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 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 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 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
- 배한봉, <빈곳>
언젠가 깨진 바위틈에서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을 보고 기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자리에 어디선가 날아온 흙이 시나브로 쌓이고, 들꽃 씨앗도 떨어져 싹을 틔운 듯했습니다. 그 위에 이따금 한 번씩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그 식물을 키워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운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가치 있는 것들은 ‘틈’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진 바위 틈새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잎과 줄기를 키우고, 마침내 예쁜 꽃을 피운 그 식물처럼, 물건과 물건의 틈, 사람과 사람의 틈에서 모든 찬란하고 향기로운 것들이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틈’을 다른 말로 바꾸면 ‘사이’입니다. ‘관계’라고도 하죠. 인간의 모든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밀도 있는 관계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잎과 줄기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젊어서는 빈틈없는 사람이 되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일을 해도 빈틈없이 마무리하려 노력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책잡히지 않으려, 말과 행동에 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틈이 없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됩니다. 생각에, 삶에, 관계에 적당히 틈을 남겨두고 조금은 헐겁게, 조금은 여유롭게 사는 삶이 오히려 찬란하고 향기로운 삶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틈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가슴 한쪽을 비워놓은 사람만이 사랑의 싹을 틔우고 사랑의 꽃을 피웁니다. 이제, 틈을 보이며 살겠습니다.
― 본문 중에서 (141~142p.)
봄날이었다
지은이 : 김병효 | 분 야 : 문학 > 에세이 > 한국에세이
출간일 : 2017년 7월 17일 | 판 형 : 148×210mm
제 본 : 무선 |면수 : 216쪽 | 가 격 : 13,500원
ISBN : 979-11-955759-8-5
지은이_ 김병효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한국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우리은행 부행장을 거쳐 우리 아비바생명 대표이사, 우리프라이빗에퀴티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국제자산신탁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저자는 평생을 금융인으로 살아오면서 시와 문학을 멀리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일상의 페이지에는 늘 시가 함께해왔고 문학의 향취가 남아 있다.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금융 분야에서 그가 맡은 바 임무를 잘 감당해내며 삶의 여유와 품격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는 문학의 역할이 컸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글로 쓰인 저자의 인생 자취가 명시들과 한데 어우러져 이 책의 풍격(風格)을 더해준다.
[출처] [사람과나무사이] 봄날이었다|작성자 사람과나무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