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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산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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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 유 게 시 판 ☜ 스크랩 임진왜란(壬辰倭亂) ?
이제학(백두) 추천 0 조회 96 12.08.26 08: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진왜란(壬辰倭亂)

"들도 산도 섬도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금속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을 하고

자식은 부모찾아 헤메는 비참한 광경은 난생 처음

적국인 전라도라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러한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감옥에 넣어 물을 먹이고,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달군 쇠를 대어 지지는 것은 이 덧없는 세상의 일.

...일본에서 온 포르투갈 인신매매 상인들도 있다.
그들은 본진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댄다."

'아방나찰이라는 지옥귀신이 죄인을 벌주는 듯.'

1597년 6월 일본 큐슈 안양사 주지 게이넨 우스키성 영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조선에 와 8개월 동안 목격한 체험담 <일일기>

이순신 투옥으로 원균이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이조 수군이 1597년 7월 16일 일본 수군에 대패한 것.
이때 전라도는 살육, 방화,고문,인신매매,구타 아수라장 백성들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가져간 일본군 만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한 일본군에게 내린 군령 탓.

"전공의 증명은 수급의 수로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 - 1597년 8월.

이렇게 해서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
전공에 눈먼 일본군이 무고한 백성 코까지 베어낸 것.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이탈리아 노예상인 프란시스코 가르데는 아래와 같이 적어놓고 있다.

"매우 많은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도 경험담에서 이렇게 밝힌다.

"전라도 무안군에는 도적선 600~700척이 수리에 걸쳐 있었으며,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
배마다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는 산과 바다를 흔들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제련공, 농부,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 많게는 10만명.
임진왜란 7년중 정유재란은 '살육전쟁'이자 '노예전쟁'

'그때 충무공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조선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 도요도미 히데요시. 남해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의 야심을 좌절시킨 충무공.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정2품 정헌대부까지 올랐던 충무공. 말도 안되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고문 당한 충무공. 원균과 조정 대신들이 충무공에게 씌운 죄목 4가지.

(1)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2)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
(3)남의 공을 가로채고 나서도 남을 모함한 죄
(4)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한 없이 방자한 죄

결국 충무공은 우의정 정탁 등의 구명운동으로 석방 파직 죄인의 신분으로 무등병 백의종군 길에 나선다.

그 아들을 보려고 멀리 여순에서 아산으로 오던 노모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한고 숨지자 충무공은 탄식을 한다.

"해가 캄캄하게 보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빨리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임진왜란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던 노예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륙 정복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총을 보유한 국가

일본군 15만 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 병력은 600명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임진왜란 당시 21만 4752명 수급을 베었다고 집계.

"해마다 출병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나라를 빈 터로 만들 것이다."-도요도미 히데요시.

당시 조선의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서는 거의 30년간 찻잔도생산되지 않았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에 기여
도공 일부는 노예로서 포르투갈 유럽으로 팔려갔다.

임진왜란후 경지 면적 170만결에서 54만결로 준 조선. 일본군의 살육, 전쟁 후유증 질병, 전염병, 흉년 등등. 농본국가 조선은 총 경지면적이 1/3로 줄어들 정도였다.

그후 300년 동안 경복궁을 재건못할 만큼 피폐.

  성종 때 이조의 집권체계가 완성되고 문화의 완숙기. 연산군 때 부정부패와 사화가 일고 선조때 당파싸움.
권력투쟁이 일고 북방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한 시기.

성종 때 왜에 삼포를 열어 왜구를 달랜다. 삼포란 일본인 왕래와 거주를 허가한 3 포구.
부산포(동래), 내이포(態川),염포(울산) 3 항구.

1407년(태종 7) 부산포와 제포를 개항하고,
1426년(세종 8)에는 또다시 염포까지 개항하여
삼포개항을 단행하고 개항장에는 왜관을 설치한다.

여기에 거류하는 왜인은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일시 체류하는 자와는 구별해 그 숫자를 총60호로 한정 그외 나머지는 돌려보내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했다.

