 사람) >
자 의산(義山). 호 옥계생(玉谿生). 허난성[河南省] 친양[沁陽] 출생. 처음 우당(牛黨)의 영호초(令狐楚)에게서 변려문(騈儷文)을 배우고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후에 반대당인 이당(李黨)의 왕무원(王茂元)의 서기가 되어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불우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경향은 이 소외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변려문의 명수이긴 하였으나 그의 시는 한(漢) ·위(魏) ·6조시(六朝詩)의 정수를 계승하였고, 당시에서는 두보(杜甫)를 배웠으며, 이하(李賀)의 상징적 기법을 사랑하였다. 또한 전고(典故)를 자주 인용, 풍려(豊麗)한 자구를 구사하여 당대 수사주의문학(修辭主義文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시킨 서사시, 또는 위정자를 풍자하는 영사시(咏史詩) 등이 있으나, 애정을 주제로 한 《무제(無題)》에서 그의 창작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 《번남문집(樊南文集)》이 있으며, 《이의산잡찬(李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