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한의 세상을 바꾼 전략 · 1 - 25 回 |
25. ‘카이사르 암살’은 로마 공화정 종식시킨 전형적 교각살우
최근 행정자치부 장관의 선거 관련 건배사를 두고 야당이 탄핵소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인, 1969년 9월 6일에도 탄핵소추 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은 점, 탄핵심판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은 점, 대통령과 정부의 진퇴 문제를 국무회의 의결 없이 국민투표에 붙인 점 등이 위헌이라는 사유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야당이 제출한 것이다. 이 탄핵소추안은 3선 개헌이라는 큰 변화에 묻혀 흐지부지됐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사례는 현재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것이 유일하다. 2004년 3월 야3당이 국회 경호권을 발동해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던 것이다. 통과를 막기에는 의석 수가 부족해 의사당 단상을 점거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에 망연자실했다. 이와 달리 야당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했다고 생각했고,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6대 국회 만세” 등을 외치면서 환호했다.
후폭풍 거셌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
그러나 한 달 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3당은 많은 의석을 잃었다. 특히 탄핵소추를 주도한 62석의 새천년민주당은 9석만을 얻어 몰락했다. 이에 비해 열린우리당은 과반의 의석을 획득했다. 또 한 달 후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노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2004년 1월부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대통령 탄핵 가능성을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증대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노 대통령은 선관위 결정을 존중하지만 동의하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야당은 노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대응했다.
이런 상황 전개는 대통령과 야당에 의한 일련의 선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야당)탄핵 추진 가능 언급→(대통령)여당 지지 호소→(야당)대통령 사과 요구→ (대통령)사과 거부→(야당)탄핵소추안 발의→ (대통령)강경 발언→ (야당)탄핵소추안 가결→(유권자)여당 선거승리 →(헌법재판소)탄핵심판 기각.
이런 다단계 선택 상황에서는 최종선택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따져보면 최선의 전략을 계산할 수 있다. 즉 국민 다수가 탄핵에 찬성할 때의 헌법재판소 선택, 그리고 국민 다수가 반대했을 때의 헌법재판소 선택을 먼저 추정해야 한다. 당시 대통령 파면 결정을 선고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법리적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국민 다수가 탄핵에 반대한다면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할 것으로 보였다.
국민여론은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비율이 찬성 비율보다 높았다. 반면 대통령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불필요하다는 비율보다 높았다. 대통령 사과가 필요하지만 탄핵에는 반대한다는 것이 다수의 생각이었다. 야3당은 국민 다수가 탄핵소추에 반발하고 또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기각하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이 점차 늘어나고 또 헌법재판소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집단 내에서만 소통하고 집단 밖과의 소통을 소홀히 할 때 오판을 범하기 쉽다. 이는 같은 집단 내에서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집단사고(groupthink)에 의한 오판으로 불린다. 그러다 보니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야당 의원들은 불안한 기색 없이 만세를 불렀고, 의장석 확보 작전이 기발했느니 또 점괘로 표결 날짜를 잘 잡았느니 하는 논공행상까지 나왔다.
완력을 동원한 야당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무모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야당은 당시 소수 의석을 가진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정상적인 국회운영이 되지 않음을 보여줘 곧 실시될 총선에서 의석 확보를 추구했어야 했다.
탄핵 추진 세력의 어설픈 전략의 결과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노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탄핵소추를 유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사과를 거부하면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이다. 설사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고 하더라도 그 함정은 상대에게 숨겨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자기 패만 알고 남이 가진 패를 모르면서 진행된 게임이 아니었다. 상대방 패를 서로가 다 잘 아는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의 정략에 당했다는 주장은 스스로 상황판단에 문제가 있었다고 자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노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통과 직후 “지금 이 과정은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한 진통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괴롭기만 한 소모적 진통은 아닐 것” 이라고 발언했다. 노 대통령은 야당의 탄핵소추가 상식적으로 부당하다고는 생각했을 것이고, 또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기각할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국회 다수 의석을 확보해 국정을 운영하고 싶지만, 탄핵 후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것이라곤 확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 대통령 탄핵소추는 노 대통령의 계산된 전략이라기보다 탄핵 추진세력의 어설픈 전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야당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결국 ‘소를 죽게 만들 쇠뿔 바로잡기’, 즉 교각살우(矯角殺牛)였고, 노 대통령에게는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당장의 어려움’, 즉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스포츠든 게임이든 사업이든 정치든, 자신이 잘해서 이기는 경우보다 상대가 실수해서 이기는 경우가 더 많다.
음식점에 몇 명의 공공기관장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관권선거를 조장하고 추진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대화가 오고갔다.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측에서 이 대화를 도청해 공개하였다. 공개 직후 김영삼(YS) 후보의 당선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YS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실제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그 사건이 오히려 YS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나오게 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관권선거 대화의 공개는 정 후보에게 교각살우이었고 YS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44년에 발생한 카이사르 암살도 마찬가지였다. 암살 직후 원로원 공화파들은 거사 성공에 흥분했고, 공화국을 수호했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민의 반발과 카이사르파의 결집으로 수세에 몰려 모두 죽임을 당했거나 자살했다. 카이사르 암살은 로마 공화정을 바로잡으려다가 결과적으로 공화정을 종식시킨 전형적인 교각살우의 예다. 반면에 카이사르 상속자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전화위복이 돼, 그는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민주 사회에서 성공의 관건은 대중의 마음을 읽는 데에 있다. 대중 마음 읽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기작을 만든 제작팀이 연이어 히트작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대중예술 전문가들이 기획했다는 영화 · 드라마 · 음악 가운데 대중의 반응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해 흥행에 실패한 건은 허다하다. 쪽박이나 리스크를 피하는 공식은 있어도 대박 혹은 흥행을 보장하는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적 시장 조사를 거친 후에 출시한 신제품이 실제 시장에서 실패한 사례도 많다. 전문적 조사와 예측은 성공 가능성을 높일 뿐이지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될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지 모를 때에는 차라리 진정성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교각살우의 가능성을 낮추고 전화위복의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43호 | 201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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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8월 30일 미군이 국방부에 설치된 미·소 핫라인 텔레프린터를 테스트하고 있다. [AP] |
25. 미 · 소, 쿠바 위기 후 ‘K-K 라인’ … 지금의 남북도 ‘K-K 라인’ 절실
“민첩한 갈색 여우는 나태한 개 위로 점프했다 (The quick brown fox jumped over the lazy dog’s back) 1234567890.”
지금으로부터 꼭 52년 전인 1963년 8월 30일 핫라인(긴급직통라인)으로 소련정부에 보낸 미국정부의 메시지다. 기존 팬그램(A부터 Z까지 모든 알파벳이 포함된 문장) 에 아라비아숫자와 아포스트로피(’)를 더해 만든 문구였다.
이 메시지를 보내기 10개월 전 미국은 쿠바행 소련 선박을 해상봉쇄하면서 소련과 전면전까지 염두에 둔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다. 인류가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가장 크게 체감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다. 당시 1분1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미국과 소련이 상대국의 공식 외교문서를 받는 데에 반나절이나 걸렸다. 이처럼 늘어진 연락시스템으로는 위기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는다. 이에 미국과 소련 정부는 위기관리 방안으로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63년 6월에 합의하고 2개월 후 개통했다.
핫라인이 모든 글자들을 제대로 타이핑하고 프린트하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개통 날 여우와 개가 등장하는 팬그램을 보냈다. 이런 미국의 테스트 메시지에 소련은 모스크바 석양에 관한 서정적 러시아어 글로 답변했다.
적대세력 간 의사소통에 긴요한 핫라인
미 · 소 간 핫라인의 공식 명칭은 직통연결(direct communications link·DCL)이었고, 미국의 관련 부서에서는 MOLINK (Moscow-link)라 불렀다. 미국 대중에게는 레드폰으로 불렸는데, 그러다 보니 다이얼도 없고 버튼도 없는 붉은 전화기가 영화 등 여러 매체에서 미 · 소 간 핫라인 소품으로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국가정상 간에 아무런 다이얼링 없이 수화기만 들면 바로 통화할 수 있는 붉은 전화기는 미 아니라 우방국 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정상 간 통화는 특정 국제전화번호로 걸어서 이뤄진다.
52년 전 개통된 미·소 핫라인은 텔레타이프였다. 미국은 영문 텔레프린터 4대를 모스크바에 보냈고 또 소련은 러시아어 텔레프린터 4대를 워싱턴에 보냈다. 미국은 모스크바에 설치된 영문 텔레프린터로, 소련은 워싱턴에 설치된 러시아어 텔레프린터로 각각 메시지를 보냈다. 1980년대에 미·소 간 핫라인의 방식은 텔레타이프에서 팩시밀리로 교체됐고, 2000년대 와서는 e메일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미 · 소 간 핫라인은 백악관과 크렘린을 직접 연결하는 선이 아니었다. 대서양과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유선이다 보니 중간에 지하공사 등으로 케이블이 단절되는 사고도 종종 발생했다.
이런저런 한계가 있지만 미·소 간 핫라인은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적대세력 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전략적 아이디어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핫라인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이다. 노벨상위원회의 공식 홈페이지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토머스 쉘링이 핫라인 설치에 기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게임이론가 아이디어 반영된 직통 채널
당시 케네디 정부는 게임이론가 등 여러 전략가들을 중용했고 따라서 토머스 쉘링과 같은 게임이론가들의 아이디어가 미국의 정책에 많이 반영됐다. 핫라인이라는 직통 채널도 그런 전략적 효과를 고려하여 추진됐다.
전쟁의 결과는 누가 먼저 공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상대 공격을 받은 후에 반격할 때의 파괴력은 동일한 군사력으로 선제적으로 기습공격할 때의 파괴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가 도발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상대의 도발 전에 선제공격해 상대를 미리 초토화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방안이다. 이를 예방전쟁이라 부른다.
선제공격을 하더라도 상대가 반격해 전쟁 자체를 피할 수 없고 또 핵전쟁처럼 전쟁 승리가 평화보다 못할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상대가 도발할 걸로 오해하게 되면 먼저 공격해서라도 전쟁 피해를 줄이려 한다. 핫라인은 이런 우발적인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미 · 소 간 핫라인의 첫 공식 교신은 이른바 6일전쟁 때였다. 67년 6월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일으켰다. 정말 아랍국가들이 전쟁을 먼저 시작하려고 했는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하여튼 이 6일전쟁 때문에 소련 흑해함대와 미국 제6함대가 지중해로 출동했다. 이때 미·소 간 핫라인이 가동됐다.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은 미국대통령 린든 존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전투행위가 즉각 중지되도록 미?소가 행동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6일전쟁은 더 이상 확전 없이 이름 그대로 6일 만에 종식됐다.
| 1971년 남한측 적십자사 최동일씨가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간 직통전화로 첫 통화를 하고있다. [중앙포토] |
적대적이거나 대등한 관계에서 더욱 필요
핫라인이 더욱 필요한 관계가 있다. 먼저 적대적인 관계에서다. 신뢰가 쌓여 오해도 없고 또 오해가 있다고 해도 바로 적대적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관계에서는 굳이 핫라인이 필요 없다. 이와 달리 오해가 심각해 바로 적대적 행동을 취하기 쉬운 관계에서는 핫라인이 큰 의미를 갖는다.
둘째,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에서다. 힘의 우열이 분명한 관계에서는 우발적인 전쟁 가능성이 크지 않다. 더구나 선제공격이냐 반격이냐는 것이 전쟁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에 비해 힘이 비슷할 때에는 공격·반격 시점의 미세한 차이가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 따라서 핫라인의 효능은 경쟁국 간에서 빛을 발한다.
셋째, 인접국 간의 관계에서다. 한반도처럼 야포만으로도 주요 시설들이 사정거리 내에 있을 때에는 기습 여부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기습 가능성뿐 아니라 기습을 제거하려는 예방공격 가능성 또한 크다. 따라서 핫라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남북한 관계는 이런 핫라인을 필요로 한다. 특히 일방이 속전속결의 군사 독트린을 채택할수록 타방에 의한 예방전쟁의 가능성 또한 작지 않기 때문이다. 7
1년 9월 20일 남북한 적십자회담에서 남북 직통 전화 개설에 합의했다. 9월 22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남측의 자유의 집과 북측의 판문각을 연결하는 2개 회선이 개통됐다. 72년에도 여러 남북 간 접촉으로 전화선이 운영되기 시작했다가 76년 판문점 도끼사건으로 단절되는 등 남북 직통 전화와 함정 간 국제상선 주파수 연결은 개통과 단절을 반복하고 있다. 2005년에는 남북 간 광케이블이 연결돼 현재까지 개성공단의 주요 전화선으로 운영 중이다.
