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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년도별 분석 년대순별 외교책임 중요 관직자. 지공거,동지공거와 급제자와의 관계
고려1대 태조(太祖)
고려2대 혜종(惠宗)
944년 혜종원년(944)최언위(崔彦撝)○ 겨울 12월에 한림원령 평장사(翰林院令平章事) 최언위(崔彦撝)가 졸하였다. 언위는 신라 사람으로 타고난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며 어릴 때부터 글을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오르고 42세에 비로소 본국에 돌아오니, 집사시랑 서서원학사(執事侍郞瑞書院學士)로 임명되었다. 뒤에 신라가 귀부하자, 태조가 언위를 태자사(太子師)로 삼아 (文翰)의 임무를 맡도록 명하였다.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지어 정한 것이요, 당시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77세에 졸하였으며,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정종2년(947)최언위(崔彦撝)○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 최언위(崔彦撝)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이 빈공진사(賓貢進士)로 유학하여 후진에 들어가다가 거란에게 사로잡혔는데, 재주가 뛰어난 이유로 임용되어 관작을 받았다. 거란의 사신으로 귀성(龜城)에 왔는데, 거란이 장차 우리나라를 침략할 줄 알고 서신으로 보고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군사 30만 명을 뽑도록 명하여 광군(光軍)이라 하였다.
고려3대 정종(定宗)
최광윤(崔光胤)정종2년(947)○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 최언위(崔彦撝)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이 빈공진사(賓貢進士)로 유학하여 후진에 들어가다가 거란에게 사로잡혔는데, 재주가 뛰어난 이유로 임용되어 관작을 받았다. 거란의 사신으로 귀성(龜城)에 왔는데, 거란이 장차 우리나라를 침략할 줄 알고 서신으로 보고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군사 30만 명을 뽑도록 명하여 광군(光軍)이라 하였다.
고려4대 광종(光宗)
958년 元甫翰林學士雙冀 최섬(崔暹),진긍(晋兢) 二人급제
쌍기(雙冀) 본래 후주인(後周人)으로 후주에서 벼슬하여 산둥반도 등주(登州)에 있는 무승군(武勝軍)의 절도순관(節度巡官)‧장사랑(將仕郞)‧대리평사(大理評事)를 지냈다.
956년(광종 7) 후주의 봉책사(封册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머물게 되었는데, 병이 낫자 광종이 보고 그 재주를 사랑하여 후주로부터 신하로 삼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원보한림학사(元甫翰林學士)에 임명하였다.
최섬(崔暹)(급제1년차958)무오 9년○ 여름 5월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쌍기에게 명하여 공거(貢擧 과거(科擧))를 맡도록 하여 시(詩)ㆍ부(賦)ㆍ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을 시험하여 진사(進士)를 뽑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방(榜)을 발표하고, 갑과(甲科)의 최섬(崔暹) 등 2명, 명경(明經) 3명, 복업(卜業)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쌍기의 건의를 채용하여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했는데 이로부터 문풍이 비로소 흥성하였다.
(35년차993)三月 翰林學士 崔暹(35) 取 八月下敎 이유현(李維賢)등 10명 급제를 주었다.
(38년차996)三月 崔暹(38) 爲都考試官 取進士 下敎 12월 정사일 곽원(郭元)등 7명과 명경 6명 복업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김심언(金審彦)은 예전에 상시(常侍) 최섬(崔暹)에게 배웠는데 일찍이 김심언(金審彦)이 어렸을 때 그를 가르쳤는데, 최섬(崔暹)의 꿈에 김심언의 정수리 위에서 불이 나와 기운이 하늘에 뻗치는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이상히 여겨 딸을 아내로 삼아주었다. 후에 김심언은 재상에 올랐으며 백성을 아끼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치세력과는 특별히 연관을 맺지 않았으며 오직 학문을 통해서만 출세하였다.)
진긍(晋兢) 958년 급제 광문원소감(光文院少監). 한국역대인물 종합씨스템에는 본관이 남원(南原)이나 현종 때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진함조(晉含祚)를 시조로 삼고 있다. 남원(南原) 진씨시조 진함조(晉含祚)가 내사시랑평장사 까지 올랐다. (남원진씨의 선조인지는 불분명하다.)
960년 三月 元甫 翰林學士 雙冀 최광범(崔光範) 等 七人급제
최광범(崔光範)장원,서희(徐熙),최양(崔亮),이몽유(李夢遊),정겸유(鄭謙儒),박양유(朴良柔).김욱(金昱) 7명
최광범(崔光範)장원 기록 未詳
서희(徐熙943~998) 960(급제1년차),
○972(급제12년차)내의시랑(內議侍郞)송에,
○983(급제23년차) 좌승(佐丞) 서희(徐熙)를 병관어사(兵官御事)로,
○993(급제33년차)내사시랑(內史侍郞)중군사(中軍使), 서희를 보내어 거란을 설복시켜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얻고, 소손녕으로 하여금 철병(撤兵)하게 하였다.
○994(급제34년차)평장사(平章事)
○998(급제38년차) 태보 내사령(太保內史令) 서희(徐熙)가 졸하였다. 서희는 필(弼)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하고 성실하였다. 나이 18세에 갑과(甲科)에 발탁되어 시호 창위(彰威)
최량(崔亮) ? ~ ? 경주(慶州) (960 급제1년차 추정:확실시됨) 시호 광빈(匡彬)
○(993 급제33년차)계사 12년겨울 10월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급제33년차)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급제33년차)을 하군사(下軍使)로 삼아, 북계(北界)에 주둔하여 거란을 막게 하였다.
○(995 급제35년차) 을미 14년 여름 4월에 평장사 최양(崔亮)이 졸하였다. 최양은 경주(慶州) 사람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며, 글을 잘 지어 과거에 올라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왕이 잠저에 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사우(師友)로 삼았는데, 왕이 즉위하자 드디어 정승에 임명되니, 사람들의 기대에 매우 흡족하였다. 병으로 인하여 해임되었으나, 얼마 후에 왕이 측근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최양이 휴가를 얻은 지 100일이 되자, 어사(御史)와 선관(選官)이 규정에 따라 그를 관직에서 해임하기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윤허하였다. 그러나 생각건대 최양은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그 충정(忠貞)을 다하여 나를 도왔으니 그 공로를 생각하면 감히 잊을 수 없다. 이에 복직하기를 명한다." 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내사시랑 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郞平章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그가 죽자 왕이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증직하고 부의로 쌀 3백 석ㆍ보리 2백 석ㆍ뇌원다(腦原茶) 1천 각(角)을 주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광빈(匡彬)이란 시호를 내렸다. 후에 여러 번 태위(太尉)ㆍ태보(太保)ㆍ대광(大匡)을 증직하고, 왕(성종成宗)의 묘(廟)에 배향되었다.
《참고》
조부:최언위(崔彦撝) 혜종원년(944)○ 겨울 12월에 한림원령 평장사(翰林院令平章事) 최언위(崔彦撝)가 졸하였다. 언위는 신라 사람으로 타고난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며 어릴 때부터 글을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오르고 42세에 비로소 본국에 돌아오니, 집사시랑 서서원학사(執事侍郞瑞書院學士)로 임명되었다. 뒤에 신라가 귀부하자, 태조가 언위를 태자사(太子師)로 삼아 (文翰)의 임무를 맡도록 명하였다.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지어 정한 것이요, 당시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77세에 졸하였으며,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정종2년(947)최언위(崔彦撝)○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 최언위(崔彦撝)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이 빈공진사(賓貢進士)로 유학하여 후진에 들어가다가 거란에게 사로잡혔는데, 재주가 뛰어난 이유로 임용되어 관작을 받았다. 거란의 사신으로 귀성(龜城)에 왔는데, 거란이 장차 우리나라를 침략할 줄 알고 서신으로 보고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군사 30만 명을 뽑도록 명하여 광군(光軍)이라 하였다.
이몽유(李夢游) (960 급제1년차 추정:확실시됨) 2회의 지공거와 1회의 시취관(좌집정)
(983 급제23년차)○正匡 최승로(崔承老) 左執政 이몽유(李夢游)(23) 兵官御事유언유(劉彦儒)(22) 左丞노혁(盧奕)(22)과 함께 강은천(姜殷川)=강감찬(邯贊)을 시취하였다.
(986 급제26년차) 五年 三月 李夢游(26년차) 知貢擧 최영린(崔英藺)에게 급제를 주었다.
(987급제27년차) 三月 禮部侍郞 李夢游(27년차) 知貢擧 八月下敎 정우현(鄭又玄)과 명경(明經) 1명ㆍ복업(卜業) 1명ㆍ의업(醫業) 2명ㆍ명법업(明法業 법률학)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987 급제27년차) ○ 8월에 禮部侍郞 이몽유(李夢遊)에게 명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장(奏狀)과 공문(公文)의 이첩(移牒) 방식을 상정(詳定)하였다.
정겸유(鄭謙儒) (960 급제1년차 추정)
○ (983) 여름 5월에 좌승(佐丞) 서희(徐熙급제23년차)를 병관어사(兵官御事)로,
○ (983) 여름 5월에 대상(大相) 정겸유(鄭謙儒급제23년차)를 공관어사(工官御事)로 삼았다.
박양유(朴良柔) (960 급제1년차 추정)
○(993 급제33년차)계사 12년겨울 10월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 북계(北界)에 주둔하여 거란을 막게 하였다.
김욱(金昱) (961년 급제1년차 추정)
○성종 원년 (982 급제21년차) 이해에 시랑(侍郞) 김욱(金昱)을 송에 보내어 왕위의 계승을 알렸다.
961년 元甫翰林學士雙冀 왕거(王擧),七人급제
왕거(王擧)장원,유언유(劉彦儒),노혁(盧奕),이지백(李知白),최업(崔業),이겸의(李謙宜),설신우(薛神祐)
왕거(王擧)후일 기록 未詳
유언유(劉彦儒) (961 급제1년차 추정), 노혁(盧奕) (961 급제1년차 추정)
(983 급제22년차)○ 十二月 正匡 최승로(崔承老) 左執政 이몽유(李夢游) 兵官御事 유언유(劉彦儒) 左丞 노혁(盧奕)과 함께 강은천(姜殷川)=강감찬(姜邯贊)을 시취하였다.
이지백(李知白) 961(급제1년차 추정)
(981 급제20년차)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
(983 급제22년차) ○ 9월에 좌승(佐丞) 이지백(李知白)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993 급제32년차) ○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朴良柔)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이지백(李知白)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는데,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 대번에 가벼이 토지를 적국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옛사람의 시(詩)에, '천리 산하를 어린아이보다 가볍게 여기니, 두 조정의 관검이 초주를 원망하네.[千里山河輕孺子兩朝冠劍恨譙周]' 하였으니, 대개 초주가 촉한(蜀漢)의 대신이 되어 위(魏)에 토지를 바치도록 후주(後主)에게 권하여 영원히 웃음거리가 된 것을 이른 것입니다. 가벼이 토지를 떼어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先王)께서 행하시던 연등(燃燈)ㆍ팔관(八關)ㆍ선랑(仙郞) 등의 일을 다시 행하고 외국의 다른 법을 쓰지 않아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만약 옳게 여기신다면 마땅히 먼저 신명께 고한 뒤에 전쟁을 하든지 화친을 하든지 주상께서 이를 결정하소서." 하였다.
(995 급제34년차)이지백(李知白)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최업(崔業) 961년(급제1년차 추정)
○972년 (급제11년차) 내의시랑(內議侍郞) 서희(徐熙)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제(制)하여 왕에게 식읍을 더 주고 추성 순화 수절 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 병부상서부사 내봉경(檢校兵部尙書副使內奉卿)을, 최업(崔業)에게는 검교 사농경 겸 어사대부 판관광평시랑(檢校司農卿兼御史大夫判官廣評侍郞)을, 강례(康禮)에게는 검교 소부소감 녹사 광평원외랑(檢校少府少監錄事廣評員外郞)을, 유은(劉隱)에게는 검교상서 금부낭중(檢校尙書金部郞中)을 주었다.
이겸의(李謙宜) (961 급제1년차 추정)
○ (984 급제23년차)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 언덕에 성을 쌓아 관문(關門)의 성으로 하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를 막고 겸의(謙宜)를 사로잡아 갔다. 군사가 무너져서 성을 쌓지 못하고 돌아온 자가 3분의 1뿐이었다.
설신우(薛神祐) (961 급제1년차 추정)
(983 급제22년차) ○ 6월에 광록경(光祿卿) 설신우(薛神祐)를 형관어사(刑官御事)로 삼았다.
964년 翰林學士趙翌 김책(金 策),及第
趙翌 횡성조씨 [ 橫城趙氏 ] 시조 조욱(趙昱, 趙翌)
김책(金策)갑자 15년○ 봄 3월에 김책(金策)과 명경ㆍ복업 각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거둥하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김책에게 갈옷을 벗고[釋褐] 공복(公服)을 내려주어 잔치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미상
966년 翰林學士 王融 知貢擧 取進士 賜 崔居業 等二人及第 최거업(崔居業) 2인급제 한수령(韓遂齡)
최거업(崔居業) 장원급제 未詳
한수령(韓遂齡) (964년 급제1년차추정)
○ (984 급제20년차) 갑신 3년 한수령(韓遂齡)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王融 고려 초기의 관인이다. 광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지공거가 되어 12차례나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글 솜씨가 뛰어나 왕의 조서와 비문 등을 찬하였다.
〔955(1년차) 왕융(王融)을묘 6년○ 대상(大相) 왕융(王融)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광평시랑 순질(荀質)을 보내어 즉위한 것을 경하하였다.
975(20년차)(경종 즉위년)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大匡內議令兼摠翰林)으로 있을 때 신라 왕 김부(金傅 : 경순왕)를 상보(尙父)로 책봉하고, 도성령(都省令)의 관호(官號)를 내리는 조서를 찬(撰)하였다.
977(22년차) 독권관(讀卷官) 王融(王融)이 되었다.
981(26년차) 판총한림원 겸 병부령으로 있으면서 강주(康州)에 있는 지곡사(智谷寺)의 진관선사비(眞觀禪師碑)의 비문을 지었다.
997(42년차)왕융(王融)정유 16년○ 9월에 드디어 흥례부(興禮府)에 행차하고 대화루(大和樓)에 거둥하여 신하들에게 연회를 배풀고, 바다 가운데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 왕이 병환이 나서 기사일에 동경에서 돌아왔다.○ 겨울 10월 무오일에 왕이 병환이 매우 위독해져서 조카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 거처하였다. 평장사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도록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 주어 부정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하기까지 하겠느냐. 더구나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전을 펼 수 있으랴." 하고, 허가하지 않고 훙하였다. 이날에 송이 즉위하였다. 문의(文懿)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는 성종(成宗)이라 하고, 강릉(康陵 경기 개풍군(開豐郡) 청교면(靑郊面) 배야리(排也里) 강릉동(康陵洞))에 장사지내었다.
972년 是歲,王融 知貢擧 取進士 賜 楊演, 等四人,及第
양연(楊演),류방헌(柳邦憲),최성무(崔成務),주인소(朱仁紹)
양연(楊演) 장원급제 未詳
류방헌(柳邦憲)자 민칙(民則) 시호 정간(貞簡) 생년 갑진(甲辰) 944년 합격연령 29세
본관 전주(全州) [부] 성명 : 유윤겸(柳閏謙) [조부] 성명 : 유법반(柳法攀) [증조부] 성명 : 유기휴(柳其休) [외조부] 성명 : 염악(廉岳)
(972년 29세1년차) ○양연(楊演)장원급제, 유방헌(柳邦憲), 등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공문박사(功文博士)·광문교서랑(光文校書郞)·광문랑(光文郞)·국자주부(國子主簿)·사문박사(四門博士)를 역임하였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시무책이 채택되어 어사우사 원외랑(御事右司員外郞)이 되고, 이어 사관수찬관 기거사인 지제고 예부낭중(史館修撰官起居舍人知制誥禮部郞中)이 되었다.
(995몀 52세23년차)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었으며
(997면 54세25년차) 성종 十六年 八月 國子司業 柳邦憲(25년차) 知貢擧 (8월 취시 익년 정월 賜 )
목종元年 正月 賜邦憲所擧甲科주인걸(周仁傑)등5명과 명경7명에 급제를 주었다
목종초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왕이 사냥을 즐겨하는 것을 간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55세26년차998)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57세28년차1000) 禮部侍郞 柳邦憲(28년차) 知貢擧 송굉(宋翃)등15명과 명경8명에 급제를 주었다.
비서감 중추사(祕書監中樞使)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60세31년차1003) 헌화대왕릉신도비문(獻和大王陵神道碑文)을 지었고
판한림원사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감수국사 상주국 정의대부 하동현개국후 식읍삼백호(判翰林院事左散騎常侍參知政事監修國史上柱國正議大夫河東縣開國侯食邑三百戶)에 봉하여졌다.
(63세34년차1006) 내사시랑평장사금자흥록대부(內史侍郞平章事金紫興祿大夫)
(66세37년차1009)(현종 즉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다.
(66세37년차1009)○ 8월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유방헌(柳邦憲)이 졸하였다. 방헌은 성품이 인자하고 남의 사정을 잘 이해하여, 비록 갑작스러운 경우에도 일찍이 말을 급히 하거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는 일이 없었으며, 유학(儒學)에 뛰어나고 생업은 일삼지 않았다. 목종(穆宗) 때 간관(諫官)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가 직언을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방헌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남을 고자질하여 곧은 체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 점이다." 하였다.
시중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성무(崔成務) ? ~ ? 미상(未詳) 972 급제추정(급제1년차)
(998 급제26년차) 三月 左司郞中崔成務(26년차) 知貢擧 取進士 賜甲科 姜周載 等七人 乙科二十五人
同進十八人。恩賜一人。明經二十人。明法二十三人。明書五人。明算十一人及第。
(1002 급제30년차)三月 禮部侍郞·한림학사 崔成務(30년차) 知貢擧 박원휘(朴元徽)등9명 급제
주인소(朱仁紹) 972(급제1년차 추정)
(999 급제27년차) ○ 이부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송에 보내었다. 황제가 특별히 인소를 불러 보았는데, 인소가,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므로 거란에게 위협당하여 제재를 받고 있다.'는 사정을 진술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주고 돌려보내었다.
973년 春二月,王融 知貢擧 取進士 賜 白思柔 等二人,及第
백사유(白思柔),유윤부(柳允孚)
백사유(白思柔) 본관 대흥(大興) 전력 진사(進士) 장원급제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991년과 99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科擧)를 주관하였는데, 후에 재상에 오른 최항(崔沆)과 왕가도(王可道) 등 많은 인재를 많이 뽑았다.
(991 급제18년차) 翰林學士白思柔(18)。知貢擧 崔 沆 等六人。明經三人及第。
(991년 성종 10) 한림학사로서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大藏經)과 어제(御製:황제의 저작)를 보내 준 일에 대해 사례하였다.
(995 급제22년차) 白思柔(22)。知貢擧 李子琳。等五人。 明經三人及第。
유윤부(柳允孚)(973년 급제1년차 추정) 시호는 경안(敬安)이다.
○(1009년 급제36년차)유윤부(柳允孚)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1015년 급제42년차)○ 8월에 내사령(內史令) 유윤부(柳允孚)가 졸하였다.
974년 春三月,王融 知貢擧 取進士 賜 韓藺卿 等二人及第 유진(劉瑨)
한인경(韓藺卿) 장원급제 (급제1년차)
○ (989 급제15년차) 시랑(侍郞) 한인경(韓藺卿)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위덕유(魏德柔)를 송에 보내니, 황제가 모두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주었다.
(1007급제33년차)정미 10년○ 가을 7월에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경주(慶州) 사람 김융대(金融大)가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원손(遠孫)이라 속이고 양민 5백여 명을 저의 노비라 하면서 궁인(宮人) 김씨(金氏)와 평장사 한인경(韓藺卿)ㆍ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에게 선물로 보내어 후원(後援)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신문하여 사실을 알았으니, 그를 죄주소서." 하였다. 왕이 노하여 이내 한인경을 양주(楊州)로 귀양보내고, 김낙은 바다 안의 섬으로 귀양보내고, 김씨는 구리 1백 근을 벌금으로 내게 하니, 이를 들은 모든 사람이 경하하였다.
유진(劉瑨) (974 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35년차)3월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유진(劉瑨)을 상서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
(1011년 급제37년차) 3월에 유진(劉瑨)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삼았다.
(1012년 급제38년차) 유진(劉瑨)을 문하시랑으로 삼았다.
(1014년 급제40년차) 유진(劉瑨)을 검교태사수문하시중(檢校太師守門下侍中)으로 삼았다.
(1019년 급제45년차) 유진(劉瑨)○문하시중 유진(劉瑨)이 졸하였다. 유진은 충주(忠州) 대원현(大原縣) 사람이다. 후비(后妃) 중에 유씨(劉氏) 성을 가진 이는 모두 그의 종족에서 나왔으므로 대대로 척리(戚里)가 되었다. 사람된 품이 청렴 결백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광종 때부터 항상 근시(近侍)의 직에 있고 일찍이 외직으로 임명된 적이 없었다. 비록 임금을 잘 보좌한 것은 없었으나 자못 대신의 여망을 얻었다.
지공거(知貢擧) 명단
958 960 961 쌍기(雙冀) 964 조익(趙翌) 966 왕융(王融) 972 왕융(王融), 김니(金柅)
973 974 왕융(王融)
고려5대 경종(景宗)
977[宋科試 登第 :김행성(金行成)]
977년 親試。 取進士。賜甲科 高 凝 等三人。乙科三人及第
○3월 왕이 동지(東池)에 거둥하여 용선(龍船)을 타고 친히 진사(進士)시험을 주도하여,
고응(高凝)장원급제,진적(陳頔),김낙(金諾),이예균(李禮鈞),왕동영(王同穎),이양(李陽),등 6명에게 급제를 주고 즉시 벼슬을 하도록 하였다.
고응(高凝) 977(급제1년차) 장원급제
(1007 급제30년차) 禮部侍郞 高凝(30) 知貢擧조원(趙元)등 6명과 명경3명에 급제를 주었다.
진적(陳頔) 977(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32년차) 3월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진적(陳頔)을 형부상서 참지정사(刑部尙書參知政事)로 삼았다.
(급제32년차) ○1009년 진적(陳頔)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삼았다.
(급제33년차) ○1010년 8월에 내사시랑(內史侍郞) 진적(陣頔)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에 보내었다. 볼모가 되었다.
○ (1020) 문하시랑 진적(陳頔)ㆍ이예균(李禮均)과 내사시랑(內史侍郞) 왕동영(王同穎), 사재경(司宰卿) 윤여(尹餘), 장작소감(將作少監) 왕좌섬(王佐暹), 소부승(小府丞) 김덕화(金德華), 장작주부(將作注簿) 김징호(金徵祜), 태의감(太醫監) 김득굉(金得宏)이 거란에 억류 되었으므로, 각기 그 아내에게 미곡을 차등 있게 내려주고 왕좌섬(王佐暹)의 아내를 개성군군(開城郡君)으로 책봉하였으며 아들 왕이보(王夷甫)에게 예부주사(禮部主事)를 임명하였다.
김낙(金諾) 977(급제1년차 추정)
○(1007 급제30년차) 가을 7월에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경주(慶州) 사람 김융대(金融大)가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원손(遠孫)이라 속이고 양민 5백여 명을 저의 노비라 하면서 궁인(宮人) 김씨(金氏)와 평장사(급제33년차 한인경(韓藺卿)ㆍ이부시랑(吏部侍郞 급제30년차) 김낙(金諾)에게 선물로 보내어 후원(後援)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신문하여 사실을 알았으니, 그를 죄주소서." 하였다. 왕이 노하여 이내 한인경을 양주(楊州)로 귀양보내고, 김낙은 바다 안의 섬으로 귀양보내고, 김씨는 구리 1백 근을 벌금으로 내게 하니, 이를 들은 모든 사람이 경하하였다.
이예균(李禮鈞) 977(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 33년차)○참지정사 이예균(李禮鈞)과 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억류되었다.
진적(陳頔)ㆍ이예균(李禮均)을 승진시켜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왕동영(王同穎) 977(급제1년차) ○ (997 급제20년차)11월에 합문사(閤門使)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왕위의 계승을 고하였다.
○ (1009년급제32년차) 왕동영(王同穎)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삼았다.
(1010 급제 33년차)경술 원년 참지정사 이예균(李禮鈞)과 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억류되었다.
(1014 급제 37년차)왕동영(王同穎)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이양(李陽) 977년(급제1년차추정)
○(988 급제11년차) 봄 2월에 좌보궐(左補闕) 이양(李陽)이 상소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의하면, 입춘(立春) 전에 토우(土牛 토우를 만들어 봄을 맞이하던 옛 풍속)를 내어 농사의 시기를 보였으니, 청컨대 고사에 의하여 제때에 맞추어 이를 행하소서. 《주례(周禮)》의 〈내재직(內宰職)〉에, '정월에 왕후에게 조(詔)하여 육궁(六宮)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늦벼와 올벼의 종자의 싹을 틔워서 왕에게 바치도록 한다.' 하였으니, 지금 주상께서 풍년을 빌고 적전(籍田)을 가는 데 있어 왕후도 반드시 종자를 바치는 예를 행하여야 될 것입니다. 〈월령(月令)〉에, '정월 중기(中氣) 후에는 희생(犧牲)에 암컷을 쓰지 말고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며, 새끼와 알을 취하지 말고 여러 사람을 모으지 말며, 드러난 해골을 덮어 묻어 주라.' 하였으니, 원컨대 봄에 행하는 정령(政令)을 펴서 모두 절후에 따라 금지하는 조항을 알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따라 교하여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여 알리게 하였다.
좌보궐(左補闕) :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 뒤에 中書門下省으로 개칭)의 관직.
낭사직(郎舍職)의 하나로 정원은 1인이었다. 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주된 임무로 하였으며, 관원을 임명하거나 법령을 제정할 때에는 서경권(署經權)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예종 때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고쳐 부르고 정6품으로 하였다.
979년 三月 王融 知貢擧 賜甲科 元徵衍 等 人及第
원징연(元徵衍),최사위(崔士威),문인위(文仁渭),김심언(金審言),조지린(趙之遴),원욱(元郁),이주정(李周楨),이몽진(李蒙戩)
원징연(元徵衍) 979(급제1년차)장원급제 본 원주 부 원극유 관 좌복야
최사위(崔士威) 961~1041 979 (급제1년차19세)
○(1009년 급제30년차49세)최사위(崔士威) 호부시랑(戶部侍郞)○기유 12년 임신일-이하줄임..-
○(1010 급제31년차50세)최사위(崔士威) 형부상서 에서 통군사(統軍使)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0 급제31년차50세) ○ 임진일에 최사위(崔士威)등이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평북 귀성군(龜城郡)) 북쪽 뉴돈(恧頓)ㆍ탕정(湯井)ㆍ서성(曙星)의 세 길로 나가서 거란과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1011 급제32년차51세) 최사위(崔士威)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1011 급제32년차51세) 가을 7월에 최사위(崔士威)를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삼았다.
○(1011 급제32년차51세) 참지정사(參知政事) 최사위(崔士威)를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1012 급제33년차52세) 최사위(崔士威)를 내사시랑 평장사로,
○(1014 급제35년차54세) 최사위(崔士威)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1019 급제40년차59세) 최사위(崔士威)를 추충 좌리 동덕공신 청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推忠佐理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봉하였다,
○(1021 급제42년차61세) 최사위(崔士威)를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으로 봉하였다,
○(1021 급제42년차61세) 시중 최사위(崔士威)가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니 유사에게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022 급제43년차62세) 최사위(崔士威)가 아뢰기를, “여러 주ㆍ현 장리(長吏)의 칭호가 혼잡하니 이제부터 군ㆍ현 이상은 호장(戶長)이라 일컫고, 향(鄕)ㆍ부곡(部曲)ㆍ진구(津口)ㆍ정(亭)ㆍ역(驛)의 이(吏)는 다만 장(長)으로 일컫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22 급제43년차62세) 최사위(崔士威)○11월에 사헌대(司憲臺)가, 시중 최사위(崔士威)와 좌복야(左僕射) 박충숙(朴忠淑)이 구정(毬庭)의 예회(禮會)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며 예에 어긋나고 불경하였다고 탄핵하여 논죄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027 급제48년차67세) 최사위(崔士威)을 ○봄 정월에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삼았다.
○(1030 급제51년차70세) 최사위(崔士威)○문하시중 최사위(崔士威)가 늙어서 퇴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5일마다 한번씩 조회하도록 하였다.
○(1031 급제52년차71세) 최사위(崔士威)를 내사령(內史令)으로 삼고 이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1031 급제52년차71세) 최사위(崔士威)○12월에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최사위(崔士威)에게 명하여 5일에 한 번 조회하고 문하성(門下省)에 들어와서 정무를 보게 하였다.
○1041 81세 문하시중 최사위(崔士威)가 졸하였다.
(문종1052)○ 제하기를, “검교태사 내사령(檢校太師內史令) 최사위(崔士威)는 성고조(聖考朝 선왕조(先王朝))에 청렴한 절개와 곧은 도를 가지고 여러 차례 도움이 되어 국난을 널리 구제하고 종묘사직을 편안히 보존하여 중흥을 이룩하였으니 묘정에 배향해야 하고 그 사위와 조카 중에 아직 벼슬을 못한 자는 계급을 뛰어넘어 8품직을 제수하라.
문인위(文仁渭) 979(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32년차)를 우복야(右僕射)로 삼았다
(1011 급제32년차)○ 12월에 문인위(文仁渭)를 참지정사로 삼았다.
(1019 급제40년차)○상서좌복야 문인위(文仁渭)가 졸하였다. 인위는 진실하여 허식이 없었다. 목종조(穆宗朝)에 천추궁사(千秋宮使)가 되었는데 김치양(金致陽)이 처형되자 궁료가 많이 연좌되어 죽음과 귀양을 당했으나 인위만은 강조의 보호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김심언(金審言) 979(급제1년차 추정) 본관 영광(靈光) 시호 문안(文安) 관직 평장사(平章事)
[처부] 성명 : 최섬(崔暹) 관직 평장사
○990년(급제11년차) 7월에 우보궐(右補闕)기거랑(起居郞) 김심언(金審言)이, 유향(劉向)의 육정(六正)ㆍ육사(六邪)의 설과 한(漢) 나라 자사(刺史) 육조(六條)의 정사를 가지고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 알리고 관청의 벽에 써서 권계(勸戒)로 삼기를 청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1009년 급제30년차)김심언(金審言) 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로,
(1013년 급제34년차) 예부상서 김심언(金審言)을 수국사로,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1013 급제34년차) 左僕射 金審言(34년차) 知貢擧임유간(林維幹)등 8명과 명경1명에 급제를 주었다.
(1014 급제35년차)김심언(金審言)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1014 급제35년차)○평장사 김심언(金審言)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1018 급제35년차)○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김심언(金審彦)이 졸하였다. 심언은 예전에 상시(常侍) 최섬(崔暹)에게 배웠는데, 최섬이 앉아서 졸다가 꿈에 심언의 정수리 위에서 불이 나와 기운이 하늘에 뻗치는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이상히 여겨 딸을 아내로 삼아주었다. 심언이 과거에 올라 대성(臺省)에 승진되고, 지방관이 되어서는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당시 많은 명예를 얻었다. 영광(靈光) 시호 문안(文安)이다.
조지린(趙之遴) 979(급제1년차 추정)
○(995 급제16년차) 좌승선(左承宣) 조지린(趙之遴)을 거란에 보내어 혼인하기를 청하였는데, 동경유수(東京留守)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시집보내도록 허가하였다
(998 급제19년차)○ 거란이 고려의 전왕(前王)이 훙서(薨逝)하였다. 하여 혼인 납폐(納幣)로 바쳤던 물품을 돌려보냈다.
(1011 급제32년차) 조지린(趙之遴)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1011 급제32년차) ○ 9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조지린(趙之遴)이 졸하였다. 지린은 관리로서의 재간은 있었으나 성품이 술을 좋아해 밤낮으로 즐겼다. 목종(穆宗) 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知銀臺事)에 임명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붕당을 만들고 남의 것을 마구 들어먹는다고 비난하였다.
원욱(元郁) (979 급제1년차 추정)
○ (994 급제15년차) 6월에 원욱(元郁)을 송에 보내어 군사를 얻어 지난해의 전쟁(거란의 침입)을 보복하기를 청했더니, 송은, 북쪽 변방이 겨우 편안해졌는데 경솔하게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송 나라와 국교를 끊었다.
