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농사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된 인물이 있다. 조선 제25대 왕 철종(1831~1864)이다. 그에게는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왕족의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던 시절 때문이다. 강화도에서 비운의 왕이자 서글픈 강화도령, 철종의 흔적을 쫓는다.
보잘것없는 농사꾼에서 조선의 왕이 되다
조선의 왕이 외딴 섬, 강화도에서 농사꾼으로 산 이유를 알려면 철종의 인생을 잠시 들여다봐야 한다. 원범(철종의 초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은언군, 아버지 이광, 큰형 이원경 모두 모함과 반역 사건에 연루되는 불운에 휩싸인다. 형이 옥사를 한 뒤 원범 역시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한 채 왕족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원범에게 한 무리의 행렬이 찾아와 궁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린다. 선대왕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유일한 왕족인 원범이 갑작스레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 왕실에는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권력 싸움이 치열했다.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농사만 지을 줄 알고 정치에 문외한이었던 원범을 왕위에 앉힌 것은, 그를 왕으로 만든 뒤 조정을 마음대로 뒤흔들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농사꾼에서 조선의 임금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이틀. 그때 철종의 나이 19살이었다.
왕이 된 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즉위 3년 후부터 친정을 했지만 실권은 안동 김씨가 쥐고 있었기에 철종의 뜻은 번번이 좌절했다. 심신이 쇠약해진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 6개월 만인 33살에 세상을 뜬다. 가진 것은 없어도 농사짓고 나무 베며 살던 때가 철종에게는 더 행복했던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화도에 남은 강화도령의 거취에 알 수 없는 측은함이 묻어 있는 이유다.
용흥궁,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
용흥궁은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4살부터 19살까지 살던 잠저다. ‘잠저’는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궐 바깥에서 살던 민가를 말한다. 원범은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어 생계를 유지했기에 처음에는 허름한 초가집이었을 것이다.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인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초가였던 집을 허물어 기와집을 짓고 ‘용이 흥하게 되었다’는 뜻을 담아 ‘용흥궁’이라 이름 붙였다. ‘궁’이라고는 하지만 창덕궁의 연경당과 같이 살림집으로 지어 소박한 분위기다. ‘ㄱ’자형 집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집 안에는 철종이 살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궁 위에 조선 한옥 구조물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적용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인 성공회 강화성당 또한 자리한다.
철종외가, 철종의 외삼촌이 살던 집
용흥궁에서 6.6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철종외가는 철종의 외삼촌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철종은 외삼촌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철종외가 건물은 철종 4년(1853)에 지어진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예스럽고 우아한 멋이 묻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ㅡ’ 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낮은 담장으로 분리한 양식이 독특하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둔 ‘H’ 자형 배치였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리면서 지금은 ‘ㄷ’ 자형으로 몸채만 남아 있다. 철종외가는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의 사랑을 주제로 한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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