목함지뢰 · 연천포격 사태, 핫라인 없어 악화
최근 DMZ(비무장지대) 남측구간에 매설된 북한 지뢰가 폭발해 우리 장병이 부상당한 사건을 시작으로 한 대북 확성기 방송 개시, 연천 포격 교환, 준전시사태 선포, 전력 전진 배치 등 일련의 사태들은 남북 간 핫라인이 없어 악화한 측면이 크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실무진 간의 연결을 단절시키지 않고 자국 메시지를 상대국에 늘 전달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접촉 여부를 전략적 선택지로 삼고 행동하고 있다. 벼랑끝 전략에서 자주 나오는 전략이다. 위기는 실무진 간 접촉 유무와 관계없이 고위직 간 접촉이 있어야 덜 악화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 실무적 차원의 남북 직통연결 외에 핫라인 설치가 필요하다. 52년 전 존 F 케네디(Kennedy) 미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Khrushchev) 소련 총리가 개설한 핫라인은 그들의 이름 이니셜을 따서 K-K라인으로도 불린다. 이참에 두 코리아의 이니셜을 딴 진짜 K-K라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반도 K-K라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연결이 복잡하지 않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해 잦은 접촉을 갖는 외국의 우방국 정상 간 국제전화처럼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한반도 K-K라인이 청와대 대통령집무실과 북한 최고지도자 집무실 간 직통 전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핫라인은 영화 장면으로 매력적이지만 위기관리가 그렇게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백악관과 크렘린이 바로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남북 두 지도자 집무실 간 직통 연결은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
북한정권의 절대적 호전성을 믿는 사람들은 남북 간 핫라인 설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핫라인은 변명 등으로 시간을 벌어 상대의 대비나 반격을 늦추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2년 전 당시 야당이었던 미 공화당은 핫라인을 뮌헨회담에 비유했다. 뮌헨회담은 주변국들이 히틀러에게 끌려다니다가 결과적으로 오히려 히틀러에게 전쟁 동기를 부여한 만남으로 평가되는 의사소통이다.
또 인권 등 여러 측면에서 북한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남북 간 핫라인 개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을 실제로 통치하는 북한 지도자는 그 정통성과 민주성에 관계없이 매우 중요한 협상파트너다.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발이 방지되는 것은 아니다.
일방이 전쟁을 원할 때는 별 의미 없어
도발 원점 타격은 도발 방지에 효과적이다. 전략적 그림에서 도발 원점이란 화력이 발사된 총구보다 도발 명령을 내린 지휘부다. 도발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예 도발의 뿌리를 선제적으로 뽑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상대가 그렇게 판단하지 않도록 신중한 행동과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일방이 진정 전쟁을 원한다면 핫라인이 별 의미가 없지만, 쌍방이 전쟁을 원치 않을 때에는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에 전쟁이 나게 되면 전투는 북한정권을 종식시킬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정권은 전쟁을 원치 않을 것이다. 북한에 비해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남한으로서도 전쟁으로 잃을 게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전쟁을 원할 리 없음은 물론이다.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쌍방이 원치 않는 결과가 도래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핫라인이 필요하다.
냉전시대 쿠바 미사일 위기 후 설치된 미·소 간 핫라인을 벤치마킹해보자. 남북 간 핫라인이 개통되면 첫 메시지는 테스트 문장이 될 것이다. 52년 전 미 · 소 간 핫라인 테스트 메시지로 등장한 팬그램은 오늘날 MS 윈도우에서 자판 및 폰트의 테스트 문구로도 사용되고 있다. 단어 ‘큰’을 추가하면 ㄱ부터 ㅎ까지한글 기본 자음이 다 들어간 팬그램이 된다. 이를 남북 간 핫라인의 테스트 메시지로 보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민첩한 갈색 여우는 나태한 큰 개 위로 점프했다 1234567890.”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42호 | 201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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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24. 클린턴, 주어 없는 사과로 성추문 덮어 |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998년 8월17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 대해 사과하기에 앞서 백악관 맵룸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
24. 잘못의 경중보다 사과의 진정성에 대중은 더 민감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요즘 정치 · 경제 ·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지도층 인사가 사과를 요구받거나 직접 사과하는 모습이 꽤 많아졌다. 잘못이 많아졌다기보다는 잘 드러나는 편이고 또 사과하지 않으면 더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7년 전인 1998년 8월 17일 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백악관 인턴이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 대해 4분짜리 사과연설을 했다. 클린턴 연설은 어설픈 해명으로 새로운 위기를 불러오지 않고 스캔들을 마무리 국면으로 전환시켰다고 평가된다.
연설 직후 미국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직 사임이나 탄핵에 찬성한 비율은 소수인 4분의 1에 불과했다. 다수는 클린턴이 대통령직을 사임해서는 안 되고, 이제 르윈스키 스캔들은 마무리됐으며, 대통령 사생활을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린턴 연설은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율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았다.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율은 연설 이전과 마찬가지로 60% 정도를 유지했다. 사실 르윈스키 스캔들은 발생 때부터 클린턴 직무수행 지지율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물론 연설이 클린턴의 결백을 확신시켜 주지는 못했다. 클린턴이 대배심원단에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한 비율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자신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클린턴의 주장에 대해서도 믿는다는 사람보다 믿지 못한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클린턴이 법을 위반했다고 생각한 비율은 대략 절반에 달했다. 심지어 클린턴을 좋아한다는 미국인 비율은 연설 직후 더 떨어졌다.
클린턴, 주어 없는 사과로 성추문 덮어
클린턴 연설을 계기로 스캔들이 종식돼야 한다는 다수 미국인들 가운데에는 클린턴을 지속적으로 좋아한 사람뿐 아니라 클린턴을 나쁘게 보더라도 아이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다룰 주제가 아니거나 너무 오래 다룬 지겨운 이슈라고 생각한 사람도 포함됐다. 그런 점에서 클린턴 연설은 정서적,윤리적 측면에서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했더라도 정치적, 법률적 측면에서는 르윈스키 스캔들에 종지부를 찍는 데 기여했다.
4분짜리 연설에서 클린턴은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하고 자기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먼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는 1998년 1월 해명이 “법적으론 정확한 진술이었다” 고 주장했다. 클린턴의 1월 해명은 여러 문헌에서 거짓말에 수반되는 코 만지기 행동 사례로 소개될 정도로 거짓말이었다. 8월 연설에서 클린턴은 자신의 1월 발언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에 “사람들을 오도했다” 거나 “그릇된 인상을 줬다” 고 표현했다. 또 위증이나 증거은닉 같은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클린턴의 사과문에는 주어가 없었다. “실수” 나 “잘못됐다”고 표현했지, “미안하다” 혹은 “사죄한다” 는 말은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고 항변했다. 특히 정치적 의도가 담긴 “너무 오랜” 조사로 “너무 많은 무고한 사람들” 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호소했다. 클린턴 사과문은 다음의 내용으로 맺었다. 미국에는 “잡아야할 기회”, “해결해야할 문제”, “당면한 안보문제”가 있으니 “과거 7개월의 구경거리에서 벗어나서” “21세기 미국에 다가올 도전과 미래에 다시 집중하자.”
클린턴 연설문은 대체로 사과문의 정석을 따르고 있다. 가족과 주변사람이 큰 피해를 입고 있고 국가의 당면과제를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 옹호가 빌 클린턴의 정치적 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됐다.
잘못 숨기지 못해 하는 사과는 역효과
| 2015년 여름의 사과 모습. 1. 메르스 사태에 대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과. 2 조부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한 홍영표 의원. 3 일제 만행에 대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의 사과. |
사과문은 과거 행위의 사과, 현재 상황의 수습, 미래 재발의 방지, 무고한 피해, 다른 당면 위기 등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될 때 잘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최근 메르스 사태와 관련한 여러 발언 가운데 반응이 좋았던 사과는 자신의 무한한 책임을 강조했고 또 책임은 없지만 헌신적으로 수습하고 있는 의료진에 대한 격려를 부탁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투로 남 탓을 한 발언과 달리 우호적 반응을 얻었다.
최근 서대문형무소에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총리가 보여준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 그리고 친일파 후손 국회의원의 홈페이지 사과문도 진정성을 보여줬다.
늘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과가 진솔한가 하는 점이다. 잡아떼는 모습보다 오히려 과잉 사과가 더 큰 동정을 받는다. 잘못을 반성해서 사과하는 모습이어야지, 잘못을 숨기지 못해 하는 사과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상대가 사과의 진정성을 느끼려면 사과문에 ‘~라면(if)’, ‘~지만(but)’ 등의 유보적인 단어가 없어야 한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사과하라고 하니 사과한다는 메시지는 차라리 사과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진정성을 의심받을 말과 행동은 조심해야 한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단어 하나 표정 하나 모두 생생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보는 정치인에게 사과는 투자
잘못의 경중(輕重)보다 사과의 진정성에 따라 대중은 반응하기도 한다. 특히 대중이 잘못의 경중을 판단하지 못할 때에는 큰 잘못보다 작은 잘못이 결과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큰 잘못을 저지른 측은 진지하게 사과하는 반면에 작은 잘못을 저지른 측은 진지한 사과를 생략하여, 대중은 사과한 큰 잘못보다 사과하지 않은 작은 잘못을 응징하기 쉽기 때문이다.
얼마 전 표절 의혹의 유명 작가는 특정 언론매체에 통해 사과의 변을 밝혔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봤다. 공개석상에서 여러 곤란한 질문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런 방식을 선택했겠지만 인터뷰방식부터 비판받았고 남 일인 것처럼 말하는 ‘유체이탈화법’의 ‘주어 없는 사과’였다고 혹평 받았다.
사실 자신의 잘못 인정은 경제인이나 문화인보다 정치인이 더 어렵다. 정치인의 사과 내용은 자기 주변이나 집단의 잘못일 때가 많고 자신의 행동일 때는 드물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당장 공직에서 사임하라는 요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고 차차기를 노리는 정치인이라면 사과는 곧 새로운 자리를 위한 투자가 될 수 있겠지만, 당장의 자리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이라면 사과는 곧 사임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단임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어렵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라는 팝송 제목처럼 사과는 정치지도자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 팝송 가사처럼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필요로 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었으면” 하는 사람은 미안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17년 전 연설에서 클린턴의 얼굴 표정과 말투는 사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만일 위증이나 매수 등의 잘못을 인정했다면 탄핵됐을 것이다. 클린턴은 법적 처벌을 감수하면서 무조건 사과하는 방식 대신에 모호성을 유지했다. 미국인 대부분은 소리(sorry)를 자주 말하지만 법적 책임이 있는 경우엔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정치지도자에겐 비굴하지 않다는 이미지도 중요하다. 실제 클린턴은 동정심을 유발하려 하지 않았다. 스캔들이 나쁜 계부 등의 불우한 성장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동정을 얻었다고 한들 정치적 지지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동정하는 것과 표를 주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동정해서 한번 표를 줄 수 있어도 계속해서 표를 주지는 않는다.
문화에 따라 사과의 정석도 달라져
정치인의 거짓말은 늘 논란거리다. 정치인은 밝혀지지 않을 거짓말을 주저하지 않고 곧 밝혀질 거짓말은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발각될 가능성이 불확실한 때에는 아예 모른다고 해야 거짓말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정치인의 말 바꾸기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런저런 약속을 많이 하다 보면 지키지 못할 약속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변(多辯)보다 침묵이 유리할 때가 많다.
한국정치사에서 민정이양 약속이나 정계은퇴 약속은 늘 조롱거리였다. 당사자들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거짓말은 이미 진위가 판명된 과거사에 대한 발언인 반면에, 약속은 진위 여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사에 관한 발언이다. 약속은 시간이 지나봐야 허언(虛言) 즉 말 바꾸기인지 아닌지가 판명된다. 애초에 지킬 의사 없이 속이는 임시방편으로 약속한 경우도 있고,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어 못 지킨 경우도 있다.
그런 점에서 말 바꾸기와 거짓말은 각각 오십보(五十步)와 백보(百步)다. 그 차이는 ‘오십보백보’라는 맹자의 고사성어 의미처럼 거의 없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인식되고 있는 반면, 구미(歐美)사회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말 바꾸기와 거짓말에 대한 사과 요구와 사과 효과도 문화에 따라 다르다. 사과 눈물의 효과도 마찬가지다. 문화에 따라 사과의 정석도 달라진다.어떤 문화에서든 서로 미워할 때에는 진솔한 사과가 쉽지 않다. 상대의 꼬투리를 잡아 사과를 요구하고 또 상대는 버티려는 기싸움일 뿐이다. 물론 기싸움의 결말 즉 사과 여부는 어느 쪽의 입장이 더 보편적이냐에 따라 좌우된다.