이주정(李周楨) (979 급제1년차 추정)
○(995 급제16년차) 2월 이주정(李周楨)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1009년 급제30년차) ○정월 지은대사공부시랑(知銀臺事工部侍郞) 이주정(李周禎)이 김치양의 편에 붙은 것을 알고 임시로 서북면 도순검부사(西北面都巡檢副使)로 임명하였다.
이몽진(李蒙戩) 979(급제1년차 추정)
○(993 급제14년차)계사 12년 왕이 감찰사헌(監察司憲) 이몽진(李蒙戩)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知貢擧 명단 : 977 親試 979 왕융(王融),
급제자: 977고 응(高 凝)장원, 진적(陳頔), 김낙(金諾),이예균(李禮鈞), 왕동영(王同穎), 이양(李陽),
979원징연(元徵衍),최사위(崔士威),문인위(文仁渭),김심언(金審言),조지린(趙之遴),원욱(元郁),이주정(李周楨),이몽진(李蒙戩),
[宋科試 登第 :김행성(金行成)]
고려6대 성종(成宗)(재위:981-997년)
983년 五月。 王融。 知貢擧。賜甲科 崔行言 等五人及第。
최행언(崔行言),박충숙(朴忠淑),이주헌(李周憲),장영(張瑩),이유항(李有恒),최창증(崔昌曾)
최행언(崔行言)왕융(王融)이 지공거가 되어 시행한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그의 딸은 성종의 후비인 연창궁부인(延昌宮夫人)이며, 그 소생이 원화왕후(元和王后: 현종의 비)가 됨으로써 상서좌복야로 증직되었다.
박충숙(朴忠淑) 983년(급제추정1년차)
(1010 급제27년차)예빈경(禮賓卿) 에서 중군병마사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2 급제29년차) 박충숙(朴忠淑)을 상서좌복야로,
(1022 급제39년차)○참지정사 박충숙(朴忠淑)과 국자사업(國子司業) 이경(李瓊)을 거란에 보내었다.
(1022 급제39년차)○11월에 사헌대(司憲臺)가, 시중 최사위(崔士威)와 좌복야(左僕射) 박충숙(朴忠淑)이 구정(毬庭)의 예회(禮會)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며 예에 어긋나고 불경하였다고 탄핵하여 논죄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037 급제54년차)○2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박충숙(朴忠淑)이 졸하였다.
이주헌(李周憲) 983(급제1년차 추정)
동주(洞州) 토산현(土山縣) 사람이다. 소리(小吏), 감찰사헌, 내사사인(內史舍人),
현종 때 전중감(殿中監)이 되었으며,
(1015년 급제32년차) 형부상서에 오르고
(1016 급제33년차)을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1016 급제33년차)이주헌(李周憲)을 서경유수로 삼았다.
(1021 급제38년차)이주헌(李周憲)○겨울 10월에 이주헌(李周憲)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으로 삼았다.
(1022 급제39년차)이주헌(李周憲)○상서우복야 이주헌(李周憲)이 졸하였다. 주헌은 소리(小吏) 출신으로 자못 근실하고 재간이 있다고 알려졌다. 성종은 일찍이 그를, “쇠 가운데에서도 쟁쟁하다." 하였다.
장영(張瑩) 983년(급제1년차)
(993 급제10년차)계사 12년왕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을 거란의 진영에 보내었는데, 소손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대신을 군문 앞에 보내어 면대하게 하라." 하였다.
(1012 급제30년차)○공부상서 장영(張瑩)과 예부시랑 유징필(劉徵弼)을 거란에 보내었다.
(1013 급제31년차)○여름 4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장영(張瑩)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1017 급제35년차)○봄 정월에 참지정사 장영(張瑩)이 글을 올려 퇴직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21 급제39년차)○장영(張瑩)을 상서좌복야 동내사 문하평장사 상주국(尙書左僕射同內史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삼아 이어 치사하게 하였다.
副使)
이유항(李有恒) 983년(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26년차)○기유 12년 여름 4월에 이유항(李有恒)을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에 보내어 거란 태후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최창증(崔昌曾) 983(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26년차) 안북도호 장서기(安北都護掌書記)죄를 얻어 쫓겨나, ○기유 12년갑술일-이하줄임..-고려사절요
983년 十二月。 正匡 崔承老。 左執政 李夢游(23년차)。兵官御事 劉彦儒(22)。左 丞 盧 奕(22)。
王覆試。取進士。賜甲科 姜殷川 及第。乙科二人。明經一人及第。
강은천(姜殷川)=강감찬(姜邯贊) 장연우(張延祐), 이방(李昉) 3명급제
강감찬(邯贊)= 강은천(姜殷川)계미 2년(983 급제1년차)○ 진사(進士)를 뽑도록 명하였다. 왕이 친히 복시(覆試)에 거둥하여 강은천(姜殷川)등 3명과 명경(明經)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복시(覆試)를 보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은천(殷川)은 곧 감찬(邯贊)이다.
○(1009년 급제26년차) 禮部侍郞 姜邯贊(26) 知貢擧 안창령(安昌齡)등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10년 급제27년차)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1014 급제31년차)가을7월에 중추사(中樞使) 강감찬(姜邯贊)이 사직단(社稷壇)을 수축하고 예사(禮司)가 의주(儀注 예식 행사의 순서)를 의정(議定)하게 하도록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16 급제33년차)12월에 이부상서 강감찬(姜邯贊)이 아뢰기를, “신이 개녕현(開寧縣 경북 상주(尙州))에 좋은 전지 12결이 있으니 군호(軍戶)에게 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18 급제35년차)내사시랑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았다.
○(1018 급제35년차)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시랑★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1019 급제36년차)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1019 급제36년차) 2월 초하루 기축일에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강감찬(姜邯贊)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김종현(金宗鉉)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자 우리 군사가 형세를 타서 분발하여 치니 저절로 배로 용기가 났다. 거란 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니 우리 군사가 뒤쫓아 쳐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으니,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거란주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손녕에게 꾸짖기를, “네가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짐이 마땅히 네 낯가죽을 벗긴 후에 죽일 것이다." 하였다.
○(1019 급제36년차) 갑오일에 삼군(三軍)이 개선하여 돌아와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왕이 영파역(迎波驛)에서 친히 맞이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음악을 갖추어 잔치를 베풀고 장사들에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왕이 금화(金花) 여덟 가지[枝]를 친히 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오른손으로 금술잔을 들고 왼손으로 감찬의 손을 잡고는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니 감찬이 배사(拜謝)하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1019)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퇴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내려주었다.
○(1019)○겨울 11월에 강감찬(姜邯贊)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봉하였다.
○(1019)을 추충협모 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봉하였다,
○(1020 급제37년차)문하시랑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니 그 말을 들어주고, 이어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로 올렸다.
○(1030 급제47년차)강감찬(姜邯贊)을 문하시중으로 올렸다.
○(1031 급제48년차)강감찬(姜邯贊)을 6월에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로 삼았다.
○(1031 급제48년차)강감찬(姜邯贊)○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하였다. 감찬은 금주(衿州) 사람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이한 계략이 많았다.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해져서 볼품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얼굴빛을 엄정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큰 일을 만나면 큰 계책을 결정하여 우뚝히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나이 70이 되자 왕이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어서 3일마다 한번씩 조회하게 하였는데, 드디어 관직을 그만두고 성 남쪽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84세로 졸하였다. 뇌(誄)를 내리고 부의를 매우 후히 주었으며, 인헌(仁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백관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장연우(張延祐) 983년 급제추정
(1010 급제27년차) 장연우(張延祐) 병부시랑(兵部侍郞) 에서 부사(副使)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1 급제28년차) 장연우(張延祐)○ 봄 정월 정축일에 하공진(河拱辰)ㆍ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시랑 충숙(忠肅)과 장연우(張延祐)ㆍ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1011 급제28년차) ○ 가을 7월에 장연우(張延祐)를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11 급제28년차) 장연우(張延祐)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삼았다.
(1014 급제31년차) 장연우(張延祐) 중추원사(中樞院使) ○11월 계미일에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 과 박성(朴成)ㆍ이협(李恊)ㆍ이상(李翔)ㆍ이섬(李暹)ㆍ석방현(石邦賢)ㆍ최가정(崔可貞)ㆍ공문(恭文)ㆍ임맹(林猛)ㆍ김정열(金貞悅)ㆍ효암(孝嵓)ㆍ최귀(崔龜) 등 19명 등이 난(소란)을 일으켰다. 이유는 전쟁을 한 이후로 군인의 수효를 더 늘리니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자,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켰더니 무관이 매우 못마땅한 마음을 가졌었고, 최질은 또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여러 번 무관에 임명되었으나 문관을 얻지 못한 까닭으로 항상 마음에 불만을 품었었다. 영업전을 빼앗긴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격동시키고 여러 위의 군사를 꾀어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함부로 대궐 안에 들어가 난(소란)을 일으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황보유의(皇甫兪義)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나아가서 임금을 뵙고 호소하기를, “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은 것은 실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지 공가(公家)의 이익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발뒤꿈치를 잘라서 신에 맞게 한다면 몸이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가 흉흉하여 분함과 원망을 견디지 못하니, 청컨대 나라의 좀을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소서." 하였다. 왕이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우선 그 청을 따라 드디어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제명하고 귀양보내었다.
(1014 급제31년차) ○12월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오직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황보유의(皇甫兪義) 만은 사면하지 않았다. 이해 조세의 반을 줄이고, 태조 때 공신의 후손을 녹용하였으며, 도성과 향리에 차등을 두어 은혜를 베풀었다.
(1015 급제32년차)○ 겨울 11월에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우(張延祐)가 졸하였다. 신라 말기에 그 아버지 유(儒)가 오월국(吳越國)에 피란하여 중국말을 익혀서 돌아오니 광종이 여러번 객성(客省)의 관원에 임명하여 매양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유를 시켜 접대하게 하였었다. 연우는 행정 사무에 능하여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졌었다.
이방(李昉) 983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7년차)경술 원년 형부시랑 에서 우군병마사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984년 三月。 王融。 知貢擧。賜乙科 李 琮 及第。丙科二人及第 3인급제
이 종(李 琮),손몽주(孫夢周),박섬(朴暹),
이 종(李 琮)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손몽주(孫夢周) 984(급제1년차)
(1010 급제26년차) 國子司業 孫夢周(26) 知貢擧 서숭(徐崧)등8명과 명경3명에 급제를 주었다.
國子司業 지공거(知貢擧) 손몽주(孫夢周)가 아뢰어 시(詩)ㆍ부(賦)를 시험하고 시무책(時務策)은 시험하지 않았다. 관직은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박섬(朴暹) (984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6년차)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공부시랑 박섬(朴暹)이 ○청수강(淸水江 청천강)임자일에 거란 군사가에 이르니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고을 백성이 모두 무너졌다.
(1011 급제27년차)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곧 옛 백제로서 성조께서도 미워하셨으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옳다 여겨 바로 장곡역(長谷驛)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1011 급제27년차) 박섬(朴暹)을 사재경(司宰卿)으로, 박섬은 안북(安北)에서 도망하여 서울에 돌아와서 그 가족을 거느리고 본향인 무안현(務安縣)으로 가다가 길에서 왕의 행차를 만나 나주까지 따라갔다가 얼마 뒤에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거란 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왕을 뵙자 곧 이 벼슬을 주니 사람들의 비난이 많았다.
(문종1052)박섬(朴暹)○ 제하기를, “지난번 통화(統和) 연간에 거란 군사가 침입하자 우리 황고(皇考)이신 현종(顯宗)이 산남(山南)으로 피난 하셨는데 상서우복야 박섬(朴暹)이 말고삐를 잡고 호종하여 능히 현저한 공로를 세워 경성을 수복하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로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니, 그 형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그려 붙여서 뒷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하였다.
985년 五月 王融 知貢擧 賜乙科 秦 亮 及第。丙科二人及第 3인급제
진 량(秦 亮), 채충순(蔡忠順) ,노정(盧頲),
진 량(秦 亮)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채충순(蔡忠順) 983년 급제추정
(1008년 급제25년차)中樞院直學士 蔡忠順(25) 知貢擧 손원선(孫元仙)등 9명과 명경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09년 급제26년차)채충순(蔡忠順)○기유 12년 임신일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中樞院副使)
(1009년 급제26년차) 2월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中樞院副使)채충순(蔡忠順)을 직중대(直中臺)로,
(1009년 급제26년차) 3월에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을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兼左諫議大夫)로 삼았다.
(1010 급제27년차)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지채문(智蔡文)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1011 급제28년차)○ 봄 정월 정축일에 하공진(河拱辰)ㆍ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시랑 박충숙(朴忠淑)과 장연우(張延祐)ㆍ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1011 급제28년차) 정월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을 비서감(祕書監)으로 삼았다.
(1011 급제28년차)채충순(蔡忠順)○ 가을 7월에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12 급제29년차)채충순(蔡忠順)을 예부상서로 삼았다.
(1013 급제30년차)○ 중추원사(中樞院使) 채충순(蔡忠順)을 거란에 보내었다.
(1017 급제34년차)○12월에 채충순(蔡忠順)을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18 급제35년차)○6월에 채충순(蔡忠順)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9월에 왕이 선화문(宣化門)에 거둥하여 삼위(三衛)와 응양군(鷹揚軍) 공신의 자손과 문반 6품 이하 무예가 있는 자를 모아서 시험하여 과등(科等)을 정하였다.
(1019 급제36년차)채충순(蔡忠順)을 추충 진절 위사공신 제양현개국남 식읍삼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濟陽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봉하였다,
(1020 급제37년차)채충순(蔡忠順)이 청하기를 "군사 중 나이 80 이상이 된 부모가 있는 자는 군역을 면하고 가서 부모를 봉양하게 하며, 모든 문무 관료 중 나이 70 이상이 된 부모가 있는데 형제가 없는 자는 외직으로 임명하지 않으며, 그 부모가 병이 있으면 휴가 2백 일을 주어 병을 간호하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22 급제39년차)채충순(蔡忠順)을 내사시랑 평장사 겸 서경유수(內史侍郞平章事兼西京留守)로 삼았다.
(1023 급제40년차)채충순(蔡忠順)을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삼았다.
(1025 급제42년차)○ 봄 정월에 채충순(蔡忠順)을 판상서 예부사로 삼았다.
(1027 급제44년차)채충순(蔡忠順)을 ○봄 정월에 문하시랑(門下侍郞)로 삼았다.
(1030 급제47년차)○2월에 채충순(蔡忠順)을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로 삼았다.
(1030 급제47년차)○12월에 문하평장사 채충순(蔡忠順)이 병으로 표문을 올려 관직을 해직시켜 주도록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031 급제48년차)○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채충순이 병으로 사직하였다.
(1036 급제53년차)○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채충순(蔡忠順)이 졸하니,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내렸다.
노정(盧頲) 985(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5년차) 10월 노정(盧頲) 어사중승(御史中丞) 에서 부사(副使)로,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0 급제25년차) 11월 기해일 부사(副使) 노정(盧頲) 전투에서 죽었다.
(1011 급제26년차) 4월에 시랑 노정(盧頲)에게 예빈경(禮賓卿)을 증직하였다.
986년 三月。 李夢游(26)。知貢擧。賜 崔英藺 等 人及第 최한(崔罕),왕림(王琳)송 태학입학
최영린(崔英藺),윤여(尹餘),최현민(崔賢敏),이정충(李正忠)
최영린(崔英藺)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윤여(尹餘) 986(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23년차) 윤여(尹餘)를 경인일 상서우승겸직중대(尙書右丞兼直中臺)로 삼았다.
(1010 급제24년차) ○ 8월에 내사시랑(內史侍郞) 진적(陣頔)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에 보내었다. 볼모가 되었다.
(1014)윤여(尹餘)를 사재경(司宰卿)으로 추증하였다.
최현민(崔賢敏) 986(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4년차) 소부감(少府監) 에서 좌군병마사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정충(李正忠) 986(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4년차)경술 원년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 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자, 김응인(金應仁)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막았다.
987년 三月。 李夢游(27)。知貢擧。取進士。
八月。下敎。賜夢游所擧甲科 鄭又玄 等?人及第 明經一人 卜業一人. 醫業二人 明法業二人及第
정우현(鄭又玄),이원(李元),탁사정(卓思政)
정우현(鄭又玄) 장원급제
처음으로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칠사(時政七事)를 논한 것이 왕의 뜻을 거슬리게 되었는데, 왕이 재상들과 회의하여 월직(越職)으로 죄를 주려 하자 서희(徐熙)가 적절하다고 변호하며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게 되어 공은 오히려 감찰어사에 탁용(擢用)되고 서희에게는 말과 주과(酒果)를 위로의 증표로 내려주었다》
이원(李元) 987(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3년차)경술 원년○완항령(緩項嶺)에서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ㆍ김계부(金繼夫)ㆍ이원(李元)ㆍ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서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모두 짧은 무기를 가지고 갑자기 나와서 패배시키니 거란 군사가 조금 물러갔다.
(1010 급제23년차)경술 원년은채문과 이원은 나가서 자혜사(慈惠寺)에 진을 쳤다. 거란주가 다시 을름을 보내어 공격하니 나졸(邏卒)이 보고하기를, “적병이 안정역(安定驛 평북 평원군(平原郡))에 와서 진을 쳤는데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하다." 하였다.
이원(李元), 최창(崔昌)호종하길청하고 다음날 도망.
(1019 급제32년차)○ 가을 7월에 이응보(異膺甫:무신)와 이원(李元)을 좌ㆍ우복야로 삼았다.
(1023 급제36년차)이원(李元)을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로 삼았다.
탁사정(卓思政) 987(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22년차)기축일에 햇빛이 붉은 장막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현운(鉉雲)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迎秋門)에 들어와서 크게 떠드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행간을 잡아 강조에게로 보내고, 탁사정(卓思政)과 하공진(河拱辰)은 모두 강조에게로 달아났다. 최항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느냐." 하니, 강조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군사들이 함부로 들어가자,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태후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보고 목놓아 울었다.
(1010 급제23년차)탁사정(卓思政)경술 원년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드디어 함께 군사를 합쳐서 다시 성에 들어갔다. 왕은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ㆍ군이 모두 함락되었으므로 표문을 올려 조회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거란 군사가 우리나라에서 포로를 사로잡거나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고는 을름(乙凜)을 보내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보우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1010 급제23년차)탁사정(卓思政)경술 원년○을묘일에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돌기(突騎) 2백 명을 거느리고 서경 성 북문에 이르러 외치기를, “황제가 어제 유경ㆍ노이 등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와서 효유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전연 소식이 없느냐. 만약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유수와 관료들은 와서 나의 지시를 받으라." 하였다. 탁사정이 한기의 말을 듣고 채문과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 등을 시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나가서 한기 등 백여 명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아 한 사람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1010 급제23년차)탁사정(卓思政)경술 원년 탁사정(卓思政)은 두려워지자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도수는 대동문(大東門)을 나와서야 비로소 속임을 당한 줄 알았으나 또한 힘으로 적을 당해낼 수도 없었으므로, 드디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 안에서는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1011 급제24년차)탁사정(卓思政)○ 여름 4월에 탁사정(卓思政)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삼았다.
(1011 급제24년차)탁사정(卓思政)○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988년 三月。 王融。 知貢擧。取進士。
九月。下敎。賜乙科 李 緯 等二人。丙科二人。醫業二人及第。 4명급제
이 위(李 緯),윤징고(尹徵古),주기(周起),김연보(金延保)
이 위(李 緯)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윤징고(尹徵古) 988 급제1년차 추정
(1013 급제25년차)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ㆍ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1014 급제26년차) ○8월에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를 송에 보내어, 금선(金線)으로 짜서 만든 용봉안복(龍鳳鞍幞)과 수놓은 용복안복 각 2 벌과 좋은 말 22필을 바치었다.
(1017 급제29년차) ○여름 4월에 문하평장사 최항과 중추부사 윤징고(尹徵古)를 사주(泗州)에 보내어 안종(安宗)의 재궁을 모셔 옮기게 하고, 왕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동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건능(乾陵)에 장사하였다.
(1018 급제30년차) 윤징고(尹徵古)를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21 급제33년차)○12월에 중추사 윤징고(尹徵古)가 졸하였다. 징고는 수주(樹州) 수안현(守安縣) 사람이다. 성품이 침착하고 진득하며, 엄하고, 굳세며, 풍채가 아름답고 해서(楷書)를 잘 썼다. 과거에 올라 여러 번 대관(臺官)이 되어 재결이 공평하고, 입으로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부고가 들리니 왕이 이르기를, “세상에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이 있으랴. 짐이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느냐." 하면서, 두번 세번 탄식하고 애석해 하였다. 상서우복야를 증직하고 장경(莊景)이란 시호를 내렸다.
(1031) ○교하기를, “고 참지정사(故參知政事) 곽원(郭元)ㆍ김맹(金猛)과 중추사(中樞使) 윤징고(尹徵古)에게 모두 훈로(勳勞)가 있으므로 짐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곽원(郭元)의 아들 곽증(郭拯)과 김맹(金猛)의 아들 김덕부(金德符), 윤징고(尹徵古)의 아들 윤희단(尹希旦)을 모두 탁용하라." 하였다.
주기(周起) 988(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23년차)○ 이해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주기(周起)가 아뢰어 비로소 진사(進士)의 시험에 성명을 봉하는 법[糊名法]을 정하였다.
김연보(金延保) 988(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2년차)김연보(金延保)경술 원년○ 9월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에 보내어 추계 문후(秋季問候)를 하고 돌아왔다. 잡히었다.
989년 三月。 王融。 知貢擧。取進士。
十二月。下敎。賜乙科 崔得中 等十人。丙科八人。明經一人。卜業二人及第。 18 등인급제
최득중(崔得中),전공지(田拱之),김연보(金延保),왕첨(王瞻),김숭의(金崇義),노제(盧濟),노이(盧顗),안홍점(安鴻漸),백행린(白行隣)ㆍ이인례(李因禮)ㆍ이거정(李巨貞),김은부(金殷傅),유행간(庾行簡),
최득중(崔得中)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전공지(田拱之) 989(급제1년차 추정)
(1007 급제18년차)정미 10년○ 이해에 호경에 지진이 일어났다.○ 탐라(耽羅)가 아뢰기를,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 나왔습니다." 하자, 태학박사(大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가보도록 하였다. 탐라 사람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하고 땅이 움직여 우레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모두 7일 밤낮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습니다. 산의 높이는 백여 장이나 되고 둘레는 40여리나 되며, 풀과 나무는 없고 연기가 산 위에 덮여 있었으며, 이를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아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전공지가 몸소 산 밑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렸다.
(1012 급제23년차)○ 형부시랑 전공지(田拱之)를 거란에 보내어 하계 문후(夏季問候)를 하고 또 왕이 병으로 친히 조회할 수 없다고 알리니, 거란주가 노하여 흥화(興化)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철주(鐵州)ㆍ곽주(郭州)ㆍ귀주(龜州) 등 여섯 성을 빼앗으라고 명하였다
(1014 급제25년차)○5월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전공지(田拱之)가 졸하였다. 공지는 사명(辭命 외교의 문장과 언사)에 능하였으며, 벼슬한 지 20여 년 동안 근면하고 신중하여 칭송을 받았다.
왕첨(王瞻) 989(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22년차)○ 공부 낭중 왕첨(王瞻)을 거란에 보내어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해 사례하였다.
김숭의(金崇義)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22년차)○ 도관 낭중(都官郞中) 김숭의(金崇義)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노제(盧濟)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1년차) 11월 기해일 주부(注簿) 노제(盧濟) 전투에서 죽었다.
노이(盧顗)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21년차) 10월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0 급제21년차) 11월 기해일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010 급제21년차) 12월 갑인일에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안홍점(安鴻漸)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22년차)○ 감찰어사(監察御史) 안홍점(安鴻漸)이 아뢰기를, “거란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자 바람과 눈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감악(紺岳)의 신사(神祠)에 깃발과 군마가 있는 듯하여 거란 군사가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옛날에 진(秦) 나라 부견(苻堅)이 진(晉) 나라를 치다가 팔공산(八公山)의 풀과 나무가 진(晉) 나라 군사로 변한 것을 바라보고는 두려워 물러갔으니 신명이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청컨대 맡은 관청이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백행린(白行隣)ㆍ이인례(李因禮)ㆍ이거정(李巨貞)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22년차)○ 형부가 아뢰기를, “낭중(郞中) 백행린(白行隣)은 왕의 행차가 남쪽으로 파천할 그 즈음에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스스로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 일컫고, 이인례(李因禮)ㆍ이거정(李巨貞) 등과 더불어 종들을 모집하여 군사를 삼았으나 적군을 보자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니 제명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김은부(金殷傅) 989년(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22년차) 신사일에 왕이 공주(公州)에 머무니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와 영접하면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산과 물을 지나시고 서리와 눈을 무릅쓰시며 이렇게 지극한 상황에 이르실 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하였다.
(1011 급제22년차)○ 2월 정미일에 왕이 전주를 출발하여 무신일에 공주에 머물러 6일을 지냈는데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쳤다. 그로 인하여 그를 맞아들이니 곧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1011 급제22년차)○ 11월에 형부 시랑(刑部侍郞) 김은부(金殷傅)를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하였다.
(1012 급제23년차)○김은부(金殷傅)가 돌아오다가 내원성(來遠城 압록강 어귀에 있는 금동도(黔同島))에 이르니 거란이 여진을 시기하여 김은부를 붙잡아 갔다.
(1012 급제23년차)김은부(金殷傅)가 거란에서 돌아왔다.
(1015 급제26년차)○ 5월에 김은부(金殷傅)를 지중추사(知中樞事)로 삼았다.
(1017 급제29년차)○중추사(中樞使) 김은부(金殷傅)가 졸하였다. 은부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원성(元成)ㆍ원혜(元惠)ㆍ원평(元平) 세 왕후가 모두 그의 딸이었다. 후에 시중(侍中)을 증직하였다.
유행간(庾行簡)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20년차)○기유 12년 임신일-이하줄임..-고려사절요- 합문사인(閤門舍人)유행간은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왕이 그를 사랑하여 남색(男色)으로 총애하였다. 매양 교할 때마다 반드시 먼저 행간에게 묻고 난 후에 시행하므로, 이로 말미암아 왕의 사랑을 믿고 교만하여 백관을 업신여겨 마음대로 턱짓을 부리니, 근시(近侍)들이 그를 왕과 같이 대하였다.왕이 일찍이 수방(水房)의 사람들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소속시키니, 드나들 때에 추종(騶從)의 참람함이 끝도 없었다.
김여탁(金如琢)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31 급제42년차)○우복야 에게 수사공(守司空)을 올려주었다.
○ 좌복야 이응보(異膺甫)에게 수사도(守司徒)를, 우복야 김여탁(金如琢)에게 수사공(守司空)을 올려주었다. 이응보(무신)
김인위(金因渭)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21 급제42년차)○8월에 김인위(金因渭)를 상서우복야로 삼고 이어 치사하게 하였다.
(1024 급제42년차)○9월에 김인위(金因渭)를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삼고 치사하게 하였다.
991년 十年。閏二月。翰林學士白思柔(18)。知貢擧。取進士。
賜甲科 崔 沆。외 乙科六人。明經三人及第。
최항(崔沆),이공(李龔),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최항(崔沆)(972~1024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내융(內融). 부 최광윤(崔光胤) 평장사(平章事) 최언위(崔彦撝)의 손자이다.
(20세 1년차991) 최항(崔沆) 장원급제 등 7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왕은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에 발탁하였다.
(33세13년차1004)四月 內史舍人崔 沆 知貢擧 賜 황주량(黃周亮)등15명과 명경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34세14년차1005) 三月 崔沆 知貢擧 최충(崔冲)등7명과 乙科十人 명경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38세18년차1009년)최항(崔沆)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中樞院使)로 김치양(金致陽)이 불궤(不軌)를 꾀하자, 채충순(蔡忠順) 등과 함께 계책을 세워 현종을 맞았다.
(38세18년차1009년)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38세18년차1009년)○한림학사(翰林學士) 최항(崔沆)을 사부(師傅)로 삼고,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였다.
(39세19년차1010)최항(崔沆)경술 원년11월. 정당문학 최항(崔沆)이 청하여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41세21년차1012)최항(崔沆)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로,
(42세22년차1013)최항(崔沆)○(1013) 9월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최항(崔沆)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예부상서 김심언(金審言)을 수국사로, 예부시랑 주저(周佇)와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ㆍ시어사(侍御史) 황주량(黃周亮)ㆍ우습유(右拾遺) 최충(崔冲)을 모두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45세25년차1016)최항(崔沆)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49세29년차1020)최항(崔沆)에게 추충 진절 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51세30년차1021)최항(崔沆)을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檢校太傅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삼았다.
(54세33년차1024)최항(崔沆)○6월에 문하시랑 평장사 최항(崔沆)이 졸하였다. 항은 언휘(彦撝)의 손자이다. 아들 최유부(崔有孚)를 비서성 교서랑(祕書省校書郞)에 임명하며 사위 이작충(李作忠)에게 장복(章服)을 내려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가 죽자 몹시 애도하며 후하게 부의하였다.
과묵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저축이 없었다고 한다.
뒤에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1033년(덕종 2) 정광(正匡)에 추증되었으며, 정종은 시중(侍中)을 가증(加贈)하고, 최항의 기일에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도량(道場)을 현화사(玄化寺)에 베풀고 명복을 빌었다. 시호는 절의(節義)이다
(문종21년1067)최항(崔沆)○ 제하기를, “고 문하시중 최항(崔沆)을 수태사 겸중서령에, 증직하였다.
○ 봄 정월에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니, 2천 8백 칸이며 12년 만에 준공하였다
이공(李龔) 991년 급제1년차 추정
(1016 급제25년차) 禮賓卿 李龔 知貢擧 김현(金顯)등9명과 명경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17 급제26년차)○5월에 이공(李龔)을 지중추사(知中樞事)로 삼았다.
(1021 급제30년차)○ 9월에 이공을 중추사로 삼았다.
(1021 급제30년차)○중추사 이공(李龔)과 병부시랑 유종(柳宗)을 거란에 보내어 책(冊)을 받은 데 대해 하례하였다.
(1021 급제30년차) 散騎常侍 李 龔 知貢擧 조패(趙霸) 등 7명과 명경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23 급제32년차)○2월에 이공(李龔)을 서경유수로 삼았다.
(1023 급제32년차) 이공(李龔)을 내사시랑 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郞平章事監修國史)로,
(1024 급제33년차) 이공(李龔)을 상서좌복야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삼았다.
(1027 급제36년차) 이공(李龔)을 ○봄 정월에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삼았다.
(1031 급제40년차) 이공(李龔)을 사공 좌복야판동경유수사(司空左僕射判東京留守事)로 삼았다.
(1031 급제40년차) 이공(李龔)○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판동경유수사(判東京留守事) 이공(李龔)이 재물을 부당하게 징수하고, 또 가노(家奴)를 시켜 역마를 빌려 타게 하였으니 법대로 논죄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35 급제44년차) 이공(李龔)○가을 7월에 이부(吏部)가 아뢰기를, “전 상서좌복야 이공(李龔)이 일찍이 오욕(汚辱) 죄를 범하였으나, 여러차례 용서를 받았으니, 그 벼슬을 복직시켜 주소서." 하니, 따랐는데, 어사대에서 논핵하여 얼마 뒤에 파직하였다.
(1036 급제45년차) 이공(李龔)○제하기를, “전 상서좌복야 이공(李龔)이 비록 두 번이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 때 재상으로 오래 문한(文翰)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니, 그 벼슬을 복직시켜 그대로 치사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문종12년1058)이공(李龔)○ 5월에 제하기를, “공부상서 유규(庾逵)의 아들 유중경(庾仲卿)을 강등하여 음직에 제수하라." 하자,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논박하기를, “중경의 어미는 평장사(平章事) 이공(李龔)이 형의 딸을 간음하여 낳은 소생이니, 중경을 조정의 반열(班列)에 둠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평장사 김원정(金元鼎)등이 의론하기를, “이것은 이공(李龔)의 허물이고 중경 부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니, 벼슬길을 막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앞서 내린 명대로 강등시켜서 음직에 제수하소서." 하니, 왕이 김원정(金元鼎)등의 논의를 따랐다.
양경(楊景) 991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9년차) 11월 기해일 양경(楊景)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성좌(李成佐) 989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9년차) 11월 기해일 이성좌(李成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992년 왕림(王琳),최한(崔罕)송 빈공과(賓貢科)에 비서랑(祕書郞)의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
(986) ○ 이해에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에 보내어 태학에 입학하게 하였다.
