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잡지 ‘신가정’ (표지화 김용준), ‘신여성’(표지화 안석주), ‘부인’ (표지화 노수현),‘별건곤’(표지화 안석주)
‘신여성’의 대표 인물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1928년 추정), 캔버스에 유채, 88 x 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긴 외투 차림에 바이올린을 든 여자가 시내를 걷는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양반 두 명이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아따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반면, 건너 편 젊은 남자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 들었다면….”
국립현대미술관 ‘신여성 도착하다’전
12월 21일부터 2018년 4월까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언론인·문인이었던 나혜석(1896~1948)이 1920년 4월 잡지 『신여자』에 발표한 만평이다. 이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신여성’에게 보였던 모순적인 태도를 담았다. 이들의 높은 교육 수준과 세련된 외모를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론 사회를 흔드는 위험 요소로 낙인을 찍어 배척했다.
‘신여성(新女性·New Woman)’이라는 말은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만들어져 20세기 초 일본 및 아시아에 도착했다. 나라마다 정의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사회·제도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근대의 새로운 여성상을 뜻한다. 조선의 경우, 1890년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등장했고, 1920~30년대 언론 매체나 잡지 등에서 ‘신여성’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됐다. 21일부터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신여성 도착하다’는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시각 매체에 등장하는 ‘신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의 근대를 바라보는 시도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중첩된 억압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 동서양 문화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된다. 예를 들어 ‘신여성’과 비슷하게 쓰였던 단어로 ‘여학생’ ‘모던 걸’ ‘현모양처’ 등이 있다. 공부를 하는 여자는 그 자체가 새로운 여성상이었고, 모던 걸은 신여성들의 개방성과 자유 연애 풍조 등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사용됐다. 한편으로는 애정에 기반한 부부 관계를 중심으로 한 핵가족의 현명한 아내도 신여성의 이상적 모델 중 하나로 그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장 전경
총 3부로 구성된 전시에는 작가 68명의 작품 100여 점과 자료 400여 점이 나온다. 1부 ‘신여성 언파레-드’는 대중매체에서 조명한 ‘신여성’ 이미지를 소개한다. 1920년대부터 『신여성』 『신여자』 『부인』 『여성』 『신가정』 등 여성의 계몽을 목적으로 한 잡지들이 속속 창간됐다. 『신여성』의 초대 편집장 박달성은 창간호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성 원리에 의하여 새로 새 여성을 짓자.”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다.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는 당대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당시 기생 출신의 서화가들이 주로 그렸던 사군자나 서예 작품부터 도쿄 여자미술학교 출신인 나혜석을 비롯해 나상윤·박래현·천경자 등의 여성 미술가들 작품이 소개된다. 특히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대여한 자수 작품 20여 점은 국내 관객들에게 처음으로 선을 보인다.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는 당대의 선각자 역할을 한 다섯 명의 신여성 나혜석(미술), 김명순(1896~1951·문학), 최승희(1911~69·무용), 이난영(1916~65·대중음악), 주세죽(1901~53·여성운동가)을 조명한다. 김명순은 당시 남성 뿐 아니라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타자화되는 여성들의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다수 남겼으나 서녀(庶女)라는 출생 신분과 연애 등 개인사에 의한 소문으로 인해 문단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난영은 한국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스’의 일원으로 조선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은 당대 최고의 예능인이었다.
전시의 마지막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소영 교수가 찍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지역의 척박한 풍경을 담은 영상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혁명가이자,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의 부인이었던 주세죽이 소련에 의해 일본 첩자로 오인 받아 강제 유배를 당한 지역. 김 교수는 이 작품으로 자유와 해방을 꿈꿨으나 낯선 땅에서 비극적으로 스러진 한 신여성의 삶을 추모한다. 전시를 기획한 강승완 학예실장은 “신여성 다섯 명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했던 당시 여성들의 다양한 도전을 보여준다”며 “현대 작가들의 오마주 작품을 통해 이들의 삶을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댓글 구시대와....신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