대한민국의 8월이면 사죄라는 단어가 더 자주 등장한다. 일제가 패망한 달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일본정부가 사죄를 이미 충분히 했음을 함의했다. 과거형이자 3인칭인 사과는 진정성이 없어 역효과임을 아베 총리가 모를 리 없고 따라서 외국에 비굴하지 않고 또 책임지지 않기를 원하는 일본 내 지지층을 위한 담화였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일본 내 특정집단 지도자의 담화문이라면 나름 성공적이었겠지만 동북아시아 지도자의 담화문 정석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41호 | 201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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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 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통령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하는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왼쪽에서 둘째)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오른쪽에서 둘째). 12월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당선됐다. [중앙포토] |
좌우 ‘클릭 수정’ 잘못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질 수도 |
23. 선거 승리의 함수
얼마 전 여당 원내대표 퇴진을 둘러싸고 거론된 이슈 하나는 여당의 정체성이었다. 좌로 이동하는 이른바 좌(左)클릭이 보수정당 새누리당, 나아가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냐는 지적이었다. 진보정당의 우(右)클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쟁이 제기된다.
한국정치사에서 대통령급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래 기간 진보적 이미지를 지녔던 이는 김대중(DJ) 전(前) 대통령이다. 네 차례 대통령후보 시절의 DJ 이미지를 비교하면 1997년 때가 가장 덜 좌파적이었고 이때 DJ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97년 대통령선거 시기와 그 직전 선거인 92년 선거를 앞두고 DJ는 어떤 색깔의 이미지를 만들었는지 비교해보자. 먼저, 지금으로부터 꼭 26년 전인 89년 8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날 DJ는 서경원 의원 북한 밀입국 사건과 관련해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에 의해 강제구인돼 조사받았다. DJ는 서 의원의 방북사실을 사전에 몰랐고, 인지한 즉시 서 의원을 당국에 출두하게 했으며, 북한 자금을 받은 적이 없고, 서 의원 공천에 간여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강제구인 이전인 6월에 이미 대(對)국민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서 의원을 당에서 제명했다.
DJ 좌파 이미지 더 짙게 한 3당 합당
이를 두고 같은 편에서는 배신이라고 하고 상대편에서는 ‘도마뱀 꼬리 자르기’의 위장이라고 말한다. 색깔문제로 피해 본 정치인으로서 잘 수습했다는 평가도 있을 것이다. 평가가 어떠하든 DJ는 북한 밀입국 사건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다.
DJ의 좌파적 이미지는 반년 후 단행된 이른바 3당 합당으로 다시 짙어지게 됐다. 김영삼(YS) 민주당총재와 김종필(JP) 공화당총재가 노태우 대통령 측에 가담해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보수정당을 창당했기 때문이다. 92년 대통령선거는 그런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실시됐다.
| 19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청와대에서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와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배석한 가운데 3당 합당을 선언하고 있다. 92년 대선에서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좌파성향이 강한 전국연합과 연대했지만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 패했다. [중앙포토] |
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DJ는 전교조 · 전노협 · 전농 · 전대협 · 전빈련 등 민족민주를 주창하는 단체의 총연합체인 전국연합과 연대했고, 범민주 단일후보로 추대됐다. 집토끼(전통적 지지자), 즉 좌파성향 유권자의 적극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려는 전략이었으나, 선거결과 집토끼보다 훨씬 많은 산토끼(부동표·浮動票)를 놓친 것으로 드러났다.
YS와의 대결 구도에서 DJ는 전국연합과 연대함으로써 좌측으로 이동했는데, 이동 전에 YS보다 DJ를 더 가깝게 여겼던 유권자 일부(★)는 DJ의 좌클릭 후 DJ보다 YS를 더 가깝게 인식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DJ는 자신이 좌측으로 이동한 거리의 절반을 YS에게 넘겨주고 804만 표(33.8%)를 얻었다.
DJP 연대로 판세 역전 … 우클릭 효과 톡톡
92년 선거 패배 직후 DJ는 정계를 은퇴했다가 95년 7월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가 취한 선택은 우클릭이었다. DJ는 자신을 온건 보수, 개혁적 보수로 부르고,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한나라당)을 수구냉전, ‘보수꼴통’으로 불렀다. 실제 DJ가 개혁적 보수였는지 아니면 위장된 보수였는지는 호불호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DJ는 96년 여름부터 영남지역과 보수성향 단체에 구애를 펼치는 등 우파적 행보를 이어갔다. 8월 연세대 특강에서는 한총련이 민주세력과 건전통일세력에 피해를 주니 자진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9월 강릉에서 북한 잠수함이 좌초한 후 무장공비가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10월 내내 북한을 강하게 규탄하고 국방비 증액과 군인 사기진작 등을 주장했다. 97년 3월에는 노동자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 미국 방문 때에는 주한미군이 북한의 남침 억제뿐 아니라 북한위협 소멸 후의 동북아 평화유지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결정적인 우클릭은 DJP 연합, 즉 YS측에서 이탈한 JP와 연대한 것이었다. DJ와 JP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연대하게 되면 DJ와 JP의 지지자 일부는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들어올 산토끼(추가될 지지)가 집 나갈 집토끼(빠질 지지)보다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연대가 성사됐다.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는 이회창(昌)후보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밀렸다. DJ는 DJP연합을 통해 우측으로 이동했는데, 본래 DJ보다 昌을 더 가깝게 여긴 유권자 일부(★)는 DJP연합 이후 DJ를 더 가깝게 받아들였다. DJ가 우측으로 이동한 거리의 절반만큼 昌에게서 뺏은 결과가 됐다. 상대에게서 한 개를 뺏으면 득표차는 두 개가 되니 결국 이동한 거리만큼 득표차 효과를 본 것이다. DJ는 1033만 표(40.3%)를 득표했다.
물론 97년 선거결과는 제3의 후보(이인제)와 경제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 92년 선거에도 정주영 후보와 박찬종 후보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제3의 후보 등 다른 주요한 요인이 있었다. 따라서 DJ의 득표율이 92년 33.8%에서 97년 40.3%로 6.5%포인트 증가한 것에는 우클릭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누리, 2012 총선 · 대선서 중도로 클릭 수정
이제 최근 선거를 살펴보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양자대결이었다. 공약 기준으로 보자면 미투이즘(me-too-ism)이나 판박이로 표현될 정도로 유사했고 중도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연대 파트너 기준으론 중간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민주통합당은 반(反)MB 혹은 반(反)새누리당의 연합군사령부를 자처하고 양자대결구도로 몰았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막말 파문을 일으킨 후보를 내치지 못했다. 또 통합진보당과의 연대 때문에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 이슈에서 좌파적 입장을 표명했다. 2012년 대선에서도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을 지지했다. 민주통합당에 호의적이던 유권자 가운데 일부는 민주통합당이 좌경화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새누리당도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 대표의 선진통일당과 합당했다. 그렇지만 당명 · 인사 · 공약 등을 통해 좌클릭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통합당보다 더 중간으로 갔다.
도표의 ★는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 및 새누리당 좌클릭 이전에 새누리당보다 민주통합당을 더 가깝게 받아들였던 유권자다. 이들은 두 야당의 연대 및 새누리당의 변신 후에 민주통합당보다 새누리당을 더 가깝게 인지해 새누리당에 투표했다.
★는 3.5%포인트라는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 간 득표율 차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크기다. 이런 선거에서 관찰되는 법칙 하나는 “투표자들을 한 직선 위에 이념 순으로 배열했을 때 그 중간에 위치한 후보는 다른 후보와 일대 일로 대결해서 지지 않는다” 는 ‘중간(median) 투표자 정리(定理)’다. 유권자 모두가 투표에 참여하고 양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에서는 '중간으로 가기' 가 승리의 길이다. 중간으로 가기는 투표에 참여하고 싶은데 누구를 찍을까 고민하는 유권자에게 구애하는 전략이다.
좌파정당에게 우클릭이, 우파정당에게 좌클릭이 유리한 선택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먼저 좌우나 보혁(保革) 등 하나의 기준으로 유권자를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기준으로 배열돼야 한다면 늘 유리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유권자는 입장이 달라도 가깝기만 하면 그 가까운 정당에 투표해야 한다. 만일 자신과 아주 가깝게 위치한 후보가 없을 때 아예 기권하는 유권자가 다수라면 중간 위치 대신에 가장 많은 유권자가 몰려있는 위치로 가야 유리하다.
셋째, 기본적으로 양당제라야 한다. 새로운 유력 정당의 등장이 용이하다면 중간으로 가는 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좌클릭 혹은 우클릭 후 생긴 빈 공간에 신당이 진입해 기존 정당의 집토끼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유권자가 정치인의 입장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중간으로 가기는 일종의 박리다매(薄利多賣)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고 많은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하려는 것이다. 만일 타협에 대한 유권자의 거부감이 크다면 자신 입장을 고수해 소신의 정치인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 현명하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소수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는 전략은 후리소매(厚利少賣)로 부를 수 있다.
자칫하면 ‘철새’ 낙인 찍힐 수도
정치노선 변경은 자칫하면 의리없는 정치인이나 변절자 · 철새 · 사쿠라 등으로 새로운 낙인을 가져다 준다. 또 당내 경선에서 취한 입장을 본선에서 바꾸기란 쉽지 않다. 뒤집어 말하면 본선에서 경쟁력이 있는 중간적 입장은 특정이념이 중시되는 당내경선을 통과하기 어렵다.
2002년 대선의 새천년민주당 당내 경선과 2007년 대선 본선에서 정동영 후보는 중간적 성향을 보였는데, 당시 상황은 중간투표자 정리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이후 중간투표자 정리가 통할 상황에서 정후보는 오히려 한 · 미 FTA와 대북정책 등에서 과거보다 더 과격한 입장을 견지했다.
중간으로 가기가 유리한 상황도 있고 반대로 불리한 상황도 있다. 좌클릭이든 우클릭이든, 바꿀 때에는 새롭게 얻을 지지자 수와 이탈할 지지자 수를 비교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지지 증감보다 경쟁자와의 차이 변화를 계산해야 한다.
총선을 불과 8개월 앞둔 지금 정치권은 선거전략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선거전략은 유권자가 자기를 지지하도록 만들기, 자기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도록 만들기, 경쟁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기권하도록 만들기 등을 구분해 수립해야 한다. 선거전략 가운데 정당 정체성은 특히 중시된다. 왜냐하면 그 정체성에 따라 선거승리뿐 아니라 계파 간 이해득실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38호 | 201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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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70년 7월 독일 바트엠스에서 산책중인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운데 사람)를 프랑스대사 베네데티(오른쪽 모자 벗은 사람)가 찾아가 만나고 있다(안톤 폰 베르너의 1880년 목판화). 이 만남을 계기로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결과 독일은 통일했다 |
앞을 본 비스마르크, 독일 통일 … 상황 오판한 김일성, 분단 고착 |
22. 보불(普佛)전쟁의 교훈
한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70년이다. 타성에 젖을 긴 시간이다. 근대적 의미의 통일 · 분단 · 재통일을 이룬 대표적 국가는 독일이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갑자기 무너지고 이듬해 동서독이 통일됨에 따라 통일은 의지와 관계없이 그냥 닥쳐오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서독 통일 이전에 수많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 2 바트엠스 산책로에서 빌헬름 1세와 베네데티 대사가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독일엽서 |
지금으로부터 145년전인 1870년 7월 19일에 발발한 프로이센 (독일 땅에 세워진 프러시아) 과 프랑스의 이른바 보불(普佛)전쟁 이면에는 통일을 위한 프로이센의 치밀한 전략이 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엠스 전보(電報)’ 사건이다. 7월 13일 아침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휴양지 바트엠스에서 수행원들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프랑스대사 베네데티가 방문해 “스페인 왕위계승에 영구히 관여하지 말라” 고 빌헬름 1세에게 요구했다. 베네데티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요구한 내용은 빌헬름 1세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전보 내용 자극적 문투로 바꾼 게 신의 한수
이런 사실이 베를린에 있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고, 비스마르크는 전보 내용을 간단하면서도 자극적인 문투로 바꿔 공개했다. 프로이센 여론은 일개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고 여겼다. 프랑스 여론도 프로이센이 대국 프랑스의 요청을 무례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독일의 여러 공국(公國)에 관여하고 있던 프랑스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의 연장선에서 프랑스와의 전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국방 개혁과 대외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룬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면 승산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여러 독일 공국들을 아우르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했는데, 비스마르크는 독일 공국들에 관여하고 있던 프랑스를 통일독일의 출범에 필요한 제물로 여겼다. 엠스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한 것은 독일 통일을 위한 비스마르크의 한 수였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사태 전개를 잘 내다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자는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3년 뒤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한 후 1852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3세였다. 그는 국내정치적 감각은 뛰어났지만 대외정책에서는 큰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질서와 프랑스 국내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자신이 프로이센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고 싶었기에 프로이센에 전쟁을 먼저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프로이센 지배 하의 남부 독일 공국 (바이에른 · 뷔르템베르크 · 바덴)으로 진격해 독립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공국들은 프로이센에 패한 뒤 설욕을 벼르고 있었고 전쟁이 나면 프랑스 편에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이 엠스 전보를 적대적으로 공개했다는 사실에서 프로이센의 전쟁 의지 및 승리 가능성을 높게 인지했어야 했다. 특히 프로이센이 주변 강대국뿐 아니라 독일내 여러 공국들과도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프랑스에 대한 프로이센의 태도는 결코 허세가 아님을 간파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고 주변국의 선호를 잘못 판단해 프로이센이 보낸 신호를 엄포로 받아들였다.
| 3 1870년 9월 프랑스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해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오른쪽) 옆에 앉아 있다(빌헬름 캄프하우젠의 1878년 그림). 4 1871년 1월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개최된 독일제국 선포식(안톤 폰 베르너의 1877년 작). |
비스마르크의 함정에 빠진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가 판 함정에 빠진 선택이었다. 선전포고 이후 사태는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비스마르크의 기대대로 전개됐다. 프로이센군은 신속하게 동원돼 프랑스를 공격했으나, 앞서 몇 년 전에 프로이센에 참혹하게 패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공격을 주저했다.