993년 三月。翰林學士崔 暹(35)。取進士。
八月。下敎。賜甲科 李維賢 等二人。乙科三人。同進士五人。明經인。明法三人及第。 10명급제
이유현(李維賢),이경(李瓊),이승건(李承乾),하공진(河拱辰),고영기(高英起),송균언(宋均彦),김작빈(金作賓)
이원귀(李元龜),최탁(崔卓),조성유(趙成裕)
이유현(李維賢)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이경(李瓊) 993년(급제1년차 추정)
○ (1022 급제29년차) 참지정사 박충숙(朴忠淑)과 국자사업(國子司業) 이경(李瓊)을 거란에 보내었다.
이승건(李承乾) 993년(급제1년차 추정)
○(994 급제2년차) 처음으로 압록강 도구당(鴨綠江渡勾當)을 설치하고 이승건(李承乾)을 사(使)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하공신(河拱辰)을 보내어 대신하였다.
하공진(河拱辰) 993년(급제1년차 추정)
○(994 급제2년차) 처음으로 압록강 도구당(鴨綠江渡勾當)을 설치하고 이승건(李承乾)을 사(使)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하공신(河拱辰)을 보내어 대신하였다.
○(1009년 급제16년차)기축일에 햇빛이 붉은 장막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이현운(이鉉雲)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迎秋門)에 들어와서 크게 떠드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유행간을 잡아 강조에게로 보내고, 탁사정(卓思政)과 하공진(河拱辰)은 모두 강조에게로 달아났다.
(1009년 급제16년차)하공진(河拱辰) 탁사정(卓思政)○기유 12년 임신일-이하줄임..-고려사절요-
(1010 급제17년차)하공진(河拱辰)경술 원년○ 5월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었다.
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종사하였는데,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東女眞)의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니,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깊이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귀양보내었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康兆)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1010 급제17년차)○ 귀양보냈던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여 관작을 회복시켰다.
(1010 급제17년차) 하공진(河拱辰)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1010 급제17년차)경술 원년○ 갑술일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진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으니 드디어 하공진(河拱辰)과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군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국왕이 와서 뵙기를 진실로 원하나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 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공진 등이 또한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빨리 군사를 거두소서." 하였다.
○(1011 급제18년차) 정월 정축일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예빈경(禮賓卿) 시랑 박충숙(朴忠淑)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ㆍ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1011 급제18년차) 좌사낭중 하공진(河拱辰)○ 거란이 하공진(河拱辰)을 죽였다. 예전에 공진이 억류를 당하였을 때 속으로 본국에 돌아오기를 도모하여 겉으로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보이니 거란주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공진이 고영기(高英起)와 은밀히 모의하고 거란주에게 아뢰기를, “본국이 이미 멸망하였으니 신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검점하고 오겠습니다." 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얼마 뒤에 고려 왕이 서울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영기는 거란 중경(中京)에 있게 하고 공진은 연경(燕京)에 있게 하며 모두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공진이 준마를 많이 사들여서 동로(東路)에 벌여놓고 본국에 돌아갈 계획을 하니 어떤 사람이 그 계획을 밀고하였다. 거란주가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빠짐없이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본국에 대해서는 감히 배반할 마음을 가질 수 없으니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살아서 대조(大朝)를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주가 의롭게 여겨 그를 용서하고, 절개를 바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타일렀으나 공진의 말이 더욱 강경하고 공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살해를 당하였다.
(1025)○교하기를, “강민첨(姜民瞻)과 하공진(河拱辰)의 공로가 모두 현저한데도 포상이 후하지 못하였으니 각기 그 아들에게 벼슬을 올려주라." 하였다.
(문종1052)좌사낭중 하공진(河拱辰)은 통화 28년에 거란 군사가 침입하자 적과 맞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뛰어난 말솜씨를 써서 능히 많은 군사들을 물리쳤으니, 형상을 공신각에 그려 붙이고 그 아들 하칙충(河則忠)은 계급을 뛰어넘어 5품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문종1052)하공진(河拱辰)은 종묘사직을 지킨 공이 있다 하여 상서공부시랑을 증직하였다.
(예종5년1110)하공진(河拱辰)○ 9월에 여러 왕씨ㆍ재신과 추신에게 천수전(天授殿)에서 주연을 베풀고 밤을 새우고서야 파하였다. 각각 폐백을 하사하였다. 왕이 시를 짓고 유신에게 명을 내려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어느 광대가 연극으로써 선대의 공신 하공진(河拱辰)을 칭찬하니, 왕은 그 공을 추념하여 그의 현손 위위주부(衛尉主簿) 하준(河濬)을 합문지후로 삼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고영기(高英起) 993년 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16년차)고영기(高英起) 감찰어사(監察御史)○기유 12년 갑술일-이하줄임..-고려사절요-
(1010 급제17년차)고영기(高英起)경술 원년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충필(忠弼)이 절문에 있다가 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서, “지장군(智將軍)이 왔습니다." 하고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문밖에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적이 빼앗아간 장물(臟物)을 찾았는데 실상 공진(拱辰)이 한 짓은 아니오며, 또 공진과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하였다.
(1010 급제17년차)고영기(高英起)경술 원년○ 갑술일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진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으니 드디어 하공진(河拱辰)과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군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국왕이 와서 뵙기를 진실로 원하나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 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공진 등이 또한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빨리 군사를 거두소서." 하였다.
(1011 급제18년차) 고영기(高英起)○정월 정축일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예빈경(禮賓卿) 시랑 박충숙(朴忠淑)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ㆍ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송균언(宋均彦) 993년 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18년차)○경인일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의 전봉(前鋒)인 원수(元帥) 부마(駙馬)의 서신과 하공진의 주장(奏狀)을 가지고 왔다.
(1011)송균언(宋均彦)을 통사사인(通事舍人)에서 도병마녹사로,
김작빈(金作賓) 993년 급제1년차 추정
(1013 급제20년차)○ 6월에 김작빈(金作賓)을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에 보내어 개원한 데 대해 하례하였다.
(1028 급제35년차)○대부경(大府卿) 김작빈(金作賓)을 거란에 보내었다.
이원귀(李元龜),최탁(崔卓) 993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7년차)경술 원년 최질(崔質)과 홍숙(洪淑) 중랑장(中郞將)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서 노진과 마수를 체포하고 이어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ㆍ부사(副使) 최탁(崔卓)ㆍ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ㆍ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통일이 되었다.
조성유(趙成裕) 993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7년차)경술 원년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는 밤에 도망하고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대장군신녕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거란은 군사 6천여 명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994년 三月。 王 融。知貢擧。取進士。
八月。覆試。下敎。賜甲科 崔元信 等四人。乙科四人。明經九人及第。 8인급제
최원신(崔元信),윤징고(尹徵古),이수화(李守和),강민첨(姜民瞻),왕좌섬(王佐暹),노집중(盧執中)유종(柳琮)
최원신(崔元信) 장원급제
본관은 경주(慶州).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최양(崔亮)의 아들이다.
(994 급제1년차)三月 王融 知貢擧 取進士 八月 覆試 下敎 賜 최원신(崔元信) 등 8명과 명경 9명 及第
○(1011 급제17년차)최원신(崔元信)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원신(崔元信)을 거란에 보내었다.
○(1012 급제18년차)현종3년에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019 급제25년차)최원신(崔元信)○8월에 예부경(禮部卿) 최원신(崔元信)과 이수화(李守和)를 송에 보내어 새해를 축하하였다.
○(1020 급제26년차)최원신(崔元信)과 이수화(李守和)가 송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위신을 욕되게 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보내었다
이수화(李守和) (994 급제1년차)
○(1010 급제16년차) 경술 원년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1010 급제16년차) 경술 원년 계사일에 이수화(李守和)가 표문을 올렸는데, 그 표문에,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자는 마땅히 간흉을 제거해야 될 것이요, 아버지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지켜야 하니, 만약 이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앙화를 받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민정을 굽어살피어 마음을 돌리소서. 크게 하늘의 그물을 열어 주시면서 하필 조작(鳥雀)이 먼저 품안에 들어오기를 구하십니까. 병거를 돌리셔야 우리 용사들의 복종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을미일에 이수화가 또 회답하는 표문을 보냈다.
○(1019 급제25년차) ○8월에 예부경(禮部卿) 최원신(崔元信)과 이수화(李守和)를 송에 보내어 새해를 축하하였다.
○(1020 급제26년차) 최원신(崔元信)과 이수화(李守和)가 송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위신을 욕되게 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보내었다
○(문종1051 급제57년차)이수화(李守和)○ 3월에 상서좌복야 이수화(李守和)가 졸하였다.
강민첨(姜民瞻) 994년 (급제1년차 추정) 진주(晉州) 시호 은렬(殷烈) 관직 상서(尙書)
(1010 급제16년차)경술 원년.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은 탁사정(卓思政)이 도망하고 장군 대도수(大道秀)는 거란에 항복하니 남은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 와 의논하여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았다.
(1012 급제18년차) 강민첨(姜民瞻)○ 5월에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ㆍ군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1018 급제24년차)강민첨(姜民瞻)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1018)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1019 급제25년차) 강민첨(姜民瞻)을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삼았다.
(1021 급제27년차) 강민첨(姜民瞻)○11월에 지중추사 강민첨(姜民瞻)이 졸하였다. 민첨은 진주(晉州) 진강현(晉康縣) 사람이다. 서생으로 몸을 일으켜서 활쏘기와 말타기는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과감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1025) ○교하기를, “강민첨(姜民瞻)과 하공진(河拱辰)의 공로가 모두 현저한데도 포상이 후하지 못하였으니 각기 그 아들에게 벼슬을 올려주라." 하였다.
왕좌섬(王佐暹),노집중(盧執中)
왕좌섬(王佐暹) (994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6년차)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보내어 우호를 닦았다.
(1014 급제20년차)왕좌섬(王佐暹)을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 삼으니 이들이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붙들려서 돌아오지 못한 때문이었다.
(1020 급제26년차)왕좌섬(王佐暹)○문하시랑 진적(陳頔)ㆍ이예균(李禮均)과 내사시랑(內史侍郞) 왕동영(王同穎), 사재경(司宰卿) 윤여(尹餘), 장작소감(將作少監) 왕좌섬(王佐暹), 소부승(小府丞) 김덕화(金德華), 장작주부(將作注簿) 김징호(金徵祜), 태의감(太醫監) 김득굉(金得宏)이 거란에 억류되었으므로, 각기 그 아내에게 미곡을 차등 있게 내려주고 왕좌섬(王佐暹)의 아내를 개성군군(開城郡君)으로 책봉하였으며 아들 왕이보(王夷甫)에게 예부주사(禮部主事)를 임명하였다
노집중(盧執中) (994 급제1년차 추정)
(1020 급제26년차)을 사재소경(四宰少卿)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의 동경에 보내었다.
유종(柳琮) (994 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15년차)중랑장(中郞將)○기유 12년 임신일 -이하줄임..-고려사절요-
(1010 급제16년차)경술 원년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었다.
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종사하였는데,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東女眞)의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니,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깊이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귀양보내었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康兆)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1010 급제16년차)경술 원년과 ○ 귀양보냈던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여 관작을 회복시켰다.
(1010 급제16년차)경술 원년 하공진(河拱辰)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 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 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1011 급제16년차) 정월 정축일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예빈경(禮賓卿) 시랑 박충숙(朴忠淑)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ㆍ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1011 급제16년차)○ 기묘일 유종(柳宗)과 김응인(金應仁)등이 경기 안성군(安城郡) 양성은 유종의 고향임에 그곳으로 향했다. 밤에 유종과 응인 등이 밤에 거짓으로 왕의 명령이라 일컫고 임금의 말안장을 부수어 고을 사람에게 주었고. 두 왕후를 각기 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호종하는 장졸을 임명하여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왕이 이에 대해 채문에게 묻자 채문이 크게 울면서, “지금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어 앙화를 당하여 이와 같이 파천하고 있으니, 마땅히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해야 될 것인데, 왕후를 버리고서 살기를 구하는 일을 어찌 차마 하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사산현(蛇山縣)을 지나 천안부(天安府 충남 천안)에 이르니 유종과 응인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여 영접하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도망하였다.
(1021 급제26년차)유종(柳宗)○중추사 이공(李龔)과 병부시랑 유종(柳宗)을 거란에 보내어 책(冊)을 받은 데 대해 하례하였다.
995년 三月。白思柔(22)。知貢擧。取進士。
九月。覆試。下敎。賜甲科 李子琳。乙科四人。 5명급제
이자림(李子琳),왕가도(王可道),유징필(劉徵弼),황보유의(皇甫兪義),양규(楊規)
이자림(李子琳) 장원급제 (급제1년차)
(1012 급제17년차) 이자림(李子琳)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1015 급제20년차) 이자림(李子琳)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1015 급제20년차) 이자림(李子琳)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
(20년차1015)이자림(李子琳) 상장군 김훈(金訓)등이 난(소란)을 일으켰다. 이유는 전쟁을 한 이후로 군인의 수효를 더 늘리니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자,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켰더니 무관이 매우 못마땅한 마음을 가졌었고, 최질은 또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여러 번 무관에 임명되었으나 문관을 얻지 못한 까닭으로 항상 마음에 불만을 품었었다. 영업전을 빼앗긴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격동시키고 여러 위의 군사를 꾀어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함부로 대궐 안에 들어가 난(소란)을 일으켜 장연우(張延祐)와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나아가서 임금을 뵙고 호소하기를, “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은 것은 실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지 공가(公家)의 이익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발뒤꿈치를 잘라서 신에 맞게 한다면 몸이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가 흉흉하여 분함과 원망을 견디지 못하니, 청컨대 나라의 좀을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소서." 하였다.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이자림(李子琳)이 은밀히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말하기를, “왕은 어찌 한 고조(漢高祖)의 운몽(雲夢) 행차를 본받지 않는가." 하니, 김맹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은밀히 왕에게 아뢰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자림이 일찍이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가 되었을 때에 자못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곧 임시로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을 임명하고 재촉하여 먼저 가서 준비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여러 신하들을 장락궁(長樂宮)에 모아 잔치를 베풀고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하여 죽였다. 상장군 김훈(金訓)ㆍ상장군 최질(崔質)ㆍ박성(朴成), 이협(李恊)ㆍ최가정(崔可貞)ㆍ석방현(石邦賢)ㆍ이상(李翔), 이섬(李暹)ㆍ김정열(金貞悅)ㆍ효암(孝嵓)ㆍ공문(恭文), 임맹(林猛)ㆍ병부낭중(兵部郞中) 최귀(崔龜) 등 19명을 목베었다. 이때 무신이 권세를 부려 문관까지 겸임하니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와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였다. 최귀는 유사(儒士)인데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왕을 호종하였으나 성질이 거칠고 비루하여 최질 등과 사귀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왕가도(王可道) 995년 (급제추정 1년차)
백사유(白思柔)가 991년과 99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科擧)를 주관하였는데, 후에 재상에 오른 최항(崔沆)과 왕가도(王可道) 등 많은 인재를 많이 뽑았다.
○(1030 급제35년차)8월에 왕가도(王可道)를 내사시랑 판삼사사(內史侍郞判三司事)로 삼았다.
○(1031 급제36년차) 왕가도(王可道)가 왕에게 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였다.
○(1031 급제36년차)왕가도(王可道)를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삼았다.
○(1031 급제36년차)왕가도(王可道)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1031 급제36년차)왕가도(王可道)가 아뢰기를, “거란이 우리나라와 서로 화호를 통하고 예물을 주고 받지마는, 그들은 우리나라를 병탄할 뜻이 있습니다. 지금 그 임금이 죽고 부마 필제(匹梯)가 배반하여 동경을 점거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 시기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압록강의 성교(城橋)를 헐어버리고, 붙잡혀 있는 우리의 사신을 돌려보내도록 청하되 만약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그들과 국교를 단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에 표문에 그 말을 붙여 써서 이 일을 청하였다.
○(1031 급제36년차)○문하시랑 평장사 왕가도(王可道)가 병이 드니, 조회를 면하여 주었다.
○(1032 급제37년차)왕가도(王可道)를 감수국사로 삼았다.
○(1034 급제39년차)○문하시랑 평장사 왕가도(王可道)가 졸하였다. 왕가도(王可道)가 일찍이 노퇴(老退)하여 고향 청주(淸州)로 돌아가 병을 요양하고 있었는데 졸하자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주고, 시호는 영숙(英肅)이라 하며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유징필(劉徵弼) 미상(추정968)∼1042년(정종 8). 본관은 충주(忠州). (995 급제1년차 추정)
○(1012 급제17년차)공부상서 장영(張瑩)과 예부시랑 유징필(劉徵弼)을 거란에 보내었다.
○(1020 급제25년차) 國子祭酒 劉徵弼 知貢擧 이원현(李元顯)등 10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22 급제27년차)(현종 13년)에 한림학사 비서감(翰林學士秘書監)이 되었으며
○(1023 급제28년차)○3월에 한림학사 비서감(祕書監) 유징필(劉徵弼)을 거란에 보내었다.
○(1024 급제29년차)禮部尙書 劉徵弼 知貢擧 이자연(李子淵)등9명과 명경1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30 급제35년차) 태자빈객(太子賓客)에 보임되었으며
○(1032 급제37년차)유징필(劉徵弼)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삼았다
○(1034 급제39년차)유징필(劉徵弼)을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1036 급제41년차)○3월에 유징필(劉徵弼)을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로 삼았다.
(靖宗38년차1036) 왕이 소목(昭穆)의 제도를 대신에게 묻자 유징필(劉徵弼)은 아뢰기를, “태조가 증조 항렬에 있어서 친(親)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혜ㆍ정ㆍ광 삼종은 반드시 옮길 필요는 없고, 다만 대종만을 능으로 옮기고 덕종을 다음 방에 부묘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황주량 등이 아뢰기를, “유징필이 친이 다하지 않았다는 뜻을 말하는 것은, 역시 한꺼번에 네 묘를 체천하여 헐기 어려우므로 그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만, 신이 들으니 옛법에 '친이 고조를 지나면 그 묘를 없앤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면 아버지ㆍ할아버지ㆍ증조ㆍ고조로부터 위로 친이 끝났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방친(旁親 방계 친족)으로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혜ㆍ정ㆍ광은 종조(從祖)의 항렬에 있어서 친할아버지와 비교가 되지 않으며, 예전에 진(晉) 나라의 종아(鍾雅)가 아뢰기를, '경황제(景皇帝)를 백조(伯祖)라는 이유로 태묘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니, 「백조」라는 글귀를 없애야 옳다.' 하자 진 나라 조정이 그 말을 따랐으니, 종조가 태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혜ㆍ정ㆍ광ㆍ대종의 신주는 모두 옮겨 없애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 뒤에 왕이 이르기를, “한꺼번에 네 신주를 체천하는 것이 내 뜻에 너무 미안하다." 하고, 다시 유징필이 아뢴 대로 하려 하니, 황주량이 다시 아뢰기를, “태조가 일묘(一廟)가 되고, 헤ㆍ정ㆍ광ㆍ대종이 소로 일묘가 되고 경ㆍ성종이 목으로 일묘가 되며, 목종이 소가 되고 현종이 목이 되니, 오묘의 수가 이에 갖춰지지만, 계파의 차례로 말하자면 현종이 목종의 숙(叔)이 되니, 만일 먼저 임금이 되었다면 경종ㆍ성종과 함께 항렬을 함께 할 수 있겠지만 목종의 자리를 이었기 때문에 현종을 목종 아래 두 번째 목의 자리에 부묘하였습니다. 그런데 체천하여 열어야 하는데 유징필은 오직 한꺼번에 사묘를 옮겨 없애기 어려운 것만 논하고 소목의 수효는 논하지 않으니, 종묘의 예는 나라의 큰 일인데, 어찌 억측으로 단정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덕종을 소로 하면 삼소(三昭)ㆍ이목(二穆)이 태조 묘와 함께 육묘가 되니 예전 제도가 아니요, 만일 계파의 차례를 논하여 현종을 첫 번째의 목으로 하여 경종ㆍ성종 다음에 모시고 목종을 그 아래에 낮춰 모신다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른바, ⌈희민(僖閔)의 역사(逆祀)⌋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는데, 서눌이 아뢰기를, “황주량이 아뢴 것이 옛 제도에 맞기는 하나 노 나라는 제후로서 소목 외에 문세실(文世室)ㆍ무세실(武世室)이 있었으니, 혜ㆍ정ㆍ광 삼종 또한 옮겨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니, 따랐다.
○(1037 급제42년차)유징필(劉徵弼)을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 겸 서경유수사로 삼았다.70세추정
○(1040 급제45년차)○제하기를, “내사시랑평장사 유징필(劉徵弼)이 명문의 후예로서 복을 이어받아 문한으로 여러 조정을 보좌하였으니, 그 공을 녹할 만하다." 하고 곧 그 아들 유작(劉綽)에게 공부서령사(工部書令史)를 제수하였다.
○(1042 급제47년차)○내사시랑평장사 유징필(劉徵弼)이 졸하였다. (추정968)∼1042년 (75세졸 추정)
황보유의(皇甫兪義) 995년 (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14년차)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12년갑술일-이하줄임..-고려사절요
(1009년 급제14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와 김응인이 함께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군을 모시고 돌아왔다.
(1014년 급제19년차)황보유의(皇甫兪義)○11월 계미일에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 과 박성(朴成)ㆍ이협(李恊)ㆍ이상(李翔)ㆍ이섬(李暹)ㆍ석방현(石邦賢)ㆍ최가정(崔可貞)ㆍ공문(恭文)ㆍ임맹(林猛)ㆍ김정열(金貞悅)ㆍ효암(孝嵓)ㆍ최귀(崔龜) 등 19명 등이 난(소란)을 일으켰다. 이유는 전쟁을 한 이후로 군인의 수효를 더 늘리니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자,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켰더니 무관이 매우 못마땅한 마음을 가졌었고, 최질은 또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여러 번 무관에 임명되었으나 문관을 얻지 못한 까닭으로 항상 마음에 불만을 품었었다. 영업전을 빼앗긴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격동시키고 여러 위의 군사를 꾀어 북을 치고 소리지르며 함부로 대궐 안에 들어가 난(소란)을 일으켜 장연우(張延祐)와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나아가서 임금을 뵙고 호소하기를, “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은 것은 실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지 공가(公家)의 이익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발뒤꿈치를 잘라서 신에 맞게 한다면 몸이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가 흉흉하여 분함과 원망을 견디지 못하니, 청컨대 나라의 좀을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소서." 하였다. 왕이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우선 그 청을 따라 드디어 장연우(張延祐),황보유의(皇甫兪義)를 제명하고 귀양보내었다.
(1014년 급제19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12월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오직 장연우(張延祐)와 황보유의(皇甫兪義) 만은 사면하지 않았다. 이해 조세의 반을 줄이고, 태조 때 공신의 후손을 녹용하였으며, 도성과 향리에 차등을 두어 은혜를 베풀었다.
(1016년 급제21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사면령○상장군김훈(金訓) 상장군 최질(崔質)ㆍ박성(朴成), 이협(李恊)ㆍ최가정(崔可貞)ㆍ석방현(石邦賢)ㆍ이상(李翔), 이섬(李暹)ㆍ김정열(金貞悅)ㆍ효암(孝嵓)ㆍ공문(恭文), 임맹(林猛)ㆍ병부낭중(兵部郞中) 최귀(崔龜) 등 19 등의 부모ㆍ처ㆍ자매ㆍ조(祖)ㆍ손(孫)ㆍ숙부ㆍ백부 중에 연좌된 자는 모두 방면하고 그 아들과 동복형제는 본관으로 돌려보내어 상사(常赦 특사(特赦)ㆍ대사(大赦)와는 다른 보통의 사면령)에는 죄를 용서해 주지 않도록 하였다. 추정(장연우(張延祐)와 황보유의(皇甫兪義) 이때이거나 이전에 귀환한 듯.
(1026년 급제31년차) ○6월에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1029년 급제34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031 급제36년차) ○5월에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32 급제37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참지정사로 삼았다.
(1032 급제37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예전 제도에는 그 집에 가서 선마(宣麻)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관을 모아놓고 건덕전(乾德殿)에서 선마를 하였다.
(1034 급제39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삼았다.
(1035 급제40년차)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 이부사로 삼았다.
(1036 급제41년차) ○3월에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판호부사로 삼았다.
(1042 급제47년차)○12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졸하였다.
훈신(勳臣)가문출신으로 급제는 아닌듯함..
양규(楊規) (995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5년차)경술 원년○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거짓 꾸며서 흥화진으로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楊規)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다. 강조의 명령을 받을 것이 아니다." 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1010 급제15년차)경술 원년○ 경신일에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하여, 신유일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날에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갔다.
(1011 급제16년차)양규(楊規)○11월 임진일에 양규(楊規)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無老代 평북의 주ㆍ군)에서 습격하여 머리 2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3천여명을 빼앗았다.
계사일에 양규가 또 이수(梨樹)에서 싸워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머리 2천 5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명을 빼앗았다.
○ 병신일에 양규가 또 여리참(餘里站)에서 싸워 머리 1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 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1011 급제16년차)○임인일에 양규가 다시 거란 군사의 전봉을 애전(艾田)에서 맞받아 쳐서 머리 1천여 급을 베었다. 조금 후에 거란주의 대군이 불시에 이르자,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종일토록 힘껏 싸웠으나 군사가 모두 죽고 화살이 다하여 모두 적의 진중에 뛰어들어 죽었다. 양규는 후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한 달만에 모두 일곱 번 싸워 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사람 3만여 명을 빼앗았고, 낙타ㆍ말ㆍ무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얻었다. 거란 군사는 여러 장수들에게 초격(鈔擊)되었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지쳤으며 무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1011) 2월 형부낭중 양규(楊規)에게 공부상서를 증직하였다.○김숙흥(金叔興)에게 장군(將軍)을 증직하였다.
(1011)○ 유사에 명하여 양규(楊規)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곡식을 주고 아들 대춘(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고, 왕이 친히 홍씨에게 교서를 지어 내려주기를, “너의 남편은, 재주는 장수의 지략을 갖추고 겸해 정치하는 도리를 알아 절의를 다하고 정성을 바쳤으니 충성스러운 지조는 비할 데가 없다. 요전에 북쪽 변경에서 구적(寇賊)을 뒤쫓아 잡아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고, 여러 번 싸움에 이겼으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렀으니 항상 그 공로를 생각하여 너에게 종신토록 해마다 벼 1백 섬을 내려주리라." 하였다.
(1019)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에게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내려주었다.(1011년 신해卒)
(1024)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에게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선종원년1084)○ 가을 8월에 제하기를, “현종(顯宗)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실 때에 문하시중 박성걸(朴成傑)은 호종(扈從)한 공이 있었으니,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양규(楊規) 등의 녹권에 아울러 기록하라." 하였다.
(예종4년1109)○ 양규(楊規)의 공을 기록하여 그 증손 양제보(楊齊寶)에게 은합(銀榼)을 하사하였다.
996년 三月 崔暹(38) 爲都考試官 下敎 12월 정사일 곽원(郭元)등 7명과 명경 6명 복업 2명에게 급제
곽원(郭元),전유연(錢惟演),김맹(金猛),서눌(徐訥),이작인(李作仁),노진(盧戩),이택성(李澤成)
곽원(郭元) 996 장원급제
(1015 급제19년차)○민관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이어 거란이 해마다 와서 침략함을 알렸다.
(1016 급제20년차)○곽원(郭元)이 송에서 돌아왔다. 곽원이 송 나라에 갔을 때에, 때마침 여진 또한 거란이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조회하지 못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황제가 거란의 맹약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어려웠는데, 학사(學士종2~정4품직) 전유연(錢惟演)이 기초한 조서에, “짐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 뜻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으니 비록 지역이 나뉘어 각기 다름은 있으나 짐이 오직 정성을 미루는 것은 차이가 없다. 경의 본도(本道 본국)를 생각하면 진실로 마음에 깊이 걱정되나 그대의 이웃 나라(거란)를 돌아보건대 또한 오래도록 맹약을 따르고 있으니 짐은 서로 화목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황제가 이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같이 하면 비록 거란이 보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하고, 곽원을 명하여 개보사(開寶寺)에 놀게 하고는 은밀히 관반원외랑(館伴員外郞) 장사덕(張師德)을 시켜 곽원을 개유하게 하였다.
사덕이 곽원과 함께 탑에 올라 조용히 말하기를, “지금 서울의 높고 큰 집들은 모두 군영이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통일하셨음에도 오히려 군사를 기르고 날마다 전투를 익히는 것은 북방에 대비하는 것이오. 천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하물며 귀국은 거란과 국경이 이어져 있으니 화호를 맺어 백성을 휴식시키는 것이 장구한 계획이오." 하였다.
(1016 급제20년차)○곽원(郭元) 형부시랑(刑部侍郞)·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1017 급제21년차) 三月 禮部侍郞 郭元 知貢擧 정배걸(鄭倍傑)등 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19 급제23년차)○한림학사(翰林學士) 곽원(郭元)이 아뢰기를, “진사과(進士科)의 대책(對策)을 없애고 논(論)으로 시험하되 반드시 《예기(禮記)》 안에 있는 글을 제목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1022 급제26년차) 좌산기상시 곽원(郭元)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왕서(王諝)를 거란에 보내었다.
(1023 급제27년차) 곽원(郭元)을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24 급제28년차) 곽원(郭元)을 서북면 행부도통(行副都統)으로 삼았다.
(1025 급제29년차) 추성문리공신 상주국(推誠文理功臣上柱國)이 되었고,
(1027 급제31년차) 곽원(郭元)을○ 봄 정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1029 급제33년차) 곽원(郭元)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여진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여 해를 끼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마땅히 그 우두머리[渠帥]를 불러 효유하고 상을 후하게 내릴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덕으로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이 아뢰기를, “여진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과 다름이 없으니 은혜로 회유하는 것이 어찌 위엄으로 누르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1029 급제33년차) ○참지정사 곽원(郭元)이 졸하였다. 곽원은 성품이 청렴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대성(臺省)을 역임하여 행정의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으나 몸을 신중히 하지 않고 이작인(李作仁)과 잘 지냈으므로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를 비난하였다. 흥요국(興遼國)이 배반하자 은밀히 아뢰기를, “압록강 동쪽 가에 있는 거란의 보장(保障)을 지금 기회를 타서 빼앗아야 합니다." 하였다. 최사위(崔士威)ㆍ서눌ㆍ김맹(金猛)등이 모두 상서하여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곽원이 고집하여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기지 못했으므로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죽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문장을 잘했으며, 대성(臺省)에 있을 때에 이능(吏能)으로 칭찬을 받았다.》
(1031)○교하기를, “고 참지정사(故參知政事) 곽원(郭元)ㆍ김맹(金猛)과 중추사(中樞使) 윤징고(尹徵古)에게 모두 훈로(勳勞)가 있으므로 짐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곽원(郭元)의 아들 곽증(郭拯)과 김맹(金猛)의 아들 김덕부(金德符), 윤징고(尹徵古)의 아들 윤희단(尹希旦)을 모두 탁용하라." 하였다.
전유연(錢惟演) (996 급제1년차 추정)
(1016 급제20년차)○곽원(郭元)이 송에서 돌아왔다. 곽원이 송 나라에 갔을 때에, 때마침 여진 또한 거란이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조회하지 못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황제가 거란의 맹약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어려웠는데, 학사(學士) 전유연(錢惟演)이 기초한 조서에, “짐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 뜻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으니 비록 지역이 나뉘어 각기 다름은 있으나 짐이 오직 정성을 미루는 것은 차이가 없다. 경의 본도(本道 본국)를 생각하면 진실로 마음에 깊이 걱정되나 그대의 이웃 나라(거란)를 돌아보건대 또한 오래도록 맹약을 따르고 있으니 짐은 서로 화목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황제가 이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같이 하면 비록 거란이 보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하고, 곽원을 명하여 개보사(開寶寺)에 놀게 하고는 은밀히 관반원외랑(館伴員外郞) 장사덕(張師德)을 시켜 곽원을 개유하게 하였다.
김맹(金猛) 996년 급제1년차 추정
(1015 급제19년차) 상장군 김훈(金訓)등이 난(소란)을 일으켰다.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이자림(李子琳)이 은밀히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말하기를, “왕은 어찌 한 고조(漢高祖)의 운몽(雲夢) 행차를 본받지 않는가." 하니, 김맹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은밀히 왕에게 아뢰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자림(李子琳)이 19명을 목베었다.
(1018 급제22년차) 給事中 金猛 知貢擧 황정(黃靖) 등 9명과 명경 1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20 급제24년차) 김맹(金猛)을 송에 보내었다.
(1027 급제31년차) 김맹(金猛)을 ○봄 정월에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30 급제34년차) 김맹(金猛)(1030)김맹(金猛)○중추사(中樞使) 김맹(金猛)이 졸하였다.