그러나, 점차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의 숫자가 증가 관원과 마찰이 잦아져, 1510년(중종 5)에 삼포의 난
이 왜란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 체결 일본과 국교가 회복되면서 제포만 다시 개항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끊임 없이 약탈과 외침 특히 대마도는 해적 왜구들의 본거지였다.

일본 본토는 호족 영웅의 춘추전국시대 말기 풍신수길이 일본을 평정후 천하통일을 꿈꾼다.
중국을 정복할 야심을 품고 먼저 이조와의 교섭. 풍신수길은 교섭이 결렬되자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이조는 전란에 휘말리고 명나라 구원병이 들어온다. 이순신과 의병들 활약에 힘입어 7년 임진왜란을 마감.

그러나, 장기주둔한 명군 및 日人과 혼인한 이조 여인들. 日本, 明, 남방, 만주로 피난간 유민들과 팔려간 노예들 그 한반도 유민들의 숫자를 이루 헤일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족 또는 조센징에는 노예를 일컫는 뜻이 담겨있다. 과거 일본인은 우리 민족을 경멸할 때 조센징이라 했다. 조선족 또는 조센징은 보이지 않는.. '수난의 역사 흔적'.

'동의보감이 씌여진 시대는 이조 여인의 수난시대.'

왜적은 죄없는 백성까지 산채로 껍질을 벗기는 만행. 이조의 여인들이 은장도로 정절을 지키기 어려웠던 듯. 죽거나 노예가 되지 않으려 정절을 받친 여인도 많았다.

명나라는 본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해 이조로 구원병을 파견했다. 이조는 그 뒷바라지에 고통과 수모가 많았고 사대주의 사상까지 팽배 이조에 조총, 고추, 호박, 토마토가 日本을 거쳐 들어온 시기도 이 무렵.

매운 고추를 이용한 고추장 김치 등 전통음식 맛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담배가 일본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시기도 임진왜란 전후. 하여, 궁녀 의녀 기생이 담배를 피는 풍속도는 이조 후반. 이조에 담배가 들어온 경로는 일본과 청나라를 통해서였다. 서양 문명이 실크 로드와 남방 항로를 통해 유입된 흔적이다.

기녀가 담뱃대를 물고 누워 정사를 벌리는 단원의 풍속도. 이조시대에도 담배는 웃 사람 앞에서 피울 수 없던 기호품. 선비가 의관을 벗어던지고 품위없이 기생에게 달려드는 모습.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이조의 사회 기강이 무너진 흔적.

임진왜란 후 왜는 이조의 각 분야에서 종사하는 장인들을 붙잡아간다. 아울러, 궁궐 사찰 등등에서 각종 문화재 및 국가 보물들을 약탈해간다. 그리고, 이조의 정전인 경복궁을 포함하여 궁궐 역사책 모두를 불태운다.

왜보다 선진국이었던 이조는 이때부터 문화적으로 점점 역전되기 시작.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문화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조시대의 남성우월 유교 관념이 남존여비로 뒤바뀐 전환기도 임진왜란.

옛부터 왜에서는 여성이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 벚꽃처럼 남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스러진다는 일본여성. 일본은 가부장 제도가 엄격하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조는 보이지 않게 그 영향을 받는다. 특히, 한반도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인 지역은 경상도. 남자가 먹고 남은 밥상의 음식만 여자들의 몫이 될 정도이다.

'아직도 주부 혼자 부엌에서 밥먹는 관습.'

일인 거주를 허가했던 삼포에서 비롯된 듯 싶다. 동래의 부산포, 웅천의 제포(진해), 울산의 염포.
울산의 염포는 '삼포의 난' 이후 진을 폐지하였다.

이조 세종 때에는 대마도(쓰시마섬)를 정벌하였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49.5km, 후쿠오카시 138km 거리.
아시아 대륙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창구였다.

대마도 정벌후 한반도와 교류가 중단한 적도 있었지만, 대마도주는 이조 통신사를 에도까지 안내한 적도 있었다. 이조는 부산포를 개항하고 왜인들의 왕래 및 거주를 허락. 왜관(倭館)을 설정했는데 훗날 이조 관원들과 마찰이 잦았다.