9월 2일 프랑스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는 대패해 포로가 됐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 신세로 독일 아헨에 머무는 동안 아헨 주민들로부터 “(다음 연금 장소인) 카셀로 빨리 꺼져라(Ab nach Kassel)” 는 야유를 받았다. 카셀과 관계없이 그냥 ‘꺼져라’ 혹은 ‘서둘러라’ 는 의미로 오늘날 쓰이고 있는 독일어 ‘압 나흐 카셀’의 어원은 나폴레옹 3세가 이처럼 독일 국민을 결속시켰음을 보여준다.
스당 패전 이후 프랑스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 전쟁을 계속 수행했지만, 결국 1871년 1월 수도 파리는 함락됐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통일 독일제국의 선포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런 일련의 정책결정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다단계 전개 상황에서의 전략 계산은 역순으로 따져보면 간단하다. 맨 마지막 단계인 단계 IV 에서, 주변국은 프랑스가 승리하여 유럽 패권을 다시 갖는 결과(④)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를 견제할 독일의 등장(⑤)을 차라리 더 나은 결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즉 단계 IV 에서 주변국은 프로이센을 선택한다. 이런 사실을 내다보는 프로이센은 단계 III 에서 전쟁을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격하지 않으면 프랑스에 굴복 하는 것(③)이 되고 진격하면 전쟁에 승리하여 통일을 이루는 것(⑤)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전개상황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한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전쟁에서 승리(④)하거나 아니면 프로이센이 굴복할 것(③)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단계 II 에서 프로이센의 발언권을 인정하는 것(②)보다 선전포고를 선택했다. 끝으로, 엠스 전보 사건 직전의 단계 I 은 프로이센으로선 세 수를 미리 내다보고 선택해야 하는 단계였다. 전보 공개가 곧 독일의 통일(⑤) 아니면 적어도 발언권 확보(②)를 가져다주고, 이는 프랑스 우위를 인정해주는 것(①)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하게 되었다.
정교한 전략 준비 · 추진이 통일의 열쇠
통일 추진자의 정확한 판단으로 통일이 이뤄진 사례뿐 아니라 통일 방해자의 잘못으로 분단된 사례도 있다. 독일은 1939년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1945년에 분단되고 말았다. 아무런 전쟁 없이 동서독이 재통일을 이룬 1990년과 대비된다.
잘못된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한 사례가 바로 6·25전쟁이다.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미국의 참전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미국은 즉시 개입했다. 심지어 남한주민이 북한군을 열렬히 반길 것이라고 오판했다. 김일성은 미국이나 남한주민의 신호를 나폴레옹 3세만큼이나 잘못 읽었다.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시작된 전쟁은 민족통일은커녕 반세기 이상 분단을 고착화했다.
프로이센의 통일전쟁 대상은 독일내 다른 공국들이 아니었고 외부세력 프랑스였다. 이에 비해 6·25도발의 주대상은 외부보다 남한내 같은 민족이었다.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눈 섣부른 전쟁이 통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만일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남북한은 이미 통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국의 강한 견제를 받던 독일도 냉전 종식과 더불어 통일됐는데, 만일 남북한 간에 전쟁이 없었더라면 통일가능성은 독일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통일은 그냥 무작정 기다리면 오는 것도 아니고, 무모하게 추진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여러 수를 내다보는 정교한 전략 준비와 추진이 있어야 통일은 실현될 수 있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36호 | 201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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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21. 백신의 사회 · 정치학 |
| 고대 그리스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가 스파르타를 공략하는 모습(장 밥티스트 토피노 레브룬의 18세기 그림). 피로스는 로마 등과의 많은 전투에 승리했지만 피해가 쌓여 스파르타와의 전투 직후 패망하고 말았다. |
대탐소실 꿈꾸던 인류가 발명한 건 ‘백신 전략’ |
21. 백신의 사회 · 정치학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국에 유입된 지 딱 두 달이다. 지난 5월 4일 중동에서 귀국한 1번 환자가 고열 등의 증상 후 5월 20일 환자로 처음 확진됐다. 지금까지 185명의 확진환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33명이 사망했다. 환자와의 접촉 후 최장잠복기가 지날 때까지 새로운 감염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확산이 종료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메르스 통제가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치료제나 백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인간에게 주사한 첫 백신은 지금으로부터 꼭 130년 전에 등장했다. 1885년 7월 6일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에게 물린 조셉 마이스터에게 광견병 백신을 접종했다. 의사면허가 없던 파스퇴르 대신에 동료 의사가 주사했다. 파스퇴르는 유리관을 직접 입으로 물고 광견병에 걸린 불독의 침을 추출하는 진정성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치료를 받은 소년이 아무런 광견병 증상 없이 나았기 때문에 그는 인류를 구한 영웅이 됐다.
| 1 파스퇴르와 광견(19세기 후반 알퐁스 미샤의 그림) 2 1885년 7월 6일 파스퇴르가 만든 최초의 인간 백신을 접종하는 모습(파스퇴르 뮤지엄 홈페이지) |
산전수전 겪으며 내공 키우는 전략
파스퇴르와 그의 동료들은 토끼 몸속에서 광견병 바이러스를 키운 후 신경티슈를 건조함으로써 바이러스를 약화시켜 백신을 만들었다. 파스퇴르는 광견병 백신 이전에도 닭콜레라와 탄저병 등 여러 가축질환의 백신을 개발한 바 있다.
약하거나 죽은 세균 · 바이러스를 주입하여 가벼운 증상만 일으키게 하면서 항체를 생성하여 면역력을 갖도록 하는 백신 원리는 파스퇴르 이전에 이미 인도, 오스만 등 여러 지역에서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1796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이런 원리에 주목하여 소젖 짜는 여인의 손바닥에 생긴 종기에서 고름을 채취하여 한 소년의 팔에 주입했다. 그 소년은 6주 후 진짜 천연두 고름을 주사해도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우두를 천연두 예방에 이용한 제너를 기리기 위해 어린 암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와쿨라(vaccula)에서 따온 백신이라는 말을 1881년 파스퇴르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신의 개발 여부는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파스퇴르 등이 개발한 가축전염병 백신은 당시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개발이 필요했다. 백신 개발로 축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한국에서 유행한 메르스의 백신이나 치료제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도 오늘날 과학기술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감염자가 별로 많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메르스 확산으로 백신이나 치료제의 개발 동기는 생겼고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이다. 다만 동물실험, 임상시험, 미국식품의약국허가 등의 절차에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수년 후에도 시장에서 메르스 백신이 필요할지가 불확실하니 메이저 제약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도 한다.
백신은 그 자체가 전략이다. 전략은 보통 창조적으로 만들어진다. 백신도 발견이 아니고 발명으로 불린다. 치료보다 예방이 훨씬 간단한 (An ounce of prevention is worth a pound of cure.) 상황에서 효과적이다. 약한 자극으로 먼저 내성을 키운 후에 나중의 강한 자극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만일 그 순서가 뒤바뀌면 면역력 형성 없이 질환에 걸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평소 너무 청결한 사람은 면역력이 없어 건강하지 못하다는 연구도 있다. 인체질환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평소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이 사업이나 정치에서 큰 배신을 당해 돈과 권력을 잃고 또 건강까지 잃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런 비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게 되는’ 트라우마를 사람들은 겪는다. 작은 아픔으로 먼저 내성을 키워 큰 아픔에도 견디거나 연착륙하는 것 또한 일종의 백신 과정이다. 대체로 높은 수준의 내공도 작은 수준의 산전수전(山戰水戰)에서 기인한다. 세상에서 늘 좋은 것만 향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작은 불행으로 큰 불행을 막는 것이 전략적 행위다.
백신 개발은 독성을 약화시킬 수 있어야 가능하다. 백신은 기존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자신의 구조를 바꿔버리면 효과적이지 못하다. 세포분열을 통해 생존하는 세균과 달리, 바이러스는 유전정보와 단백질로만 구성되어 있어 독립적으로 생존하기 어렵고 숙주의 세포에서만 번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오히려 쉽게 변이할 수 있다.
바이러스에 대해 효과적인 백신이 적은 이유도 바이러스의 조합 다양성과 변이 가능성 때문이다. 변이는 백신이나 치료제에 대응한 바이러스의 생존 전략이다. 그런 다양성과 변이성 때문에 특정 바이러스 대신 여러 바이러스의 공통된 구조에 반응하는 범용 백신도 개발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균과 바이러스 역시 이미 개발된 여러 백신에 대해 내성이 있는 구조로 변이하여 진화하고 있다.
같은 물건이나 같은 행동도 그 가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때와 장소가 맞아야 출세하기도 하고 활용되기도 한다. 야구에서 안타를 많이 치면 승리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타율보다 타점이, 또 타점보다 결승타가 승리에 더 중요하다. 점수와 연결되지 않는 안타만 남발하는 선수보다, 필요할 때에만 적시타를 치는 선수가 팀 승리에 더 기여한다.
48%와 49%를 좌우할 수 있는 3%의 힘
정치에서는 지지율보다 득표율이 더 중요하고, 득표율보다 의석비가 더 중요하며, 의석비보다 대권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지지도를 갖고도 더 높은 득표율을, 또 더 높은 의석비를, 또 정권을 얻기 위해 선거제도 조정과 이합집산을 도모한다.
정치나 비즈니스에서 같은 지분이라고 해서 같은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51%의 지분을 갖고 있을 때에는 내가 49%를 갖고 있어도 엄격한 과반수제 에서의 내 영향력은 0이다. 이에 비해 다른 두 경쟁자가 각각 49%와 48%를 갖고 내가 3%만을 갖고 있더라도 내 영향력은 33%에 이른다. 왜냐하면 과반수승리연합은 49+48, 49+3, 48+3, 49+48+3 총 4가지인데 3%가 승리연합에 낄 가능성은 49나 48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는 자기보다 16배가 큰 49%와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3%가 49%와 48%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향유하기도 한다. 만일 49%와 48%가 서로 앙숙이어서 도저히 연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3%의 선택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3%는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 개인의 영향력도 마찬가지다. 1989년 제13대 국회의 의석비는 민주정의당(민정) 43%, 평화민주당(평민) 24%, 통일민주당(민주) 20%, 신민주공화당(공화) 12%였다. 당시 국회 운영에 대한 의원들의 만족도 조사에서 민정당과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대체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변한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가 만족한다고 응답한 바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당별 결정력(pivotal power)이 같았기 때문에 의원 1인당 영향력은 의원 수가 적은 공화당이 더 높았던 것이다.
그리스 피로스 왕은 소탐대실 (小貪大失) 케이스
경우의 수를 감안한 결정력이나 영향력 계산은 전략적 효율성 추구에 도움된다. 만일 투입과 산출에 관한 방정식이 존재한다면 효율적 전략의 계산은 미분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의 추가 투입으로 기대되는 가치의 증대 계산을 시점별로 계산하여 적절한 타이밍과 투입량을 정할 수 있다. 이런 미분 계산이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골든타임(사고수습이 가능한 초기) 그리고 마중물(펌프로 많은 물을 긷기 전에 부어야 하는 적은 물) 모두 작은 대가를 지불하고 큰 혜택을 얻는 백신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고대 그리스 에피루스 왕 피로스가 여러 전투에 이겼지만 전쟁부담을 견디지 못해 결국 패망한 ‘피로스의 승리’, 입찰에서 낙찰받았지만 고가의 입찰가로 위험에 빠지는 ‘승자의 저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것’ 이 모두가 당장은 이겼지만 결국은 손실이 더 큰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사례다.