(1031) ○교하기를, “고 참지정사(故參知政事) 곽원(郭元)ㆍ김맹(金猛)과 중추사(中樞使) 윤징고(尹徵古)에게 모두 훈로(勳勞)가 있으므로 짐의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곽원(郭元)의 아들 곽증(郭拯)과 김맹(金猛)의 아들 김덕부(金德符), 윤징고(尹徵古)의 아들 윤희단(尹希旦)을 모두 탁용하라." 하였다.
(문종21년1067)김맹(金猛)○ 제하기를, “고 문하시중 최항(崔沆)ㆍ강감찬(姜邯贊)과 참지정사 김맹(金猛)은 청절(淸節)과 곧은 도로써 여러 조정을 겪으면서 보필한 공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사방이 평안하여 백성이 그 은혜를 받는 것은 모두 그들의 힘이다. 최항(崔沆)과 강감찬(姜邯贊)은 수태사 겸중서령을, 김맹(金猛)은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증직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서눌(徐訥)(972~1042 71세졸) 996년 급제1년차 추정 거의 확실함)
(26세1년차996)서눌(徐訥)○ 겨울 12월 정사일에 급제를 주었다.
(46세20년차1016)서눌(徐訥) (현종 7년) 중승(中丞)이 되었다.
(47세21년차1017)서눌(徐訥) 형부시랑 서눌(徐訥)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48세22년차1018)서눌(徐訥)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 등을 거쳐 이부지사(吏部知事)를 지냈다.
(51세26년차1022)서눌(徐訥) 국자좨주(國子祭酒) 서눌(徐訥)의 딸을 맞이하여 숙비(淑妃)로 삼았다.
(51세26년차1022)서눌(徐訥)을 중추사 우산기상시(中樞使右散騎常侍)로, 삼았다.
(52세27년차1023)서눌(徐訥)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53세31년차1024)서눌(徐訥)을 서북면 행영도통(行令都統)으로 삼았다.
(56세34년차1027)서눌(徐訥)을 정월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으로 삼았다.
(58세36년차1029)서눌(徐訥)○평장사 서눌(徐訥)을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로 삼았다.
(59세37년차1030)서눌(徐訥)을 문하시랑 동평장사 판상서이부사로 삼았다.
(60세38년차1031)서눌(徐訥)○6월에 서눌(徐訥)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삼았다.
(60세38년차1031)서눌(徐訥)○겨울 10월에 서눌(徐訥)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靖宗65세43년차1036)서눌(徐訥)ㆍ황주량(黃周亮) ○덕종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祔廟)하였다. 예전에 왕이 소목(昭穆)의 제도를 대신에게 묻자 서눌ㆍ황주량 등이 아뢰기를, “현종을 태묘에 부묘할 때에 형제는 소목을 같이한다는 예문에 따라, 혜종ㆍ정종ㆍ광종ㆍ대종은 반열을 함께 하여 소가 되고 경종ㆍ성종은 반열을 함께 하여 목이 되었으며 목종(穆宗)이 소가 되었는데 현종을 목 자리에 모셨으니, 이소(二昭)ㆍ이목(二穆)이 태조의 묘(廟)와 함께 오묘(五廟)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덕종을 부묘하면 그 수가 오묘를 넘으니, 청컨대 혜ㆍ정ㆍ광 삼종(三宗)을 체천(遞遷)하여 태조묘 서벽(西壁)에 모시고, 대종(戴宗)은 추존한 임금이니 신주를 능에 옮겨다가 제사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靖宗66세44년차1037)★서눌(徐訥) 등 14명○ 거란 내원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우리 영덕진(寧德鎭 평북 의주(義州))에 통첩하기를, “고려가 처음에는 마음을 기울여 정성 바치기를 힘쓰더니 요 몇 년 이후로 예를 빠뜨리니, 직공(職貢)을 닦으려면 먼저 표장(表章)을 올려야 할 것이니 만일 진실한 정성을 증명한다면 따로 허락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문하시중 서눌 등 14명이 의논해 아뢰기를, “사신을 보내어 고주(告奏)하여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靖宗67세45년차1038)★서눌(徐訥)○5월에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의 보고에, “위계주(威鷄州)에 있는 여진의 구둔(仇屯)ㆍ고조화(高刁化) 두 사람이 그 도령(都領)인 장군 개로와 재물을 다투다가 개로의 취한 틈을 타서 때려 죽였습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니, 문하시중 서눌(徐訥)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여진이 비록 다른 종족이나 이미 귀화하여 이름이 우리 호적에 올라서 일반 백성과 같으니 본래 우리나라 법대로 따라야 할 것이고 이제 재물을 다투는 일 때문에 그의 윗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법대로 처리하소서." 하였다. ★내사시랑 황주량(黃周亮) 등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들이 비록 귀화하여 우리의 번리(藩籬)가 되기는 하였으나 겉만 사람이고 속은 짐승 같아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풍교에 익숙하지 않으니,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또 법조문에, '교화 밖[化外]의 여러 사람들은 저희끼리 서로 죄를 범한 경우 각각 제 나라 풍속대로 처리한다.' 하였고, 더구나 그 이웃에 사는 늙은 이들이 이미 저희의 풍속대로 범인 두 집의 재물을 내다가 개로의 집에 보내주어 그 죄를 갚았으니, 어찌 다시 죄를 논하여 처단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황주량 등의 의논을 따랐다.
(70세48년차1041)서눌(徐訥)○시중 서눌(徐訥)에게 궤장을 내려주었다.
(71세49년차1042)서눌(徐訥)○봄 정월에 시중 서눌(徐訥)이 두 번째 표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71세49년차1042)★서눌(徐訥)○내사령 서눌(徐訥)이 졸하였다. 눌은 서희(徐熙)의 아들이다. 예전에 눌이 병에 걸려 지장사(地藏寺)에 가 있었는데 왕이 우승선(右承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 문병을 하고 삼중대광내사령으로 올려주었고 자손에게 영업전을 주었으며, 졸하자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거둥하여 낭하(廊下)에서 조상하고 시호를 원숙(元肅)이라 하였으며, 그 뒤에 왕의 묘에 배향하였다.
이작인(李作仁) (996 급제1년차 추정)
(1009 급제13년차) 이작인(李作仁)12년 임신일-이하줄임. 우승선전중시어사(右承宣殿中侍御史)
(1020 급제24년차) 이작인(李作仁)을 거란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번국(藩國)을 일컫고 공물 바치는 것은 종전대로 할 것을 청하게 하며, 마침내 억류하였던 야율행평(耶律行平) 등을 돌려보내었다.
(1022 급제26년차) 이작인(李作仁)을 사헌대부(司憲大夫)로 삼았다.
(1028 급제32년차) 三月 禮部侍郞 李作仁 知貢擧 賜 정재원(鄭在元)등 10명과 명경1명에게 급제
(1030 급제34년차) ○2월에 이작인(李作仁)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1031 급제35년차) ○11월 동경유수사 호부상서(東京留守使戶部尙書) 이작인(李作仁)이 졸
노진(盧戩) 995년 (급제1년차 추정)
(1010)10월 노진(盧戩)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0 급제15년차) 11월 기해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진(盧戩)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010) 11월 거란이 노진(盧戩)과 그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시켜 격서를 가지고 통주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양규(楊規)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다. 강조의 명령을 받을 것이 아니다." 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성 안의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택성(李澤成) (996 급제1년차 추정)
1038년 경 퇴직 급제42년차 태자첨사
(문종1049 급제53년차)○ 나이가 80세 이상 국로인 상서우복야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顒), 태자첨사 이택성(李澤成) 등에게 합문(閤門)에서 잔치를 베풀고 왕이 친히 나아가 술을 내려주었으며, 이어 보성과 옹 등에게 각각 공복(公服) 1벌과 복두(幞頭) 2개ㆍ뇌원다(腦原茶) 30각(角)을 주고 택성(澤成)에게 공복 1벌을 주며,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正衙門)으로 나감을 허락하노라." 하니, 그 3명이 굳이 사양하였다. 그 이튿날은 민간의 늙은 남녀와 의부ㆍ절부ㆍ효자ㆍ순손과 홀아비ㆍ과부, 애비 없는 어린애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신분을 나누어 좌우 동락정(左右同樂亭)과 낭하에 자리를 정하였으며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知貢擧 명단 :983왕융(王融), 시취관:983 최승노(崔承老), 유언유(劉彦儒), 노혁(盧 奕),
984왕융(王融),985왕융(王融),986이몽유(李夢游),987이몽유(李夢游),988왕융(王融),989왕융(王融),
991백사유(白思柔),993최섬(崔暹),994왕융(王融),995백사유(白思柔),996최섬(崔暹),997류방헌(柳邦憲)
장원급제자: 983최행언(崔行言), 983강은천(姜殷川)=감찬, 984이종(李琮), 985진량(秦亮), 986최영린(崔英藺), 987정우현(鄭又玄), 988 이위(李緯), 989최득중(崔得中), 991최항(崔沆), 993이유현(李維賢), 994최원신(崔元信), 995이자림(李子琳), 996곽원(郭原).
급제 확실시 되는 명단 : 장인전(張仁詮), 이현운(李鉉雲), 김응인(金應仁),이정충(李正忠), 유충정(劉忠正), 유행간(庾行簡), 탁사정(卓思政), 황보유의(皇甫兪義), 유종(柳宗), 이예균(李禮鈞), 왕첨(王瞻), 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이인택(李仁澤), 문연(文演)
급제 추정자 명단 :안소광(安紹光),노정(盧頲),이방(李昉),최현민(崔賢敏),유언경(劉彦卿),
왕첨(王瞻), 박승(朴昇)ㆍ최창(崔昌)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 장영(張瑩), 장계(張洎)
고려7대 목종(穆宗) (998~1009)
998년 正月 賜柳邦憲(26)所擧甲科 周仁傑 等二人 乙科三人 5명급제 국자감시강주재(姜周載)등 50명
김성적(金成積)송 과거급제
주인걸(周仁傑),유소(柳韶),이가도(李可道),이주좌(李周佐),
주인걸(周仁傑) ? ~ ? 미상(未詳) 장원
유소(柳韶) (998 급제1년차 추정)
(1029 급제31년차)○서북면 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 유소(柳韶)를 기복(起復)시켜 진(鎭)에 나아가게 하였다. 이때 흥요국이 원조를 청하는데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유소를 보내어 대비한 것이다.
(1030 급제32년차)○2월에 유소(柳韶)를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31 급제33년차)○5월에 유소(柳韶)를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로 삼았다.
(1031 급제33년차)유소(柳韶)를 중군병마원수(中軍兵馬元帥)로 삼았다.
(1031 급제33년차)○겨울 10월에 유소(柳韶)를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삼았다.
(1033 급제35년차)○평장사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에 관방(關防)을 새로 설치하게 하여, 서해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盈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만들었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1034 급제36년차)○여러 신하들에게 문덕전(文德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유소(柳韶) 등이 관성을 개척한 수고를 위로하여 유소에게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靖1036 급제38년차)유소(柳韶)를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삼았다.
(靖1038 급제38년차)○여름 4월에 평장사 유소(柳韶)가 졸하니, 시호를 양의(襄毅)라 하고 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가도(李可道) (998 급제1년차 추정)
(1021 급제23년차)○여름 5월에 상서좌승(尙書左丞) 이가도(李可道)에게 명하여, 가서 경주 고선사(高僊寺)에 있는 금라가사(金羅袈裟)와 부처의 정수리 뼈와 창림사(昌林寺)에 있는 부처의 어금니를 가지고 와서 모두 내전에 안치하였다.
(1022 급제24년차)○3월에 이가도(李可道)를 동지중추사(同知中樞事)로 삼았다.
(1022 급제24년차) 이가도(李可道)를 중추사 국자좨주(中樞使國子祭酒)로, 삼았다.
(1027 급제29년차) 이가도(李可道)을 ○봄 정월에 참지정사로 삼았다.
(1029 급제31년차)○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029 급제31년차) 이가도(李可道)를 검교태위 수충 창궐 치성공신(檢校太尉輸忠創闕致盛功臣)으로 삼고 왕씨 성을 내려주며, 개성현(開城縣)의 장전(莊田)을 급여하였다.
이주좌(李周佐) (998 급제1년차 추정)
(靖1040 급제 42년차)○정종 경진 6년8월에 형부상서 판어사대사 이주좌(李周佐)가 졸하였다. 주좌는 동경(경주) 사람으로 집안이 대대로 미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는데 유수(留守) 이성공(李成功)이 한 번 보고 그릇이 되었다 하여 임기가 찬[秩滿] 뒤에 데리고 서울에 와서 국학에서 글을 배우게 하자, 과거에 오르고 대성(臺省)을 거쳐 조정에 있은 지 40여 년에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뛰어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졸하자 왕이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사공(司空)을 증직하고 백관을 시켜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998년 三月。左司郞中 崔成務。知貢擧。取進士。賜甲科 姜周載 等七人。乙科二十五人。
同進士八人。恩賜一人。明經二十人。明法二十三人。明書五人。明算十一人及第。
강주재(姜周載),문유령(文儒領),강윤봉(康閏奉),장극맹(蔣劇孟),김응인(金應仁),최보성(崔輔成),조옹(趙顒),이인택(李仁澤),유품렴(庾稟廉),최창(崔昌),조자기(曹子奇),최귀(崔龜),손간(孫簡),강승영(康承穎),이성좌(李成佐),위종정(魏從正),박승(朴昇),강은(康隱),정성(鄭成),백일승(白日昇),장호(張顥),늠희령(廩犧令),유품렴(庾稟廉),유충정(劉忠正),원영(元永),이용지(李用之),간영언(簡英彦),유백부(庾伯符),전인영(田仁穎),피위종(皮渭宗),정민의(鄭民義)
강주재(姜周載) 장원급제
강주재(姜周載) (998년 장원급제1년차)
998년 正月 賜柳邦憲(26)所擧甲科 周仁傑 等二人 乙科三人 5명급제 국자감시 강주재(姜周載)등 50명
(998)三月 左司郞中 崔成務 知貢擧 甲科 강주재(姜周載)等七人 乙科二十五人 同進士十八人
○ 강주재(姜周載) 등 50명과 은사(恩賜) 1명, 명경(明經) 20명, 명법업(明法業) 23명, 명서업(明書業) 5명, 명산업(明算業) 1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10 급제12년차)강주재(姜周載) 11월에 기거랑(起居郞) 강주재(姜周載)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례하였다.
문유령(文儒領)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2 급제14년차)○9월에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 문유령(文儒領)을 거란의 내원성(來遠城)에 보내었다.
강윤봉(康閏奉)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8 급제20년차)○좌윤(左尹) 강윤봉(康閏奉) 등 19명이 전공으로써 작 1급씩 올려받았다.
장극맹(蔣劇孟) (998 급제1년차 추정)
(1034 급제36년차)○3월에 장극맹(蔣劇孟)을 상서 우복야로 삼았다
(문종1047)○ 가을 7월에 제하기를, “수사도 좌복야 장극맹(蔣劇孟)이 오랫동안 변방에서 세운 공이 현저하여 나랏일을 위하여 집을 잊었으니, 특이한 은총을 베풀어 마음에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야 마땅하다. 자손에게 상례로 상주하여 제수하는 음직(蔭職) 외에, 특별히 한 아들에게 관(官)을 내려주라." 하였다.
김응인(金應仁) 998년(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13년차) 감찰어사(監察御史)
(1009년 급제13년차)김응인(金應仁) 황보유의(皇甫兪義)와 함께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군을 모시고 돌아왔다.
(1010 급제14년차)김응인(金應仁)경술 원년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 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자, 김응인(金應仁)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막았다.
(1011 급제15년차) 정월 정축일에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예빈경(禮賓卿) 시랑 박충숙(朴忠淑)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ㆍ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 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1011 급제15년차)○ 기묘일 유종(柳宗)과 김응인(金應仁)등이 경기 안성군(安城郡) 양성은 유종의 고향임에 그곳으로 향했다. 밤에 유종과 응인 등이 밤에 거짓으로 왕의 명령이라 일컫고 임금의 말안장을 부수어 고을 사람에게 주었고. 두 왕후를 각기 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호종하는 장졸을 임명하여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왕이 이에 대해 채문에게 묻자 채문이 크게 울면서, “지금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어 앙화를 당하여 이와 같이 파천하고 있으니, 마땅히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해야 될 것인데, 왕후를 버리고서 살기를 구하는 일을 어찌 차마 하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사산현(蛇山縣)을 지나 천안부(天安府 충남 천안)에 이르니 유종과 응인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여 영접하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도망하였다.
최보성(崔輔成),(998 급제1년차 추정)
1038년 경 퇴직 급제40년차 상서우복야
(문종1049 급제53년차)○ 나이가 80세 이상 국로인 상서우복야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顒), 태자첨사 이택성(李澤成) 등에게 합문(閤門)에서 잔치를 베풀고 왕이 친히 나아가 술을 내려주었으며, 이어 보성과 옹 등에게 각각 공복(公服) 1벌과 복두(幞頭) 2개ㆍ뇌원다(腦原茶) 30각(角)을 주고 택성(澤成)에게 공복 1벌을 주며,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正衙門)으로 나감을 허락하노라." 하니, 그 3명이 굳이 사양하였다. 그 이튿날은 민간의 늙은 남녀와 의부ㆍ절부ㆍ효자ㆍ순손과 홀아비ㆍ과부, 애비 없는 어린애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신분을 나누어 좌우 동락정(左右同樂亭)과 낭하에 자리를 정하였으며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조옹(趙顒). 998년 급제1년차 추정
(靖1046 급제46년차)○9월에 우복야로 치사한 조옹(趙顒) 상장군으로 치사한 김홍광(金洪光) 등이 나이가 많이 들었으므로 술과 음식ㆍ의복을 내려주었다.
1039년경 퇴직 급제39년차 우복야 , 사재경(司宰卿)
(문종1049 급제49년차)조옹(趙顒)○ 나이가 80세 이상 국로인 상서우복야 최보성(崔輔成), 사재경(司宰卿) 조옹(趙顒), 태자첨사 이택성(李澤成) 등에게 합문(閤門)에서 잔치를 베풀고 왕이 친히 나아가 술을 내려주었으며, 이어 보성과 옹 등에게 각각 공복(公服) 1벌과 복두(幞頭) 2개ㆍ뇌원다(腦原茶) 30각(角)을 주고 택성(澤成)에게 공복 1벌을 주며, “합문에서 말을 타고 정아문(正衙門)으로 나감을 허락하노라." 하니, 그 3명이 굳이 사양하였다. 그 이튿날은 민간의 늙은 남녀와 의부ㆍ절부ㆍ효자ㆍ순손과 홀아비ㆍ과부, 애비 없는 어린애와 자식 없는 늙은이, 위독하거나 고칠 수 없는 병이 든 자에게 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신분을 나누어 좌우 동락정(左右同樂亭)과 낭하에 자리를 정하였으며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다.
유품렴(庾稟廉)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27 급제29년차)○교하기를, “전 공부시랑(前工部侍郞) 유품렴(庾稟廉) 등 1백 43명이 비록 아첨하고 사벽하며 간사한 죄를 범하였으나 이미 여러 차례의 사면을 거쳤으니 모두 죄명을 삭제하고 관직에 서용할 것이다." 하였다.
이인택(李仁澤)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2 급제12년차)○ 5월에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ㆍ군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1019 급제19년차)○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이인택(李仁澤)을 거란의 동경에 보내었다.
최창(崔昌),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2년차)경술 원년 지채문(智蔡文) 이 즉시 군용사(軍容使)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나아가 강덕진(剛德鎭 평남 함천군(咸川郡))에 머물렀다.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함질(咸質)양택(楊澤)문안(文晏)등과 이미 항복할 표문을 만들었다.지채문(智蔡文)과 최창(崔昌)이
(1011 급제13년차).최창(崔昌)이 소리질러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 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 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하였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 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는데 종석이 따르지 않자,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이때 성 안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았다
(1011 급제13년차)최창(崔昌)○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조자기(曹子奇)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2년차).경술 원년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 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 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하였다.
(1012 급제14년차)○ 5월에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ㆍ군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최귀(崔龜)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5 급제17년차) ○이전에 계획하였다.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이자림(李子琳)이 은밀히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말하기를, “왕은 어찌 한 고조(漢高祖)의 운몽(雲夢) 행차를 본받지 않는가." 하니, 김맹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은밀히 왕에게 아뢰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자림이 일찍이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가 되었을 때에 자못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곧 임시로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을 임명하고 재촉하여 먼저 가서 준비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여러 신하들을 장락궁(長樂宮)에 모아 잔치를 베풀고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하여 죽였다. 상장군 김훈(金訓)ㆍ상장군 최질(崔質)ㆍ박성(朴成), 이협(李恊)ㆍ최가정(崔可貞)ㆍ석방현(石邦賢)ㆍ이상(李翔), 이섬(李暹)ㆍ김정열(金貞悅)ㆍ효암(孝嵓)ㆍ공문(恭文), 임맹(林猛)ㆍ병부낭중(兵部郞中) 최귀(崔龜) 등 19명을 목베었다. 이때 무신이 권세를 부려 문관까지 겸임하니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와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였다. 최귀는 유사(儒士)인데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왕을 호종하였으나 성질이 거칠고 비루하여 최질 등과 사귀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손간(孫簡) (998 급제1년차 추정)
(1015 급제17년차)○ 기미일에 거란이 와서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니, 대장군 정신용(鄭神勇), 별장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사의 뒤로 나와 쳐서
머리 7백여 급을 베었는데 신용 등 6명은 전사하였다.
(1016)손간(孫簡)에게는 상약봉어(尙藥奉御)를, 추증하였다.
강승영(康承穎) (998년 급제1년차 추정)
(1015 급제17년차)○ 기미일에 거란이 와서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니, 대장군 정신용(鄭神勇), 별장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사의 뒤로 나와 쳐서 머리 7백여 급을 베었는데 신용 등 6명은 전사하였다.
(1016 급제18년차)강승영(康承穎)에게는 태사령(太史令)을 증직하였다.
(靖1036)강승영(康承穎)○제하기를, “을묘년에 거란이 변방을 침범하였을 때 강승영(康承穎)이 선봉이 되어 싸우다 죽었으니 그 공을 생각해 주어야 하겠다.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증직하고, 그 아들 강화(康和)에게 초직(初職)을 주라." 하였다.
이성좌(李成佐) (998 급제1년차 추정)
(1010) 11월 기해일 이성좌(李成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위종정(魏從正) 998년(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11년차) 내사주서(內史主書)죄를 얻어 쫓겨나, ○기유 12년갑술일-이하줄임..
(1011년 급제13년차)○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박승(朴昇) 998년(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13년차)최창(崔昌)○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강은(康隱) 998년(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13년차)○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정성(鄭成) (998 급제1년차 추정)
(1011 급제13년차) 진사(鎭使) 호부낭중.
(1011)계묘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鎭使)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그들이 반쯤 건너갔을 때에 뒤에서 치니 거란 군사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백일승(白日昇) (998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2년차)경술 원년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보내어 우호를 닦았다. 억류되었다.
장호(張顥) (998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2년차)경술 원년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늠희령(廩犧令) (998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2년차)경술 원년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유품렴(庾稟廉) (998 급제1년차 추정)
(1027 급제29년차)○교하기를, “전 공부시랑(前工部侍郞) 유품렴(庾稟廉) 등 1백 43명이 비록 아첨하고 사벽하며 간사한 죄를 범하였으나 이미 여러 차례의 사면을 거쳤으니 모두 죄명을 삭제하고 관직에 서용할 것이다." 하였다.
유충정(劉忠正) (998 급제1년차 추정)
(1009년 급제11년차)○기유 12년 임신일-이하줄임..-고려사절요- 지은대사 좌사낭중(知銀臺事左司郞中)유충정은 재능은 없으나 역시 왕에게 극히 사랑을 받았다.
(1030)유충정(劉忠正) 가을 7월에 흥요국의 행영도부서(行營都部署) 유충정(劉忠正)이 영주자사(寧州刺史) 대경한(大慶翰)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원영(元永) (998 급제1년차 추정)
(1018 급제20년차)○예빈소경(禮賓少卿) 원영(元永)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이용지(李用之)간영언(簡英彦) (998 급제1년차 추정)
(1010 급제12년차)경술 원년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는 밤에 도망하고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대장군신녕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었다. 성이 드디어 함락되니 거란은 군사 6천여 명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1011)간영언(簡英彦)○ 대장군 채온겸(蔡溫謙). 대장군 신영한(申寧漢),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崔元), 우습유(右拾遺) 승리인(乘里仁), 태사승(太史丞) 유인택(柳仁澤)이 전사하였으므로, 그들의 집에 쌀과 베로 차등 있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유백부(庾伯符) (998 급제1년차 추정)
(1019 급제21년차)○통주도부서(通州都部署) 유백부(庾伯符) 등 1백 73명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으므로, 벼슬을 추증하고 그 집에 쌀과 보리를 차등 있게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1032)유백부(庾伯夫)○경술년 이래 전장에서 죽은 사람의 공을 논하여 유백부(庾伯夫)에게 위위소경을 증직하였다.
전인영(田仁穎) (998 급제1년차 추정)
(1019 급제21년차)
(1032)○경술년(1010년) 이래 전장에서 죽은 사람의 공을 논하여 전인영(田仁穎)에게 예빈소경을 증직하였다.
피위종(皮渭宗),정민의(鄭民義) (998 급제1년차 추정)
(1025 급제27년차) 등 6명을 불러 그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예전에 위종이 병부낭중으로 있을 때 국경 밖에서 순찰하다가, 거란의 장군 야율살할(耶律撒割)이 사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주부(注簿) 정민의(鄭民義) 등 5명과 함께 달려나가서 그를 죽이고 돌아와서 공(功)으로 상을 받으려 하자, 유사가 그를 함부로 군사를 움직여 국경 밖에 나간 죄로 먼 지방에 귀양보냈던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놓여 돌아왔다.
김인유(金仁裕) (998 급제1년차 추정)
(1022 급제24년차)○군기소감(軍器少監) 김인유(金仁裕)를 거란에 보내어 춘계 문후(春季問候)를 하였다.
허원(許元) ? ~ ? 양천(陽川) [부] 성명 : 허현(許玄)
1000 柳邦憲(28)。知貢擧 賜甲科 宋 翃 等八人。乙科七人。明經八人及第 15명급제
송 굉(宋 翃),최제안(崔齊顔),왕희걸(王希傑)
송 굉( 宋 翃)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최제안(崔齊顔) (1000 급제1년차 추정) (확정)
(1020 급제20년차)을 거란에 보내어 천령절(千齡節)을 경하였다.
(1030 급제30년차)최제안(崔齊顔)을 중추사(中樞使)로 삼았다.
(1034 급제34년차)○12월에 최제안(崔齊顔)을 이부상서로 삼았다.
(靖1036 급제36년차)최제안(崔齊顔)을 상서좌복야 중추사로 삼았다.
(靖1037 급제37년차)최제안(崔齊顔)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중추사로 삼았다.
(靖1043 급제43년차)○2월에 최제안(崔齊顔)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삼았다.
(靖1046 급제46년차)○시중 최제안(崔齊顔)에게 명하여 구정에 나가 향을 피우고 거리에 나가는 경행(經行)을 배송(拜送)하게 하였다. 서울 거리를 세 길로 나누어 각각 색색 가마에 《반야경(般若經)》을 싣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중들은 법복을 입고 걸어가며 경을 외우고 감압관(監押官) 또한 공복을 입고 도보로 따라 거리를 돌아다니며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니, 이것을 경행이라 하며 이해부터 상례(常例)가 되었다.
(靖1046 급제46년차)○8월에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崔冲)등을 불러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靖1046 급제46년차)○겨울 10월에 시중 최제안 등이 아뢰기를, “병서(兵書)에, '만 명의 군사 중에서 3천 명을 뽑아 기병(奇兵)으로 만들고, 천 명의 군사 중에서 3백 명을 뽑아 기병으로 만든다.' 하였으니, 육위군(六衛軍)에서 장군 한 사람마다 거느린 중에서 2백 명씩 뽑아 선봉군(先鋒軍)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靖1046 급제46년차)○시중 최제안(崔齊顔)이 졸하였다. 태조의 신서(信書)인 《훈요(訓要)》가 난리 중에 없어졌는데, 제안이 일찍이 최항(崔沆)의 집 서고에서《훈요》를 발견하여 바치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문종1047)○ 제하기를, “고 시중(故侍中) 최제안(崔濟顔)의 한 아들이 비록 나이는 벼슬할 때가 되지 않았으나, 특별히 8품직을 주어야 하겠다." 하였다.
김행공(金行恭) 1000 급제1년차 추정
(1031 급제31년차)을 거란에 보내어 새 임금의 즉위를 하례하게 하였다.
(1031 급제31년차)○김행공(金行恭)이 거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거란이 우리가 청한 바를 들어주지 아니 합니다." 하였다. 평장사 서눌 등 29명이 의논하기를, “거란이 우리가 청한 말을 듣지 않으니 사신을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중추사(中樞使) 황보유의(皇甫兪義) 등 33명은 의논하기를, “만약 국교를 단절한다면 그 피해가 반드시 백성을 괴롭게 하는 데 이를 것이니, 화호를 계속하여 백성을 휴식 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왕이 서눌과 왕가도(王可道)의 의논을 좇아 하정사(賀正使)는 정지하고 성종(聖宗)의 태평이라는 연호 그대로 썼다.
1002년 三月。崔成務(30)。知貢擧。取進士。
八月。下敎。賜乙科 朴元徽 等三人。丙科六人。明經十九人及第。 9명급제
박원휘(朴元徽),
○ 6월에 탐라산(耽羅山)에서 4군데에 구멍이 뚫리고 붉은 빛깔의 물이 5일 동안 솟아나오다가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기와나 돌이 되었다.
박원휘(朴元徽) 장원급제 후일 기록 미상.
1004년 四月。內史舍人 崔 沆(13)。知貢擧。取進士。賜甲科 黃周亮 等五人。乙科十人。明經四人及第
황주량(黃周亮),이작충(李作忠),유교(柳喬),
○ 봄 3월에 과거법(科擧法)을 고쳐 정하였다. 전에는 늘 봄에 선비를 시험하여 뽑아 두었다가 더러 가을ㆍ겨울에 와서 방(榜)을 발표하였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3월에 과장(科場)을 개설하여 10일 동안 문을 잠그고, 첫날은 《예경(禮經)》10조를 첩시(貼試)하며, 이튿날은 시(詩)ㆍ부(賦)를 시험하고, 하루가 지나서 시무책(時務策)을 시험하여 과거의 등급을 정하여 아뢰고는 문을 열기로 정하였다. 명경(明經) 이하의 여러 업(業)은 전년 11월에 뽑아 두었다가 진사(進士)와 함께 같은 날에 방을 발표하기로 정하고, 이를 항구적인 법식으로 삼았다.
황주량(黃周亮) 1004년 장원급제
(1013 급제9년차)시어사(侍御史) 황주량(黃周亮)ㆍ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1023 급제19년차)翰林學士 黃周亮(19) 知貢擧 장교(張喬) 등 4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29 급제25년차) 尙書左丞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030 급제26년차)황주량(黃周亮)을 중추부사(中樞副使)로 삼았다.
(1032 급제28년차)황주량(黃周亮)을 중추사로 삼았다.
(1032 급제28년차)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로 삼았다.
(1033 급제29년차)황주량(黃周亮)을 판어사대사로 삼았다.
(1034 급제30년차)황주량(黃周亮)을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로 삼았다.○왕이 현종의 딸을 후로 삼았다.
(1034 급제30년차)황주량(黃周亮)○12월에 왕제 서(緖)를 수태사 겸 내사령으로, 기(基)를 수태보로, 황주량을 예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靖1036급제32년차)황주량(黃周亮) ○덕종의 신주를 태묘에 부묘(祔廟)하였다. 예전에 왕이 소목(昭穆)의 제도를 대신에게 묻자 서눌ㆍ황주량 등이 아뢰기를, “현종을 태묘에 부묘할 때에 형제는 소목을 같이한다는 예문에 따라, 혜종ㆍ정종ㆍ광종ㆍ대종은 반열을 함께 하여 소가 되고 경종ㆍ성종은 반열을 함께 하여 목이 되었으며 목종(穆宗)이 소가 되었는데 현종을 목 자리에 모셨으니, 이소(二昭)ㆍ이목(二穆)이 태조의 묘(廟)와 함께 오묘(五廟)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덕종을 부묘하면 그 수가 오묘를 넘으니, 청컨대 혜ㆍ정ㆍ광 삼종(三宗)을 체천(遞遷)하여 태조묘 서벽(西壁)에 모시고, 대종(戴宗)은 추존한 임금이니 신주를 능에 옮겨다가 제사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靖1037 급제33년차)황주량(黃周亮)을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 예부사로 삼았다.