한반도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시기는 임진왜란부터 구한말. 병자호란, 2차대전, 6.25 등 잦은 전란으로 가문의 대가 끈길 정도. 이조 후반에 들어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축첩제도가 성행하게 된다.
그 시기를 제외하면 남녀평등 또는 여성 우월사상이 지배적인 한반도.

특히, 신석기시대 모계사회 여성은 남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 아직도 한반도 민족 자녀들에게 어머니는 신격화되어 있는 존재. 한반도 민족의 모성애는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지리산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토속적인 성모 신앙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국가가 형성되고 전쟁이 일어나며 힘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모계사회의 일처 다부제는 일부 다처제로 바뀐다.

풍신수길은 이조, 명, 류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 고산국(高山國;타이완),
루손(呂宋; 필리핀) 천축(天竺; 인도)까지 지배하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당시 군사적 현황을 분석해 보면 일본은 이조와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조에서는 불세출의 영웅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왜군과 싸워 23전 23승 무패 신화로 이조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임진왜란은 중국, 이조, 일본 삼국의 흥망성쇄가 뒤바꾸는 계기.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쇠퇘해 훗날 청나라에게 패권이 넘어간다. 이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성풍속에 커다란 전환기를 맞는다. 그당시 궁중화가 단원 김홍도 및 신윤복의 풍속도는 오늘날 춘화와도 같다.

김홍도의 운우도첩 춘화는 당시 성풍속을 말해준다. 김홍도는 이조시대의 음양사상을 예술로 승격시킨다.
아울러 그당시 성풍속도를 적나라하게 화폭에 남겼다.

운우지정
운우는 신농의 세딸 중 하나인 요희가 환생한 다음의 별칭. 요염한 운우는 처녀귀신이 되어 산중턱의 노란 꽃으로 환생.

옥황상제는 그녀를 가엾이 여겨 운우의 신으로 격상. 낮에는 한조각 구름으로 산과 골짜기를 거닐게 하고
밤이면 쓸쓸한 비로 변해 욕구불만을 달래게 해준다.

하여, 남녀 간 육체적인 사랑을 운우지정이라 한다. 운우지정은 우리나라 산의 지명에도 큰 영향을 준다.
운우지정은 선녀탕, 옥녀탕, 숲속의 요정, 전설의 모체.


한낮에 뜰에서 운우의 정을 나누는 처녀와 총각 이조시대 그림의 뒷배경은 나무절구와 절구공이.
단원 김홍도의 성풍속도는 오늘날 춘화 수준이다.

자식을 기원하며 절에서 백일 불공을 드리던 여인 그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려는 듯 노승과의 성행위
그 광경을 문 틈으로 몰래 엿보고 있는 동자승의 모습.

산속 개울가 넓은바위에서 달빛 아래 벌리는 정사. 그림 같은 산수와 동녀의 정기를 함께 받으려는 듯.
이조시대 사대부 양반들의 풍류로 보여지는 그림이다. 이조 양반들은 기생을 동반해 산수 좋은 곳을 즐겨 행차.

두 선비와 두 기녀가 한방에서 동시에 벌리는 정사 각각 다른 체위로 운우지정을 나누는 적나라한 춘화.
한반도에 춘화가 유입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알려졌다.

원나라 황실과 밀접했던 고려 왕실 귀족층을 통해 유입. 물론 그당시 춘화는 몇몇 특권층 만이 누렸던 외래문화. 원나라 춘화가 고려 귀족을 통해 한반도 성풍속으로 정착.

본격적인 춘화 유입은 청을 통해 외국 문물이 들어온 17∼8세기. 이조 역관들이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며 몰래 갖고 들어온 춘화 그당시 사대부를 포함한 양반 사회에 빠른 속도로 은밀히 퍼졌다.

사대부들이 춘화처럼 기생들과 어울리며 성풍속은 문란해진다. 구한말에 일본 창녀의 유입과 매음이 번창하며 저질 춘화 유입. 음란성이 강조되며 예술적 품격은 떨어지고 퇴폐 향락으로 발전.

남녀간에 운우의 정을 나누는 적나라한 그림이 전해온다. 아울러, 지리산 일대의 풍습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하여, 지리산의 유래를 알려면 임진왜란을 알아야 만 한다.