전염병 백신이 개발되지 못했을 때에는 격리 등 감염 차단이 예방에 필수적이다. 접촉여부, 감염률, 치사율 등을 입력하면 확산정도와 사망자수를 계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최적의 차단 시간과 공간이 나온다. 질환뿐 아니라 감정도 전염된다. 따라서 사회심리적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치사율 18%보다 완치율 82%에 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표현 또한 중요하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름(於異阿異)’ 을 인지한 대처가 동일한 투입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백신적 전략이다. 활성화된 교류로 전염에 훨씬 취약한 오늘날, 개인이나 사회든 백신적 기능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34호 | 201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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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20. 마키아벨리가 주는 교훈 |
| 마키아벨리는 사망 다음날 피렌체 산타크로체(성십자가) 성당에 묻혔다. 조각가 이노센조 스피나치가 만든 묘비명(1787년 제작)은 “어떤 찬사도 그 이름보다 못하다” 고 쓰고 있지만 마키아벨리에 대한 정반대의 평가도 적지 않다. . |
잦은 묘수는 패착의 씨앗, 차라리 기본에 충실하라 |
⑳ 마키아벨리가 주는 교훈
지금으로부터 꼭 488년 전인 1527년 6월 21일 『군주론』으로 유명한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데이 마키아벨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사망 후에야 출간됐는데 그마저도 1557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포함됐었다. 신을 부정하고 권모술수를 조장할 뿐 아니라 정치를 종교로부터 독립시키고 교황 · 추기경을 비롯한 지도자의 위선(僞善)을 폭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글들은 생전에 자기를 알아주지 않던 명분적인 중세 세상을 실리적인 근대 세상으로 바꾸는 물꼬를 텄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프랑스혁명 지도자, 소련공산당 지도자 등이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 군대를 한 차례 쫓아낸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죽은 마키아벨리는 결코 쇠퇴할 것 같지 않던 전(前)근대적 질서를 해체해버렸다.
마키아벨리주의, 마키아벨리주의자, 올드 닉 등 마키아벨리에서 따온 용어는 각각 권모술수, 권모술수자, 악마 등 모두 그 의미가 부정적이다. 부자와 빈자 모두 각각 자신의 부와 자유를 빼앗는 방법을 마키아벨리가 가르쳤고, 또 선인과 악인 모두 자신의 행동을 마키아벨리가 각각 위선과 악행으로 매도하거나 노출시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1 팔을 뒤로 하여 매단 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스트라파도 고문 모습(18세기 역사책 삽화). 마키아벨리는 반(反)메디치가 음모 혐의로 스트라파도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 메디치가에 『군주론』을 헌정했으나 중용되지 못했다. 메디치가의 실각 이후에는 메디치가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또 중용되지 못했다. 2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비판한 도서 『안티마키아벨리』(1740년 출간)의 속표지. 저자인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도 대체로 『군주론』 내용과 유사했다는 평가다. |
‘위선(僞善)’ 의 효용성 인정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주의는 별개의 의미다.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를 권고한다는 점에서 위선의 효용을 인정했다. 위선이 통하는 세상이라고 주장하면 위선자일까? 마키아벨리의 저술행위 자체는 마키아벨리적이지 않다. 위선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행위 자체는 위선이라기보다 겉모습만 악에 가까운 위악(僞惡)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위악(僞惡)은 단순화된 표현에서 연유할 때가 많다. 일부에게 맞는 말이지만 모두에게는 맞지 않음에도 단정하는 수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골적 표현들은 하나마나한 말 대신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마키아벨리의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너무 솔직하게 발언했다가 곤경에 처한 경우는 허다하다.
마키아벨리 글을 비판하면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닐까? 마키아벨리 글들을 금서목록에 올린 교황청 외에도, 마키아벨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지도자는 적지 않다. 『반(反)마키아벨리론』을 집필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대왕)가 그 대표적 예다.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따라하는 것처럼,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 스타일은 세월이 갈수록 『군주론』 방식이었다.
진짜 위선자는 묵묵히 위선을 실천할 뿐
| | | 성 미카엘이 사탄을 땅으로 떨어뜨려 무찌르고 있는 모습(라파엘로의 1518년 작품). 메디치가 교황 레오네 10세의 명령에 따라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주문하여 메디치가 후견인인 프랑스 왕에게 선물됐다. | | 진짜 위선자는 위선(僞善)이 통한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또 동의하지도 않는다. 위선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고 그냥 묵묵히 위선을 실천할 뿐이다. 위선에 대해 언급해야 할 상황이라면 자신은 그냥 사람들을 믿는다고만 대답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탐욕(貪慾) · 변덕 (變德) · 배신(背信) · 기만(欺瞞) · 위선(僞善) 등 즉 성악설에 가깝게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률을 초월하여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이런 주문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마키아벨리를 반(反)도덕주의자로 부르고, 옹호하는 측에서는 초(超)도덕주의자로 부른다.
위선과 위악 가운데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일까? 노골적으로 악한 행위보다 차라리 위선적이더라도 겉으로 선한 행위가 사회적 선의 실천 가능성을 대체로 높인다. 특히 마키아벨리 글을 탐독하여 사소한 일에도 온갖 권모술수를 쓰는 사람도 있으니 이는 마키아벨리론의 부작용이다.
행동의 차원과 달리, 분석의 차원에서는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 사회적 선의 실천 가능성을 높인다. 대중이 권력자의 위선적 행위를 인지하게 되면 위선의 효능은 감소한다. 마키아벨리 덕분에 지도자의 위선적 행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마키아벨리주의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모던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인간은 대체로 이기적이다. 생존에 유리한 이기적 인간은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전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경제학 또한 마키아벨리의 후예다. 그러다 보니 정치경제적 사고를 가진 사람일수록 이기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많다.
이런 선입관에 대해 일부 경제학자가 실증적으로 반박했다. 말로 하는 이기주의 그리고 행동으로 하는 이기주의는 별개의 것임을 보여줬다. 한 조사에서 이기심을 전제한 과목의 수강 대학생, 그리고 그렇지 않은 과목의 수강 대학생을 대상으로 돈을 습득했을 때 돌려줄 의사를 물었더니, 돌려준다는 비율은 이기심 전제 과목의 수강생들이 낮았다. 그런데 실제 10달러가 든 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여 강의실에 놓아둔 후의 회수율은 오히려 이기심 전제 과목의 수강생이 그렇지 않은 과목 수강생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유사한 결론은 다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대부분 학회의 회비는 회원 본인이 자기 소득에 따라 회비액수를 선택하여 납부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소득에 합당한 학회비를 납부한 비율은 이기심을 전제하는 학문에서 더 높았다.
이 두 조사가 엄격하게 수행된 것이라면,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일수록 정직한 행동을 한다는 의미다. 권모술수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권모술수의 행동을 반드시 행한다고 볼 수는 없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은 권모술수로 가득 차 있지만 마키아벨리 본인의 권모술수 행동은 별로 전해져오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권모술수자로 평가되는 인물들은 막상 권모술수를 남에게 권고하지 않았다.
본인 처세엔 능하지 못했던 마키아벨리
음모에 대해 공공연하게 분석하는 사람들은 음모를 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흔히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불리는 한비자(韓非子)가 그런 예다. 한비자의 세 가지 통치 개념 가운데 하나인 술(術)은 주로 권모술수 기법에 관한 것이다. 진시황이 한비자를 중용하려 했는데 순자(荀子,荀卿) 밑에서 한비자와 함께 공부한 이사(李斯)는 한(韓)나라 왕족인 한비자가 진나라에 충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모함하여 한비자는 투옥되어 자결하게 되었다. 음모론 전문가가 음모에 희생된 것이다. 한비자의 법가적 통치방식을 따랐다고 볼 수 있는 진이 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서자 유교가 법가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는 노골적인 것보다 위선이 한 수 위로 작동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에 발탁되기 위해 『군주론』을 집필했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군주론』의 헌정사는 발탁되어 일하고 싶음을 드러낸 솔직한 글이지 권모술수의 행동은 아니다. 자신의 소신과 관찰력을 그대로 보여준 것뿐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처음 헌정하려던 메디치가 지도자는 교황 레오네 10세의 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였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의 친구 파올로 베토리가 줄리아노의 새 보좌관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16년 줄리아노가 사망하자 『군주론』은 피렌체의 새로운 지도자 로렌초 데 메디치(1492년생)에게 헌정됐다. 물론 로렌초가 『군주론』을 읽었다는 얘기는 없다.
로렌초가 1519년 사망하자 레오네 10세의 사촌이자 로렌초의 오촌당숙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피렌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줄리오는 공화주의적 성향을 가끔씩 드러낸 마키아벨리를 별로 믿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게 정무직 대신에 『피렌체논고』와 『피렌체역사』를 집필하는 직책을 맡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에 중용되기를 원했지만, 메디치가는 마키아벨리를 중용하지 않았다. 실제 권모술수에 반대되는 통치를 한 것도 아닌 메디치가는 마키아벨리의 제안들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자와 가까이 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꼈을 수도 있다.
줄리오는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 후 1526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반(反)메디치 소요를 겪었고 결국 피렌체는 공화정으로 돌아갔다. 공화정은 마키아벨리의 본래 구상이었기 때문에 공화정 피렌체는 마키아벨리가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클레멘스 7세 때 봉직했다는 이유로 공화정에서 배제됐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앓다가 세상을 떴다.
각종 처세술 문헌에서 마키아벨리를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정작 마키아벨리 본인은 처세에 능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명예를 중시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에서 프로스페로 콜론나의 사촌 파브리치오를 호평한 바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파격적인 조건으로 콜론나의 중용 제의를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콜론나의 서기장 대신 낮은 보수의 피렌체역사 집필 업무를 맡았다. 즉 그의 삶은 자의든 타의든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
人災는 정책이나 전략으로 해결 가능
마키아벨리 · 한비자 · 사마천 등 권력정치를 강조했던 사상가들 모두 처세를 잘하지 못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 · 사마천 · 정약용 · 김만중 등은 모두 세상에서 버려졌을 때 집필에 집중하여 후세에 남을 고전을 대거 저술했다.
『군주론』 헌정사는 “만일 전하께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시면 제가 그동안 부당하게도 지속적인 큰 악운에 시달려왔음을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본인이 출세하지 못한 이유를 불운으로 표현했다. 운을 의미하는 마키아벨리의 개념 포르투나는 결국 능력이나 실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니 운칠복삼(運七福三)이니 하는 표현처럼 전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바둑이나 장기에서 묘수를 많이 쓰면 대개 진다. 간혹 쓰는 것이 묘수이지, 자주 쓰게 되면 그 일부는 패착일 수밖에 없다. 기발한 전략일수록 아주 드물게 써야 효과적이다. 묘책을 여러 번 써야 할 정도로 운이 나쁘면 헤어나기 어렵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전략도 운때가 맞아야 한다. 운때가 맞지 않으면 어떤 전략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결국 대부분은 기본에 충실한 자가 승리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러 고난을 겪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고난의 사다리를 탈수록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봤다. 천재(天災)가 포르투나의 탓이라면 인재(人災)는 정책이나 전략으로 해결할 몫이다. 인재가 자주 발생하는 요즘, 우리 스스로 나아질 수 있는 여지는 크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32호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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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8일자 로동신문 1면에 보도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대남 평화통일 호소문. |
3300년 전 트로이 목마, 65년 전 6·25 … 노림수는 ‘기습’ |
⑲ 기습과 방어의 기본
▶ 6월15~17일 조국평화통일 사회단체대표자협의회를 해주 혹은 개성에서 개최 ▶ 8월5~8일 남북총선거를 실시 ▶ 8월15일 최고입법기관회의를 서울에서 소집
북한정권이 1950년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우리조국 남북반부의 전체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들” 과 “전체조선인민들에게” 제의한 평화통일 방안이다. 이 호소문 발표 후 18일 만인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도발 직전의 평화 호소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북측은 평화통일을 위한 최후의 노력이었다고 강변하겠지만 남측으로서는 북측의 철저한 속임수로밖에 볼 수 없다. 6월 25일 직전까지 대화 공세 편 김일성
남북총선 및 평화통일의 제의가 있었던 6월 초순은 김일성 정권이 남한을 무력침공하기로 이미 결정해둔 상황이었다. 1949년 3월 스탈린을 면담한 김일성은 무력침공에 관해 소련 의견을 물었다. 스탈린은 이에 소극적이다가 중국 내전 종식과 미국 애치슨 선언 이후인 1950년 4월에서야 무력침공에 동의했다. 5월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과의 회담에서 중국 동의도 얻었고, 또 남한 내 좌파의 전폭적 지원도 기대했다.
