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는 영웅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이문열 소설이 있다. 1987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1992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걸작이다. 4.19 전후한 시기 시골 초등학교 교실이 배경이다. 주인공 엄석대는 교묘하고 대담한 부정 행위로 전교1등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이자, 무능한 담임 선생의 신임과 위임을 받아 교실을 지배하는 학급 반장이다. 권력의 기교를 몸에 익힌 교활하고, 치밀한 숨은 권력자의 전형이다. 그런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새담임 선생님에 의해 교묘한 반칙 행각이 드러나면서 ‘영웅’은 일그러지고, 숨죽이던 몇몇 학생들의 저항에 의해 엄석대 왕국은 붕괴된다.
오래 전에 읽은 이 소설이 생각난 것은, 우리가 성취한 민주화와 문명화를 깊이 회의(懷疑)하게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야만(野蠻)의 왕국과 엄석대를 접하기 때문이다. 유병언과 ‘해피아’는 그 중에 하나다. 그런데 최근에 ‘공공단체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을 통해 훨씬 센 엄석대를 알게 되었다. 이 법은 내년 3월11일 지역농협(1012개), 축협(142개), 수협(92개)등 총 1,400개 협동조합의 조합장 동시선거를 관리하기위해 제정되었다. 농협개혁 운동가 최양부(현 바른협동조합실천운동본부 이사장,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의 분석에 따르면, 2012년 말 기준 농축협의 조합원 총수는 대략 245만명(조합당 평균 2,175명), 지역조합 당 총자산은 평균 244억원, 예수금 평균잔액은 1,804억원, 상호금금융 평잔도 1.201억원이 된다. 지역농협의 총자산은 238조원, 이와 별도의 농협중앙회는 108조원이다. 농협임직원수는 중앙회 18,784명, 지역조합 70,225명으로 총 89,089명이다.
농협 빚 없는 농민은 거의 없기에, 채권자인 농협의 농민 및 농촌에 대한 영향력은 불문가지. 한편 지역농협은 8조원의 무이자 지원금과 엄청난 자산과 인력을 운용하는 중앙회(장)에 종속되어 있다. 당연히 민주적 감시, 통제가 허술하면 지역농협(조합장)은 작은 엄석대로, 농협중앙회(장)은 슈퍼 울트라 엄석대가 되게 되어 있다. 실제 조합장만한 알짜 자리가 없다. 억대 연봉에 판공비는 수억 원대다. 중앙회장은 연봉만 12억원이다. 임직원들 처우 역시 재벌기업 못지않다. 그래서 농협중앙회장은 만석군, 조합장은 천석군, 임직원은 백석군, 조합원(농민)은 농협에 땅을 저당잡힌 빈털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지역농협 조합장 중 288명은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중앙회장 선거권자가 된다. 이러니 지역농협도 중앙회도 그 운영 및 선거과정에서 사생결단의 싸움과 부정, 비리가 끊이지 않을 수가 없다. 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도2011년3월31일 ‘제2회 공정사회 추진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에서 역대 기관장이 가장 감옥에 많이 가는 데가 농협중앙회와 국세청”이라고 하였다. 역대 청장 18명 중 이주성, 전군표, 한상률 등 8명이 비리 혐의 등으로 구속 또는 수사를 받았다. 농협중앙회장의 경우 1988년 직선제 도입 이후 선출된 회장이 전원--한호선(88년 3월~94년 3월), 원철희(94년 3월~99년 3월), 정대근(99년 3월~2007년 11월)--구속됐다.(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중앙회장 선거권자를 지역농협 조합장 전원(1,197명)에서 288명으로 줄이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니, 선거부정비리 소지를 줄이지는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그래서 국민과 수백만 조합원의 이목을 집중시켜 좋은 사람도 뽑고, 공명선거도 실현하기 위해 동시선거와 위탁선거법을 만든 것이다. 법안은 . 법안은 2014년 2월 새정연 유대운의원 등 15명이 발의했고, 세월호 참사 직전인4월14일 상임위(안전행정위원회)에 상정됐다. 4월28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서 원안수정 의결되어, 그 다음날 안행위에서 가결되고, 5월2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런데 법안 내용을 보니 다른 공직선거에서는 허용되는 예비선거운동 기간이 사라졌다. 기존에 해오던 합동연설회, 공개토론회도 사라졌다. 심사과정에서 원안에는 있던 언론기관 및 단체의 후보초청 대담, 토론회도 사라졌다. ‘진행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실질적으로 특정 후보자를 위한 선거운동으로 이용될 소지가 높다’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는 영웅’ 농협중앙회와 농림축산식품부 등의 반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회는 정말 못난 담임선생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공직선거와 달리 누가 유권자(조합원)인지도 모르는데, 후보가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도, 유권자가 후보들을 비교, 판단할 기회도 너무 없는 기득권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규칙이 법의 외피를 입게 되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쌍팔년도(1955년)식 법이지만 언론에 거의 보도 되지 않았다. 핵심 이해관계자(출마 예정자)들도 몰랐다. 세월호 참사로 분노와 통곡의 나날을 보낼 때 슬그머니 수정,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판 언론에 대해서 조차 입막음 작업을 해 놨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농협과 위탁 선거법은 한국 민주주의가 왜 어디서 좌초해 버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농협은 조합원(농민)에 의해서도 통제되지도 않고, 농민을 위한 조직도 아니다. 가격 폭락 등에 우는 200~300만 농민들의 눈물도 모른다. 단지 조합장과 임직원들을 위한 신의 직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엄석대처럼 뒷골목, 풀뿌리를 틀어쥐고, 이를 지렛대로 지역구 의원을 움직이고, 국회 상임위를 움직인다.
