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1> 서장 (書狀)
“이 일은 선방 생활을 오래 하거나 선지식을 많이 찾아다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마디 한 구절 아래에서 곧바로 계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진실을 말함에는 털 끝 만큼의 틈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곧바로’ 라고 말하지만 벌써 구부러진 것이고, ‘계합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어긋난 것입니다. 하물며 다시 경전을 끌어 들이고 가르침을 들며, 이치를 말하고 사실을 말하여 구경(究竟)에 이르고자 함에 있어서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털 끝만 한 것이라도 있으면 바로 티끌이다’고 옛 스님이 말했습니다. 본래면목을 아직 알지 못하고 망상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비록 강바닥의 모래만큼 많은 도리를 말한다고 하여도 나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든 말할 수 없든 별다른 일은 아닙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마조 스님은,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고 말할 수 없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다’고 했습니다.”
본래면목이 분명하다면 선(禪)이라 하든 교(敎)라 하든, 부처라 하든 중생이라 하든, 입을 열든 입을 다물든, 앉아 움직이지 않든 서서 다니든, 생각을 하든 생각을 잊든, 깨어 있든 잠을 자든 아무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일부러 선이라 할 것도 없고 교라 할 것도 없고 부처라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고요히 앉아 있을 것도 없고 서서 다닐 것도 없다. 오히려 선이라 하든지 교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구분하고 차별하여 세우고 무너뜨리고 한다면 선(禪)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선은 원래 보고 듣는 온갖 일과 온갖 행위와 온갖 생각에 착착 들어맞아서 털 끝 만큼의 어긋남도 없다. 그러나 생각을 앞세워 따지고 헤아려 간다면 단 한 가지 일이나 단 한 가지 행위나 단 한 가지 생각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놓아두면 본래 옳지 않은 것이 없지만, 마음을 가지고 헤아리면 한 가지도 옳은 것이 없다. 이것을 두고 털 끝 만큼의 차이로 하늘과 땅 만큼이나 벌어진다고 말하는 것이고, 털 끝 만한 것이라도 있으면 바로 티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번갯불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본래면목은 언제 어디서나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자라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켜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면 상(相)을 따라 분별하고 분별하게 되면 취하고 버림이 있게 되니 가면 갈수록 더욱 어긋나기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긋나더라도 진실을 알고 보면 어긋남이 없다.
마치 본래 정해진 모습이 없어서 인연따라 자유롭게 모양을 바꾸는 것이 물의 본성이어서,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겨서 어떤 모양으로 변하더라도 본래의 물은 조금도 바뀜이 없이 그대로 물인 것과 같다. 만약 물이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인연따라 바뀌는 모양에서 자신을 찾는다면 물은 결코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어서 인연따라 자유롭게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와 같이 인연따라 나타나는 마음이 바로 우리의 의식이요 느낌이요 의지요 지식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이나 느낌이나 의지나 지식 등 알음알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찾으려고 한다면 마치 물이 그릇의 모양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음은 어디에든 나타나 있지만 스스로는 정해진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았으면 모든 곳에서 마음을 볼 수가 있지만,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떤 방법을 통하여 어떤 곳을 찾더라도 어디에서도 마음을 찾을 수는 없다. 인연따라 흘러가는 ‘이것’은 흘러가지 않는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서장통한 선공부'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_()()()_