(1037 급제33년차)三月 禮部尙書 黃周亮(33) 知貢擧 賜 노연패(盧延霸) 등12명과 명경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靖1038 급제34년차) ○5월에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의 보고에, “위계주(威鷄州)에 있는 여진의 구둔(仇屯)ㆍ고조화(高刁化) 두 사람이 그 도령(都領)인 장군 개로와 재물을 다투다가 개로의 취한 틈을 타서 때려 죽였습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니, 문하시중 서눌(徐訥)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여진이 비록 다른 종족이나 이미 귀화하여 이름이 우리 호적에 올라서 일반 백성과 같으니 본래 우리나라 법대로 따라야 할 것이고 이제 재물을 다투는 일 때문에 그의 윗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법대로 처리하소서." 하였다. 내사시랑 황주량(黃周亮) 등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들이 비록 귀화하여 우리의 번리(藩籬)가 되기는 하였으나 겉만 사람이고 속은 짐승 같아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풍교에 익숙하지 않으니,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또 법조문에, '교화 밖[化外]의 여러 사람들은 저희끼리 서로 죄를 범한 경우 각각 제 나라 풍속대로 처리한다.' 하였고, 더구나 그 이웃에 사는 늙은 이들이 이미 저희의 풍속대로 범인 두 집의 재물을 내다가 개로의 집에 보내주어 그 죄를 갚았으니, 어찌 다시 죄를 논하여 처단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황주량 등의 의논을 따랐다.
(靖1038 급제34년차) ○11월에 황주량을 문하시랑평장사로 삼았다.
(1041년 月 門下侍郞 黃周亮(37)。知貢擧。取進士。
賜乙科 兪 暢 等四人。丙科四人。明經五人及第)
(1041 급제37년차)靖宗七年 門下侍郞 黃周亮(37) 知貢擧 賜 유창(兪暢) 등 5명과 명경 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인원오차
(靖1043 급제39년차)○봄 정월에 황주량(黃周亮)을 특진 수태보(特進守太保)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삼았다.
이작충(李作忠) 1004 급제1년차 추정(확정)
(1024 급제20년차 )○6월에 문하시랑 평장사 최항(崔沆)이 졸하였다. 항은 언휘(彦撝)의 손자이다. 아들 최유부(崔有孚)를 비서성 교서랑(祕書省校書郞)에 임명하며 사위 이작충(李作忠)에게 장복(章服)을 내려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1032 급제28년차) 尙書左丞 李作忠(24) 知貢擧 백가이(白可易)등 9명과 은사4명에게 급제를 내려주었다.
(1034 급제30년차) ○3월에 이작충(李作忠)을 어사대부 지한림원사로 삼았다.
(1036 급제32년차) 이작충(李作忠)을 이부상서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1036 급제32년차) ○8월에 이작충(李作忠)을 중추원사로 삼았다.
(1038 급제34년차) ○11월에 이작충(李作忠)을 참지정사주국(參知政事柱國)으로 삼았다.
(1043 급제39년차) ○2월에 이작충(李作忠)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삼았다.
(1044 급제40년차) 四月。內史侍郞 李作忠。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金元鉉 等四人。丙科五人。同進士七人。明經二人。恩賜二人及
유교(柳喬) 1004 급제1년차 추정
(1031 급제27년차)○공부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를 거란에 보내어 성종(聖宗)의 장사에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1005년 三月。崔 沆(14)。知貢擧。
四月。下敎。賜甲科 崔 冲 等七人。明經三人及第。 7명급제
최충(崔冲),황보영(皇甫穎),김영기(金令器),김양좌(金良佐)
최충(崔冲) (1005 급제1년차) 장원급제
(1013 급제8년차) 우습유(右拾遺) 최충(崔冲)을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1026 급제21년차) 內史舍人 崔冲 知貢擧 賜 최황(崔貺)등11명과 명경1명에 급제를 주었다.
(1031 급제26년차) 최충(崔冲) 현종이 웅함에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옛글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 하리오.' 라고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몰래 나라를 위태롭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함을 알아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제하고 멀리 사자를 빨리 보내 맞아와 왕위를 전하여 왕실이 튼튼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인하여 병권(兵權)을 가진 신하[戎臣 강조(康兆)를 가리킴]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임금이 파천하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한 뒤에는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라 이를 수 있다." 하였다.
(1034 급제29년차) ○여름 4월에 동지중추원사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성종(成宗) 때에 안팎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說苑)》의 육정 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 나라 자사의 육조령(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하고 격려한 바를 알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034 급제29년차) 최충(崔冲)을 형부상서 중추사로 삼았다.
(1035 급제30년차) 刑部尙書 崔冲(30) 知貢擧 김무체(金無滯)등 14명과 명경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37 급제32년차) 최충(崔冲)을 참지정사 수국사로 삼았다.
(1041 급제36년차) ○8월에 판서북로병마사 상서좌복야 최충에게 명하여 순시하게 하였는데, 왕이 편전에 거둥하여 옷을 내려주고 보냈다.
(1041 급제36년차) 최충(崔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1043 급제38년차) ○2월에 최충(崔冲)을 수사도수국사상주국으로 삼았다.
(1046 급제41년차) 성종十二年 三月 門下侍郞 崔冲(41) 知貢擧 이인정(李仁挺)등 17명과 명경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46 급제41년차) ○8월에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시중 최제안(崔齊顔)과 평장사 최충(崔冲)등을 불러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문종1047 급제42년차)○ 최충(崔冲)을 문하시중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원충(金元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이자연(李子淵)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047 급제42년차) ○ 6월에 제하기를, “법률은 형벌의 판례이다. 법률이 밝으면 형벌에 지나침이 없고, 법률이 밝지 못하면 죄의 경중이 잘못되는 것이니, 지금 쓰는 율령이 어떤 것은 그릇된 것이 많아서 참으로 마음에 걸린다. 시중 최충(崔冲)을 시켜 여러 율관(律官)을 모아 거듭 자세히 상고하여 진실로 마땅하게 하는 데 힘쓰고 서업(書業)과 산업(算業) 또한 살펴 바루도록 하라." 하였다. 최충(崔冲)등을 문덕전(文德殿)에 불러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무를 물었다.
(문종1049 급제44년차)○ 2월에 최충(崔冲)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李子淵)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王寵之)를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문종1050 급제45년차) ○ 문하시중 최충(崔冲)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부로 삼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金元冲)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李子淵)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鄭傑)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문종1050 급제45년차) ○ 11월에 도병마사 문하시중 최충(崔冲)등이 아뢰기를, “서북의 주ㆍ진이 지난해에 흉년이 듦으로 인하여 백성이 가난하고 궁핍하여 남자는 부역에 지치고 여자는 꾸어먹은 쌀을 갚느라 지치니, 어떻게 견디어 나가겠습니까. 성지를 수선하는 외에 일체 역사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1050 급제45년차) ○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동여진 추장 염한(鹽漢) 등 85명이 일찍이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하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해 갔으므로 경관(京館)에 억류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오랑캐는 겉만 사람이고 속은 짐승이어서 형법으로도 응징할 수 없고 인의로도 교화할 수 없습니다. 구류시킨 지가 이미 오래되어 앙심을 먹고 원한을 품을 것이며, 수구(首丘)의 정이 반드시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으니, 모두 놓아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3월부터 억류15명, 전후 포함 85명)
(문종1051 급제46년차)4월 광인관(廣仁館)에 구류하였던 동여진 적수(賊首) 아골(阿骨) 등 77명을 놓아 돌려보냈다.
(문종1053 급제48년차) ○ 제하기를, “시중 최충(崔冲)은 대대로 유종(儒宗)이며 삼한의 기덕(耆德)이었다. 지금 비록 늙어서 물러가겠다 하나 차마 윤허할 수 없으니, 해사(該司)를 시켜 옛 법을 상고하여 궤장을 내려주어 일을 보게 하라." 하였다.
(문종1055 급제50년차) ○ 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李子淵)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문종12년1058 급제53년차) ○ 여름 4월에 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올렸더니 치사하므로, 의대와 은그릇ㆍ비단ㆍ포백과 안장 갖춘 말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문종12년1058 급제53년차) ○ 예사가 아뢰기를, “삼가 제지(制旨)에 의거하니, '예식을 갖출 때의 어복(御服)은 마땅히 붉고 누른색을 입는 것이지마는 그 외에 다른 색으로 입을 만한 것을 널리 옛 서적에서 살펴 아뢰라.' 하셨는데, 이제 〈율력지(律曆志)〉를 상고하니, '누른 빛은 중(中)의 색으로 왕의 복색이다.' 하였고, 《당사(唐史)》에는, '천자의 옷에 적색ㆍ황색을 사용하므로 마침내 사서인(士庶人)은 세 가지 누른빛으로는 옷을 만들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하였으며, 또 '강사의(絳紗衣)는 초하루 조하를 받을 때에 입는다.' 하였습니다. 《개원례(開元禮)》에는, '황제가 원구(圓丘)에서 풍년을 빌 때에는 강사포(絳紗袍)를 입는다.' 하였고, 고사(古史)에, '한 번 물들인 것을 강색(絳色)이라 한다.' 하고 그 주(注)에, '분홍색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왕의 복색은 예식을 갖출 때에는 황ㆍ자(赭)ㆍ강 세 가지 색이고 연회의 작은 모임에는 편의대로 할 것이나, 지금 입으시는 홍색ㆍ황색 외에는 대신할 만한 다른 색이 없습니다." 하였다.
(문종22년1068 급제63년차) ○ 9월에 수태사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충(崔冲)이 졸하였다. 충은 해주 대녕군(大寧郡) 사람인데, 풍채가 훌륭하고 성품과 행실이 곧고 굳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목종조에 갑과 1등으로 뽑혀서 4대의 조정을 거치며 벼슬하였고, 자질이 문무를 겸하여서 나가서는 장수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었다가 나이 70세에 이르러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왕이 그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특별히 윤허하였으나, 군사상 큰 일은 모두 자문하였다. 여러 차례로 추충(推忠)ㆍ찬도(贊道)ㆍ좌리(佐理)ㆍ동덕(同德)ㆍ홍문(弘文)ㆍ의유(懿儒)ㆍ보정(保定)ㆍ강제(康濟)라는 공신의 호칭을 더해주었다. 현종이 중흥한 뒤로 전쟁이 겨우 멈추어 문교(文敎)에 겨를이 없었는데, 충이 후진들을 불러 모아서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니, 여러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드디어 낙성(樂聖)ㆍ대중(大中)ㆍ성명(誠明)ㆍ경업(敬業)ㆍ조도(造道)ㆍ솔성(率性)ㆍ진덕(進德)ㆍ대화(大和)ㆍ대빙(待聘)이라는 9재(齋)로 나누었는데,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일렀으며,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도(徒)에 들어가서 배웠다. 해마다 더운 철이면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서 여름 공부[夏課]를 하며, 도 가운데 급제한 자로 학문은 우수하면서 벼슬하지 않은 자를 골라 교도(敎導)로 삼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치게 하였다. 간혹 선진(先進 먼저 과거에 오른 사람)이 오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한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 차례로 이름을 불러들여서 작은 술자리를 베푸는데, 아이와 어른이 좌우에 벌여 서서 술과 안주를 받들어 진퇴의 예의가 있으며, 장유(長幼)의 질서가 있어 종일토록 수작하니, 보는 자가 아름답게 여기고 찬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와서 충이 졸하니, 태의감(太醫監) 이염(李鹽)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여서 조위(弔慰)하고 시호를 문헌(文憲)이라 하였으며,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 뒤에도 과거를 보려는 사람이 모두 9재에 적(籍)을 두니,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하였다. 또 유신(儒臣) 중에 도(徒)를 둔 자가 11명이 있어 세상에서 12도라고 일컬었으나 충의 도가 가장 성하였다. 동방에 학교가 일어난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하였다.
황보영(皇甫穎) 1005 급제1년차(확정)
(1035 급제30년차) 황보영(皇甫穎)을 중추사 겸 어사대부로 삼았다.
(靖1036 급제31년차) ○8월에 황보영(皇甫穎)을 병부상서로 삼았다.
(靖1041 급제36년차) ○신사일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皇甫穎)이 강가에서 영접하였다. 왕이 용선(龍船)에 올라 대신에게 잔치를 내려주고, 승개(承愷)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우습유(右拾遺) 김상빈(金尙賓)이 나아와 간언하니 이내 중지하고 선은관(宣恩館)에 들어가 거둥하였다.
(靖1041 급제36년차) 황보영(皇甫穎)을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삼았다.
(靖1043 급제38년차) ○2월에 황보영(皇甫穎)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삼았다.
(문종1047 급제41년차) ○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영(皇甫穎)이 아뢰기를, “신이 후사가 없으니 외손 김녹숭(金祿崇)으로 대를 잇게 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1047 급제41년차) ○ 겨울 10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황보영(皇甫穎)이 졸하였다.
김영기(金令器) 1005 급제1년차 추정(확정)
(靖1044 급제39년차)○11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영기(金令器)가 아뢰기를, “지금 세 성을 쌓는데 며칠이 안 되어 다 마쳤으니, 그때 역사를 감독하던 주ㆍ진의 관리들에게 작상을 주어야 마땅하고, 또 세 군데 성을 쌓은 땅이 원래 적의 소굴이어서 침입할까 염려하여 요해마다 둔을 설치하고 뭍과 육지를 막아서 적이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군사들 역시 포상하여 칭찬해야 하며, 성을 쌓을 때에 나가 싸워 공이 있는 병부상서 고열(高烈) 등에게도 역시 특별히 포상하여 뒷사람을 권장하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1047 급제42년차)김영기(金令器)○ 최충(崔冲)을 문하시중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원충(金元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이자연(李子淵)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052 급제45년차)○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김영기(金令器)가 졸하였다.
김양좌(金良佐) 1005 급제1년차(확정)
(1032 급제27년차)○경술년 이래 전장에서 죽은 사람의 공을 논하여 김양좌(金良佐)에게 소부소감을 증직하였다.
유교(柳喬) 1005 급제1년차
(1031 급제26년차)○공부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를 거란에 보내어 성종(聖宗)의 장사에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1007년 禮部侍郞 高凝(30) 知貢擧조원(趙元)등 6명과 명경3명에 급제를 주었다.
조원(趙元),,김종현(金宗鉉),송융(宋融)
조원(趙元) 장원급제
(1010 급제3년차) 경술 원년 기미일에 탁사정(卓思政)이 도망하고 장군 대도수(大道秀)는 거란에 항복하니 남은 장수들은 통군녹사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함께 신사(神祠)에 빌고 점을 쳐서 길조를 얻었다. 이에 여럿이 조원(趙元)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었다.
(1018 급제11년차)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박유인(朴有仁) ? ~ ? 미상(未詳) 1007 급제1년차 추정(확정)
(1030 급제23년차) 四月 禮部郞中 朴有仁(23) 知貢擧 賜 최유선(崔惟善)등18명
(1033 급제26년차) 禮部侍郞 朴有仁(26) 知貢擧 최희목(崔希穆)등8명과 명경2명ㆍ은사2명
(1034 급제27년차) ○한림학사 박유인(朴有仁)을 평양군 문학(平壤君文學)으로
(1041 급제34년차)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박유인(朴有仁)과 우승(右丞) 이유량(李惟亮)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하는 예를 축하하고, 판위위사(判衛尉事) 유삼(柳參)은 방물을 바쳤다.
(문종1047 급제40년차) ○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삼았다.
김종현(金宗鉉) 1007 급제1년차 추정
(1019 급제12년차)○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姜邯贊)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송융(宋融) 1007 급제1년차 추정
(靖1039 급제32년차)○12월에 호부시랑 송융(宋融)을 보내 거란에 가서 영수절(永壽節)을 하례하고 겸하여 새해를 축하하였다.
왕희걸(王希傑) (1007 급제1년차 추정)
(1028 급제21년차)○11월에 태복경(太僕卿) 왕희걸(王希傑)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유량(李惟亮)을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하였다.
(1032 급제25년차)○봄 정월에 어사대(御史臺)가, 대부경(大府卿) 왕희걸(王希傑)ㆍ우사낭중(右司郞中) 유백인(柳伯仁)ㆍ예부낭중 최복규(崔復珪)ㆍ원외랑 이응년(李膺年)이 서경에서 분사(分司)로 있을 적에 토지를 구하고 돈을 불렸다고 탄핵하여 파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008년 三月 中樞院直學士 蔡忠順(15년차) 知貢擧
賜甲科 孫元仙 等四人。乙科五人。明經二人及第 9명급제
손원선(孫元仙),이괴(李瓌)
손원선(孫元仙) 장원급제 이후 자료 미상.
이괴(李瓌) 1008 급제1년차 추정
(1027 급제19년차)○9월에 혜일중광사(慧日重光寺)를 세우도록 명하고 인부와 공장(工匠)을 징발하게 하니 대신과 간관이 모두 아뢰기를, “백성들이 괴롭고 피폐하니 공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좌승선(左承宣) 이괴(李瓌)만은 아뢰기를, “부처님을 위하여 절을 지으니 공덕이 한량없을 것인데 백성들을 수고롭게 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의 의논이 그를 비난하였다.
(靖1044 급제36년차)○우복야 이괴(李瓌)와 상사봉어(尙舍奉御) 최희정(崔希正)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하여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1009년 初卽位。禮部侍郞 姜邯贊(26년차)。知貢擧。取進士。
賜甲科 安昌齡。乙科四人。同進士 三人。明經二人及第 7명급제
안창령(安昌齡),김원충(金元冲)
안창령(安昌齡) 장원급제 이후 자료 미상.
김원충(金元冲) 1009 급제1년차 추정(확정)
(靖1036 급제27년차)○진봉 겸 고주사(進奉兼告奏使)로 상서우승 김원충(金元冲)이 송 나라로 가다가 옹진(瓮津)에 이르러 배가 부서져서 그대로 돌아왔다.
(靖1038 급제29년차)김원충(金元冲)○상서좌승(尙書左丞) 김원충(金元冲)이 거란에 가서 문안하고 사은하며 이어 연호를 청하였다.
(문종1050 급제41년차)김원충(金元冲)○ 문하시중 최충(崔冲)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부로 삼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金元冲)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李子淵)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鄭傑)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상기 知貢擧 명단 : 1002 최성무(崔成務), 1000 류방헌(柳邦憲),1002 최성무(崔成務), 1004최항(崔沆), 1005최항(崔沆), 1007고응(高凝), 1008채충순(蔡忠順)
고려8대 현종(顯宗)(1010~1031)
1010년 四月。國子司業 孫夢周(27)。知貢擧。
賜甲科 徐 崧。丙科六人。同進士 一人。明經三人及第。8명급제
서숭(徐崧),박성걸(朴成傑)
서숭(徐崧) 장원급제
(1년차1010) 四月 장원 서숭(徐崧) 등 8명과 명경(明經)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지공거(知貢擧)손몽주(孫夢周)가 아뢰어 시(詩)ㆍ부(賦)를 시험하고 시무책(時務策)은 시험하지 않았다.
(1010) 10월 서숭(徐崧)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1010) 11월 기해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전투에서 죽었다.
박성걸(朴成傑) 1010 급제1년차 추정
(靖1039 급제29년차)○9월에 도병마부사 박성걸(朴成傑)이 아뢰기를, “동로 정변진(靜邊鎭 함남 영흥(永興))에 번적이 엿보는 곳에 성을 쌓으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1050 급제40년차)○ 봄 정월에 동북면 병마사 박성걸(朴成傑)이 아뢰기를, “지난해 10월에 해적이 진명(鎭溟 함남 덕원군(德源郡))의 병선 2척을 약탈해 가자 병마녹사(兵馬錄事) 문양열(文揚烈)이 곧 병선을 이끌고 원흥도부서판관(元興都部署判官) 송제한(宋齊罕)과 더불어 적의 소굴까지 쫓아가 그 집들을 불질러 없애고 20급을 베었으니, 그 공을 상주어야 합니다." 하니, 제하여 도병마사에게 내려보냈다.
(문종1053 급제43년차)○왕총지(王寵之)ㆍ이자연(李子淵)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정준(金廷俊)ㆍ박성걸(朴成傑)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055 급제45년차)○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李子淵)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金廷俊)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朴成傑)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문종17년1063 급제53년차)○ 박성걸(朴成傑)을 검교태위 문하시중으로, 임종일을 중서시랑 평장사 주국으로 올렸는데, 모두 치사하였다.
(선종원년1084)박성걸(朴成傑)○가을 8월에 제하기를, “현종(顯宗)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실 때에 문하시중 박성걸(朴成傑)은 호종(扈從)한 공이 있었으니,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양규(楊規) 등의 녹권에 아울러 기록하라." 하였다
(1010년현종 남행인데 성걸이 20대 초 추정하면 1063년은 70대 이고 무장일 가능성이 크다.)
유백인(柳伯仁) (1010 급제1년차 추정)
(1032 급제22년차)○봄 정월에 어사대(御史臺)가, 대부경(大府卿) 왕희걸(王希傑)ㆍ우사낭중(右司郞中) 유백인(柳伯仁)ㆍ예부낭중 최복규(崔復珪)ㆍ원외랑 이응년(李膺年)이 서경에서 분사(分司)로 있을 적에 토지를 구하고 돈을 불렸다고 탄핵하여 파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靖1040 급제29년차)○6월에 상서우승 유백인(柳伯仁)을 거란에 보내 사은하였다.
최복규(崔復珪) (1010 급제1년차 추정)
(1032 급제22년차)○봄 정월에 어사대(御史臺)가, 대부경(大府卿) 왕희걸(王希傑)ㆍ우사낭중(右司郞中) 유백인(柳伯仁)ㆍ예부낭중 최복규(崔復珪)ㆍ원외랑 이응년(李膺年)이 서경에서 분사(分司)로 있을 적에 토지를 구하고 돈을 불렸다고 탄핵하여 파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김화언(金華彦)
(靖1038)○지례사(持禮使)로 합문지후(閤門祗候) 김화언(金華彦)을 거란 동경에 보냈다.
1013년 八月。左僕射 金審言(30)。知貢擧。取進士。覆試。
賜乙科 林維幹 等三人。丙科三人。同進二人。明經一人及第 8명급제
임유간(林維幹)
임유간(林維幹) 장원급제
(1039 급제26년차)左諫議大夫 林惟幹(26) 知貢擧 賜 황항지(黃抗之)등18명과 명경2명 은사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39 급제26년차)임유간(林維幹)○우산기상시 임유간(林維幹)을 보내 거란에서 책봉한 데 대해 사례하였다.
(문종1047 급제34년차) ○ 제하기를, “고 중추원사 임유간(林維幹)이 충정으로 보필해서 그 공적이 참으로 많아 특별한 은전을 행해야 마땅하니, 그 아들 양개(良槩)에게 8품직을 제수하여야 하겠다."
이응년(李膺年) 1013 급제1년차 추정
1032 급제19년차)○봄 정월에 어사대(御史臺)가, 대부경(大府卿) 왕희걸(王希傑)ㆍ우사낭중(右司郞中) 유백인(柳伯仁)ㆍ예부낭중 최복규(崔復珪)ㆍ원외랑 이응년(李膺年)이 서경에서 분사(分司)로 있을 적에 토지를 구하고 돈을 불렸다고 탄핵하여 파면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014년 四月。 秘書監 周 佇。知貢擧。取進士。
賜 禹賢符 等十一人及第。
우현부(禹賢符),석방보(石邦寶),왕총지(王寵之),유염현(遺廉顯),유교(柳喬)
주 저(周 佇) (1005)을사 8년○ 이해에 송(송) 나라 온주(溫州)의 문사 주저(周佇)가 와서 의탁하자, 예빈시주부(禮賓寺注簿)로 임명하였다.
(1011)○ 봄 정월 정축일에 하공진(河拱辰)ㆍ고영기(高英起)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공진 등을 붙잡아 두니 호종하던 여러 신하들은 공진 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직 시랑 충숙(忠肅)과 장연우(張延祐)ㆍ채충순(蔡忠順)ㆍ주저(周佇)ㆍ유종(柳宗)ㆍ김응인(金應仁) 만은 떠나가지 않았다.
(1011)주저(周佇)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禮部侍郞中樞院直學士)로 삼았다.
(1013)예부시랑 주저(周佇)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1014) 秘書監 周佇 知貢擧 우현부(禹玄符)등 1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021)주저(周佇)를 한림학사 승지 숭문 보국공신 좌산기상시 상주국(翰林學士承旨崇文輔國功臣左散騎常侍上柱國)으로 삼았다.
(1022)주저(周佇)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삼았다.
(1024)주저(周佇)○예부상서 주저(周佇)가 졸하였다. 주저는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문장을 잘하였다. 예전에 주저가 중국에서 오니 학사 채충순(蔡忠順)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은밀히 아뢰어 그를 머물게 했다가 두 서너 달이 못되어 드디어 제고(制誥)를 맡게 되었다. 후에 왕이 남쪽으로 파천할 때 호종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공신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왕(목종 현종) 때 크게 명성이 났으며 외교빙(外交聘)의 사명(辭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지어졌으므로 은혜로운 대우가 비할 데 없었다.
우현부(禹賢符) 장원급제 이후 미상.
석방보(石邦寶) ? ~ ? 미상(未詳)
왕총지(王寵之) 1014 급제1년차 추정
(靖1040 급제26년차)○를 중추원 지주사로 삼았다.
(문종1047 급제33년차)○ 제하기를, “예전 제도에, 변방에 처치할 일이 있으면 양부(兩府) 재신에게 명하여 가서 군대의 일을 전단하게 하여 대번병마(大蕃兵馬)라 칭호하였는데 이름과 뜻이 맞지 않으니,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고, 마침내 중추사 왕총지(王寵之)를 서북면 중군사 겸 행영병마사로 삼았다.
(문종1049 급제35년차)○ 2월에 최충(崔冲)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李子淵)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王寵之)를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문종1050 급제36년차)○ 겨울 10월에 도병마사 이부상서 왕총지가 아뢰기를, “옛글에,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 하였고, 또, '적이 오지 않으리라 믿지 말고 우리의 방비를 믿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매양 중추(仲秋)가 되면 동남반(東南班)의 원리(員吏)를 교외에 불러모아 활쏘고 말 타는 것을 교습시켰습니다. 더구나 위(衛)의 군사들은 나라의 조아(爪牙)이니 농사가 한가한 틈을 타서 금고(金鼓)ㆍ정기(旌旗)ㆍ좌작(坐作)의 절차를 가르쳐야 합니다. 또 마군(馬軍)은 모두 단련하지 않았으니 선봉 마병을 뽑아서 1대(隊)마다 마갑(馬甲) 10벌씩을 주어서 달아나고 쫓는 법을 익히게 하고, 이어 어사대와 병부육위(兵部六衛)가 그 교열을 맡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1053 급제39년차)○왕총지(王寵之)ㆍ이자연(李子淵)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정준(金廷俊)ㆍ박성걸(朴成傑)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5년1061 급제47년차)○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문종21년1067 급제53년차)○ 3월에 중서령으로 치사한 왕총지(王寵之)가 졸하였다.
(문종34년1080)○ 봄 2월에 제하기를, “고 문하시중 왕총지(王寵之)와 예부상서 중추사 정배걸(鄭倍傑)은 모두 충성스럽고 곧기가 짝이 없으며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으니, 시대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내 어찌 잊으리오. 남다른 은총을 내려서 과인의 어진이를 사모하는 뜻을 밝혀야 하겠으니, 총지에게는 수태사 중서령을, 배걸에게는 수태위 문하시중 광유후(守太尉門下侍中光儒侯)를 추증하라." 하였다.
유염현(遺廉顯) 1014 급제1년차 추정
(1031 급제17년차)○윤달 國子監試 右拾遺 유염현(遺廉顯) 取 정공지(鄭功志) 등 60명을 뽑으니, 부(賦)와 육운(六韻)ㆍ십운(十韻)의 시로 시험하였다. 국자감시(國子監試) 처음 시작되었다.
1016년 七月。 禮賓卿 李 龔(23)。知貢擧。取進士。覆試。
賜 金 顯 等九人。明經五人及。
김현(金顯),이유량(李惟亮)
김현(金顯) 장원급제
(문종1054 급제38년차)○四月 知中樞院事 金顯(38) 知貢擧 유선여(柳善餘) 등 25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11년1057 급제38년차) ○ 김원정(金元鼎)을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김현(金顯)을 상서 좌복야 참지정사로, 한공서(韓功敍)를 상서우복야로 삼았는데,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관제에 좌우복야는 각각 한 사람씩인데, 이제 임종일(任從一)을 우복야로 제수하고 한공서(韓功敍)를 또 우복야로 삼으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공서는 파면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문종12년1058)김현(金顯) 등이 또 아뢰기를, “제술(製述)을 공부한 강사후(康師厚)는 열 번이나 과거를 보아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으레 갑오년 사면령의 예(例)에 따라 마의(麻衣)를 벗게 함이 마땅하나, 사후는 유림랑 당인(儒林郞堂引)이었던 강상귀(康上貴)의 증손입니다. 당인은 구사(驅史)의 관원인데, 무자년 제에, 전리(電吏)ㆍ소유(所由)ㆍ주선(注膳)ㆍ막사(幕士)ㆍ구사ㆍ문복(門僕)의 자손은 제술ㆍ명경ㆍ율ㆍ서ㆍ산수ㆍ의술ㆍ복술ㆍ지리 등의 학업을 공부하여서 과거에 올랐거나, 혹은 전쟁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자라야 조정의 반열에 오르도록 허락하였으며, 또 병신년의 특별 제지(特別制旨)에 의거하면, 위의 조항에 해당된 사람의 자손이 은사를 받아서 벼슬에 오른 사람은 부조(父祖)의 벼슬길에 따라 참작하여 제수하라 하였으니, 이제 사후에게 마의를 벗게 함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참지정사 김현(金顯) 등이 아뢰기를, “사후의 증조인 강상귀(康上貴)는, 관직은 비록 당인이었으나 유림랑을 겸하였고, 그의 아비 강서(康序)는 열 번 과거를 보아 역시 마의를 벗고 벼슬에 올랐으며, 사후의 10년 동안 형설(螢雪)의 공부를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삼가 바라건대 그 역시 마의를 벗도록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이자연(李子淵) 등의 논의를 따랐다.
이유량(李惟亮) 1016 급제1년차 추정(확정)
(1028 급제14년차)○11월에 태복경(太僕卿) 왕희걸(王希傑)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유량(李惟亮)을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하였다.
(靖1041 급제27년차)○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박유인(朴有仁)과 우승(右丞) 이유량(李惟亮)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하는 예를 축하하고, 판위위사(判衛尉事) 유삼(柳參)은 방물을 바쳤다.
1017년 三月。禮部侍郞, 郭 元(21)。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鄭倍傑。丙科五人。同進士 五人及第。
정배걸(鄭倍傑),김정준(金廷俊),정걸(鄭傑)
정배걸(鄭倍傑) 장원급제《초계정씨(草溪鄭氏)의 시조 》
(문종1047 급제30년차)○中樞院副使 鄭倍傑 知貢擧 김정신(金鼎新) 등 17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1049 급제32년차) ○ 2월에 정배걸(鄭倍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문종1050 급제33년차) ○ 정배걸(鄭倍傑)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1080년(문종 34)에 홍문광학(弘文廣學)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수태위(開府儀同三司守太尉)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올랐고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문종34년1080)정배걸(鄭倍傑)○ 2월에 수태위 문하시중 광유후(守太尉門下侍中光儒侯)를 추증하였다.
김정준(金廷俊) 1017 급제1년차 추정(확정)
? ~ ? 광산(光山)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김책(金策) [조부] 성명 : 김준(金峻) [증조부] 성명 : 김길(金吉)
(靖1042 급제25년차)○내사령 서눌(徐訥)이 졸하였다. 눌은 서희(徐熙)의 아들이다. 예전에 눌이 병에 걸려 지장사(地藏寺)에 가 있었는데 왕이 우승선(右承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 문병을 하고 곧 어의 두 벌과 곡식 1천 석, 말 2필을 절에 바쳐 복을 빌었으며
(문종1049 급제32년차) ○김정준(金廷俊)을 중추원사 판어사대사로 삼았다.
(1049 급제32년차)○(文宗)三 5월에 中樞院使 金廷俊 知貢擧 박인수(朴仁壽) 등 15명과 은사1명 급제를 주었다.
(문종1053 급제36년차)○왕총지(王寵之)ㆍ이자연(李子淵)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정준(金廷俊)ㆍ박성걸(朴成傑)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055 급제38년차)○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李子淵)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金廷俊)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朴成傑)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문종11년1057 급제40년차)○ 김정준(金廷俊)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삼았다.