이 오랜 부조리에 대한 원성과 개혁의 열망이 수십년간 축적되어 드디어 3.11동시선거까지는 끌어냈는데, 막판에 기득권자들의 되치기에 당한 것이다. 왜 이럴까? 세계 보편적 현상인 대의민주주의 자체의 한계도 있다. 상정되는 법안 숫자가 너무 많아 소수(심사소위)가 심사를 주도하기에 로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법안 자체가 대체로 복잡미묘한 현실을 규율하는 것이기에 배경 지식도 많아야 하고, 또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데, 아무리 양심적이고 부지런한 의원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익집단의 꼼수와 농간이 진하게 배여있는 법안이 있다 해도 알 길이 없고, 본회의를 수십개 법안이 무더기 통과되는 통에 안다해도 막을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 문제는 ‘광장’ 권력인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에 대해서는 정치중독이라 할 정도로 관심이 많지만, 인접한 뒷골목 현실과 그 지배 권력에는 관심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정말로 무능한 담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회는 단원제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사안(법안)조차도 적절한 단위를 만들어 위임한다는 개념이 없다. 판단할 능력은 없으면서 권한만 행사하려 한다. 예컨대 위탁 선거법의 경우 핵심 이해관계자인 다수 비기득권자(출마자)와 개혁 운동가들과 전문가들이 주요하게 포함된 자문위원회를 만들지도 활용하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염불(국가시스템 개혁 등) 보다 잿밥이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밀실에 농협중앙회라는 거대한 기득권자만 불러 쌍팔년도(단기4288년=1955년) 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진보와 보수의 최고 가치는 닥치고 정권, 묻지마 승리다. 국가개조의 비전과 전략이 아니다. 권력 그 자체, 아니 권력이 제공하는 젖과 꿀, (상대에게 먹일) 사약과 오랏줄이 목적이다. 이렇게 되면 적의 적은 무조건 친구가 된다. 광장 권력이 모처럼 팔걷어부치고 뒷골목 질서를 잡아보려하면, 뒷골목 기득권과 야당이 손을 잡는다는 얘기다. 51대 49의 정치적 교착 상태이기에 이는 엄청난 개혁 억지력(기득권 방어력)을 발휘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이런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무섭고 답답한 일이다. 한국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개혁은 뒷골목 기득권과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현재의 정치 구도는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개혁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니 비기득권자인 청년과 영세자영업자와 을, 병, 정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너무 줄어든 파이, 기회, 희망과 너무 늘어난 불공평에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대통령의 7시간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보다 수만 배는 더 중요한 것이 1987년 이후 28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8년의 우리 민주주의 겉돌기, 우회, 교착, 좌초가 아닐까? 왜 이렇게 아파트(관리사무소 난방비리 등), 학교, 농협, 지방, 관피아 등 뒷골목(?)에 ‘일그러지지 않는 영웅’들이 많은지? 쌍팔년도식 야만이 판을 치는지? 확신컨대 이를 파고 들어가 보면 광장 권력의 무능, 헛발질, 소모적 갈등의 원인도 밝혀질지 모른다. 뒷골목의 그 무수한 엄석대들은, 어부지리(漁父之利)고사에 나오듯이, 새(보수)와 조개(진보)가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통해 두 놈다 취한 어부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무서운 어부는 우리의 주변국과 경쟁국일 것이다.
-김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