스탈린 · 마오쩌둥 · 김일성 모두 미국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남측이 기습에 대비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1950년 6월 전쟁 직전까지의 북한 대남 정책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북한 정권은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호소문에 이어 10일에는 북한에서 연금된 조만식 부자를 남한에서 체포된 남로당 출신 사형수 김삼룡 · 이주하와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정부가 교환을 수락하자 북한 정권은 20~23일 여러 차례에 걸쳐 교환 장소와 일시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는 21일 서울에서 남한 국회와 협상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북한의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 남한은 처음엔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채병덕 참모총장 명의로 11일 오후 4시부터 경계령을 내렸지만 23일 자정을 기해 해제했고 25일 새벽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침공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북한 정권의 행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원전 13세기의 트로이 목마를 연상시킨다. 트로이군과 오랜 전투를 벌이던 그리스군은 목마를 둔 채 일단 철수했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은 무슨 물건인지 모르니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트로이에 위장 투항해 있던 시논이라는 그리스 첩자는 목마가 전쟁승리의 영물이며 트로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크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라오콘이 갑자기 나타난 뱀에 물려 죽자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성 안으로 가져갔다. 감시가 느슨했을 때 그리스 병사들은 목마에서 나와 성문을 그리스 정규군에 열어줬다. 결국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점령하고 파멸시켰다. 여기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적을 조심해라” 는 뜻의 “선물 든 그리스 사람을 조심해라” 는 표현이 나왔다.
| 1 앙리 모뜨의 ‘선물 든 그리스사람을 조심해라’(1874년작) 2 뱀에게 물려죽는 라오콘 3부자를 그린 엘 그레코의 17세기 유화. 라오콘 뒤로 트로이목마와 트로이성이 보인다. |
불신도 기습과 기만에 대한 대비책
기원전 13세기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1950년의 북한 정권도 상대 지도부와 화해할 생각이 없었고 또 화해를 제의한다고 한들 상대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은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호소문에서 이승만 정권을 적대시하고 배제함을 분명히 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파탄시킨 범죄자들인 이승만 · 이범석 · 김성수 · 신성모 · 조병옥 · 채병덕 · 백성욱 · 윤치영 · 신흥우 등 민족반역자들을 남북대표자 협의회에 참가시키지 말 것” 과 “조국통일사업에 유엔조선위원단의 간섭을 허용하지 말 것” 그리고 “조선인민은 외국의 간섭이 없이 반드시 자력으로 조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것” 을 촉구했다. 성문을 열어달라는 요구를 남측의 사회단체에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전쟁을 원했거나 전쟁 중 북측에 부역한 남측 주민들은 북한의 기대와 달리 소수였다.
6·25전쟁은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됐다. 20세기 동아시아에서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전쟁은 적지 않다. 일본이 1904년 뤼순 러시아함대 그리고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함대를 공습할 때 모두 선전포고는 없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던 순간까지도 평화적 해결방안을 미국 정부에 거론했다.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북한도 그랬다. 이런 평화 제의들은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평화공세 혹은 거짓임을 강조하여 위장평화공세로 불린다.
36계 등 전략론 문헌 다수는 주로 속고 속이는 것을 다룬다. 손자병법 행군편은 상대의 표면적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겸손한 말로 더욱 준비하는 자는 공격하려는 것이고(辭卑而益備者進也), 강경한 말로 더욱 공격하는 자는 퇴각하려는 것이며(辭强而進驅者退也), 아무런 약속 없이 강화하자는 자는 속이려는 것이다(無約而請和者謀也). 이 경구에 따르면 북한 매체의 대남 발언도 과거나 지금이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손자병법식으로 의도와 초기 행동을 늘 정반대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언행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 공격할 의도 없이 온건하게 표현하는 자도 있고, 또 강경한 말을 구사하면서 실제로 공격하는 자도 있다. 적대적 상대의 발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아예 무시하는 것이 상대 의도에 말리지 않는 길이다.
민주주의는 철인 정치지도자 불신의 산물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의도를 속단하지 말라는 경구는 손자병법뿐 아니라 여러 고전에 등장한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구밀복검(口蜜腹劍), 포장화심(包藏禍心) 등이 그런 사자성어의 예다. 당나라 이의부는 ‘늘 미소를 짓지만 남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가득찬(笑中有刀)’ 인물로 평가됐다. 이의부는 당 태종과 당 고종의 신임으로 온갖 권력을 누리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나라 현종 때의 이임보 역시 ‘말은 달콤하지만 마음은 위험한(口蜜腹劍)’ 인물로 평가됐다. 이의부와 마찬가지로 말년과 사후가 좋지 않았다.
상대의 나쁜 의도가 의심되면 이를 확인해서 대비해야 한다. 춘추시대 강대국인 초나라의 공자와 약소국인 정(鄭)나라의 대부 딸이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초나라는 혼례에 참가하는 병력으로 정나라를 쉽게 점령하려 했다. 초나라는 성 밖에서 혼례를 치르자는 정나라의 제의를 거부하고 예법에 맞게 성 안에서 혼례를 치르자고 했다. 초나라는 정나라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오히려 불만을 표했다. 이에 정나라는 초나라가 ‘나쁜 마음을 감추고’(包藏禍心) 있는지 정면으로 묻고, 나쁜 마음이 없으면 혼례에 비무장으로 참가할 것을 제의했다. 결국 초나라 사람들은 비무장한 채 정나라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대가 불신에 불쾌감을 표하면 표할수록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습은 도발자에게 큰 이점이 있다. 기습은 반격할 여지를 상대에게 주지 않고 싸움을 일찍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습작전은 시간과 공간 가운데 하나에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상대의 공간적 혹은 시간적 반격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기습의 유형 하나는 특정지역 예컨대 접경지역이나 수도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여 상황을 종료하는 방식이다. 제한적 공간의 성공적 점령은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는 상대에게서 반격할 시간(타이밍)을 빼앗는다. 기습의 다른 유형 하나는 상대의 공격력을 파괴시켜 아예 반격의 빌미를 주지 않는 방식이다. 장악한 지역이 거의 없다고 하더라도 제한된 시간 안에 상대의 대량살상무기를 전멸시킨다면 상대는 반격할 공간(베이스)을 잃게 된다. 이 유형에선 기습공격의 목표물이 민간시설보다 군사시설이다.
기습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먼저 방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완벽한 방어가 어려워 결국 억지 기능으로 대비할 때가 대부분이다. 자국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방어 시스템보다, 도발자에게 피해를 최대화하는 반격 시스템으로 도발을 억지하는 것이다. 억지가 작동하려면 무엇보다도 상대에 반격할 수 있는 군사력이 기습공격을 받은 후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 반격할 때의 목표물은 상대의 군사시설보다 정책결정자 거주지나 주요 민간시설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기습 · 기만 성공해도 패망 사례 많아
기습에 잘 견디는 장치 하나는 동맹이다. 왜냐하면 동맹국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선제공격으로 무장해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선 1953년 정전된 이후 전쟁이 재발하지 않고 있다.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하고 근현대 전쟁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하고 있는 현재의 정전 상황은 한반도 안보상황이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억지 시스템으로 60년 이상 전쟁 재발 방지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 억지의 주요 구성요소는 미국 및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었다.
불신 또한 기습과 기만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다. 믿지 못하는 상대를 둔 상황에서 생존과 관련하여 아무런 안전장치를 갖추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행동이다. 적대적 관계에서 상대를 무조건 신뢰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내정치에서도 민주주의 자체가 불신에 기초한다. 전권을 받은 특정 국가지도자 1인에 의한 철인(哲人)정치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시스템이나, 그런 지도자의 행동을 믿을 수 없으니 민주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기습에 대한 대비책 하나는 기습이다. 기습당하기 전에 먼저 기습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기습할 동기가 충분하다고 그 상대가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내가 기습받을 가능성은 커진다.
기습이 효과적이지 않을 때에는 평화공세나 위장평화공세의 효능도 떨어진다. 남을 속이는 데에 성공해봤자 얻을 게 크지 않다면 굳이 속이려들지 않는다. 따라서 화해나 평화의 진정한 제의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려면 속임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기습과 기만은 단기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종국에는 패망에 이른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신뢰는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하고, 국가신뢰 역시 외교적 자본으로 활용된다. 신뢰를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 한 차례의 기습 · 기만 성공보다 나음은 말할 나위 없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30호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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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18. 협력을 끌어내는 기술 |
| 5·24 조치.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5월 24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관련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담은 이른바 5 · 24 조치다. |
상호주의 전략 펼 땐 1대1 대응보다 일관성이 핵심 |
⑱ 협력을 끌어내는 기술
지금으로부터 꼭 5년 전인 2010년 5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는 천안함 폭침을 북한 소행으로 결론내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이른바 5 · 24조치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냐는 것이 5년전 논쟁이었다면, 지금은 5 · 24조치를 해제해야 하느냐는 논쟁이 진행중이다. 한편에선 최근의 대북민간비료지원은 5 · 24조치에 위배하는 일관성 없는 정책이라고 비난하고, 다른 한편에선 5 · 24조치를 해제하지 않는 정부를 성토한다. 5 · 24조치를 그대로 유지하라고 주장하면 반(反)통일세력으로, 당장 해제하라고 말하면 종북세력으로 간주되는 것이 작금의 남남갈등이다.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면 당연히 전략도 달라야 한다. 하지만 목표가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추진전략에 있어 극심한 이견을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5 · 24조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측이나 해제해야 한다는 측이나 모두 남북한의 상호대립보다 상호협조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북한의 협조를 유도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추진전략은 상반된 셈이다.
인간 사회 생기면서 상호주의 나타나
5·24조치를 옹호하는 측은 대북 제재로 북한 협력을 유도할 수 있으니 북한이 협조할 때까지 조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 같고, 5·24조치를 비판하는 측은 제재로는 협력을 유도할 수 없으니 조치를 당장 해제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 같다. 한반도 평화 추진전략도 마찬가지다. 대북 유화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상대와 친해져야 한다고 보고 있고, 반대로 대북 강경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 는 베게티우스의 고전적 경구에 충실한 것이다.
협력을 유도하는 대표적인 전략은 ‘상대가 협조할 때 나도 협조하고 상대가 배반할 때 나도 배반한다’ 는 상호주의전략이다. 내가 상호주의전략을 채택할 때 상대는 자신이 협조하면 상호협조가, 자신이 배반하면 상호배반이 되기 때문에 결국 상호협조 아니면 상호배반 가운데 선택하게 된다.
상호주의는 흔히 티포태(tit-for-tat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혹은 보상보복으로 표현된다. 상호주의는 20세기 후반 게임이론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이미 태초의 인간사회 때부터 사용되어왔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21장은 “생명에는 생명을,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 손에는 손을, 화상에는 화상을, 외상에는 외상을, 타박상에는 타박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고 서술하고 있다. 함무라비법전이나 탈무드에서도 탈리오(보복)에 관한 비슷한 문구를 담고 있다. 고대 한반도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시행되었다. 남을 죽인 자는 죽여서 되갚는 것이 고조선 8금법의 첫 조항이었다. 이 모두가 남에게 행한 나쁜 짓 그대로 가해자에게 앙갚음함으로써 나쁜 짓을 억제하려는 방식이다.
이런 앙갚음은 감정을 억제시키고 대신 이성으로 해결하려는 역설적인 노력이었다. 이런 법제도가 도입되기 전 앙갚음은 훨씬 과도했다. 과도한 보복을 자제시키기 위한 취지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눈알 하나에 눈알 하나, 이빨 하나에 이빨 하나’ 방식이 적절하다고 본 것이었다.
현대사회는 그런 앙갚음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한다면 모두가 이빨 빠진 장님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밀라는 태도가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앙갚음이 나은지 관용이 나은지는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우리 사회에서 견해차를 논리로 해소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따지면 “너 잘 났어, 정말” 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정치사회 갈등의 다수는 정부 대 반(反)정부라는 구도 속의 양극화 결집에 다름 아니다. 민주국가일수록 여러 정책 대안의 비용과 효과를 객관적으로 따져 실제 정책을 선택한다. 대북정책도 정책목표와 정책환경에서 출발하여 엄격한 논리로 추론해야 남한 내 합의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엄격한 논리라는 맥락에서, 남한과 북한이 각각 협조와 제재라는 두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간단한 남북한게임 모델을 만들어보자.
협조와 제재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나은지는 ① ② ③ ④ 결과가 어떠하냐에 달려있다. ①은 남북한 모두 협조하는 결과고, ④는 쌍방 모두 상대를 제재하는 결과다. 한국은 남북한이 함께 협력하는 것(①)을 최선의 결과로 인식하고, 북한만 협력하는 것(③)을 차선의 결과로 인식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한국의 선호도는 ① 〉③ 〉④ 〉②(일방적 양보를 최악으로 인식하는 상황) 아니면 ① 〉③ 〉② 〉④(파국을 최악으로 인식하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한국이 ① 〉③ 〉② 〉④의 선호도를 보인다면 북한이 협조하든 말든 협조하는 것이 한국 자신에게 유리하다. 이처럼 상대 선택에 관계없이 늘 유리한 전략을 우위전략이라고 부른다.
