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
이팝나무꽃은 봄이 짙어 가는 풍성함을 안겨준다. 친숙했던 아카시아꽃은 멀어지고 달리는 길마다 생소한 가로수는 흰 쌀밥처럼 가지마다 매달려 있다.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한 시간 달렸다. 몇 주 만에 찾아간 시골집은 갖가지 꽃나무와 유실수가 경쟁하듯 기지개를 켠다.
대문 옆 텃밭에는 내린 비에 잡초가 수북하게 돋았다. 집안 마당에는 잔디가 누른빛을 밀어내고 계절을 이끌어 나간다. 지난겨울에 덮어 두었던 비닐 천막을 걷어 내 상추와 쑥갓에 자연 바람을 불어넣는다. 영양분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 채소는 떡잎이 노랗게 웅크리고 있다.
뒷마당 울타리는 사람 키 높이보다 더 자랐다. 요즈음은 흔하게 볼 수 없는 탱자나무다. 고향 초등학교에 담벼락으로 사방 돌린 탱자나무 울타리는 흔하디흔한 모습이었다. 굳센 가시 탓에 최고의 방호 구실을 했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 가는 탱자 열매는 으뜸가는 방향제 역할을 도맡았다. 이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새로 사들인 시골집 뒤뜰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 자랑을 하고 있다.
울타리 담장 높이를 낮춰야지 하면서도 오늘내일 미루다가 드디어 날을 잡았다. 전정 가위와 전기톱을 준비하였다. 전기톱은 1년 전 사용한 후 손질을 대충해놓은 상태라 점검이 필요하다. 위험이 뒤따르는 기계이기에 사전 채비가 우선이다. 몸체와 톱날을 연결한 뒤 엔진 오일을 채워 넣고 스위치를 작동시켜 본다. 정상적인 동작을 한다. 안전을 위해 신발과 긴 가죽 장갑까지 갖추고 작업에 임한다. 햇빛 가리개 모자는 작업 속도를 느리게 만든다. 안전이 먼저다. 조심스럽게 전기톱 스위치를 넣어 미루고 미뤘던 담장 낮추기에 들어간다. 작은 가지는 전지가위로 탱자나무 줄기를 자르고, 엄지손가락 두세 개 정도 굵은 나무는 기계의 힘을 빌린다. 성인 키보다 높이 자란 울타리를 가슴 자락만큼 낮춘다.
동이 틀 무렵부터 시작된 전정 작업은 아침 먹고 계속된다. 시작할 때보다 톱 쓰는 요령이 생겨 속도가 빨라지고 높이를 고르게 맞출 수 있다. 가끔 전기톱 안전장치가 틀어져 바르게 하느라 진행이 중단된다. 손에 익으면서 남아있는 울타리 길이도 줄어든다. 자른 가지를 울타리 밖으로 정리하면서 작은 가시는 대수롭지 않게 바지 아랫단을 뚫고 허벅지를 찌르기도 한다. 북 치고 장구 치듯 혼자 하는 일은 다른 이의 손길이 기다려질 뿐이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뒷마당 탱자나무 울타리 허리춤이 잘려 나가고 무성한 잔가지 대신 굵직한 막대기를 꽂아 둔 모습으로 남았다. 옆면 잔가지를 없애 타원형에서 직각으로 뒷정리를 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울타리 밖 산과 들판이 눈앞 가까이 안긴다. 단아하게 이어진 산등성이는 마을을 감싸고 무논에는 농사 준비로 갈아엎은 물웅덩이에 잿빛 두루미가 먹이를 찾는 것인지 연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다. 닫혀 있던 세상을 환하게 가슴으로 쓸어 담는다. 울타리 키 낮추기의 변화가 이렇게 다른 풍경을 누리게 만들었다.
울타리를 핑계 삼아 집 밖으로 다니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겨 왔다. 드나드는 마을 사람들과 짧은 인사 외따로 이야기를 이어 간 적이 없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대문이 높은 담벼락인 양 안과 밖 경계를 지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낯가림을 떨치고 동네 사람들과 왕래를 하면서 그들의 삶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 야트막한 돌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끼리 주고받았던 고향의 어린 시절 정을 떠올린다.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마당 안을 들여다보면서 무 몇 뿌리, 떡 한 조각도 함께 하였다. 콩 한 조각도 나눈다고 했던가. 곳곳에 둘린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란 가시는 삶은 다슬기 살을 빼내는 도구로 쓰이고 뾰족뾰족한 울타리 본래의 역할을 하였다. 노랗게 익은 열매는 방향제 외에 놀이 기구로 쓰였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점차 고향의 정서를 멀리하고 시멘트 블록 담으로 바뀌고, 담장 위에는 가시 박힌 철조망이 얹혔다. 삐걱거리는 나무 대문은 하나둘 사라지고 묵직한 철제 대문이 차지하였다.
울타리 본래의 물리적인 경계는 상징적이기도 하다. 사유 재산 경계와 짐승의 무단 침입을 막는 수단이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면서 예스러운 돌담과 정서가 서린 탱자 울타리는 줄어들었다. 이전의 정취를 뜻밖의 경험으로 다가간다.
전원생활의 멋스러움에 기대를 걸고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삼 년째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지읍에 무작정 왔다. 일주일에 이삼일 그러다 이제는 삼사일씩 지내다 도시로 되돌아간다. 텃밭에 각종 푸성귀 씨를 뿌려 채소가 자라면 시장이 반찬이듯 텃밭이 반찬 가게다. 손가락 두 개 크기만큼 자란 어린 잎사귀를 수확해 먹는 재미에 빠졌다. 여기에 더해 온돌방에 불을 지핀다. 아궁이 참나무 장작 타는 냄새는 누구나 꿈꾸는 황토 방의 포근함으로 다가온다. 더운 계절을 제외하면 언제나 따끈한 아랫목을 데워 주는 불 지피기가 먼저다. 가마솥에 물을 반쯤 채우고 환풍기 스위치를 올려 매캐한 연기를 구름에 닿게 굴뚝 밖으로 몰아낸다.
몇 차례 휘몰아치는 바람이 이어지더니 아침부터 봄비가 내린다. 마을 곳곳에 모종 심는 사람이 이어진다. 이랑 지은 텃밭 공간에 고추와 토마토, 땅콩 모종을 심었다. 내리는 비가 땅을 흠뻑 적셔 주기를 기대한다.
우산을 받치고 십여 분쯤 걸어 낙동강 둔치에 도착하였다.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정비되어 있다. 맨발걷기에 맞춰 산책로 옆에 새 길이 만들어졌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가끔 있을 뿐 자연 속에 파묻혔다. 간혹 물웅덩이를 피해 빗방울이 매달린 싱그러운 보리밭을 맞이한다. 오늘처럼 세상 밖으로 다가가 뭇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부대껴 봐야겠다. 아침저녁으로 찾아 산책하는 길은 눈에 익었다. 세 개의 행정 군이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오일장에는 싱싱한 농산물이 쌓여있다. 전통 시장의 덤이 얹힌다. 나이 든 어르신의 정이 구수한 덕담이 따라온다. 땅과 자연은 받은 대로 돌려주는가 보다. 욕심부리지 않으려 한다. 자연을 닮아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