-임진왜란 약사.-

1592년 4월 13일 : 일본, 21만명의 병력으로 이조 침입
4월 14일 : 부산진 함락
4월 15일 : 동래성 함락. - 본격적으로 일본군 북상 시작.
4월 28일 : 8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던 이일, 신립 충주에서 대패 - 신립 자결
4월 30일 : 선조 몽진
5월 2일 : 일본군 한성 점령
5월 7일 : 이순신, 옥포에서 일본함대 격파
5월 29일 : 사천에서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5월 : 선조, 이덕형을 명으로 보내 구원요청,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화재
6월 13일 : 일본군, 평양 점령
6월 : 선조, 의주에 피난, 명의 지원군 도착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일본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저해권 장악
7월말, : 곽재우가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7월, : 묘향산의 휴정이 전국의 승병을 일으킴
7월, : 회령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일본군에게 잡힘
8월, : 금산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전사
8월, : 명나라 대표 심유경이 종전을 위한 회담시작
9월, : 이순신, 부산포에서 일본수군 대파
10월, : 제1차 진주대첩
12월, : 이여송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옴

1593년 1월, : 의병, 관군, 명군이 연합하여 평양성 탈환
2월, : 행주대첩, 함경, 평안도의 왜군 한성으로 퇴각
3월, : 심유경 일본과의 강화회담 재개
6월, : 제2차 진주성싸움
8월, : 일본군 철수 시작, 명군 철군
10월, : 한성으로 선조 돌아옴

1594년 1월, : 전국에 대기근 발생
2월, : 훈련도감 설치
3월, : 당항포의 일본수군 격파

1596년 7월, : 이몽학이 난을 일으킴
8월, : 김덕령 사망
9월, :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과의 화의조건에 반발하여 조선 재침을 명함

1597년 1월, : 정유재란 발발
2월, : 이순신 무고로 투옥
7월, : 원균이 지휘하던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하고 원균사망, 이순신 재임용
9월, : 명량해전
10월, : 일본군 남해안으로 퇴각

1598년 9월, :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일본 철군 시작
11월, : 노량해전. 일본 수군 대파, 이순신 전사.


정유재란은 일본이 호남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전란.
임진왜란의 패인이 호남 의병 때문이라 판단한 일본
지리산 일대 호남지역에 보복하 듯 무자비하게 찬탈.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부녀자들을 겁탈한다.
왜인들의 만행을 경계하려고 마을마다 세웠던 장승들.
문란한 성풍속과 성병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문화.

8도 장승의 공격을 받아 오장육부가 썩어 죽는 변강쇠.
외지인이 마을 부녀자를 겁탈하면 장승에게 죽는다는 뜻.
왜인들은 산 사람의 껍질을 벗겨 장승에 거는 만행도 자행.

왜인들은 칼로 목숨을 위협해 이조 부녀자들을 유린.
이조의 성풍속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문란해지기 시작.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간에 걸친 기나긴 전쟁.
결국, 충무공은 임진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목숨을 잃는다.
만약 충무공이 전사를 하지 않았다면 숙청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의 격전장은 거의 이조 정권의 유배지.
육지와 단절된 남해의 섬들은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
당파싸움 잦았던 이조 후기에 제주도 남해 고도는 유배 적지.

행정구역상으로 추자도는 북제주군에 속한다.
현재 추자도에서 제주도 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영암, 완도군에 딸린 섬이라 호남 말씨.

1946년 북제주군 편입, 1831년 제주목, 1891년 완도군
추자도 뱃길은 목포로 열려져 있기에 호남 문화권이다.

추자도는 옛부터 육지와 제주도의 징검다리였다
고려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려 들른 곳.
제주도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머물렀던 고장이다.

추자도는 영암 무안 나주 진도 전남 해안의 뱃길.
북제주 애월 조천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자 유배지.

추자군도는 해적 및 왜구들이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추자도에 딸린 섬들이 42개나 되고 청산도는 참치어장.
즉,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청산도, 나로도, 추자도 남쪽.