정걸(鄭傑) 1017 급제1년차 추정(확정)
(문종1049 급제32년차)○ 2월에 최충(崔冲)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李子淵)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王寵之)를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문종1050 급제33년차)정걸(鄭傑)○ 문하시중 최충(崔冲)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부로 삼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金元冲)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李子淵)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鄭傑)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1018년 五月。給事中 金 猛(22)。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黃 靖。丙科四人。同進士四人。明經十人及第 9인급제
황 정(黃 靖),김원정(金元鼎),이영간(李令幹)
황 정(黃 靖) 장원급제 이후 미상.
김원정(金元鼎) 1018 급제1년차 추정(확정)
미상∼1063년(문종 17). 고려 초기의 문신.
감찰어사(監察御史)·우사낭중(右司郞中)을 거쳐
(문종1052 급제34년차)○ 3월에 김원정(金元鼎)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문종1055 급제37년차)○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李子淵)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金廷俊)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朴成傑)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문종11년1057 급제39년차)○ 5월에 참지정사 김원정(金元鼎)이 아뢰기를, “지금 병부(兵部)가 동서의 양쪽 경계에다가 군졸을 보내서 수비하기를 청하는데, 근래에 군사와 백성이 책봉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느라고 시달린데다가, 또 흥왕사(興王寺)의 역사에 나가게 되어서 휴식하지 못했고 급료 또한 부족하였으니, 책봉 받을 때에 부린 군졸에게 하사했던 예(例)에 따라 변경에 나가는 군졸에게도 물품을 내려주어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11년1057 급제39년차)○ 김원정(金元鼎)을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김현(金顯)을 상서 좌복야 참지정사로, 한공서(韓功敍)를 상서우복야로 삼았는데,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관제에 좌우복야는 각각 한 사람씩인데, 이제 임종일(任從一)을 우복야로 제수하고 한공서(韓功敍)를 또 우복야로 삼으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공서는 파면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문종12년1058 급제40년차)○ 5월에 제하기를, “공부상서 유규(庾逵)의 아들 유중경(庾仲卿)을 강등하여 음직에 제수하라." 하자,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논박하기를, “중경의 어미는 평장사(平章事) 이공(李龔)이 형의 딸을 간음하여 낳은 소생이니, 중경을 조정의 반열(班列)에 둠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평장사 김원정(金元鼎)등이 의론하기를, “이것은 이공(李龔)의 허물이고 중경 부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니, 벼슬길을 막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앞서 내린 명대로 강등시켜서 음직에 제수하소서." 하니, 왕이 김원정(金元鼎)등의 논의를 따랐다.
(문종15년1061 급제43년차)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로,
(문종16년1062 급제44년차)○ 김원정(金元鼎)을 파직하여 서경유수사로 나가게 하였다. 김원정이 내직에 있으면서 일찍이 서경유수를 요령(遙領)하였는데 일을 아뢰다가 왕의 뜻을 거슬렸던 것이다.
(문종17년1063 급제45년차)○ 가을 7월에 김원정을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으로 삼았다. 얼마 뒤에 졸하였다.
○ 8월에 제하기를, “국자감의 여러 학생 중에 요사이 학업을 폐하는 자가 많은 것은 훈도가 이르지 못해서이니 책임이 학관(學官)에게 있다. 이제부터는 정밀하게 더욱 권면하여 연말이 되거든 잘못을 가려서 퇴직과 유임을 결정하며, 유생은 국자감에 머문지 9년, 율생(律生)은 6년이 되도록 우둔하여 성취가 없는 자는 모두 내치도록 하라." 하였다.
(문종20년1066)김원정(金元鼎)○ 2월에 삼사(三司)가 아뢰기를, “문하시중 김원정(金元鼎)이 졸한 지 벌써 4년인데, 아직도 휼전(恤典)이 없으니, 부의를 더 내리시고 직계(職階)를 추증하소서." 하니, 제하여 곡식 1백 30석을 내려주었다.
이영간(李令幹) ? ~ ? 담양(潭陽) 관직 우복야(右僕射) 1018년 급제1년차 추정
(문종1056 급제38년차)○尙書右僕射 李令幹 知貢擧 이간방(李幹方) 등 13명 급제를 주었다.
1020년 五月。 國子祭酒 劉徵弼(25)。知貢擧。取進士。覆試。
賜乙科 李元顯。丙科三人。同進士六人。明經三人及第。10인급제
이원현(李元顯),
이원현(李元顯) 장원급제 이후 미상.
1021년 月。 散騎常侍 李 龔(28)。知貢擧。取進士。覆試。
賜甲科 趙 覇。丙科一人。同進士五人。明經四人及第 7인급제
조 패(趙 覇),
조 패(趙 覇) 장원급제
(문종11년1057 급제36년차)○左散騎常侍 趙 覇(36) 知貢擧 이준(李晙) 등 14명과 명경 4명에게 급제
1023년 月。翰林學士 黃周亮(19)。知貢擧。取進士。覆試。
賜丙科 張 喬 等二人。同進二人。明經二人及第 4인급제
장교(張喬),임종일(任從一),한공서(韓功敍)
장교(張喬) 장원급제
(靖1045 급제22년차)○서북로 병마판관 감찰어사 이춘(李春)이 아뢰기를, “번적 백여 명이 영원진(寧遠鎭 평남 영원)ㆍ장평수(長平戍 함남 영흥(永興))에 침입하여, 군사 30여 명을 사로잡아 갔으니, 장교(張喬)가 능히 방어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추정관직:서북로 병마사
임종일(任從一) 1023 급제1년차 추정(확정)
(문종11년1057 급제34년차)○ 이유충(異惟忠)을 동지중추원사로, 임종일(任從一)을 상서우복야로, 왕무숭(王懋崇)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문종15년1061 급제38년차)○ 임종일(任從一)을 상서좌복야 중추사로 삼았다.
(문종15년1061 급제38년차)○2월 제하기를, “형정은 왕화(王化)에 먼저 할 바이니, 준엄하면 백성이 상하고 관대하면 백성이 업신여긴다. 형벌이 적당하여야 음양이 고르고 바람과 비가 순하며, 법이 마땅함을 잃으면 원망이 쌓여서 재변이 일어나는데, 포악한 신하와 혹독한 관리는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다. 짐은 훈고(訓誥 선대 임금의 가르침)에 따라 형벌을 매우 조심하며, 신하가 포악하고 관리가 혹독하여 그 적당함을 얻지 못할까 항상 염려하니, 이제부터는 형부의 관원을 잘 가려 위임해서 억울한 옥사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문종15년1061 급제38년차)○ 임종일(任從一)을 참지정사로, 왕무숭(王懋崇)을 지중추원사로 삼았다.
한공서(韓功敍) 1023년 급제1년차 추정(확정)
(문종11년1057 급제34년차)○ 김원정(金元鼎)을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김현(金顯)을 상서 좌복야 참지정사로, 한공서(韓功敍)를 상서우복야로 삼았는데,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관제에 좌우복야는 각각 한 사람씩인데, 이제 임종일(任從一)을 우복야로 제수하고 한공서(韓功敍)를 또 우복야로 삼으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공서는 파면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문종15년1061 급제38년차)○ 겨울 10월에 한공서(韓功敍)를 검교사공수상서 좌복야로 삼았다.
1024년 月。禮部尙書 劉徵弼(29)。知貢擧。取進士。
賜丙科 李子淵 等二人。 同進士七人。明經十人及第 10인급제
이자연(李子淵),유삼(柳參)
이자연(李子淵) 장원급제 손자 이자현(李資玄) 손자 이자덕(李資德)
(靖宗1040 급제16년차) ○이자연(李子淵)을 지중추원사로 삼았다.
(문종1047 급제23년차) ○ 최충(崔冲)을 문하시중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원충(金元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이자연(李子淵)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049 급제25년차) ○ 2월에 최충(崔冲)을 수태보(守太保)로, 이자연(李子淵)을 수사도(守司徒)로, 왕총지(王寵之)를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으로, 정걸(鄭傑)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문종1050 급제26년차)이자연(李子淵)○ 문하시중 최충(崔冲)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부로 삼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金元冲)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李子淵)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鄭傑)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1051 급제27년차)○(文宗) 五年 4월 內史侍郞李子淵(27)知貢擧 賜 최석(崔錫)등19명과 명경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1053 급제29년차)○ 이자연(李子淵)ㆍ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정준(金廷俊)ㆍ박성걸(朴成傑)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문종1054 급제30년차)○ 이자연(李子淵)에게 태부(太傅)를 올려주었다.
(문종1055 급제31년차) ○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李子淵)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金廷俊)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朴成傑)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문종1055 급제31년차) ○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아뢰기를, “하늘과 땅의 재앙과 상서는 매양 형정의 잘잘못과 서로 부합되므로 상과 벌을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부와 형부는 사리를 분별해 다스리기를 힘써야 하는데 날이 지나고 달이 바뀌어도 질질 끌고 판결짓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이ㆍ형 두 부의 관리에게 사리를 정밀히 살피게 하고 그 관리가 근면한지 태만한지를 조사하여 포창하거나 깎아내리면, 성상께서 정사에 부지런하고 형벌할 때에 불쌍히 여기시는 뜻에 맞추어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상서를 이룩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문종1056 급제32년차) ○ 시중 이자연(李子淵)이 아뢰기를, “요사이 흥왕사(興王寺)를 짓는 일 때문에 덕수현(德水縣)을 양천(楊川)으로 옮겼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이 집을 짓느라고 편안히 살 겨를이 없어 남자는 지고 여자는 끌며 길에 늘어섰으니, 가난한 사람은 구렁에 떨어져 죽을까 걱정이 되고 넉넉한 사람도 편히 살 곳이 없습니다. 한 해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소서." 하니, 제하기를, “특별히 두 해를 면제하라." 하였다.
(문종11년1057 급제33년차) ○ 시중 이자연(李子淵)에게 의복과 은그릇ㆍ안마(鞍馬)ㆍ포백ㆍ미곡을 내여주었다.
(문종12년1058 급제34년차) ○ 5월에 제하기를, “공부상서 유규(庾逵)의 아들 유중경(庾仲卿)을 강등하여 음직에 제수하라." 하자,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논박하기를, “중경의 어미는 평장사(平章事) 이공(李龔)이 형의 딸을 간음하여 낳은 소생이니, 중경을 조정의 반열(班列)에 둠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평장사 김원정(金元鼎)등이 의론하기를, “이것은 이공(李龔)의 허물이고 중경 부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니, 벼슬길을 막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앞서 내린 명대로 강등시켜서 음직에 제수하소서." 하니, 왕이 김원정(金元鼎)등의 논의를 따랐다.
이자연(李子淵) 등이 또 아뢰기를, “제술(製述)을 공부한 강사후(康師厚)는 열 번이나 과거를 보아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으레 갑오년 사면령의 예(例)에 따라 마의(麻衣)를 벗게 함이 마땅하나, 사후는 유림랑 당인(儒林郞堂引)이었던 상귀(上貴)의 증손입니다. 당인은 구사(驅史)의 관원인데, 무자년 제에, 전리(電吏)ㆍ소유(所由)ㆍ주선(注膳)ㆍ막사(幕士)ㆍ구사ㆍ문복(門僕)의 자손은 제술ㆍ명경ㆍ율ㆍ서ㆍ산수ㆍ의술ㆍ복술ㆍ지리 등의 학업을 공부하여서 과거에 올랐거나, 혹은 전쟁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자라야 조정의 반열에 오르도록 허락하였으며, 또 병신년의 특별 제지(特別制旨)에 의거하면, 위의 조항에 해당된 사람의 자손이 은사를 받아서 벼슬에 오른 사람은 부조(父祖)의 벼슬길에 따라 참작하여 제수하라 하였으니, 이제 사후에게 마의를 벗게 함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참지정사 김현(金顯) 등이 아뢰기를, “사후의 증조인 상귀는, 관직은 비록 당인이었으나 유림랑을 겸하였고, 그의 아비 서(序)는 열 번 과거를 보아 역시 마의를 벗고 벼슬에 올랐으며, 사후의 10년 동안 형설(螢雪)의 공부를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삼가 바라건대 그 역시 마의를 벗도록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이자연(李子淵) 등의 논의를 따랐다.
유삼(柳參) 1024년 급제1년차 추정
(靖1041 급제17년차)○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박유인(朴有仁)과 우승(右丞) 이유량(李惟亮)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하는 예를 축하하고, 판위위사(判衛尉事) 유삼(柳參)은 방물을 바쳤다.
(문종12년1058 급제34년차)○ 왕이 탐라와 영암(靈巖)에서 목재를 벌채하여 큰 배를 만들어 송 나라와 통하려 하니, 내사문하성이 말하기를, “국가가 북조(北朝 거란)와 수호한 뒤로는 국경에 급한 변이 없고 백성이 생활을 편안히 즐기니, 이것으로써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거란이 우리를 힐책한 글에,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서쪽으로 송 나라와 왕래하니, 이것은 어떤 음모를 하려는 것인가.' 하였고, 또 상서(尙書) 유삼(柳參)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동경유수가 남조(南朝 송 나라)와 사신 왕래한 일을 물으면서 의심하고 시기하는 듯하였으니, 만약 이번에 송 나라와 통하려고 하는 이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입니다. 또 탐라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해산물을 배에 싣고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데 작년 가을에도 재목을 벌채하여 바다를 건너오고 새로 절을 창건하느라고 노고가 이미 많았으니, 이제 또 거듭 괴롭게 하면 다른 변이라도 생길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1026년 月。 內史舍人 崔 冲(21)。知貢擧。取進士。
賜甲科 崔 貺 等二人。丙科二人。 同進士七人。明經一人及第 11인급제
최황(崔貺),이유충(異惟忠),김상빈(金尙賓),이유백(李維伯)
최황(崔貺) 장원급제 이후미상.
이유충(異惟忠) 1026년 급제1년차 추정
(문종11년1057 급제31년차)○ 이유충(異惟忠)을 동지중추원사로, 임종일(任從一)을 상서우복야로, 왕무숭(王懋崇)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문종14년1060 급제34년차)○ 이유충(異惟忠)을 중추원사로 삼았다.
(문종15년1061 급제35년차)이유충(異惟忠)을 참지정사로,
(문종25년1071 급제45년차)이유충을 특진 수사공으로 삼았다.
(문종26년1072 급제46년차)이유충(異惟忠)○ 여름 4월에 중서시랑 평장사 이유충(異惟忠)이 졸하였다.
김상빈(金尙賓) 1026년 급제1년차 추정
(靖宗1041 급제15년차)○신사일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皇甫穎)이 강가에서 영접하였다. 왕이 용선(龍船)에 올라 대신에게 잔치를 내려주고, 승개(承愷)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우습유(右拾遺) 김상빈(金尙賓)이 나아와 간언하니 이내 중지하고 선은관(宣恩館)에 들어가 거둥하였다.
(문종1049 급제23년차)○國子試 右副承宣 金尙賓 取試賦 한복(韓 復)등 39인을 뽑았다.
이유백(李維伯) 1026년 급제1년차 추정
(문종1049 급제23년차)○ 3월에 동북로 감창사(監倉使)가 아뢰기를, “교주방어판관 이유백(李維伯)은 성지(城池)를 잘 수리하고 기계를 가다듬고 갖춘 것이 여러 군 중에 제일이고, 또 그 관할하에 연성(連城)ㆍ장양(長楊)의 관리와 백성들이 말하기를, '유백이 도임한 이래로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구휼하였으니 비록 임기가 차서 교대하게 되었으나 더 유임시켜 주길 원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그 뜻을 이부에 내려보냈다.
1028년 月。 郞 中 李作仁(28)。知貢擧。取進士。覆試。
賜乙科 鄭在元。丙科二人。同進士七人。明經一人及第 10명급제
정재원(鄭在元),김양지(金良贄),유규(庾逵)
정재원(鄭在元) 장원급제 이후미상.
김양지(金良贄) ? ~ ? 미상(未詳) 1028년 급제
(문종1054 급제26년차)○ 급사중(給事中) 김양지(金良贄)를 보내 거란에 가서 태자책립을 고하였다.
(문종15년1061 급제33년차)김양지(金良贄)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문종19년1065 급제37년차)○ 8월에 상서우복야 김양지와 전중소감(殿中少監) 서정(徐靖)을 거란에 보내어 책명에 사례하였다.
유규(庾逵) (1028 급제1년차 추정)
(문종12년1058 급제30년차)○ 5월에 제하기를, “공부상서 유규(庾逵)의 아들 유중경(庾仲卿)을 강등하여 음직에 제수하라." 하자,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논박하기를, “중경의 어미는 평장사(平章事) 이공(李龔)이 형의 딸을 간음하여 낳은 소생이니, 중경을 조정의 반열(班列)에 둠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평장사 김원정(金元鼎)등이 의론하기를, “이것은 이공(李龔)의 허물이고 중경 부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 공신 유금필(庾黔弼)의 후손이니, 벼슬길을 막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앞서 내린 명대로 강등시켜서 음직에 제수하소서." 하니, 왕이 김원정(金元鼎)등의 논의를 따랐다.
1030년 月。 禮部郞中 朴有仁(23)。知貢擧。取進士。覆試
賜乙科 崔惟善 等十八人及第
최유선(崔惟善),왕무숭(王懋崇),이춘(李春), 김의진(金義珍),
최유선(崔惟善) 장원급제 해주(海州). 부 최충(崔冲), 아들 최사제(崔思齊)
(문종1053 급제23년차)○刑部尙書 崔惟善 知貢擧 우상(禹相) 등 21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1055 급제25년차) ○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과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를 보내 거란에 가 조상하고, 회장(會葬)하였다.
(문종1056 급제26년차)○ 처음으로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德水縣)에 짓고, 그 현을 양천(楊川)으로 옮겼다.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이 간하기를,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은 신성(神聖)하고 영무(英武)하여 비할 데가 없었는데, 백성이 도첩(度牒)을 받아 중이 되는 것과 사관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그의 아버지인 고조(高祖)의 뜻을 따랐으므로 사전(史傳)이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우리 태조의 《훈요(訓要)》에,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국내 산천 지세의 순역(順逆)을 살펴서 절을 세울 만한 곳이면 짓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후세의 사왕(嗣王) 및 공후ㆍ귀척ㆍ후비(后妃)ㆍ신료는 앞다투어 원찰(願刹)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조종의 오랜 터전을 계승하여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절용(節用)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가득찬 복을 유지하고 이루어 놓은 왕업을 지켜서 후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물을 없애고 백성의 힘을 다해서 급하지 않은 비용에 이바지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려 하십니까. 신은 이에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겨 답하였다. 그 뒤 어느 날 한가한 자리에 들어가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조용히 위로하고 장려하기를, “간쟁하는 것은 충성이며, 임금이 좋아하는 대로 따르는 것은 아첨이다." 하니, 유선이 대답하기를, “창업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수성(守成)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였다.
(문종15년1061 급제31년차)○ 三月 翰林學士 崔惟善 知貢擧 라계함(羅繼含)등 20명 급제를 주었다.
(문종15년1061 급제31년차)○ 11월에 최유선(崔惟善)을 참지정사 권판한림원사로 삼았다.
(문종15년1061 급제31년차)최유선(崔惟善)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권이부상서사로,
(문종19년1065 급제35년차)○ 6월에 문덕전(文德殿)에 거둥하여 진사를 복시할 때에 시어사 노단(盧旦)이 일을 아뢰다가 왕의 뜻을 거슬렸다. 왕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끌어 내어 공란(公襴 조복(朝服))을 벗기고 묶으려 하니, 평장사 최유선(崔惟善)이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헌사(憲司)에 넘겨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왕의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졌으나 마침내 복시는 파하고, 오직 열 번이나 과거를 보고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만을 뽑아서 이원장(李元長) 등 5명에게 출신(出身)을 은사하고 또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튿날 노단(盧旦)을 강등시켜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에 제수하였다.
(문종21년1067 급제37년차)○ 가을 9월에 송악정(松岳亭)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벌이고 사신(詞臣)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였는데, 평장사 최유선(崔惟善)이 지은 시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말 한 필을 내려주었다.
(문종22년1068 급제38년차)○ 최유선(崔惟善)을 판상서이부사로, 왕무숭(王懋崇)을 판상서형부사로, 김의진(金義珍)을 판상서병부사로 삼았다.
(문종25년1071 급제41년차)○왕자 수(琇)를 검교상서령 수사공 평양후로, 최유선을 수사도로 삼았다.
(문종27년1073 급제43년차)○ 5월에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서여진 추장 만두불(漫豆弗) 등이 동여진 번인의 전례를 따라 주ㆍ군을 설치해 주도록 청하고, 평로진(平虜鎭) 근처의 번수(蕃帥)인 유원장군 골어부(骨於夫) 및 멱해촌요결(覓害村要結) 등 역시 또한 우리 국적에 붙여 영구히 번병이 되기를 원하였는데, 점검하자 호수(戶數) 35호, 인구 2백 52명이었으니 판도(版圖)에 등재(謄載)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삼산촌(三山村) 도적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므로 복속된 번인 도령(都領) 다어개(多於皆) 등이 정주 낭장(定州郎將) 문선(文選)과 함께 출격하여 공을 세웠으니 은상(恩賞)을 더해 주소서." 하니, 문하시중 최유선 등이 논의하기를, “삼산촌 도적은 본래 변경을 침범한 도적이 아니었는데 지금 번군(蕃軍)이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만약 포상을 내리면 도리어 원망만 사게 될 터이니 상을 내리는 것은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29년1075 급제45년차)○ 봄 정월에 문하시중 최유선이 졸하였다. 유선은 대대로 유학의 영수이며 정승의 가문으로 두 조정을 보필하여 비록 혁혁한 명성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였다. 시호는 문화(文和)이며, 뒤에 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왕무숭(王懋崇) 1030 급제1년차 추정
(문종11년1057 급제27년차)○ 이유충(異惟忠)을 동지중추원사로, 임종일(任從一)을 상서우복야로, 왕무숭(王懋崇)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문종15년1061 급제31년차)○ 임종일(任從一)을 참지정사로, 왕무숭(王懋崇)을 지중추원사로 삼았다.
(문종25년1071 급제41년차)왕무숭(王懋崇)○5월에 왕무숭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상서병부사로 삼았다.
(문종26년1072 급제42년차)왕무숭(王懋崇)○ 가을 7월에 병사 장선(張善)이 고변하기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그 도당 천여 명과 더불어 왕을 폐위시키고 왕제(王弟) 평양공(平壤公) 기(基)를 세우려 꾀하고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잡아다가 거신은 처형하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이며, 기(基)는 이미 죽었으므로 기의 아들 진(璡)은 남해현(南海縣 경남 사천군(泗川郡))에, 정(珵)은 안동부(安東府 경북 경주(慶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뒤에 모두 죽였고, 막내 아들 영(瑛)은 어리므로 죽음을 면하였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선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각각 벼슬 1급을 내려주었다. 윤달에 평장사 왕무숭(王懋崇)을 안동부에,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는 곡주(谷州 황해 곡산(谷山))에 내쳤는데, 역시 거신의 역모에 관련된 때문이었다.
이춘(李春) 1030 급제1년차 추정
(靖1045 급제15년차)○서북로 병마판관 감찰어사 이춘(李春)이 아뢰기를, “번적 백여 명이 영원진(寧遠鎭 평남 영원)ㆍ장평수(長平戍 함남 영흥(永興))에 침입하여, 군사 30여 명을 사로잡아 갔으니, 장교(張喬)가 능히 방어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비서성(祕書省)이《예기정의(禮記正義)》70본(本)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본을 새로 인쇄하여 올리니, 명하기를, “각각 1본씩 어서각(御書閣)에 간직하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내려주라." 하였다.
김의진(金義珍)미상∼1070년(문종 24). 경주(慶州) 고려 초기의 문신·학자. (1030 급제1년차 추정)(1047년 급제17년차)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고,
(1060년 급제30년차) 지상서부사(知尙書部事)가 되었으며,
(문종15년1061 급제31년차)김의진(金義珍)을 좌산기상시 동지중추원사 (左散騎尙侍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1065년 급제35년차)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기도 하였으며,(아니다. 지공거는 노단이다.)
(1068년 급제38년차)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사숙(私塾)을 세워 후진양성에 노력하니 그 문하생들을 양신공도(良愼公徒)라 불렀다. 이는 고려 12공도(十二公徒)의 하나로 사학(私學)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시호는 양신(良愼)이다.
(문종24년1070 급제40년차)○ 가을 8월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의진(金義珍) 졸하였다.
김화숭(金化崇) 1030 급제1년차 추정
(문종1051 급제21년차)○ 9월에 여진이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부사 김화숭(金化崇)이 쳐부수고 59급을 베니, 옷과 비단ㆍ은기를 내려주고, 장리(將吏)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문종13년1059 급제29년차)○二月 翰林學士 金化崇 知貢擧 양신린(楊信麟)등 17명 급제를 주었다.
최융(崔融) ? ~ ? 미상(未詳)
급제자 명단 : 안창령(安昌齡), 서숭(徐崧), 임유간(林維幹), 우현부(禹賢符), 김현(金顯), 정배걸(鄭倍傑), 황정(黃靖), 이원현(李元顯), 조패(趙覇), 장교(張喬), 이자연(李子淵), 최황(崔貺), 정재원(鄭在元), 최유선(崔惟善), 최홍정(崔弘正). 석방보(石邦寶).
급제 확실시되는 명단 : 왕총지(王寵之). 최융(崔融). 김정준(金廷俊). 이령간(李令幹). 김화숭(金化崇). 유염현(遺廉顯),
급제 추정자 명단 : (靖宗1041)★김상빈(金尙賓)○신사일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皇甫穎)이 강가에서 영접하였다. 왕이 용선(龍船)에 올라 대신에게 잔치를 내려주고, 승개(承愷)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우습유(右拾遺) 김상빈(金尙賓)이 나아와 간언하니 이내 중지하고 선은관(宣恩館)에 들어가 거둥하였다.
(문종1049)金尙賓○國子試 右副承宣 金尙賓 取試賦 한복(韓 復)등 39인을 뽑았다.
고려9대 덕종(德宗)
1031년 國子試。 初年。 命右拾 遺廉顯(15)。取 鄭功志 等六十人
정공지(鄭功志) 이후 미상
○ 문관으로 무예가 있는 자를 장교(將校)로 고쳐 임명하였다
(1031)고진상(高眞祥)○발해의 감문군(監門軍) 대도(大道)ㆍ행랑(行郞)등 14명과 제군판관(諸軍判官) 고진상(高眞祥)ㆍ공목관(孔目官) 왕광록(王光祿)이 와서 의탁하였다.
1032년 月 尙書左丞 李作忠(24)。知貢擧。取進士。賜乙科 白可易 等三人。丙科六人。恩賜四人及第
백가이(白可易),김양지(金良贄)
백가이(白可易) 장원급제 미상.
(1032)고진성(高眞成○거란의 전직(殿直) 고선오(高善悟)와 전전(殿前) 고진성(高眞成) 등 15명, 좌상(左廂) 도지휘사 대광(大光), 보주(保州) 회화군사판관(懷化軍事判官) 최운부(崔運符),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운형(李運衡) 등이 도망해 왔다.
1033년 月 禮部侍郞 朴有仁(26) 知貢擧 賜丙科 崔希穆 等五人 同進士三人 明經二人 恩賜二人及第
최희목(崔希穆),이득로(李得路),
최희목(崔希穆) 장원급제 이후 미상
이득로(李得路) 1033년 급제1년차 추정
(문종1055 급제22년차)○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과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를 보내 거란에 가 조상하고, 회장(會葬)하였다.
知貢擧 :1031 國子試 遺廉顯(15) 1032 李作忠(24), 1033 朴有仁(26)
덕종(德宗) 0 (?) 덕종 시년 미상(試年未詳) (33.33%) 1 명
이상선(李象先) ? ~ ? 수안(遂安) 관직 호부상서(戶部尙書) [부] 성명 : 이단(李端)
고려10대 정종(靖宗) (재위1034~ 1046년)
1035년 月。刑部尙書 崔 冲(30)。知貢擧。
賜乙科 金無滯 等四人。丙科四人。同進士六人。明經一人及第
김무체(金無滯),이종현(李從現),홍덕성(洪德成),이상정(李象廷),
최상(崔尙),최유부(崔有孚),김숙창(金淑昌),김정(金正),오학린(吳學麟) -5인
김무체(金無滯) 장원급제 미상
이종현(李從現) ? ~ ? 미상(未詳) 1035년 급제
홍덕성(洪德成) 1035년 급제 ? ~ ? 남양(南陽) 관직 상서(尙書) [부] 성명 : 홍현(洪顯)
[조부] 성명 : 홍의(洪毅) [증조부] 성명 : 홍동주(洪東周) [외조부] 성명 : 홍섭(洪渉) (문종35년1081)홍덕성(洪德成)○ 공부상서 홍덕성(洪德成)이 두 번째 글을 올려서 노퇴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상정(李象廷) ? ~ ? 미상(未詳) 위 1035년 급제
최상(崔尙) ? ~ ? 탐진(耽津) 관직 참지정사(參知政事) [부] 성명 : 최응규 1035년 급제1년차
(문종1056 급제21년차)○ 9월에 겸시어사 형부원외랑(兼侍御史刑部員外郞) 이유적(李攸績)을 산동남충 경상주삼도무문사(山東南忠慶尙州三道撫問使)로, 겸어사 잡단병부낭중 김약진(金若珍)과 예부낭중 최상(崔尙)을 아울러 산남(山南)의 진주(晉州)ㆍ나주(羅州)ㆍ전주(全州)ㆍ청주(淸州)ㆍ광주(廣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 7도무문사(七道撫問使)로, 겸감찰어사 시전중 내급사(兼監察御史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關西)ㆍ관북(關北)ㆍ관내(關內)ㆍ3도무문사로, 감찰어사 민창수(閔昌壽)를 관내 동도무문사(關內東道撫問使)로 하였다
(1057년 급제22년차) 내사사인 지동궁시독사(內史舍人知東宮侍讀事)가 되고,
(문종12년1058 급제23년차)○ 내사사인 최상(崔尙)이 아뢰기를, “어제 거란의 사신 왕종량(王宗亮)을 전송하려고 밤에 금교역(金郊驛)에 도착하였는데 종량이 늘어선 횃불을 보고 말하기를, '성문 밖 전별에서 술에 취하여 밤이 늦었다. 그러나 횃불을 잡은 하인들이 옷이 엷어 민망스러우니, 이후로부터는 아침이 되거든 길을 떠나도록 준비하라. 일찍이 들으니, 귀국 조정에서는 객사(客使)를 인견할 때에 밤까지 술을 권한다더니, 이제 예악을 보니, 중화와 꼭 같음은 탄복하고 칭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왕궁 잔치에 세 번 나아갔는데 반드시 등불을 죽 켜 놓았던바, 우리나라 법에는 오직 어두운 저녁에만 촛불 쓰기를 허락하며, 신하들이 손을 접대하는 데에는 비록 밤이 되어도 촛불은 켜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신 또한 생각하건대, 왕자(王者)는 밝은 데를 향해서 다스리나니 대낮에 빈객을 접견함이 마땅하고, 하물며 등촉 역시 백성들의 고혈로 된 것이겠습니까. 너무 많이 허비하면 검소한 성덕에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 옛날에 진경중(陳敬仲)이 환공(桓公)과 술을 마시다가 환공이 불을 켜고 계속하자고 하니, 경중이 사양하면서, '신은 낮 잔치만을 준비하였고 밤 잔치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잔치를 하는 예는 낮으로 정하도록 하고 전송하는 예도 조회하는 때를 이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문종19년1065 급제30년차)○ 9월 예부상서 최상(崔尙)과 장작소감(將作少監) 김성점(金成漸)을 거란에 보내어 태자 책명에 사례하였다.
(문종22년1068 급제33년차)○ 여름 4월에 최상(崔尙)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문종22년1068 급제33년차)○5월 同知中樞院事 崔尙 知貢擧 최인(崔絪) 등 1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최유부(崔有孚) ? ~ ? 경주(慶州) 관직 참지정사(參知政事) 1035년 급제
[부] 성명 : 최항(崔沆) [조부] 성명 : 최광원(崔光遠) [증조부] 성명 : 최언위(崔彦撝)
(1024)최항(崔沆)이 졸하여 그 아들을 비서성 교서랑(祕書省校書郞) 으로 삼았다.