반면 북한은 한국만의 양보 · 협력(②)을 최선의 결과로 인식하고, 또 남북한 대립 · 파국(④)이나 북한만의 양보 · 협력(③)보다 쌍방의 양보 · 협력(①)을 더 선호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북한의 선호도는 ② 〉① 〉③ 〉④(파국을 최악으로 인식하는 상황) 아니면 ② 〉① 〉④ 〉③(일방적 양보를 최악으로 인식하는 상황)이다. 북한이 ② 〉① 〉④ 〉③의 선호도를 갖는다면 한국이 협조하든 말든 협조하지 않는 게 북한 자신에게 나은 우위전략이 된다.
남북 각각이 2개의 선호도를 갖는 상황에서는 네 가지 선호도 조합이 가능하다. 먼저, <표 2>의 상황 A에서 북한은 협조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고, 한국은 협조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선호도를 서로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최악(④)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상호주의로 최선(①)을 추구하기는 어렵다. 이미 자신에게 최선(②)의 결과를 얻은 북한이 한국의 상호주의에 호응하여 상호협력(①)으로 갈 동기는 작다.
상황 B에서도 북한은 일단 협조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이를 인지하는 한국은 자신에게 최악(②)의 결과보다 차악(④)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 상황에서 한국이 확고한 상호주의전략을 취할 수 있다면 상호배반(④)보다 상호협력(①)을 선호하는 북한은 이에 호응할 가능성이 높다.
상황 C의 한국은 북한이 협조하든 말든 상관없이 협조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를 인지하는 북한은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차선(①) 대신 최선(②)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북한은 이미 최선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굳이 상호주의에 호응할 동기는 작다.
상황 D는 상대 선택과 관계없는 우위전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만일 한국이 확고한 상호주의전략을 고수할 수 있다면 북한은 한국의 상호주의에 호응하여 최악(④)을 피하고 상호협력이라는 차선(①)을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5 · 24조치를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해제해야 할지를 놓고 현재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상황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바람직한 대북 전략에 대해 합의가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종종 상황인식이 다르지 않음에도 대북 전략을 서로 다르게 주장하기도 한다. 상황이 A, B, C, D 혹은 기타 가운데 어떤 것인지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결과는 별 이견 없이 명확하게 정리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공유된 상황인식과 논리적 추론이 대북 전략 방향에 대한 합의를 가능하게 한다.
상호주의 효과를 보기 위해 상호주의적 대응 정도를 반드시 상대 행동과 동일하게, 즉 등가(等價)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이빨 하나에 이빨 하나’ 대신 ‘이빨 열 개에 이빨 하나’처럼 비례적으로 대응해도 상호협조가 가능하다. 또 반드시 곧바로 대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응에 시차가 있더라도 상대 행동에 따라 행동한다는 일관성만 갖추면 상호협력의 결과가 가능하다.
상호주의전략은 철저한 이행이 중요하다. 유연하게 운용하는 상호주의는 상호협력이라는 상호주의 본연의 효과를 얻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의 상호주의전략이 확고하다고 상대가 인식해야만 상대는 자신의 협력이 곧 상호협력이고 또 자신의 배반은 곧 상호배반이라는 판단 아래 협력을 선택하려 한다.
| . 인양된 천안함 선체에서 군 요원들이 조사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
북 협조적 행동에 5 · 24 해제 여부 달려
상호주의전략은 자칫 갈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적절한 타협선에 대한 생각이 다를 때, 즉 양보로 행한 행위를 상대가 양보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배신으로 보는 경우, 서로가 상대를 제재하여 갈등이 증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 양보로 상호주의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호주의는 상대 마음을 바꾸는 전략이 아니다. 상대 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다. 감흥을 통한 상대 마음 바꾸기는 상호주의보다 일방적인 양보로 더 가능하다. 북한이 좋아서 혹은 한국 정부가 싫어서 북한에 무조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그리고 북한 정권이 싫어서 북한에 무조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 모두 전략적 행동이 아니다. 상대가 좋든 싫든 자신에게 유리한 상대 행동과 결과를 유도하는 것이 전략적 태도다.
친구와도 깨질 수 있고 적이라도 이해관계가 맞으면 성사될 수 있는 것이 협상이다. 적대적 관계에서는 좋다거나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적대적 관계에서 사과는 일종의 굴복으로 받아들여진다. 적대적 상대에게 요구할 것은 사과보다 협조적 행동이다.
5 · 24조치를 해제하려면 북한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천안함 폭침과 아무 관계 없다고 주장하는 북한으로서는 잘못을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쁜 행동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요구할 것은 과거 행위에 대한 사과보다 미래 행위에 대한 안전장치다. 서해, 특히 남측 수역에서 북한의 모든 군사적 활동을 금지하거나 감시받겠다는 북측의 협조적 행동이 사과보다 훨씬 중요하다.
상호협력은 쌍방이 상호배반보다 상호협력을 더 선호해야 그 의미를 갖는다. 상호협력에는 상호주의가 효과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상호주의가 상호협력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상호주의로 상호협력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지금 당장의 이득뿐 아니라 미래에 얻을 이득도 중시해야 한다. 각 상황에 맞는 전략의 정확한 계산은 남북 간 그리고 남남 간 갈등해소에 필요하다. 전략의 엄격한 계산은 최선의 결과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도 가능하게 만든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제428호 | 201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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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베크링의 마지노요새. 땅속 깊은 곳에 박혀 있는 대형 잠수함 모양인데 콘크리트구조물 지붕 위 강철 포탑(작은 사진)에 대포 등을 탑재할 수 있었다. |
6주만에 파리 점령, 독일군 승부수는 우회 침공이었다 |
⑰ 우회와 기습
'방어가 최선' 맹신한 프랑스 군부 … 국경선 지역에 마지노요새 구축독일은 "철옹성은 피하는 게 상책" … 돌아서 허찌르기 전략으로 승리
지금으로부터 꼭 75년전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이른바 전격전(blitzkrieg)으로 서유럽 침공을 시작했고 프랑스는 한달반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한 1939년 9월 이후 8개월 동안 독일 봉쇄에 주력했는데 마지노(Maginot)선이 주요 봉쇄선이었다. 독일의 서유럽 침공에는 돌아가기, 허 찌르기, 섞기, 길 빌리기 등의 전략적 키워드가 깔려있었다. 먼저, 돌아가기다 (迂回)
참호전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살상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서 프랑스군 지도부는 방어가 최선의 전략이라고 인식했다.
1927년 프랑스 육군장군 앙드레 마지노는 독일과의 국경에 철옹성을 세울 것을 건의했고 1936년부터 지붕 있는 포대의 요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격전으로 불리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신속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회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독일군은 난공불락의 마지노요새를 우회했다. 독일군이 마지노요새를 점령하고 있을 때에는 연합군이 마지노요새를 우회하여 독일로 진군했다. 철옹성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손자병법식으론 우회(迂回)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다.
둘째, 허 찌르기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은 우회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허를 찔렀기 때문에 성공했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에 마지노요새를 구축하고 베네룩스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과의 국경, 특히 저지대에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벨기에 아르덴 삼림지역은 탱크와 같은 중무장군이 통과하기 어렵다고 프랑스는 판단해 독일군 침투로로 예상하지 않았다. 실제 독일군의 주 침공로는 바로 아르덴 삼림지역이었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예상치 못한 루트를 선택하여 프랑스 깊숙이 침투했고 프랑스군을 전방과 후방으로 분리시켜 승리를 거뒀다.
기만술 함께 편 노르망디 · 인천 상륙작전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은 작전 성공을 위해 다른 지역에 상륙한다는 기만작전을 전개했다. 마찬가지로 1950년 유엔군과 국군도 인천상륙작전을 북한군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거짓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동쪽에서 소리치며 서쪽을 공격하는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다.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부담이 크다. 초강대국 미국조차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국지전을 몇 개로 한정하느냐에 따라 행정부마다 군사전략을 다르게 수립했다. 각자가 한정된 자원으로 공격과 방어를 수행하는 상황에서는 일부 지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축구 승부차기에서 골키퍼는 슛의 예상 방향을 좁혀서 방어하고, 야구에서도 타자는 투수의 예상 구질을 좁혀서 볼을 노린다.
스포츠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쟁에서 유리한 선택은 상대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상대가 가위, 바위, 보를 낼 때 내가 이길 수 있는 전략은 각각 바위, 보, 가위다. 만일 상대 선택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이기기 쉽다.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상대 선택을 본 후 자신의 선택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눈과 손이 빠른 사람은 이길 가능성이 높다. 축구 승부차기나 야구 투타 대결에서도 상대 선택을 관찰한 후에 자신의 선택을 정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선수는 승률이 높다.
내 선택을 상대가 잘못 알아도 이기기 쉽다. 도박과 스포츠 등 각종 게임은 주로 상대를 속여야 이긴다. 도박에서 상대가 내 패를 잘못 읽으면 내가 이득을 보고, 축구에서 드리블은 주로 페인트(feint)로 돌파하는 것이며, 야구에서도 투수의 투구나 주자의 도루 모두 상대 예상의 허점을 찔러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은 간첩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상대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승리 가능성을 높인다. 물론 상대가 나의 수를 정확하게 읽어주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유리할 때도 있다. 치킨게임의 배수진이 그런 예다. 그런 득실구조를 제외한 대부분 상황에서는 내게 여러 선택지가 있고 또 상대가 내 선택을 알 수 없는 것이 내게 유리하다.
셋째, 섞기다.
최선책이 상대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면 최선책은 돌고 돌게 된다. 예컨대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상대 가위에 대한 나의 최적전략은 바위이고, 나의 바위에 대해 보가 상대의 최적전략이며, 상대 보에 대한 나의 최적전략은 가위다. 이런 상황에서 최적전략은 어떤 모습일까. 가위, 바위, 보를 적절하게 섞은 것이 최적전략이다.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특정 선택을 유독 많이 내는 사람들은 그런 습관을 상대에게 읽히면 질 가능성이 높다.
75년전 유럽으로 돌아가서, 독일의 프랑스 공격 루트는 고지대와 저지대라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단순화해보자. 프랑스가 방어력을 고지대에 집중하는 동안 독일군이 광활한 저지대를 통과하는 것은 독일에게 최상(+2)의 결과를, 프랑스에게는 최악(-2)의 결과를 가져다줬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만일 프랑스가 저지대 방어에 집중해 있는 동안 독일군이 좁은 고지대를 통해 돌격하면 독일은 차선(+1)의 결과를, 프랑스는 차악(-1)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독일군이 저지대 루트를 선택하고 프랑스가 이를 정확히 대비한 경우는 프랑스가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한 차선(+1)의 결과를 얻고 독일은 기습공격이 없어 어느 정도 피해가 불가피한 차악(-1)의 결과로 가정할 수 있다. 만일 독일군이 고지대 험로를 통과하고 프랑스가 그 길목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이는 독일군에게 최악(-2)이고 프랑스군에게 최상(+2)이었을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의 공격 루트에 자국 군대를 배치하려하고 독일은 프랑스군이 없는 곳으로 공격하려하기 때문에 최적전략은 돌고 돈다. 상대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군을 이동하는 것 그리고 상대 선택을 관찰하자마자 자국의 군대이동을 신속히 완료하는 것 모두 쉽지 않다. 결국 상대 선택과 관계없이 스스로 판단하여 자국 군대를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다.
독일은 고지대와 저지대를 어떤 비율로 공략해야 하는지 고민했을 것이다. 즉 고지대에 배치할 독일 공격력의 비율(q)과 저지대에 배치할 비율(1-q)의 계산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고지대에 군사력을 얼마나 배치할지 즉 프랑스 전력의 고지대 배치 비율(p)과 저지대 배치 비율(1-p)을 잘 계산했어야 했다.
독일의 최적전략은 고지대와 저지대를 1대 1의 비율(q=½)로 나누어 공격하는 방안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최적전략은 고지대와 저지대에 각각 1대 2의 비율(p=⅓)로 군사력을 배치하는 방안이다. 최적의 혼합비율은 다음 방정식으로 계산할 수 있는데, 굳이 직접 확인할 이유가 없는 독자들은 수식 부분을 우회하는 것도 전략적인 독서방법임은 물론이다.
프랑스의 득실 = p [(+2)(q) + (-2)(1-q)] + (1-p) [(-1)(q) + (+1)(1-q)] = p (6q?3) + (1-2q)
독일의 득실 = q [(-2)(p) + (+1)(1-p)] + (1-q) [(+2)(p) + (-1)(1-p)] = q (2-6p) + (3p-1) 위 계산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독일이 어떤 루트로 공략해도 그 효과는 동일하게 만드는 방어선 구축이 프랑스의 최적전략이다. 즉 아르덴 삼림지역과 같은 고지대에도 저지대 배치 군사력 규모의 절반 정도를 배치하는 것이 프랑스의 최적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아르덴 지역을 소홀히 했고 결국 방어에 실패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고지대 대 저지대 비율을 각각 1대 2와 1대 1로 결정한 선택은 독일과 프랑스 가운데 누구도 혼자 선택을 바꿔 자국이 더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이다. 만일 프랑스가 1대 2 비율보다 훨씬 더 저지대에 치중한 선택을 한다면 독일은 고지대로 공략할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저지대 치중은 프랑스가 취해서는 안 되는 작전이었다. 반면에 1대 2라는 프랑스의 선택은 독일에게 그대로 읽혀져도 더 나빠질 게 없다. 이 상황에서는 독일이 고지대와 저지대를 1대 1 비율로 공략하고, 이에 프랑스는 고지대와 저지대를 1대 2의 비율로 방어하는 것이 내쉬균형이다. 여기서 내쉬균형이란 혼자만 선택을 바꿔서는 더 나아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끝으로, 길 빌리기다.
