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토요일 1월 5일에 대전 아트시네마에 가서 비토리오 타비아니와 파올로 타비아니 감독의 <레인보우 나의 사랑>을 봤습니다.
1929년생과 1931년생인 형제가 공동 감독하여 2017년에 만든 러브스토리입니다.
아마도 타비아니 형제의 유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난 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잇는 영화 <파드레 파드로네>(혹은 <아버지, 주인님>)를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부문에서 필름으로 보는 행운을 얻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깊이 사고하게 만드는 영화였고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부장제'의 부조리함, 곧 아버지와 자식 간의 뒤틀린 관계를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 아버지로서의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서
인간 본성의 벌거벗은 듯 추악하기 그지없는 초라함과 가련함이
뭐라 말로 표현 못할 인간의 삶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레인보우: 나의 사랑>을 보러 가면서도 기대했던 것은 역시 그 인간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었습니다.
예고편을 보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이탈리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지만 타비아니 형제의 영화인만큼 그저 그것만은 아닙니다.
<파드레 파드로네>를 비롯해, 타비아니 형제 감독들의 영화는 이탈리아의 자연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타비아니 식의 영화적 사실주의는 관객들로 하여금 독특한 영화 체험을 하게 합니다.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영화사 상의 사조는, 스튜디오 촬영이 아닌 현지에서 촬영을 하고, 현지 주민을 배우로 등장시키는 등 영화적인 극사실주의를 고집하는데, 타비아니 형제는 이러한 네오리얼리즘에 의해 비로소 담겨질 수 있는 이탈리아의 사실적인 풍경과 사람들을 담아냅니다.
이탈리아는 온갖 다양한 유럽 문화의 어머니와도 같은 나라입니다.
반면에 가장 봉건적인 모습이 20세기 전반기까지도 남아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 극렬히 드러나는 전쟁을 겪으며 아마도 타비아니 형제들이 직접 체험했을 부조리한 전쟁의 참상과 아이러니한 인간 군상이 <레인보우: 나의 사랑>에는 담겨있지 않은가 합니다.
고전 영화 <오즈의 마법사> 삽입곡인 <Over the Rainbow>의 테마 멜로디가 간간히 흘러나오지만 가사와 전체 멜로디가 영화 전체에 걸쳐 흘러나오는 식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없습니다.
아직 테레비가 없던 시절, 그리고 아직 세계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절에 영화관과 레코드판을 통해 저 미국에서 전해져 온 노래 <Over the Rainbow>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지구 상 가장 압도적이며 거대한 문화 세계를 구축한 영어 문화를 상징하는 콘텐츠였지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같은 동네서 이웃해 살던 이들조차도 파시스트와 파르티잔으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던 비열한 현실이 펼쳐지던 아비규환과도 같은 전쟁통이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영화의 주인공 20대 초반의 젊은 파르티잔 청년은 이념도, 국가도, 역사도 아닌 오직 '무지개 너머 저 세상'같은 사랑만을 쫓아 광란의 며칠 간을 보냅니다.
인간은 이념도 이상도 윤리도 제도도 아닌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진정 인간다울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역시 전쟁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남부군>에 나오는 빨치산(곧, 파르티잔)들의 모습 역시 이념보다는 애욕과 배고픔 등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본능에 휘둘리는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1977년 칸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파드레 파드로네>를 통해 아버지의 환상, 일루젼을 깨뜨렸던 타비아니 형제는 <레인보우: 나의 사랑>에서 러브스토리를 그리면서도 그 이면의 인간 본성을 독특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포함해 인물들 상당수는 유치하고 추잡(醜雜)합니다.
주인공은 이성 친구를 사랑하고 부모님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의 부모님을 사랑하며 인간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핑계로 다른 인간을 죽이기도 합니다.
모순 덩어리 인간의 추악함을 그려내는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아름다운 듯한 사랑이 실제로는 그저 추악한 인간 본성과 다를 것 없이 앞뒤 안 맞는 것이자 이기적인 행위의 복합체이며, 비이성과 광기의 한 양상일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87세와 89세의 형제 감독이, 어쩌면 자신의 유작일 수도 있을 영화를 어느 젊은 친구의 '전쟁'과 '사랑'을 소재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 싶습니다.
다양한 오락 영화를 만들던 감독들도, 인생의 말년이 되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알듯모를듯한 영화를 자신의 유작으로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만 타비아니 형제 감독은 자신들의 영화 경력의 시작과 동일하게 인간 본성을 그리고, 인간 세상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20대 질풍노도의 시절, 세상은 이념과 이익을 위한 광란의 전쟁을 치를 때 젊은이는 자신만의 광란의 사랑을 쫓아 그 세상을 그려내고 있는 타비아니 감독들이 전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뚜렷합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라는 거겠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여인의 사랑을 쫓아 적들의 총탄 속을 뚫고 달리는 젊은이의 초상이 정말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이,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살던 저 켄터키 주 시골 마을에 내리쬐이던 구름 속 햇살은 이후에 <자전거 도둑>의 감독이자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거장 중 한 명이었던 비토리아 데 시카의 <밀라노의 기적>에 인용됩니다.
그리고, 그런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잇는 타비아니 형제는 다시 <오즈의 마법사> 속 <오버 더 레인보우>를 자신의 영화로 그려내네요.
비토리오와 파올로 타비아니 형제 감독들의 영화에 존경을 표합니다.
21세기의 권력 지향 인물들에게 <파드레 파드로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파드레 파드로네>, 그리고 <레인보우: 나의 사랑> 속에 나오는 이탈리아 산들의 풍경이 그립네요.
할일이 많아서 조만간에는 힘들지만 2026년 쯤에는 다시 한 번 이탈리아에 가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