1035년 급제 (문종14년1060 급제25년차)최유부(崔有孚)○ 3월에 내사문하가 아뢰기를, “이제 사재경(司宰卿) 최유부(崔有孚)를 서경 부유수(西京副留守)로 삼았는데, 그의 아비 최항(崔沆)이 깨끗한 절조와 곧은 도로써 사직을 바로잡았으므로 국가에서 그 공을 생각하여 일찍이 현화사(玄化寺)에다가 그의 기재보(忌齋寶)를 설치하고 해마다 유부를 보내서 분향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아우인 최영부(崔永孚)가 천안부(天安府)의 원[守]으로 나가서 아직 고만(考滿)이 안 되었는데, 유부가 또 유수로 가면 기제(忌祭)와 성묘ㆍ시향(時享)의 예(禮)를 궐하게 될까 깊이 염려되니, 최유부(崔有孚)에게 3품직을 제수하고 외직에는 보임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25년1071 급제36년차)○ 봄 정월에 최유부(崔有孚)를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문종26년1072 급제37년차)○ 최유부(崔有孚)를 판상서형부사로 삼았다.
김숙창(金淑昌) ? ~ ? 미상(未詳) 1035년 급제
김정(金正)? ~ ? 미상(未詳) 1035년급제 (문종1052 급제17년차)○ 태사(太史) 김성택(金成澤)에게 명하여 십정력(十精曆)을, 이인현(李仁顯)에게 칠요력(七曜曆)을, 한위행(韓爲行)에게 현행력(見行曆)을, 양원호(梁元虎)에게 둔갑력(遁甲曆)을, 김정(金正)에게 태일력(太一曆)을 짓게 하였다.
오학린(吳學麟) ? ~ ? 고창(高敞) 관직 학사(學士) 1035년 급제
1009년(고려 목종 12)∼미상. 본관은 고창(高敞).고창오씨(高敞吳氏)의 시조이다.고려 정종(靖宗) 때 문헌공(文憲公)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로 지공거전시(知貢擧典試)에서 급제하여 당시 학자들이 선망하던 청요직(淸要職)한림태학사(翰林太學士)를 지냈다.1057년(문종 11) 북방 국경인 압록강(鴨綠江) 일대에서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할 때 그 곳 사목(司牧)으로 발탁되어 그 지방을 평정(平定)하고 민심과 생업(生業)을 안정시키는 큰 공을 세워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으니,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아들 오질(吳質) 또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손자 복양공(濮陽公)오세문(吳世文)은 승보시(陞補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동각시학(東閣侍學)을 지냈으며, 오세문(吳世文)의 형 오세공(吳世功)과 동생 오세재(吳世才)도 당대에 이름난 학자였는데 특히 오세재(吳世才)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李仁老) 등과 교우관계를 돈독히 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오학린(吳學麟)은 문교부흥에 전력하였으며 문장이 전아(典雅)한 많은 시(詩)와 저술이 있다고 《동인문집(東人文集)》,《삼한귀감(三韓龜鑑)》 등에 기록이 있으나 모두 산일(散逸)되고, 《동문선(東文選)》에 장(狀) 〈재걸 추훼 압강성교 궁구장(再乞抽毁鴨江城橋弓口狀)〉과 오언율시(五言律詩) 〈구룡산 흥복사에 거듭 놀면서[重遊九龍山興福寺]〉가 전해질 뿐이다.고창의 향현사(鄕賢祠), 황해도 평산(坪山)의 죽림사(竹林祠)에 제향(祭享)되었다.
1037년 月。禮部尙書 黃周亮(33)。知貢擧。
賜乙科 盧延覇 等四人。丙科四人。同進士三人。明經二人及第 12명
노연패(盧延霸)
노연패(盧延霸) 이후 기록 미상.
김행경(金行瓊) 영광(靈光) .수사공태자소사(守司空太子少師) 김극검(金克儉)의 할아버지이다.
1037 급제1년차 추정
(1061년문종15 급제24년차) 한림학사에 올랐고,
(문종17년1063 급제26년차)○ 翰林學士 金行瓊 知貢擧 홍기(洪器) 등 3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24년1070 급제33년차)○ 尙書左僕射 金行瓊 知貢擧 최익신(崔翼臣) 등 2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25년1071 급제34년차)○ 봄 정월에 김행경(金行瓊)을 상서좌복야 판상서형부사로 삼았다.
(문종25년1071 급제34년차)○ 김행경(金行瓊)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1073년 중서시랑이 되어 문종의 왕자 상안공(常安公)수(琇)를 책봉하는 예식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문종31년1077 급제40년차)○ 겨울 11월에 김행경(金行瓊)을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삼았다.
(선종4년1087 급제50년차)○ 김행경(金行瓊)을 문하시랑 동중서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知貢擧 : 상기 知貢擧 명단 :1009 강감찬(姜邯贊),1010 손몽주(孫夢周), 1013김심언(金審言), 1014주저(周佇), 1016이공(李龔), 1017곽원(郭元), 1018김맹(金猛),1020유징필(劉徵弼),1021이공(李龔),1023황주량(黃周亮),1024유징필(劉徵弼),1026최충(崔沖),1028이작인(李作仁),1030朴有仁(23),
1039년 月。左諫議大夫林惟幹(26)。知貢擧
賜乙科 黃杭之 等五人。丙科八人。同進士五人。明經二人。恩賜一人及 18명
황항지(黃抗之) 장원급제.
(문종16년1062 급제23년차)황항지(黃抗之)○ 3월에 국자사업(國子司業) 황항지(黃抗之)에게 국학의 모든 유생을 고시(考試)하도록 명하였는데, 등급을 매길 때 매우 난잡하여 당시 의논이 시끄러웠다. 이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정유산(鄭惟産)에게 복시(覆試)하기를 명하니, 유산이 봉미(封彌)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청하였다. 과장의 봉미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041년 月 門下侍郞 黃周亮(37)。知貢擧。取進士。
賜乙科 兪 暢 等四人。丙科四人。明經五人及第
유창(兪暢)
유창(兪暢) 장원급제. 미상.
이성미(李成美)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1041년 급제1년차 추정(1059년 급제18년차)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수서(隋書)》 680판(板)을 새로 조성(雕成)하여 왕에게 올려서 비각(秘閣)에 보관하게 하였다.이때 안서도호부사 도관원외랑(安西都護府使都官員外郞)이선정(異善貞)도 《주후방 肘後方》 73판, 《의옥집 疑獄集》 11판, 《천옥집(川玉集)》 10판을 새로 조성하여 바침으로써 함께 비각에 보관하였다.(1068년 급제27년차) 지난해의 흉년으로 개경 북쪽의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사신으로 나가 창고를 열어 이들을 진휼하였다.(문종26년1072 급제31년차)○秘書監 李成美 知貢擧 박유각(朴維恪) 등 22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27년1073 급제32년차)○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해적이 동경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자 원흥진군장(元興鎭軍將)이 전함 수십 척을 거느리고 초도에 나가 싸워서 12급을 베고, 포로로 잡혔던 16명을 탈환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지병마사 비서감(知兵馬事祕書監) 이성미(李成美)와 영군도부서장군(領軍都部署將軍) 염한(廉漢) 등에게 은약합(銀藥合) 한 벌씩을, 그 밖에 공이 있는 장수와 이속에게는 직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양온령(良醞令)ㆍ지창흡(池昌洽)
(문종12년1058)○ 내시 에게 명하여, “《예기》의 〈중용〉ㆍ〈투호(投壺)〉두 편을 강의하게 하고, 보문각 학사 등에게〈투호〉는 고례(古禮)인데 폐한 지 이미 오래이다. 송 나라 황제가 보내준 기구가 매우 정밀하게 갖추어 있으므로 장차 시험하려 하니, 경등은 투호의 의식을 정하고 아울러 그림으로 올려라."고 하였다.
1044년 月。內史侍郞 李作忠(36)。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金元鉉 等四人。丙科五人。同進士七人。明經二人。恩賜二人及 16명
김원현(金元鉉) 장원급제 미상.
이성미(李成美)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1059년(문종 13)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수서(隋書)》 680판(板)을 새로 조성(雕成)하여 왕에게 올려서 비각(秘閣)에 보관하게 하였다.이때 안서도호부사 도관원외랑(安西都護府使都官員外郞)이선정(異善貞)도 《주후방 肘後方》 73판, 《의옥집 疑獄集》 11판, 《천옥집(川玉集)》 10판을 새로 조성하여 바침으로써 함께 비각에 보관하였다.1068년 지난해의 흉년으로 개경 북쪽의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사신으로 나가 창고를 열어 이들을 진휼하였다.(문종26년1072)○秘書監 李成美 知貢擧 박유각(朴維恪) 등 22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27년1073)○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해적이 동경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자 원흥진군장(元興鎭軍將)이 전함 수십 척을 거느리고 초도에 나가 싸워서 12급을 베고, 포로로 잡혔던 16명을 탈환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지병마사 비서감(知兵馬事祕書監) 이성미(李成美)와 영군도부서장군(領軍都部署將軍) 염한(廉漢) 등에게 은약합(銀藥合) 한 벌씩을, 그 밖에 공이 있는 장수와 이속에게는 직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1046년三月。門下侍郞 崔 融(41)。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李仁挺 等四人。丙科六人。同進士七人。明經一人及第。17명
이인정(李仁挺) 장원급제.
본 경주(慶州) 관직 평리(評理) 부 이핵(李翮) 조부 이득견(李得堅) 증조부이승고(李升高)
고유(高維) ? ~ ? 제주(濟州) 관직 복야(僕射) [부] 성명 : 고자견(高自堅)
상기 知貢擧 : 1035최충(崔 冲), 1037황주량(黃周亮), 1039임유간(林惟幹), 1041황주량(黃周亮), 1045이작충(李作忠),1046 최융(崔 融)
정종(靖宗) 0 (?) 정종 시년 미상(試年未詳) (23.81%) 5 명
최사량(崔思諒) ? ~ ? 해주(海州) 합격연령 18세 관직 좌복야(左僕射)
[부] 성명 : 최유길(崔惟吉) [조부] 성명 : 최충(崔冲) [증조부] 성명 : 최온(崔溫)
이정공(李靖恭) ? ~ ? 부평(富平) 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정유산(鄭惟産) ? ~ ? 해주(海州) 관직 평장사(平章事)
고려11대 문종(文宗) (재위1046~1083년)
1047년 四月 中樞院副使 鄭倍傑(30)。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金鼎新 等二人。丙科九人。同進士六人。明經三人及第
김정신(金鼎新),고유(高維)
김정신(金鼎新) 장원급제 미상.
고유(高維) 1047급제1년차 추정
본관은 탐라(耽羅).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고조기(高兆基)가 아들이다.
(문종11년1057 급제10년차)고유(高維)○ 봄 정월에 고유(高維)를 우습유(右拾遺)로 삼았는데, 중서성(中書省)이 아뢰기를, “유의 가계는 탐라 출신이니, 간관(諫官)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다면 다른 관(官)을 제수하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25년1071 급제25년차)高 維(25)○ 國子試 十月 秘書少監 高 維。取七十五人。
1049년 國子試三年 二月 右副承宣 金尙賓。取試賦 韓 復 等三十九人
金尙賓(靖宗1041) ○신사일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皇甫穎)이 강가에서 영접하였다. 왕이 용선(龍船)에 올라 대신에게 잔치를 내려주고, 승개(承愷)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우습유(右拾遺) 김상빈(金尙賓)이 나아와 간언하니 이내 중지하고 선은관(宣恩館)에 들어가 거둥하였다. 1030~1035 급제추정
(문종1049)金尙賓○國子試 右副承宣 金尙賓 取試賦 한복(韓 復)등 39인을 뽑았다.
한복(韓 復) 미상.
1049년 五月。 中樞院使 金廷俊。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朴仁壽 等二人。丙科七人。同進士六人。恩賜一人。明經四人及 15명급제
박인수(朴仁壽),이신석(李申錫)
박인수(朴仁壽) ? ~ ? 미상(未詳) 장원
이신석(李申錫) ? ~ ? 미상(未詳) 1049년 급제
1051년 四月 內史侍郞 李子淵(27) 知貢擧。
賜乙科 崔 鍚 等七人。丙科六人。同進士六人。明經三人及第。19인 급제
최석(崔錫),김양감(金良鑑),최사훈(崔思訓),최 택(崔 澤),위제만(魏齊萬),박인량(朴寅亮)
최석(崔錫) ? ~ ? 장원급제 개명 최석(崔奭) 자 예보(譽甫) 시호는 예숙(譽肅)이다.
본관 동주(東州) 관직 평장(平章) 기타 : 96졸(九十六卒)
[부] 성명 : 최원립(崔爰立) [조부] 성명 : 최은숙(崔殷叔) [증조부] 성명 : 최준옹(崔俊邕)
태조 때의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으로,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의 아버지이다.
(1059 급제8년차) 최석(崔錫) 좌습유(左拾遺)를 지내고,
(문종29년1075 급제24년차) ○ 여름 4월에 형부시랑 최석(崔奭)을 보내 요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고 전중내급사 전함정(全咸正)은 곤녕절(坤寧節 왕비의 생일)을 축하하였으며,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조유부(趙惟阜)는 새해를 축하하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허충(許忠)은 방물을 진상하게 하였다. 귀국하여 전중감 지어사대사(殿中監知御史臺事)가 되었다.(1077년 급제26년차)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문종34년1080 급제29년차) ○ 동번이 난을 일으키자 중서시랑 평장사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석(崔奭)과 병부상서 염한(廉漢)을 병마사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로 삼아서 보군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주(定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밤에 삼군이 각기 1만 명씩 거느리고 길을 갈라서 바로 적의 소굴로 향하였는데, 날이 샐 녘에 갑자기 당도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땅을 울리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여 3백 92급을 베고 그 우두머리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ㆍ말 백여 필을 노획하였고 적이 버린 군기(軍器)가 길을 메웠으며, 적의 막사와 부락을 파괴한 것이 십여 곳이었다. 해질 무렵에 개선하여 전승하였음을 아뢰니, 왕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배위(裵偉)를 보내서 문정 등에게 내린 칙서에, “근래에 변방에 일이 그치지 않아 밤낮으로 걱정하였는데, 이제 아뢴 바를 살피건대 훌륭한 계책으로 오랑캐에게 항복을 받아 백성의 해를 소탕하여 짐에게 동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함은 오직 그대들의 공이다." 하고, 특히 문정에게는 무게가 백 냥 되는 은합 한 벌을, 최석ㆍ염한ㆍ이이에게는 무게 50냥 되는 은합 한 벌씩을 모두 정향(丁香)을 담아서 내려주었다.
(문종35년1081 급제30년차) ○ 봄 정월에 최석(崔奭)을 검교 사공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으로 삼았다.
(문종35년1081 급제30년차) ○ 6월에 이부상서 최석(崔奭) 등이 아뢰기를, “전년에 진사 노준(魯隼)은 그 아비가 법률을 범하여 대공복(大功服)에 해당되는 친족에게 장가들어서 낳은 아들이니,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을 가려 뽑아서 임용하는 데에는 상례(常例)에 구애하지 말 것이니, 여러 진사와 함께 관질을 주어서 조적(朝籍)에 통하게 하여야 한다." 하니, 재상 문정(文正) 등이 논의하기를, “집을 잘 다스린 뒤에라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준의 아비는 혼인을 바르게 하지 못하여 인륜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을 숭상하여 선비를 등용하기가 급하니, 계자(階資)를 낮추어서 노준(魯隼)에게 관직을 제수하소서." 하니, 문정(文正)을 따랐다.(문종36년1082 급제31년차) ○ 吏部尙書 崔奭 知貢擧 최연(崔 淵)등1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문종37년1083 급제32년차) ○ 이정공(李靖恭)과 최석(崔奭)을 함께 중서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로(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삼았다.
(문종37년1083 급제32년차)○ 中書侍郞 崔 奭(32) 知貢擧 侍講學士 朴寅亮 同知貢擧 음정(陰鼎) 등 14명과 명경 3명, 은사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예전 제도에는 지공거 한 사람만을 두어서 과거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또 동지공거를 두고 마침내 일정한 제도가 되었다.
(선종3년1086 급제35년차)최석(崔奭)ㆍ김량감(金良鑑)을 아울러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고,
(선종4년1087 급제36년차)최석(崔奭) ○ 선정전(宣政殿)에 나와 정사를 보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최석(崔奭)ㆍ김양감(金良鑑)과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柳洪)이 당시 정사의 득실을 아뢰었다.
(선종4년1087 급제36년차) ○최석(崔奭)을 수태위 판상서 이부사 감수국사(守太尉判常書吏部事監修國史)로 삼았다.
이듬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수국사(修國史)를 역임하였다.(1088년 급제37년차) 三月。判尙書吏部事 崔 奭(37)。知貢擧。 禮賓少卿 崔思諏(25)。同知貢擧。
賜乙科 金富弼 等五人。丙科七人。同進士十一人。明經三人。恩賜一人第
이어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예부사(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이정공(李靖恭)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김양감(金良鑑) ? ~ ? 문종(文宗) 5년(1051)급제. 본관은 광산(光山) 시호는 문안(文安)이다.(1070년 급제19년차)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가 되고,
(1071년 급제20년차)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3년 급제22년차)○ 8월 태복경(太僕卿) 김양감(金良鑑)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을 보내 송 나라에 가서 사은하고 겸하여 방물을 바쳤다.(1074년 급제23년차) 태복경(太僕卿)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登州)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 浙江省)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1075년 급제24년차)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
(1081년 급제30년차)○ 봄 정월에 김양감(金良鑑)을 참지정사 판상서 병부사 겸서경유수사 주국으로 삼았다.
(문종35년1081 급제30년차)○ 김양감(金良鑑)을 권판중추원사로 삼았다.
(1082년 급제31년차)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문종37년1083 급제32년차)○ 김양감(金良鑑)을 우복야로 삼았다.ㆍ왕석(王錫)을 좌복야로 삼았다.
(선종1년1084 급제33년차)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선종3년1086 급제35년차)○최석(崔奭)ㆍ김량감(金良鑑)을 아울러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고,
(선종4년1087 급제36년차)○ 선정전(宣政殿)에 나와 정사를 보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최석(崔奭)ㆍ김양감(金良鑑)과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柳洪)이 당시 정사의 득실을 아뢰었다.
(선종4년1087 급제36년차)○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 김양감(金良鑑)을 수태위(守太尉)로 삼았다. (1090년 급제39년차 四月 門下侍郞 金良鑑。知貢擧。 諫議大夫 孫 冠。同知貢擧。
賜乙科 李景泌 等三人。丙科九人。同進士十四人。 明經二人。恩賜三人
그 답안이 격식에 맞지 않아 주사(主司)에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자겸(李資謙)과 인척이면서도 정의를 지켜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최사훈(崔思訓) 문종(文宗) 5년(1051) 신묘(辛卯) 급제.
1078년 공부상서가 되어 호부시랑 문황(文晃)과 함께 안흥정(安興亭)에서 송나라 사신을 맞기도 하였다.
최 택(崔 澤) 문종(文宗) 5년(1051) 신묘(辛卯) 급제. 朴龍雲,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一志社)
위제만(魏齊萬) 문종(文宗) 5년(1051) 신묘(辛卯) 급제.朴龍雲,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一志社)
월정화(月精花)편에 고려 시대에 진주에 살던 기생으로 사록(司錄) 위제만(魏齊萬)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부인이 병들어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월정화(月精花)〉 노래를 지어서 그를 풍자하였는데, 고려 시대 풍속음악의 하나인 이 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 〈악지(樂志)〉에 노래의 유래만 전한다.
박인량(朴寅亮) 미상∼1096년(숙종 1). 죽산(竹山) 시호 문렬(文烈) 관직 참지정사(參知政事)
1056급제추정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고려 개국공신 박수경(朴守卿)의 현손이다.
(1051)문종 5년 신묘(辛卯),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일찍이 거란이 압록강 동쪽지역에 야심을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동안에다 보주(保州)를 설치하여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환을 요청해도 듣지 않다가,
1075년(문종 29) 박인량(朴寅亮)이 지은 진정표(陳情表)가 요주(遼主)를 감동시켜 철거하게 되었다.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문종34년1080)박인량(朴寅亮)○가을 7월에 호부상서 유홍(柳洪)과 예부시랑 박인량(朴寅亮). 김근(金覲)을 보냈는데 송 나라 바다에 이르자 구풍(颶風)이 갑자기 일어나서 배가 하마터면 뒤집힐 뻔하였다. 송 나라에 이르러 공물로 바칠 방물을 계산하니 거의 반이나 없어져버렸다. 약재를 내려준 데 대해 사례하고 이어 방물을 바쳤다. 황제가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보내면서 왕에게 조하여 유홍 등의 죄를 석방하게 하였다.
(문종37년1083)○ 中書侍郞 崔 奭(33) 知貢擧 侍講學士 朴寅亮 同知貢擧 음정(陰鼎) 등 14명과 명경 3명, 은사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예전 제도에는 지공거 한 사람만을 두어서 과거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또 동지공거를 두고 마침내 일정한 제도가 되었다.
(선종6년1089)○ 6월에 박인량(朴寅亮)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삼았다.
이어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숙종원년1096)박인량(朴寅亮)○ 9월에 우복야 참지정사 박인량(朴寅亮)이 졸하였다. 인량은 문장이 전아하고 화려하였다. 송 나라 희령(熙寧) 연간에 김근(金覲)과 함께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저술한 척독(尺牘)ㆍ표(表)ㆍ장(狀) 및 시를 송 나라 사람이 칭찬하여, 두 사람의 시와 문을 간행까지 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요에서 압록강을 지나와서 경계(境界)로 삼으려고 하자, 인량이 진정표를 지었는데, “온 하늘 아래가 왕의 땅, 왕의 신민 아님이 없는데, 얼마 안 되는 땅의 나머지를 하필 내 경계니 내 관할이니 할 것입니까." 하고, 또 "문양(汶陽)의 옛 토지를 돌려주어서 저희 나라를 돌보아 주시면,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려서 태평 시대에 춤추오리다." 하니, 요의 황제가 보고 그 의논을 중지하였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고 하였다.저술로는 《고금록 古今錄》 10권과 《수이전(殊異傳)》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세 아들 박경인(朴景仁)·박경백(朴景伯)·박경산(朴景山)이 모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름으로써 고려 전기 명문가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053년 三月 刑部尙書 崔惟善(23)。知貢擧。取進士。
賜乙科 禹 相 等六人。丙科九人。同進士六人。明經二人及第 21인급제
우상(禹相) 장원급제 미상.
서정(徐靖) 1053년 급제1년차 추정
(문종19년1065 급제12년차)○ 8월에 상서우복야 김양지와 전중소감(殿中少監) 서정(徐靖)을 거란에 보내어 책명에 사례하였다.
(선종8년1091 급제37년차)○ 9월에 상춘정(賞春亭)에 나와서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 부여공(扶餘公) 왕수(王燧),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柳洪)ㆍ좌복야 소태보(邵台輔)ㆍ병부상서 서정(徐靖)ㆍ상장군 왕국모(王國髦)ㆍ직문하성 고경(高景)ㆍ한림학사 손관(孫冠)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조용하게 변경(邊境)에 관한 일을 물었다.
(선종9년1092 급제38년차)○ 여름 4월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서정(徐靖)을 서북면 병마사 겸 중군병마사로 삼았다.
(선종9년1092 급제38년차)○ 6월에 서정(徐靖)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선종10년1093 급제39년차)○ 5월에 서정(徐靖)을 상서 좌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로 삼았다.
1054년 四月。知中樞院事 金 顯(38) 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柳善餘 等六人。丙科八人。同進士十一人。明經二人及第。25인급제
유선여(柳善餘),최사제(崔思齊)
유선여(柳善餘) ? ~ ? 미상(未詳) 장원
최사제(崔思齊)∼1091년(선종 8). 해주(海州). 최충(崔冲)의 손자로, 최유선(崔惟善)의 아들이다.1054년(문종 8 급제1년차) 과거에 급제. 시호는 양평(良平)이다.
(문종35년1081 급제27년차) ○ 예부상서 최사제(崔思齊)와 이부시랑 이자위(李子威)를 보내 송 나라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겸하여 의약을 내려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1088년(선종 5 급제34년차) 중추원사,
(선종6년1089 급제35년차)○ 6월에 최사제(崔思齊)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선종7년1090 급제36년차)○ 최사제(崔思齊)를 중서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
(선종8년1091 급제36년차) ○ 중서시랑 평장사 최사제(崔思齊)가 졸(卒)하였다.
1056년 四月。尙書右僕射李令幹。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李幹方 等二人。丙科四人。同進士七人。恩賜二人。明經四人及第 13명 급제
이간방(李幹方)
이간방(李幹方) 장원급제 미상
최응(崔應)(문종1056)○ 태자에게 명하여 여러 왕씨들과 더불어 동지루(東池樓)에 술자리를 벌이고, 수재(秀才) 최응(崔應)ㆍ이서(李曙)ㆍ어실충(御室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각각 비단을 내려 주었다.
1057년 四月。左散騎常侍 趙 覇(36) 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李 俊 等三人。丙科九人。同進士二人。明經四人及第 14인 급제
이준(李晙)
이준(李晙) 장원급제 미상
1059년 二月。 翰林學士 金化崇。知貢擧。
賜丙科 楊信麟 等八人。同進士九人。明經四人。恩賜四人及第 17명 급제
양신린(楊信麟)
양신린(楊信麟) ? ~ ? 미상(未詳) 장원
1061년 三月。 翰林學士 崔惟善。知貢擧。取進士。
賜乙科 羅繼含 等六人。丙科八人。同進士六人。明經二人及第 20명 급제
라계함(羅繼含)
라계함(羅繼含) ? ~ ? 미상(未詳) 장원
1063년 五月。 翰林學士 金行瓊。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洪 器 等四人。丙科十四人。同進士十二人。明經一人。恩賜五人
홍기(洪器),최사추(崔思諏),손 관(孫 冠)
홍기(洪器) ? ~ ? 미상(未詳) 장원
최사추(崔思諏) 1036 ~ 1115 해주(海州) 자는 가언(嘉言). 초명은 사순(思順) 시호 충경(忠景)
합격연령 28세 관직 태사(太師) 문하시중을 지낸 최충(崔冲)의 손자이며, 상서령을 지낸 최유길(崔惟吉)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왕이 그가 명문가의 아들로 학문에 해박하고 견문이 많다 하여 내시(內侍)를 삼아 문답하니, 대답이 뜻에 맞아 매우 기뼈하였다.그는 선종조에 전중소감(殿中少監)과 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를 역임하였고,
(1088년 53세 급제25년차) 三月。判尙書吏部事 崔 奭。知貢擧。 禮賓少卿 崔思諏(25)。同知貢擧。
賜乙科 金富弼 等五人。丙科七人。同進士十一人。明經三人。恩賜一人第그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는데,
(1092년 57세 급제29년차)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고 요나라의 사신 왕정(王鼎)이 오자 그 관반(館伴: 國賓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다.그때 왕정이 매일밤 홀로 앉아 글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꾀를 써서 그 글을 취해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요나라가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무비(武備)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과 송나라가 남하(南夏)를 치는 일을 말한 것으로 임금을 간하기 위하여 올린 소(疏)였다. 왕은 그의 빈객 접대에 능함을 가상히 여겨 손수 조서(詔書)를 써서 표창하고 뒤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하였다.(선종11년1094 59세 급제31년차) 최사추(崔思諏)를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事左散騎常侍)로 삼았다.
(헌종원년1095 60세 급제32년차)○ 최사추(崔思諏)를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로 삼았다.
(헌종원년1095 60세 급제32년차)○ 최사추(崔思諏)를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守司空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로
(헌종원년1095 60세 급제32년차)○ 최사추(崔思諏)를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로 삼았다.
(숙종2년1097 62세 급제34년차)○ 최사추(崔思諏)를 중서시랑 평장사 판형부사 겸 서경유수사(中書侍郞平章事兼判刑部事西京留守事)로 삼았다.
(숙종5년1100 65세 급제37년차)○ 3월에 최사추(崔思諏)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삼았다.
(숙종6년1101 66세 급제38년차)최사추(崔思諏)○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崔思諏)ㆍ어사대부(御史大夫) 임의(任懿)ㆍ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궁궐터를 살피어 정하는 일을 돕게 하였다.
(숙종6년1101 66세 급제38년차)○ 최사추(崔思諏)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옛 문서와 부합되니 주산 줄기의 중심 큰 맥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지형에 따라서 도성을 건설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좇았다.
(1103년 68세 급제40년차)에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그해 반역을 도모한 대장군 고문개(高文蓋)·장홍점(張洪占)·이궁제(李弓濟), 장군 김자진(金子珍)등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의 호를 받았다.(숙종8년1103 68세 급제40년차)○ 최사추(崔思諏)를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숙종10년1105 70세 급제42년차)최사추(崔思諏)○ 봄 2월에 문하시랑 최사추(崔思諏)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사추가 늙었다고 물러나기를 매우 간절하게 청하니, 위계정(魏繼廷)이 말하기를, “최공이 관(官)에 계시어 저희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보고, 군국(軍國)의 대사를 한결같이 그의 말을 좇았는데, 이제 만약 늙어 사퇴하면 우리들은 어찌하랴." 하였다. 후에 수춘궁(壽春宮)의 잔치에서 사추가 일어나 축수(祝壽)하니, 왕이 그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이 만약 진실로 물러난다면 누구와 정사를 함께 하겠소."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치사(致仕)는 예(禮)입니다. 신은 늙어서 일을 할 수 없사오니, 한가롭게 살면서 여생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수태보(守太保)가 되어 나이를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예종7년1112 77세 )○ 12월에 최사추(崔思諏)를 수태사중서령(守太師中書令)으로 추증 치사하게 하였다.
사위인 이자겸(李資謙)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태자를 낳자 추성봉국공신 대령군 개국후(推誠奉國功臣大寧郡開國侯)에 봉하여졌다.
(예종10년1115 80세)최사추(崔思諏)○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사추(崔思諏)가 졸하였다. 사추는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손자로 힘써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종이 불러들여 궁중에서 왕을 모셨는데 말하여 보니 왕의 마음에 맞았다. 그 후로 내외 관직에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의논하는 것이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감히 경솔하게 옛 법을 고치지 않았다. 문인과 자제 중에 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항상 왕을 섬기는 도리로 교훈하고 개인적인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다름이 없었다.
왕이 마침 연등회에 나가 풍악을 보다가 부고를 듣고서는 놀라고 슬퍼하여 잔치를 파하고 조회를 정지하며, 부의와 위문을 특별히 후하게 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장례에 참석하게 하였다.
숙종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손 관(孫 冠)1024년(현종 15)∼1109년 1061년 급제1년차 추정
고려 문종 때의 문신. 안협손씨(安峽孫氏)의 시조. 자는 지족(知足). 품성이 청순하고 질박하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한 뒤, 좌보궐(左補闕)을 거쳐 청요직(淸要職)에서 활동하였다.
(1090년 급제29년차 四月 門下侍郞 金良鑑。知貢擧。 諫議大夫 孫 冠。同知貢擧。
賜乙科 李景泌 等三人。丙科九人。同進士十四人。 明經二人。恩賜三人
(선종8년1091 급제30년차)○ 9월에 상춘정(賞春亭)에 나와서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 부여공(扶餘公) 왕수(王燧),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柳洪)ㆍ좌복야 소태보(邵台輔)ㆍ병부상서 서정(徐靖)ㆍ상장군 왕국모(王國髦)ㆍ직문하성 고경(高景)ㆍ한림학사 손관(孫冠)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조용하게 변경(邊境)에 관한 일을 물었다.
(헌종원년1095 급제34년차)○ 5월에 손관(孫冠)을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로 삼았다.
(헌종원년1095 급제34년차)○ 손관(孫冠)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삼았다.
(헌종원년1095 급제34년차)○ 손관(孫冠)을 상서 우복야 참지정사 판호부사로 삼았다.
현종 때 지중추원사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호부사(知中樞院事尙書右僕射參知政事判戶部事)로 치사하였다.
(예종4년1109 급제48년차)○ 참지정사로 치사한 손관(孫冠)이 졸하였다. 손관은 성품이 청순하고 질박하였으며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1065 (문종19년1065 급제35년차)○ 6월에 문덕전(文德殿)에 거둥하여 진사를 복시할 때에 시어사 노단(盧旦)이 일을 아뢰다가 왕의 뜻을 거슬렸다. 왕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끌어 내어 공란(公襴 조복(朝服))을 벗기고 묶으려 하니, 평장사 최유선(崔惟善)이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헌사(憲司)에 넘겨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왕의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졌으나 마침내 복시는 파하고, 오직 열 번이나 과거를 보고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만을 뽑아서 이원장(李元長) 등 5명에게 출신(出身)을 은사(恩賜)하고 또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튿날 노단(盧旦)을 강등시켜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에 제수하였다.
1066년 四月。 起居舍人 盧 寅。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高仲臣 等三人。丙科七人。同進士四人。明經二人及第 14명과 명경 2명에게 급제
노 인(盧 寅) (문종14년1060)○ 송 나라 진사(進士) 노인(盧寅)이 글재주가 있으므로 비서성 교서랑을 제수하였다.
