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락의 세 번째 신탁 시도(27-3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번성케 하는 축복의 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는 백성은 생수의 강가 동산에 심긴 나무와 같이 번성합니다. 열매가 풍성합니다. 아무리 목마르고 메마른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번성하고 형통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27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28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 29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30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27-30)
두 번 실패했는데도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신탁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는 장소가 바뀌면 다른 신탁이 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신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변함이 없으실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세 번째 신탁 시도 역시 앞선 두 번의 신탁 시도와 매우 비슷한 패턴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세 번째 신탁 시도에서부터는 매우 다른 점도 나타납니다. 첫 번쌔 신탁이 자신이 모압까지 오게 된 동기에 대해 자세히 말했고, 두 번째 신탁에서 발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세 번째 신탁에서는 독특하게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예언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신탁이 반복되면서 점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본질을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발락은 새로운 장소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 눈에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이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전 두 번의 경우엔 언급되지않은 것인데, 발락의 마음이 매우 급하고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릅니다. 바알신과 관련된 장소에 가서 여호와의 신탁을 받으려 한다는 점이 매우 이상합니다.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장소도 정관사가 포함된 표현이기에, 그 지역에 있는 특정한 장소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진영이 어떻게 보이는 지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탁을 받는 방식도 약간 변합니다. 일곱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각각 준비하여 제물로 드리는 것은 전과 같지만, 발락과 고관들이 그 제물 곁에 서 있다는 표현은 하지 않고, 발람이 신탁을 받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발람에게 임함(24: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대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으며 나아갈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힘으로는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인생은 거친 광야를 헤치고 달려 나가는 능력의 인생이 됩니다.
1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2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1-2)
발람이 신탁을 받는 장면을 좀 더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번엔 이전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발람은 더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기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도 않았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접신을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과 같이 점술을 쓸 필요가 없어진 셈입니다. 발람은 이제까지 선지자로서 해오던 일상적인 의식을 멈추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발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매우 중대한 차이입니다. 점술이나 복술을 행하는 대신 발람은 자신의 얼굴을 광야로 향해 들어 올려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십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발람의 입에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본문은 명백히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발람은 더욱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향한 참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어떤 방식으로 발람에게 임했는지 정확히 진술하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여러 경우에 하나님의 영이 특정한 인물에게 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힘을 받아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한다든지, 모세와 함께한 장로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거나 혹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내용들이 구약성경 전체에서 심심찮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함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어졌기에 앞으로 서술하게 될 발람의 세 번째 예언과 네 번째 예언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미래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실제 이전 두 번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선택하셨고, 인도하셨는지에 대한 내용, 즉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본문의 예언은 특별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전망을 과거와 현재에서 미래로 확대하게 됩니다.
발람의 세 번째 축복(24:3-9)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태도가 압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의 목적이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조건이나 능력을 보면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지만,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얼마든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도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3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4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5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8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3-9)
세 번째 신탁에서 발람의 성격도 매우 달라집니다. 이전 두 번의 경우 발람은 대단히 소극적으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랴”(23:8)라고 말했고, 두 번째의 경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23:26). 반면에 세 번째의 경우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라고 묘사하며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눈을 감았던 자”라는 표현은 해석상에 난점이 있습니다. 사용된 히브리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눈을 감았던 자’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눈을 뜬 자’ 혹은 ‘눈이 열린 자’로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은 눈을 감았던 자로 묘사하지만, 대부분의 영어번역본은 ‘눈이 열린 자’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발람은 지금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 임함으로 자신의 영적인 눈이 열려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를 보고 선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이 열렸기에 그는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람은 자신을 “엎드려서 눈을 뜬 자”라고도 묘사합니다(4). 여기서 눈을 떴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말씀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엎드렸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여기서 더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발람의 묘사는 경이롭습니다. 이스라엘이 장막 치고 있는 거처들은 정말 아름답고, 그들은 마치 강변에서 자라는 백향목과 같으며, 이스라엘의 물통에는 물이 넘쳐나고, 그 후손은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길 바랐지만, 발람이 보는 이스라엘의 미래는 넘치는 힘과 풍성한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참된 왕이시기에 세상의 왕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는 ‘아각보다 높은’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아각이 등장하는 곳은 사무엘상 15장이기에 연대기적인 난점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아각’은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기보다 당시 나라의 왕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것 같습니다. 굳이 역사적으로 연결하려 한다면, 차라리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쳤던 아말렉을 염두에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행하심으로 들소의 힘과 같이 크신 당신의 능력이 나타났으며, 이를 본 열국이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적국을 삼키고 그 뼈를 꺾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를 힘입어 강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화살로 적을 꿰뚫을 것이고, 수사자와 암사자처럼 웅크리고 일어설 것이며, 그 앞에서 견딜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자들은 넓은 평원 한 가운데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지만 아무도 그 휴식을 방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고 휴식을 취할지라도,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라는 말로 마치는데, 이는 명백하게 발람의 축복을 통해 창세기 12:3을 떠올리게 하는 예언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이기에, 열방이 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것뿐입니다. 발락의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광야와 같은 인생이 에덴 동산과 같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삶이 열매 하나 없을 것 같은데 인생이 강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번성하게 됩니다. 더욱더 인생의 길을 가로막는 대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