벨기에는 국가 형성기인 19세기부터 이차대전까지 중립국으로 인정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때 독일은 프랑스를 치기 위해 벨기에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빌려주지 않으면 벨기에를 점령하겠다고 통고했다. 이에 벨기에는 거부했고 곧 독일에게 점령됐다. 독일이 패배해 일차대전이 끝나면서 벨기에는 중립국 위치와 왕정을 복원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75년전 다시 발생했다. 차이가 있는 것은 독일이 벨기에에게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 없이 바로 침공했다는 점이다. 벨기에 레오폴드 3세는 영국에서 벨기에 망명정부를 이끌지 않고 독일에게 항복했다. 결국 독일 패전 후 권좌에 복귀하지 못했고 대신 아들이 즉위했다. 일차대전과 이차대전 당시 벨기에는 프랑스 원정의 길을 쓰겠다는 독일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까.
두 세력 충돌 때 중립보다 개입이 유리
기원전 658년, 진(晉)나라는 우(虞)나라에게 괵(?)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우(虞)나라가 길을 빌려주자 진(晉)나라는 괵나라를 정벌한 후 돌아오는 길에 우(虞)나라도 정벌해버렸다. 이것이 가도멸괵(假道滅?)의 출처다.
가도멸괵의 역사 때문인지 역사상의 가도 요구는 대부분 거절됐다. 여진을 정벌하기 위한 거란의 가도 요구는 고려가 거부했고, 명을 정복하기 위한 왜의 가도 요구는 조선이 거부했다. 거부(拒否)의 대가로 고려와 조선은 각각 거란 그리고 왜와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길을 빌려줘도 되는지는 특히 약소국에게 생존과 관련된 고민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21장에서 두 세력이 싸울 때 약자가 중립을 지키면 승자의 먹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자에게 승자는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고 또 패배자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반대로 누구를 도왔고 도움을 받은 측이 승리하게 되면 그 승리자는 도움을 갚으려 할 것이며, 만일 도움을 받은 측이 패배하게 되더라도 그 패배자는 자신을 도운 자에게 배려할 것으로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중립보다 개입을 권고했다.
도와줘서 성공한 경우도 있고 도와주고 망한 경우도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성공한 사례이고, 가도멸괵과 토사구팽은 실패한 사례다. 길을 빌려주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빌려주든 빌려주지 아니하든,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은 터지기 쉽다. 고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만 새우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그 역할은 승패를 뒤바꿀 정도로 강한 힘이 아니라,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중간적 입장에 의해서다.
오늘날 공격과 방어의 경쟁은 종종 목도된다. 군사안보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과 방패 간의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창은 상대의 허를 찌르려 하고, 방패는 창이 향할 곳에 있으려 한다. 공격에는 우회와 기습이, 방어에는 혼합적 대응과 예방적 중재가 효과적일 때가 많다. 모든 걸 뚫는 창 그리고 모든 걸 막는 방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26호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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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16. 선동 · 선전의 함정 |
| 1932년 4월 대통령결선투표를 앞두고 히틀러가 유세하고 있다. 괴벨스(사진상 히틀러 뒤편 바로 왼쪽)에 의하면 나치는 독일국민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독일국민이 나치를 선택했다. 그리고 독일국민은 그 대가를 치렀다. |
선동엔 증오의 대상 필수 … 괴벨스, 전선 너무 확대해 자멸 |
⑯ 선동 · 선전의 함정
“우리 행동을 국민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고, 국민이 위임한 후 행동해야 한다.” “정치란 불가능한 기적을 일궈내는 것이다.” “위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선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 예술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정확한 표본 추출이 표본 크기보다 중요
누구의 어록일까. 존경받는 저명 민주 지도자의 발언일까. 그 반대다. 지금으로부터 꼭 85년 전인 1930년 4월 26일.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 선전책임자로 임명한 요제프 괴벨스가 한 말이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그 뿌리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괴벨스는 나치당이 제2당 또는 제1당으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8년 5월 선거에서 3%에 불과했던 나치 득표율이 30년 9월 선거에서 18%로 급등했다. 3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히틀러를 당선시키지는 못했지만 결선투표에 진출시켰다. 또 32년 제국의회가 해산된 직후 실시한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 득표율로 제1당이 됐고, 11월 총선에서도 제1당 자리를 유지했다. 33년 1월 수상에 취임한 히틀러는 그해 3월 “제국정부의 정책과 조국 독일의 민족적 재건에 대해 국민을 계몽하고 선전” 할 제국선전부를 설립하고 그 장관에 괴벨스를 임명했다.
괴벨스의 선전방법론은 그의 어록만으로 쉽게 이해된다. “선전은 쉽게 학습될 수 있어야 하고, 간단한 용어나 슬로건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다” 는 괴벨스의 소신대로 그의 어록 또한 간단명료하다. 물론 오늘날 전해오는 그의 어록이 실제로 전부 그의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그의 선전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 | | 1 1933년 4월 베를린 이스라엘백화점 앞의 유대인업체 불매 운동. 표지판에는 “독일인이여! 자신을 보호하라! 유대인에게 구매하지 말라!”고 적혀있다. 2 1936년 2월 동계올림픽에서 히틀러와 괴벨스(맨 왼쪽)가 사람들에게 사인해주고 있다. 당시 나치는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 |
먼저, 대중의 인식과 행동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대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어버린다” 는 괴벨스 말대로 국민의 뜻은 가변적이다. 어쩌면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자신들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국민의 지지가 극단적으로 왔다갔다 한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나은 정치인과 정책을 선택한다는 전제하에서 신성시된다. 숱한 정치인 가운데 옥석을 가리는 판단이 쉽지 않지만, 유권자 다수가 스스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에 대해 확신한다. 선전에 흠뻑 빠져 있음에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게 사로잡는 것이 선전 비결이라고 괴벨스는 강조했다. 선동 받는 대중 대부분은 자신이 주인이고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남에 의해 조정될 뿐이다.
대중이 선동 대상이었던 괴벨스 시대와 달리 디지털시대의 대중은 선동 주체가 될 수 있다. 선동을 주도할 정치적 의도가 없다면 심리적 동기라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소셜네트 워크서비스(SNS)에 직접 올린 정보가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때 느끼는 자기존재감이 그런 예다. 정보 전달 행위의 심리적 동기 역시 아날로그시대든 디지털시대든 감정 공유를 매개로 하는 큰 네트워크에 포함됨으로써 영향력 집단에 속했다는 안도감이다.
둘째, 선전에서는 이성보다 감성과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여러 선거와 전쟁 때 괴벨스가 활용한 도구는 확성기연설, 신문, 포스터, 유니폼, 음반, 라디오, 영화, 취주악단, 합창, 횃불퍼레이드, 대규모집회 등이었고 주로 감성을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 | | 3 1935년 히틀러와 괴벨스(맨 오른쪽)가 당시 세계적인 독일 영화사인 유니버설영화사(UFA)에서 영화를 살펴보고 있다. | |
특히 영화는 나치정권이 공을 들인 선전수단이었다. 나치 때 제작된 영화들은 오늘날에도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상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편집하는 게 더 큰 감동을 준다. 다큐멘터리나 사건보도에서도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그런 설정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 이미 종료된 이슈도 영화나 TV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이슈화하면서 새로운 조치가 내려지기도 한다.
셋째, 대중을 조정하는 것은 감성 가운데에서도 불안 · 공포 · 증오라는 것이 괴벨스의 해석이다. “좌절감을 이용하되 줄여주어야 한다” 는 괴벨스 말처럼, 바이마르공화국의 실패로 좌절감이 이미 팽배했기 때문에 선동이 통했다.
좌절감은 증오로 연결된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 이라고 말한 괴벨스는 27년에 주간지 ‘공격(Der Angroff)’을 창간해 반(反)유대주의를 활용했다. 나치당 선전책임자로 부임한 30년에는 ‘공격’을 주간지에서 일간지로 바꿔 발간했다. 독일인이 불행하게 된 탓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게 유대인이었다. 감성적인 대중은 악인의 모든 것이 다 나쁘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증오는 쉽게 증폭된다. 특정 집단을 증오하면서 독일 ‘민족공동체’ 의식과 ‘투쟁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일부 극우집단은 자신들의 불행이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탓이라고 선동한다. 대내적으로도 탓 만들기는 존재한다. 역대 대통령들 임기 후반 때 나쁜 일만 생기면 모두가 인기 없는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탓 만들기 일종이다.
하지만 증오 대상을 너무 확대해 스스로 사면초가를 만드는 것은 전략적이지 못하다. 나치 독일은 서로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볼셰비키와 앵글로색슨 모두를 적대시함으로써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맥락에서 맺어진 미 · 영 · 소 연합군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넷째, 악마가 등장하면 영웅 출현도 필연적이다. 나치의 증오감 고취에는 히틀러 카리스마와 신화의 구축이 뒤따랐다. “대중은 지배자를 기다릴 뿐, 자유를 줘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며 괴벨스는 대중이 아래로부터의 결정보다 위로부터의 지배를 더 편하게 느낀다고 봤다.
오늘날은 대중이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괴벨스 시대와는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스스로를 낮춰야 지도자로 남을 수 있다. 사실 괴벨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중이란 여성과 같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거구보다 신체적 약점을 지닌 사람에게 모성애를 보인다.” 대중은 정치인에게 존중 받기를 원한다. 경쟁자가 대중을 모멸했다고 인식시킬 수 있다면 대중을 쉽게 선동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을 존중하는 태도는 언론보도에서도 관찰된다. 종종 언론매체들은 매 선거결과를 황금분할로 표현한다. 어떤 선거결과가 황금분할인지 선거 전에 밝힌 적도 없으면서 선거만 끝나면 숭고한 국민의 뜻이자 명령으로 표현한다. 바람직한 황금분할로 유권자 전체가 동의할 선거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실제 선거결과가 황금분할이라고 하더라도 수천만 명의 유권자가 미리 조율해서 특정 선거결과가 나오도록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다섯째, 선전에서는 내용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보다 신뢰를 받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괴벨스는 다음 같은 말로 거짓 선동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기왕 거짓말을 하려면 될 수 있는 한 크게 하라.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는 큰 거짓말을 잘 믿는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듣게 되면 처음에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그 다음에는 의심하게 되고 계속 듣다 보면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선동은 문장 하나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해명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해명할 때면 이미 대중은 선동 당해있어 어떤 해명보다 선동 내용을 더 잘 기억한다.”
SNS에 떠도는 거짓 정보를 언론이 ‘SNS에 돌고 있는 내용’이라고 보도만 해도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후의 진실 규명 행위는 기억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수가 거짓을 진실로 말하면 나머지 사람도 그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세 사람이 없던 호랑이를 봤다고 말하면 없는 호랑이의 존재가 진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그런 예다. 또 거짓을 자꾸 듣다보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삼시성호(三時成虎)란 표현이 가능한 이유다.
상식은 거의 모든 사람이 공유한 생각이다. 그런데 때론 목소리 큰 일부의 생각이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급진세력과 반동세력 모두 자신의 의견이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다수 생각이 무조건 진실로 받아들여지면 포퓰리즘과 인민재판이 흥한다. 다수 생각이 늘 옳다는 생각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물론 다수의 지속적 생각은 대부분 옳았지만 특정 시점의 다수 생각은 잘못되었을 때가 많다. 오늘날 독일 국민은 나치에 대한 당시 독일 국민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획일보다 다름이 진실에 더 가깝다.
괴벨스식 선동과 선전은 정권 장악에 도움이 됐다. 그렇지만 선동과 선전만으로 정권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전쟁을 일으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괴벨스 부부는 여섯 아이를 독살하고 자살했다. 거짓에 의존한 선동과 선전은 이처럼 결국 본인에게 더 큰 좌절감을 줄 수 있다.
독일국민의 지지로 출범한 나치정권은 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을 활용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자기 파멸의 방법을 잉태하고 있다. 선악이나 증오의 감정이 지배하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요즘처럼 따뜻한 봄날에도 선동과 부화뇌동이 난무할 때면 깊게 드리워진 괴벨스의 그림자가 보인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24호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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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 한림대 교수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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