고중신(高仲臣)
고중신(高仲臣) 장원급제
1068년 四月。 崔 尙。知貢擧。取進士。
賜乙科 崔 駰 等二人。丙科五人。同進士十人。明經二人。恩賜一人及
1070년 四月。尙書左僕射金行瓊。知貢擧。取進士。
賜乙科 崔翼臣 等三人。丙科七人。同進士十一人。恩賜二人。明經一人及
최익신(崔翼臣) ? ~ ? 미상(未詳) 장원
임의(任懿) 충공(忠恭) 1041 ~ 1117 나주(羅州) 자 충공(忠恭) 시호 정경(貞敬)
합격연령 30세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임현(任顯) [처부] 성명 : 이제정(李齊頲)
1071년 國子試二十五年 十月 秘書少監 高 維。取 七十五人
1072년 三月。 秘書監 李成美。知貢擧。取進士。
賜乙科 朴維恪 等二人。丙科十一人。同進士九人。明經二人及第。
박유각(朴惟恪) ? ~ ? 미상(未詳) 장원
정목(鄭穆) 1040 ~ 1105 동래(東萊) 합격연령 33세 기타 : 병과(丙科)
[부] 성명 : 정문도(鄭文道) [조부] 성명 : 정지원(鄭之遠) [처부] 성명 : 고익공(高益恭)
1073년 十月。以翰林學士鄭惟産爲明年知貢擧。
1074년 四月。 命太子。覆試。惟産所取進士。
賜乙科 李 嘏 等二人。 丙科十人。同進士十四人。明經二人及第。
이하(李嘏)
이하(李嘏) ? ~ ? 미상(未詳) 장원
윤관(尹瓘) ? ~ 1111 파평(坡平)
1076년 三月 禮部尙書 李靖恭。知貢擧。取進士。覆試。
賜乙科 李 昱 等二人。丙科七人。同進士二十一人。明經二人及第
1078년 三月。 參知政事 文 正。知貢擧。取進士。命太子。
賜乙科 禹元齡。丙科七人。同進士十二人。明經三人及第。
우원령(禹元齡),조중장(趙仲璋)
우원령(禹元齡) ? ~ ? 미상(未詳) 장원
조중장(趙仲璋) ? ~ 1119 배천(白川) 시호 강회(康懷)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조선정(趙先正) [조부] 성명 : 조양유(趙良裕)
1080년 五月。 禮部尙書 盧 旦。知貢擧。取進士。
賜乙科 金尙磾 等二人。丙科九人。同進士七人。明經三人及第。
김상제(金尙磾),노준(魯隼)
김상제(金尙磾) ? ~ ? 미상(未詳) 장원
노준(魯隼) ? ~ ? 미상(未詳)
(문종35년1081)○ 6월에 이부상서 최석(崔奭) 등이 아뢰기를, “전년(1080년)에급제 진사 노준(魯隼)은 그 아비가 법률을 범하여 대공복(大功服)에 해당되는 친족에게 장가들어서 낳은 아들이니,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을 가려 뽑아서 임용하는 데에는 상례(常例)에 구애하지 말 것이니, 여러 진사와 함께 관질을 주어서 조적(朝籍)에 통하게 하여야 한다." 하니, 재상 문정(文正) 등이 논의하기를, “집을 잘 다스린 뒤에라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준의 아비는 혼인을 바르게 하지 못하여 인륜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을 숭상하여 선비를 등용하기가 급하니, 계자(階資)를 낮추어서 노준(魯隼)에게 관직을 제수하소서." 하니, 문정(文正)을 따랐다.
1082년 三月。 吏部尙書 崔 奭。知貢擧。
取進士 崔 淵 等十九人。放榜時。有大學生 田德祖 等。於論場。私坼官封詩賦名紙。事覺。命來春改試
1083년 三月。 中書侍郞 崔 奭。知貢擧。侍講學士 朴寅亮。同知貢擧。
賜乙科 陰 鼎 等二人。丙科六人。同進士六人。明經三人恩。 賜一人及第
음정(陰鼎),이자현(李資玄),곽여(郭輿)
음정(陰鼎) ? ~ ? 괴산(槐山) 장원
이자현(李資玄) ? ~ ? 인천(仁川) 자 진정(眞精) 시호 진악(眞樂) 관직 대악승(大樂丞)
기타 기타 : 65졸(六十五卒)
[부] 성명 : 이의(李顗) [조부] 성명 : 이자연(李子淵) [증조부] 성명 : 이한(李翰)
곽여(郭輿) ? ~ ? 청주(淸州) 자 몽득(夢得) 호 동산거사(東山居士)
관직 원외랑(員外郞) [부] 성명 : 곽상(郭尙)
상기 知貢擧 명단 : 1047정배걸(鄭倍傑), 1049國子試김상빈(金尙賓), 1049김정준(金廷俊),
1051이자연(李子淵), 1053최유선(崔惟善), 1054김현(金顯), 1056 이영간(李令幹), 1057조패(趙覇),
1059김화숭(金化崇), 1061최유선(崔惟善), 1063김행경(金行瓊), 1065 노단(盧旦) 무취(은사5인),
1066노인(盧寅), 1068최상(崔尙), 1070김행경(金行瓊), 1071 國子試고유(高維), 1072이성미(李成美),
1073정유산(鄭惟産), 1076이정공(李靖恭), 1078문정(文正), 1080노단(盧旦), 1082최석(崔奭)
1083 최석(崔奭),박인량(朴寅亮)
문종(文宗) 0 (?) 문종 시년 미상(試年未詳) (43.55%) 27 명
이자인(李資仁) ? ~ ? 인천(仁川) 합격연령 22세 관직 중추부사(中樞副使)
[부] 성명 : 이정(李頲) [조부] 성명 : 이자연(李子淵) [증조부] 성명 : 이한(李翰)
이예(李預) ? ~ ? 인천(仁川)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부] 성명 : 이자상(李子祥) [조부] 성명 : 이한(李翰) [증조부] 성명 : 이허겸(李許謙)
신수(愼脩) ? ~ ? 거창(居昌) 시호 공헌(恭獻) 관직 복야(僕射)
고영신(高令臣) ? ~ ? 개성(開城) 시호 양경(良敬) 관직 사공(司空)
문관(文冠) ? ~ ? 정선(旌善) 자 민장(民章) 시호 장경(章敬) 관직 사공(司空)
[부] 성명 : 문임간(文林幹)
문정(文正) ? ~ ? 장연(長淵) 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정문(鄭文) ? ~ ? 초계(草溪)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부] 성명 : 정배걸(鄭倍傑)
위계정(魏繼廷) ? ~ ? 미상(未詳)
이오(李䫨) ? ~ ? 인천(仁川)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이자상(李子祥) [조부] 성명 : 이한(李翰) [증조부] 성명 : 이허겸(李許謙)
유신(柳伸) ? ~ ? 전주(全州) 일명 유인(柳仁)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김한충(金漢忠) ? ~ ? 경주(慶州) 관직 좌복야(左僕射)
김상기(金上琦) ? ~ ? 강릉(江陵)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김양(金陽) [조부] 성명 : 김징우(金徵祐)
김황원(金黃元) 1045년(정종 11)∼1117년(예종 12). 문신·시인. 본관은 광양(光陽),자는 천민(天民).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 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청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한림원에 있을 때 요나라의 사신을 시로써 맞아 존경을 받았고, 그 문명 때문에 재상 이자위(李子威)의 시기를 받아 한때 파직당하였다.
후에 선종에게 이름이 알려져 좌습유(左拾遺)·지제고(知制誥)에 기용되고, 이어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星州)를 다스려 치적을 쌓았으며,
예종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학사·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하고 나서 치사(致仕)하였다.
평양 부벽루에 올랐다가 그곳에 걸린 평양의 산천을 읊은 시구들이 한결같이 신통하지 못하다고 모두 태워버리고, 스스로 지어 걸기로 하여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한 구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에는 한점한점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를 얻고는 끝내 그 짝을 채우지 못하여 통곡을 하며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한다.그는 영달을 하려고 남의 말이나 본뜨며, 행세차로 짓는 시는 구역질이 난다고 크게 반발할 정도로, 문학이 영달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평탄한 삶을 영위하지는 못하였다.
(예종12년1117)김황원(金黃元)○가을 8월에 첨서추밀원사 김황원(金黃元)이 졸하였다. 황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과거에 합격하여 문장이 '해동의 제일'이라 하였다. 성질이 깨끗하고 굳세어 세력에 따르지 않으며, 이재(李載)와 함께 한림원에 있으면서, 이름이 같이 높았다. 이때 거란의 사신이 왔는데, 김황원(金黃元)이 궁궐 안 잔치에서, “봉새는 윤발(綸綍 임금의 조서)을 입에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자라는 봉래산을 타고 바다 건너왔네."(有鳳含綸綍從天降,鼇駕蓬萊渡海來之句)라는 글귀를 즉석에서 부르니, 거란 사신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그 시의 전편을 구하여 적어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고문체를 배워서, 유행하는 문체를 따르지 않으니, 재상 이자위(李子威)가 미워하여 말하기를, “이들이 오랫동안 문한의 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후생을 그릇되게 할 것이다."고 하면서 위에 아뢰어 배척하였다. 후에 외직으로 경산부사(京山府使)가 되어서는, 백성들에게 은혜스러운 정사를 하였다. 숙종이 연영전(延英殿)을 개설하고 황원을 불러 서적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문득 질문하면서 ‘선배’로 부르고 이름을 칭하지 않았다. 예종이 즉위하자, 중서사인 벼슬로 요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도중에서 북쪽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게 된 것을 보고, 역마를 달려 상서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제하기를 청하였더니, 돌아올 때에는 백성들이 보고, “이분이 우리를 살려 준 상공(相公)이다."고 하였다. 후에 여진이 요 나라를 침략하여 동쪽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항복받았으나, 오직 내원ㆍ포주 두 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식량이 다되었다. 물품을 가지고 값을 감하여 우리나라에서 곡식을 사 가려 하였는데, 국경 지방의 관리들이 만간인이 요 나라와 무역하는 것을 금하였다. 황원이 상소하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히 여기는 것이 인이 아니요, 이웃 나라를 노하게 하는 것이 의가 아닙니다. 두 성에 양곡을 팔고 겸하여 서로 무역하기를 허락하도록 하옵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질이 근엄하지 않고,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였다. 죽은 뒤에 예부낭중 김부식이 시호 주기를 청하였으나, 요직에 있는 자로서 좋아하지 않는 이가 있어 저지되었다.
(예종17년1122)김황원(金黃元)○ 가을 7월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이궤(李軌)가 졸하였다. 이궤는 과거에 급제해서 출세하여 김황원(金黃元)과 벗이 되어 친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났다.그의 작품이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거의 없어 부분적으로 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063~1073 급제.
최홍사(崔弘嗣) ? ~ ? 충주(忠州) 일명 최홍사(崔洪嗣)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부] 성명 : 최부(崔阜) [조부] 성명 : 최광(崔光)
한규(韓圭) ? ~ ? 장단(長湍) 관직 호부시랑(戶部侍郞)
이숙(李璹) ? ~ ? 부평(富平) 관직 참지정사(參知政事) [부] 성명 : 이정공(李靖恭)
이위(李瑋) ? ~ ? 부평(富平) 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 [부] 성명 : 이정공(李靖恭)
노단(盧旦) ? ~ ? 미상(未詳)
(문종19년1065) ○ 6월에 문덕전(文德殿)에 거둥하여 진사를 복시할 때에 시어사 노단(盧旦)이 일을 아뢰다가 왕의 뜻을 거슬렸다. 왕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끌어 내어 공란(公襴 조복(朝服))을 벗기고 묶으려 하니, 평장사 최유선이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헌사(憲司)에 넘겨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왕의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졌으나 마침내 복시는 파하고, 오직 열 번이나 과거를 보고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만을 뽑아서 이원장(李元長) 등 5명에게 출신(出身)을 은사하고 또 명경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튿날 노단(盧旦)을 강등시켜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에 제수하였다.
(문종27년1073) ○ 8월 태복경(太僕卿) 김양감(金良鑑)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을 보내 송 나라에 가서 사은하고 겸하여 방물을 바쳤다. 이듬해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1077년 직문하성(直門下省), 이듬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이듬해 우복야 한림학사승지(右僕射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고,
(문종34년1080)○ 禮部尙書 盧旦 知貢擧 김상제(金尙磾) 등 18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문종35년1081)○ 8월에 서여진의 만두(漫豆) 등 17명이 가족을 이끌고 와서 의탁하였다. 예빈성이 아뢰기를, “예전 제도에 본국 변경의 백성으로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고향이 그리워 스스로 돌아오는 자와 송 나라 사람으로 재예가 있는 사람 외에 흑수ㆍ여진 사람의 입국은 허가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두 역시 예전 제도를 따라 돌려보내소서." 하자, 예부상서 노단(盧旦)이 아뢰기를, “만두 등이 비록 무지한 속인이나 의를 사모하여 왔으니 거절할 수 없습니다. 산남현(山南縣)에 살게 하여 편호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1085 선종二年) 四月 中樞院使 盧 旦。知貢擧。尙書禮部侍郞 李 預。同知貢擧。
賜乙科 金 晙 等三人。丙科七人。同進士十二人。明經三人。恩賜二人及第(선종3년1086)노단(盧旦)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에 오른 뒤 그만두었다.
(선종8년1091)○ 가을 7월 상서 좌복야로 치사한 노단(盧旦)이 졸했다.
사학을 열어 후진교육에 힘썼던 바 이를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하였고,
이것은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憲公徒)를 포함한 사학12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이다. 시호는 광헌(匡憲)이다.
이자위(李子威) ? ~ ? 미상(未詳)
김근(金覲) ? ~ ?경주(慶州) 관직 예부시랑(禮部侍郞) [조부] 성명 : 김위영(金魏英)
오함서(伍咸庶) ? ~ ? 미상(未詳)
유석(柳奭) ? ~ ? 미상(未詳)
임성개(林成槩) ? ~ ? 미상(未詳)
황영(黃瑩) ? ~ ? 미상(未詳)
유석(庾晳) ? ~ ? 미상(未詳)
이굉(李宏) ? ~ ? 미상(未詳)
(문종35년1081)노준(魯隼)○ 6월에 이부상서 최석(崔奭) 등이 아뢰기를, “전년(1080년)에급제 진사 노준(魯隼)은 그 아비가 법률을 범하여 대공복(大功服)에 해당되는 친족에게 장가들어서 낳은 아들이니,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을 가려 뽑아서 임용하는 데에는 상례(常例)에 구애하지 말 것이니, 여러 진사와 함께 관질을 주어서 조적(朝籍)에 통하게 하여야 한다." 하니, 재상 문정(文正) 등이 논의하기를, “집을 잘 다스린 뒤에라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준의 아비는 혼인을 바르게 하지 못하여 인륜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을 숭상하여 선비를 등용하기가 급하니, 계자(階資)를 낮추어서 노준(魯隼)에게 관직을 제수하소서." 하니, 문정(文正)을 따랐다.
상기 급제 추정자 명단 : 이수. 문익(文翼) 한이(韓彛) 조신준(趙臣俊)
(숙종4년1099)한이(韓彛)○ 문익(文翼)을 요에 보내어 원자(元子)를 책봉하는 명을 내릴 것을 청하고, 이수(李壽)는 왕의 생신 축하에 대하여 사례하고, 한이(韓彛)는 방물을 진상하고, 조신준(趙臣俊)은 신정을 축하하였다
고려12대 선종(宣宗)(재위1084~1094년)
1084년 五月。同知樞密院事崔思諒。知貢擧。 吏部侍郞 金上琦。同知貢擧。
賜乙科 高旻翼 等三人。丙科七人 同進士六人 明經四人及第。
고민익(高旻翼),이공저(李公著)
고민익(高旻翼) ? ~ ? 미상(未詳) 장원 일명 고민한(高旻漢)
이공저(李公著) 1053 ~ 1138 토산(土山) 합격연령 33세 관직 태자소보(太子少保)
1085년 四月 中樞院使 盧 旦。知貢擧。尙書禮部侍郞 李 預。同知貢擧。
賜乙科 金 晙 等三人。丙科七人。同進士十二人。明經三人。恩賜二人及第
김준(金晙),김인존(金仁存)
김준(金晙) 1057 ~ 1124 장원 개성(開城) 시호 정신(貞愼)
합격연령 29세 관직 평장사(平章事)
김인존(金仁存)? ~ 1127 강릉(江陵) 초명 김연(金緣) 자 처후(處厚) 시호 문성(文成) 시중(侍中)[부] 성명 : 김상기(金上琦) [조부] 성명 : 김양(金陽) [증조부] 성명 : 김징우(金徵祐)
1086년 五月。中樞院副使 李子威。知貢擧。 禮部侍郞 金 覲。同知貢擧。
賜乙科 朴景伯 等四人。丙科八人。 同進士十八人。明經三人及第。
박경백(朴景伯),이공수(李公壽)
박경백(朴景伯) ? ~ ? 장원 죽산(竹山) 관직 상서(尙書) [부] 성명 : 박인량(朴寅亮)
이공수(李公壽) ? ~ 1136 미상(未詳)
1088년 三月。判尙書吏部事 崔 奭。知貢擧。 禮賓少卿 崔思諏。同知貢擧。
賜乙科 金富弼 等五人。丙科七人。同進士十一人。明經三人。恩賜一人第
김부필(金富弼),윤포(尹誧)
김부필(金富弼) ? ~ ? 장원 경주(慶州) [부] 성명 : 김근(金覲)
제 : 김부일(金富佾) 김부식(金富軾) 김부철(金富轍)=김부의(金富儀)
윤포(尹誧) ? ~ ? 횡성(橫城) 일명 윤해(尹諧) 시호 정렬(靖烈) 관직 대광(大匡)
[부] 성명 : 윤조명(尹祚明) [조부] 성명 : 윤수기(尹修己) [증조부] 성명 : 윤수현(尹守玄) [외조부] 성명 : 유열(庾說)
1090년 四月。 門下侍郞 金良鑑。知貢擧。 諫議大夫 孫 冠。同知貢擧。
賜乙科 李景泌 等三人。丙科九人。同進士十四人。 明經二人。恩賜三人
이경필(李景泌),최유(崔濡)
이경필(李景泌) ? ~ ? 미상(未詳) 장원
최유(崔濡) 1072 ~ 1140 강릉(江陵) 관직 평장사(平章事)
최홍정(崔弘正)
(예종2년1107) 최홍정(崔弘正)○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보냈다. 을유일에 윤관ㆍ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고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호왈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ㆍ황군상(黃君裳)을 정(定 함남 정평(定平))ㆍ장(長 함남 정평(定平))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 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1091년 國子試 八年。三月。 禮部郞中 李 䫨。 取 金 藎 等九十一人
김 신(金 藎)
1092년 四月。 吏部尙書 金上琦。知貢擧。 禮部侍郞 伍咸庶。同知貢擧。
賜乙科 金 成 等五人。丙科十人。同進士十八人。明經三人。恩賜二人及第
1094년 三月。 知中樞院事 李 預。知貢擧。禮部侍郞 魏繼廷。同知貢擧。
賜乙科 鄭克恭 等二人。丙科九人。同進士十七人。明經四人。恩賜四人及
지공거와 동지공거명단: 1084 崔思諒,金上琦 1085 盧 旦,李 預 1086 李子威,金 覲 1091 國子試李 䫨
1092金上琦,伍咸庶 1094 李 預,魏繼廷
선종(宣宗) 0 (?) 선종 시년 미상(試年未詳) (52%) 13 명
박경작(朴景綽)=박경인(朴景仁) ? ~ ? 평산(平山) 박경작(朴景綽) 관직 참지정사(參知政事)
[부] 성명 : 박인량(朴寅亮) [조부] 성명 : 박충후(朴忠厚) [증조부] 성명 : 박종(朴琮)
(예종16년1121)○ 참지정사로 치사한 박경인(朴景仁)이 졸하였다. 경인이 젊어서 힘써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세 번이나 간관이 되었는데, 언론이 강직하여 망설이는 일이 없으니 당시의 의논이 중히 여겼다.
오연총(吳延寵) 1055 ~ 1116 미상(未詳)
김부일(金富佾) ? ~ ? 경주(慶州)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김근(金覲)
임유문(林有文) ? ~ ? 옥구(沃溝)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부] 성명 : 임개(林槩)
허경(許慶) ? ~ ? 양천(陽川) 관직 평장사(平章事)
김약온(金若溫) ? ~ ? 광양(光陽) 일명 김의문(金義文) 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
[부] 성명 : 김양감(金良鑑) [조부] 성명 : 김정준(金廷俊) [증조부] 성명 : 김책(金策)
최자성(崔滋盛) ? ~ ? 수원(水原) 관직 평장사(平章事)
[부] 성명 : 최유락(崔惟諾) [조부] 성명 : 최충공(崔忠恭) [증조부] 성명 : 최사위(崔士威)
김진(金縝) ? ~ ? 강릉(江陵) 관직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이궤(李軌) ? ~ ? 청주(淸州) 일명 이재(李載) 참지정사(參知政事) [부] 성명 : 이유(李攸)
(숙종5년1100)이재(李載)○ 9월에 예부낭중 이재(李載)를 요에 보내어 조유에 사례하였다. 일찍이 요의 사신 왕악(王萼)이 흥왕사의 작은 종(鐘)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이다." 하므로 중[僧] 후(煦)가 악에게, “내가 들으니 황제께서 불교를 믿는다 하시니 이 종을 바치기를 원한다." 하니, 악이 "좋다." 하였다. 후가 금종(金鐘) 두 틀을 주조하기를 청하여, 요의 황제에게 바치려고 이재(李載)에게 말하였는데 공목관(孔目官 문서 맡은 관리) 이복(李復)이 이 사실을 먼저 요황제에게 아뢰니, 요에서는 왕악(王萼)이 사신으로 가서 망령되게 물품을 요구하였다고 하여 준엄한 형을 내리고, 종은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 이복(李復)이 돌아온 뒤에 형부에서 복(復)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는데 이재(李載)는 복의 아룀을 알고서도 금지시키지 못한 죄로 아울러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예종원년1106)이재(李載)○ 유신(儒臣:학사) 우간의(右諫議) 김연(金緣)ㆍ최준(崔璿)ㆍ예부낭중(1100년) 이재(李載)ㆍ이덕우(李德羽)ㆍ박승중(朴昇中) 등 10여 명에게 명하여, 태사관(太史官)과 함께 장녕전(長寧殿)에 모여서 지리에 관한 여러 사람의 책을 모아 같고 다른 점을 교정하고 그 번잡한 것을 산정해서《해동비록(海東祕錄)》이란 책 한 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예종4년1109)이재(李載)○ 우간의대부 이재(李載)가 소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군국에 변고가 많아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데 자주 군신과 주연을 즐기고, 더욱이 지금 동쪽 변방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주둔한 군사가 가지 않고 있습니다. 근자에 거짓으로 화호(和好)를 청함에 국가에서는 이를 믿고 사신을 보내어 요에 알리고 그 9성을 돌려 주려 함은 심히 불가하니, 청컨대 헤아리소서." 하였다.
(예종4년1109)이재(李載)○ 11월에 건덕전에서 조회를 열었는데 간의대부 이재(李載)ㆍ김연(金緣)과 어사대부 최계방(崔繼芳) 등이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ㆍ임언(林彥)의 패전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왕은 윤허하지 않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재(李載) 등이 또 복합(伏閤)하여 굳게 간하니, 오시(午時)에 이르러 승선 심후에 명하여 선유하였다.
이궤(李軌)(예종12년1117)○2월에 이궤(李軌)를 추밀원사로 삼았다.
(예종12년1117)○6월에 이궤(李軌)를 판삼사사로 로 삼았다.
(예종12년1117)○12월에 이궤(李軌)를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로 삼았다.
(예종13년1118)○3월에 이궤(李軌)를 호부상서 판례부사로 삼았다.
(예종15년1120)○ 6월에 이궤(李軌)를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로 하였다.
(예종17년1122)○ 가을 7월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이궤(李軌)가 졸하였다. 이궤는 과거에 급제해서 출세하여 김황원(金黃元)과 벗이 되어 친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났다.
노조(盧朝) ? ~ ? 곡산(谷山) 관직 우복야(右僕射)
상기 급제 추정자 명단 : 김진, 노조. 김상우, 림언, 김고.
고려13대 헌종(獻宗) (재위1095~1095년)
1095년 四月。 參知政事 柳 奭。知貢擧。 左承宣 崔弘嗣。同知貢擧
賜乙科 兪 進 等三人。丙科九人。同進士十四人。明經三人。 恩賜三人及
유진(兪進),
유진(兪進) ? ~ ? 미상(未詳) 장원
고려14대 숙종(肅宗) (재위1096~1105년)
1096년 三月。 參知政事 崔思諏。知貢擧。 禮部侍郞 林成槩。同知貢擧。
賜乙科 金輔臣 等五人金富軾。丙科十人。同進士十五人。明經四人。恩賜四人
김보신(金輔臣),김부식(金富軾)
김보신(金輔臣) ? ~ ? 미상(未詳) 장원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 경주(慶州) 시호 문렬(文烈) 합격연령 22세 태사(太師)
1097년 四月。 參知政事 黃 瑩。知貢擧。吏部尙書 庾 晳。同知貢擧。
賜乙科 林元通 等五人金富轍。丙科十人。同進士十八人。明經四人。恩賜四人及
임원통(林元通),김부철(金富轍)
임원통(林元通) ? ~ ? 미상(未詳) 장원
김부철(金富轍) ? ~ ? 경주(慶州) 급제순위 5위 개명 김부의(金富儀) 자 자유(子由)
시호 문의(文懿) 관직 지추밀원(知樞密院) [부] 성명 : 김근(金覲)
1098년 四月。 禮部尙書 魏繼廷。知貢擧。 國子祭酒 洪 器。同知貢擧。
賜乙科 李德允 等三人。丙科八人。同進士十六人。明經三人。 恩賜五人
이덕윤(李德允),
이덕윤(李德允) ? ~ ? 미상(未詳)
1099 二月。宋詔。許擧子 賓貢。
1100년 四月。同知樞密院事 李 䫨。知貢擧。 知奏事 柳 伸。同知貢擧。
賜乙科 韓淑旦 等三人。丙科十一人。同進士二十二人。明經三人。恩賜六人及第
한숙단(韓淑旦)
한숙단(韓淑旦) ? ~ ? 미상(未詳) 장원 전력 진사(進士)
장수(張脩) ? ~ ? 인동(仁同) 개명 장홍우(張鴻羽) 관직 박사(博士)
[부] 성명 : 장세평(張世平) [조부] 성명 : 장유기(張惟器) [외조부] 성명 : 백가적(白可績)
1102년 三月。 知奏事 尹 瓘。知貢擧。 司宰卿 李 宏。同知貢擧。
賜乙科 康 滌 等五人。丙科十一人。同進士十七人。明經三人。 恩賜五人及第。
竝召試投化宋進士 章忱。賜別頭乙科及第。仍賜紅牌鞍馬。
강척(康滌),정항(鄭沆),장침(章忱) 宋進士 別頭乙科
강척(康滌) ? ~ ? 미상(未詳) 장원(壯元)及第
정항(鄭沆) 1080 ~ 1136 동래(東萊) 자 자림(子臨) 시호 문안(文安) 합격연령 23세
상서(尙書) [부] 성명 : 정목(鄭穆) [조부] 성명 : 정문도(鄭文道) [증조부] 성명 : 정지원(鄭之遠) [외조부] 성명 : 고익공(高益恭) [처부] 성명 : 왕국모(王國髦)
최재(崔梓) ? ~ ? 미상(未詳) 자 대용(大用) 본관 미상(未詳)
[부] 성명 : 최저수(崔翥守) [조부] 성명 : 최영(崔穎) [증조부] 성명 : 최후(崔厚)
장침(章忱) 宋進士 別頭乙科
(숙종7년1102)○ 양신부(楊信孚)를 요에 보내어 생신을 축하해 준 것을 사례하고 곽준목(郭峻穆)은 방물을 진상하고 김택선(金澤先)은 신정을 축하하였다.
1104년 二月。 翰林學士 鄭 文。知貢擧。 禮部侍郞 劉 載。同知貢擧。試進士 命太子。
賜乙科 宋 瑋 等三人。丙科八人。同進士十六人。 明經二人。恩賜五人及第。
송위(宋瑋)
송위(宋瑋) ? ~ ? 미상(未詳)
한유충(韓惟忠)=한주(韓柱) ? ~ ? 미상(未詳) 일명 한주(韓柱)
안직서(安稷諝)=안직숭(安稷崇) ? ~ ? 미상(未詳) 일명 안직숭(安稷崇)
지공거와 동지공거: 1095최사추 崔思諏 임성개 林成槩, 1097황형 黃瑩 유석 庾晳 1098위계정 魏繼廷 홍기 洪器, 1100 이오 李䫨 류신 柳伸 1102 윤관 尹瓘 이굉 李宏 1104 정문 鄭文 유재 劉載
장원 급제자 1095김보신金輔臣, 1097임원통林元通, 1098이덕윤李德允, 1100한숙단韓淑旦,
1102강척康滌, 1104송위宋瑋,
급제자 명단:1095김부식金富軾, 1097김부철(金富轍)=김부의(金富儀)장홍우, 정항, 최자. 한유충,
안직숭, 1102 宋進士 別頭乙科 장침(章忱), 1098 宋詔。許擧子 賓貢
숙종(肅宗) 0 (?) 숙종 시년 미상(試年未詳) (44%) 11 명 [ 명단 ]
이영(李永) ? ~ ? 안성(安城) 관직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부] 성명 : 이중선(李仲宣)
한안인(韓安仁) ? ~ ? 장단(長湍) 일명 한교여(韓曒如)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부] 성명 : 한규(韓圭)
한충(韓冲) ? ~ ? 장단(長湍) 관직 중추부사(中樞副使)
최기우(崔奇遇) ? ~ ? 청주(淸州) 관직 기거주(起居注)
홍관(洪灌) ? ~ ? 남양(南陽) 관직 좌복야(左僕射)
문공인(文公仁) ? ~ ? 남평(南平) 일명 문공미(文公美) 평장사(平章事)[부]성명:문익(文翼)
인종6년1128이전은 문공미(文公美)이며 이후는 문공인으로 개명 되었다.
박승중(朴昇中) ? ~ ? 나주(羅州) [증조부] 성명 : 박섬(朴暹)
장문위(張文緯) ? ~ ? 홍천(洪川) 관직 시사재소경(試司宰少卿)
[부] 성명 : 장제망(張齊望) [조부] 성명 : 장진(張瑨)
이지미(李之美) ? ~ ? 인천(仁川) 관직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부] 성명 : 이자겸(李資謙) [조부] 성명 : 이호(李顥) [증조부] 성명 : 이자연(李子淵)
강후현(康侯顯) ? ~ ? 미상(未詳) 관직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임존(林存) ? ~ ? 미상(未詳)
(숙종2년1097)김부철(金富轍)=김부의(金富儀)○ 임원통(林元通) 등 33명, 명경 4명, 은사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이 과거에 김부철(金富轍)=김부의(金富儀)이 5등에 합격하였는데, 그의 형 김부필(金富弼)ㆍ김부일(金富佾)ㆍ김부식(金富軾)은 모두 전에 과거에 올랐던 것이다.
급제 판단자 : 五年이총린(李寵鱗), 五年강열(康悅), 1104강영준(康英俊)
(예종7년1112)강열(康悅)○ 겨울 10월에 공부시랑 이총린(李寵鱗)을 요에 보내어 횡선사(橫宣使)를 보내준 데 대하여 사례하고, 호부시랑 강열(康悅)은 생신을 축하해 준 데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예종3년1108)강영준(康英俊)○3월 내시위위주부 강영준(康英俊)을 보내어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에게 양과 술을 하사하고, 아울러 군인에게 은사라(銀鐁鑼) 1개ㆍ은병 40개를 하사하였다.
(인종17년1139) 강영준(康英俊) ○ 11월에 좌상시 강영준(康英俊) 등이 소를 올려 10여 조의 일을 논하였는데, 그 중에서 다만 전 추밀원사 최유적(崔惟迪)과 중 의장(義莊) 등을 다시 본주(本州)로 귀양보내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고려15대 예종(睿宗) (재위1106~11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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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5 양원귀(楊元貴)(명종5년1175) ○5월에 용강현(龍岡縣)의 백성들이 조위총(趙位寵)에게 붙고자 하므로, 급제 양원귀(楊元貴)가 타일러서 귀순하게 하였다. 임금이 갸륵히 여겨 원귀를 수궁승(守宮承)에 임명해서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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