추자도 최남단 관탈도는 귀양객이 갓을 벗었다는 섬.
관탈도에서 뱃길로 불과 30분이면 제주항에 도달한다.

완도-청산도-추자도-관탈도-제주도가 일렬로 징검다리
해남 땅끝마을 앞 섬이 보길도, 좌우 섬이 완도와 진도
경치는 아름다워 보여도 생활환경오로는 몹시 열악한 편.

추자군도의 최대 문제는 역시 물이다.
횡견도 같은 섬에서는 빗물을 받아 쓴다.
추자도에서는 바닷물로 만든 물을 먹고 산다.
그래서 집집마다 거대한 물탱크 한두 개씩 있다.

척박한 농토, 육지와 고립된 외딴 섬의 열악한 생활환경.
해적에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거나 심한 풍랑에 시달리기.
가뭄이 들면 식수조차 귀하고 흉년이 들면 굶어죽기도 십상.

'제주도에서 한시간 거리의 추자도는 악명 높은 유배지'

진도와 완도 역시 이조 후반에 악명 높기로 알려진 유배지.
진도는 붓을 다루던 문인들 귀양지라 지금도 문인들이 많다.
완도는 산이 많고 척박해 칼 쓰는 힘센 무인들을 귀양보냈다.

'완도는 이조정권에 항거할 만한 무인들의 귀양지.'

완도는 신라시대 장보고의 거점이자 역사적으로 해적들의 소굴.
완도는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을 장악할 만한 전략적인 요충지.
이조시대에 공도령을 내려 완도 주민을 강제로 이주한 곳이 김제.

하여, 김제를 비롯 여수 목포는 이조시대부터 무인의 고장.
국란에 처해 있을때마다 나라를 구한 의인이 많았던 전라도.
역사적으론 민중 봉기가 많았기에 핍박 받은 고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막바지 즈음에 이조 왕실은 정권 유지에 급급.
임진왜란 공신들을 푸대접하고 의병장들을 모함하기 일쑤.
공신들을 숙청한 시기라 이순신도 권력에 환멸을 느꼈을 듯.

전라도는 임진왜란 당시 왕실 통치권이 영향력을 못미친 자치지역.
이조 왕실은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보다 이순신이 두려웠던 존재.
이순신이 반기를 든다면 무능한 이조왕실을 뒤엎을 수도 있었기 때문.

이순신 함대와는 일본 풍신수길도 싸우지 말라고 했을 정도.
명나라 황실에서도 천하무적 이순신 함대를 높이 평가할 정도.
하물며 이조 왕실은 백성들이 따르는 이순신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

당시 전라도 백성들은 무능한 왕실보다 충무공을 더욱 따랐다.
그 탓에 충무공은 왜적과의 전쟁보다 조정 당파싸움에 시달렸다.
충무공은 일본과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당부했던 충무공.
충무공은 전사한 걸까? 숙청을 피해 미리 은둔한걸까?
그의 죽음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충무공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주역은 거북선일까?
그당시 거북선은 불과 몇척이고 이순신의 주력함대는 판옥선.
일본의 안택선(층루선)과는 근본적으로 그 구조 형태가 달랐다.

안택선은 바닥이 뾰족해 파도를 헤쳐나가기에 적당한 서양식.
판옥선은 바닥이 둘글어 강에서 유리하지만, 바다에서는 불리.
이순신은 기존 판옥선을 성처럼 크게 개조하고 현자총통을 장착.

대장군전(철로 만든 큰 화살)을 넣고 발사하여 적의 배를 격침.
크고 높은 판옥선에서 화포를 쏘아 장거리에서 명중율을 높였다.
왜선은 충무공과 미처 싸워보지도 못하고 바다에 수몰되었던 듯.

또한, 일본 수군은 성벽같은 판옥선에 오르기조차도 어려웠단다.
마치 성벽 아래 일본 수군이 성벽 위의 충무공 수군과 싸우는 형국.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신화를 일군 이순신은 탁월한 전술 전략가.

1598년 철군하는 왜군과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그당시 기록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첫째, 노량해전에서 갑옷을 벗고 진두지휘 했다는 기록.
그렇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충무공의 유언.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살아 돌아와 16년간 은둔 생활 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아들, 조카, 몸종 외 없다는 점.
나라에서 국장을 치룬 무덤이 16년 뒤 다른 곳으로 이장된 점.

지금부터 충무공 죽음에 관한 사실을 좀 더 알아보자.
충무공의 전사 기록을 보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고금도로 영구를 이동해, 12월 10일 아산으로 옮겨진다.

1598 년 2월 11일 장례를 치루고 15년 후에 묘지를 이장
1614년은 이순신이 만약 생존해 있었다면 70세가 되는 해.
만약 은둔 했었다면 그때까지 살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두 영웅 이순신과 권율.
모두 임진왜란을 이미 예측한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
프로 바둑기사인 유시훈은 유성룡의 14 대 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던 이순신.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이조왕실은 그가 두려웠다.
임진왜란 공신들은 전란이 끝날 무렵에 선별하여 숙청한다.
이조왕실과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고 굴복했던 공신들만 무사.

임진왜란에서 이조가 승리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 명나라의 지원, 의병활동 등등.
그리고, 임진왜란 긴 전쟁에 지쳐 이조에 귀화한 '항왜'
명분없는 기나 긴 전쟁에 회의를 느낀 왜군들이 많았다.

이조의 투항왜군 우대정책으로 항왜 왜군은 약 1만 명.
반면 이조 백성이면서도 왜에 협력한 자들은 순왜(順倭).

화승총과 화약제조기술, 검술과 포술 등을 가르치고,
왜군에 관한 정보제공 및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
선조는 눈부신 활약을 한 항왜에게 벼슬과 함께 은 포상

'사야카는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한반도를 침략.
하지만, 사야카는 한 차례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귀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 그가 쓴 귀순 이유.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해 본의 아니게 선봉장.
인의의 나라를 공격할 수 없어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저의 소원은 이 나라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사야카는 귀화후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
그 결과 권율과 어사 한준겸 주청으로 차관급 자헌대부
1600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우록동에 거처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사야카는 일본인으로 태어나 22년을 살았으며,
김충선이 되어 50년을 살다가 1642년 72세 사망.
인조는 그에게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헌대부를 하사.


<모하당문집>에 실린 김충선의 한시 <남풍유감>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조상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구름을 보며 고향 생각하고
봄풀을 봐도 고향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땐들 없겠는가

일가친척은 살아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하직했을까
고향산천 그리움 끊일 날 없도다

나라엔 불충이요 집에는 불행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무의미한 전쟁을 반대하였던 평화주의자 사야카.
육순 노구를 이끌고 여진족과 맞서 싸운 김충선.

낳고 길러준 부모와 나라를 버리고 적국의 장수로
동족을 무찌르는 일에 앞장서야 했던 사야카의 번뇌

7년 전쟁 후 선조는 덕천가강 국서에 대한 회답
포로를 귀환시키려고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한다.
이로부터 1811년 순조 11년까지 12번 통신사 파견

특히 1682년 숙종 8년에 파견된 제7회 통신사 기록.

정사 윤지완을 대표로 475명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 지은이들은 제7회 통신사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7회 통신사는 의사만이 아니라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
한시 잘하는 사람, 서예나 그림에 능통한 사람, 악기 명인,
춤의 명수 등 문화교류를 위한 인재가 선발된 문화사절단."

일본의 요청으로 특별 파견된 사람들은 의원·영원·마상재인
이들은 오늘날 의사·화가, 곡마단의 기예단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경로는 한양에서 쓰시마, 쓰시마에서 경도, 경도에서 동경

일본에서는 통신사 일행의 짐을 운반하기 위해 총인원 30 만명
8만 마리 말이 동원되었고 한양에서 에도까지 6~9달 가량 걸렸다.
통신사의 여정은 화려했지만 매우 힘든 여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평화를 원했던 쇼군들은 통신사를 극진히 환대했다.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막부가 쓴 돈은 100만 냥
그당시 막부의 연간 예산은 78만 냥 정도였다 하니 융숭한 대접.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 1876년 강화도 조약,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한합방으로 구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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